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0
반듯반듯하면서도 사통팔달한 도로와 질서 있게 지어진 주택들, 그리고 널찍한 농지가 인상적이다.
곳곳에 공동 사육장도 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지구로 치면 닭이나 돼지, 소나 양 같은 동물들이 있다.
수풀이 자라지 못하는 바위지대엔 바싹 마른 나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아! 내가 펠릿의 원료가 될 폐목들을 모아놓으라 했지? 그런데 정말 많이도 모아놓았네.”
어차피 가져갈 것인지라 보이는 족족 아공간에 담았다. 그런데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코리아도는 제주도만 한 섬이다.
이 큰 섬의 중심부는 거의 전부가 사람이 헤치고 지나가기에도 힘들 만큼 빽빽한 정글이다. 그래서 해변에만 해적들의 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 대부분이 벌목되어 있으니 얼마나 많겠는가!
게다가 이곳은 열대기후이다.
매년 상당히 많은 나무와 풀이 자라난다. 그것들을 다 베어내서 쌓아두었다. 그러니 많은 게 당연하다.
“휴우! 이걸 언제 다……. 그래도 뭐 다다익선이니까. 아공간 오픈! 입고!”
지난번에 이곳을 떠나기 전 4서클 마법사 하리먼에게 약 300페이지짜리 개발지침서를 주고 떠났다.
섬들을 어떻게 개발할지 청사진을 그려준 것이다.
그 내용 중 하나는 펠릿의 원료가 될 폐목 등을 최대한 많이 모아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어마어마한 양이다.
정확한 양은 알 수 없지만 추측하건대 50톤짜리 대형 덤프트럭 300만 대가 와도 다 실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코리아도 하나에서 수거한 양이 이 정도이니 나머지 58개 섬의 것을 다 합치면 얼마나 많겠는가!
이실리프 군도는 제주도만 한 섬 세 개와 거제도 크기의 섬 20개, 그리고 진도만 한 것이 36개가 있다.
이것들의 전체 면적을 다 합치면 약 2만 6,000㎢