# 1187
이때 숲 저쪽으로부터 누군가 다가선다.
“마탑주님!”
“누구……?”
현수의 시선을 받은 이는 토들레아 일족의 족장 트렌시아 토들레아였다. 나이가 많아서 60대로 보인다.
“아! 족장님이셨군요.”
“네, 위대하신 분들과 함께하시는 듯하더군요.”
“위대한 존재요? 아닌데요. 아! 정령왕들이니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겠습니다.”
“네? 저, 정령왕이요?”
트렌시아 토들레아는 몹시 놀란 표정을 짓는다.
엘프들은 정령력을 타고 태어난다. 그렇기에 정령들과 상당히 친숙한 존재이다.
하지만 상급 정령 이상과는 교분을 나눈 적이 거의 없다. 최상급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데 현수가 그런 최상급 정령들을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 정도로 여기는 정령왕들과 함께했음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니 대단히 놀랍다는 표정이다.
“네, 물, 불, 바람, 땅의 정령왕이었습니다.”
“헉!”
트렌시아 토들레아는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뜬다.
자신이 본 게 사실이라면 조금 전 사대 속성 정령왕들이 현수에게 허리를 숙여가며 예를 갖췄다. 그리고 현수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 고개만 까닥였다.
이는 사대 속성 정령왕들과 교분을 나누는 정도가 아니라 부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 혹시 그, 그분들과 어떤 관계인지… 제가 조금 전에 본 건…….”
트렌시아 토들레아는 몹시 조심스런 표정이다.
“다들 최상급이었는데 이곳에서 정령왕으로 진화하도록 조금 도왔습니다. 그랬더니 고맙다고 인사를 한 거지요.”
“세, 세상에……!”
인간이 정령으로 하여금 진화하도록 도왔다는 건 아르센 대륙의 어떤 역사책에도 언급조차 되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너무 놀라 말도 잇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족장님, 제가 조금 바쁜 일이 있어서…….”
“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빚은 술을 즐기시는 것 같아 준비해 놨다는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깜박 잊었습니다.”
“아! 엘프주요?”
“네, 혹시 필요하시면…….”
“저야 당연히 좋지요. 감사합니다. 주신다면 흔쾌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이곳 시간으론 30일이 지났지만 지금 귀환하면 지구에서의 시간은 멈춰 있는 것과 같다.
내일 북한의 수뇌부들과 연회를 하기로 했는데 엘프주를 내놓으면 몹시 좋아할 듯싶다.
그리고 엘프주는 다다익선이다. 아버지와 장인, 그리고 이연서 회장 등이 아주 좋아하는 술이기 때문이다.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 역시 엘프주라면 사족을 못 쓴다. 그러니 준다고 할 때 얼른 받아야 한다.
“저쪽에 준비해 놓았습니다. 가시지요.”
“네, 그러시죠.”
트렌시아 토들레아의 뒤를 따라가니 토들레아 일족이 도열해 있다.
“어서 오셔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두에 서서 현수를 반갑게 맞이해 준 이는 일족의 장로인 후렌지아 토들레아이다. 여전히 어여쁘다.
“아! 반갑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오랜만입니다.”
“레이찰 토들레아가 영주님을 뵙습니다.”
“오마샤 토들레아 또한 영주님을 뵙습니다.”
“하일라 토들레아가 지엄하신 분을 알현하옵니다.”
셋의 인사를 받은 현수는 이들이 여기에 왜 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실리프 자치령의 아카데미에서 정령학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야 할 교수들이기 때문이다.
현수의 궁금증을 풀어준 이는 족장이다.
“제가 영주님께서 오셨다는 전갈을 보냈더니 이렇듯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다들 반갑습니다.”
“그동안 고모로부터 엘프주 담는 법을 배웠습니다. 언제든 말씀만 하시면 영주님을 위한 술을 담도록 할게요.”
하일라 토들레아가 조신한 몸짓과 어투로 이야기하곤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그 순간 앞섶이 살짝 벌어지면서 보아선 안 될 것을 보여준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의복은 낡았고 고무줄이 없을 뿐이다. 민망해진 현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내가 자리에 없더라도 자치령에서 술을 담아주세요. 전권을 위임합니다.”
“네, 그리하겠어요.”
하일라는 또 한 번 고개를 조아린다.
“자자! 저쪽으로 가시지요.”
트렌시아 토들레아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엘프들이 축제를 위해 비장해 둔 술 창고였다.
“대단히 많군요.”
커다란 오크통이 끝도 없이 놓여 있다. 족장은 가장 깊숙한 곳의 술을 진상품이라는 명목으로 선물했다.
양조된 지 1,000년쯤 된 명품 중의 명품이다.
일족의 조상들이 온갖 정성을 들여 담근 것이라 양은 많지 않았지만 질은 최상급 중에서도 최상급이었다.
* * *
“휴우! 다행이네.”
현수는 엘프주를 선물 받아 아공간에 담은 후 곧장 차원이동을 했다. 하일라 토들레아의 애뜻해하는 눈빛이 마음에 걸렸지만 하루라도 더 머물면 지구의 시간 또한 30일이 훅 지나가기에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시각은?”
“이제 새벽이네요.”
아직은 어슴푸레한 것이 여명이 밝지 않은 듯하다. 노트북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예상대로다.
“흐음! 그럼 이제부터 내가 지시한 대로 해줘, 아리아니.”
“네, 제가 알아서 잘할게요.”
말을 마친 아리아니는 4대정령을 이끌고 나간다.
잠시 후, 일본 곳곳에서 지진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혼슈 서해안에 위치한 주고쿠 산맥의 최고봉은 다이센 산(大山)으로 해발 1,729m이다.
현수는 이것의 정상을 수심 300m 이하로 침강시키라고 명을 내렸다. 약 2,030m가 침강해야 한다.
12년은 4,383일이다. 명령대로 하려면 매일 46.32㎝씩 주저앉아야 한다.
그런데 땅의 정령 노이아는 상급이던 자신을 정령왕까지 끌어올려 준 현수가 너무나 고맙다. 하여 현수가 해달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어내고 싶었다.
하여 매일 70㎝씩 침강시키기로 마음먹었다.
12년이 지나면 다이센 산의 정상은 수심 1,339m 아래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우르릉! 우릉! 우르르르릉!
“아앗! 지진이다! 대피하라! 대피하라!”
“헉! 이 정도면 최소 6.5야! 어서 대피해!”
“우아아! 지진이다! 지진이 발생했다! 피해!”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잠자던 이들이 밖으로 대피했다.
이날 이후 일본은 곳곳에서 발생하는 지진이 최대의 뉴스가 되었다. 정치인들의 추문이나 연예인들의 스캔들은 뉴스가 되지 못했다.
일본 열도 전체에서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진이 발생하면서 지반이 조금씩 침하되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한국 역시 거의 매일 지진에 관한 뉴스가 첫머리에 올라온다. 강원도 동북쪽 및 울릉도 북쪽, 그리고 독도 인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다. 제주도의 동쪽과 서쪽에서도 거의 매일 지진이 일어나고, 제주 남쪽과 이어도와 마라도 인근 해역에서도 매일 지진이 발생한다.
처음엔 몰랐다. 하여 우려가 심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해양지질학자 발표한다. 한반도 동해와 남해에서 융기 현상이 빚어짐을 알아낸 것이다.
러시아와 지나 역시 지진에 관한 속보가 전해진다.
러시아의 경우는 일본과 영토 분쟁을 벌이던 네 개의 섬이 서서히 융기하고 있음을 발표한다.
이 섬들이 캄차카 반도와 연결될 경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진다. 육지에 이어지면 영유권 분쟁이 끝나고 영토가 넓어짐을 의미하니 축제 분위기이다.
지나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조어도가 조금씩 침강하고 있음이 밝혀진 때문이다.
전체 면적은 6.3㎢에 불과하지만,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기점으로 경제ㆍ전략적 가치가 높았다.
특히 막대한 양의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중요성이 더욱 컸다. 그런 조어도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하자 우려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는 중이다.
태평양 건너 미국 또한 동아시아의 지각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주일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오키나와 및 인근 섬 전부가 조금씩 가라앉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침강 속도가 심상치 않아 주일미군 철수 의견이 대두되었다. 바다에 주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 러시아, 지나는 군사력 부문 세계 1, 2, 3위이다. 대한민국은 7위이고 일본은 9위에 랭크되어 있다.
핵무기 전력을 뺀 것으로 매겨진 랭킹이다.
이런 나라들이 관심을 보이니 다른 나라들 역시 해외토픽으로 동아시아 지각운동에 대해 보도했다.
수많은 전문가가 나서서 갑작스럽고 동시다발적인 지각운동에 대한 원인규명을 시도하지만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땅의 정령왕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라곤 아무도 상상치 못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융기와 침강은 곳곳에서 벌어진다. 이를 가만히 살펴보면 모조리 일본이 불리하다.
가장 먼저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은 ‘오키노도리시마’와 ‘미나미도리시마’였다.
이로써 일본은 배타적 경제수역 85만㎢를 잃었다.
일본 입장에선 콘크리트를 더 부어서라도 섬으로 유지시키고 싶을 것이다. 하여 급히 조사선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조사 결과 두 섬은 이미 수심 20m 이상이며 나날이 침강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일본은 자신들의 영토라 우길 근거가 확실하게 소멸되었다는 것을 감추고 싶었다. 그러나 감추지 못한다.
다국적 조사선이 두 섬이 있던 자리에 접근하였고, 동승한 언론에 의해 전 세계로 사실이 보도된 때문이다.
북방 네 개 섬은 융기되는데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캄차카 반도와 육로로 이어지게 생겼다.
반면 북해도 북쪽 해안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되어가는 중이다. 그나마 있던 항구까지 모조리 사라지는 중이다.
조어도 역시 매일 수면 아래로 주저앉는 중이다.
뿐만이 아니다. 오키나와를 비롯한 제반 열도 모두가 급속도로 침강하는 중이다. 일본으로선 미칠 지경일 것이다.
반면 대한민국은 다르다.
독도 인근은 오히려 융기되고 있다. 하여 해군을 급파해 둔 상태이다. 일본 순시선의 접근을 막으려는 목적이다.
독도에서 가까운 오키 제도와 도젠 섬은 연일 계속되는 지진으로 인해 소개령이 내려져 빈 섬이 된다.
그와 동시에 시마네현을 비롯한 인근 지역 역시 급속도로 수몰되어 가는 중이다.
시마네현의 경우는 2012년에 지진이 발생되어 300명 이상의 인명 피해가 있던 곳이다.
이런 지진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하여 일본 언론은 연일 열도 침몰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일각에선 종말론이 터져 나와 이래저래 어수선하다.
일련의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일본 거주 재일교포들의 탈출은 급속도로 늘고 있다. 이실리프 자치령으로 가기만 하면 거주지와 직장이 주어진다는 소문이 번진 결과이다.
전에는 이주를 권해도 긴가민가하며 움직이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엔 다르다. 자발적으로 문의하고 있다.
일본 열도가 침몰하는 게 기정사실화된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인들 또한 국외 탈출 러시가 벌어지고 있다.
처음엔 부유한 사람들 위주였다.
돈이 있으니 어디든 가서 살면 된다. 그런데 대다수 선량한 서민은 불안하지만 취할 방도가 없어 전전긍긍했다.
이때 이들에게 다가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준섭 전무이사가 대표로 재직 중인 이실리프 브레인엔 재일교포 스카우트 담당이 별도로 있다.
노인수와 사사키 노조미 부부가 이들의 수장이다. 이 부부는 재일교포로 하여금 이주를 권유하는 조직을 구성했다.
이들에 의해 거의 모든 재일교포가 이주를 결정하자 다음으로 선량한 일본인들에게 접근했다.
접근엔 조건이 있다. 재특회와 같은 마인드를 가진 자들은 100% 제외이다. 아울러 야쿠자도 열외이다.
일본의 인구는 약 1억 2,710만 명이다.
이들 중 재일교포는 약 180만 명이다. 아버지가 일본인인 경우는 제외이며 조총련계는 포함된 숫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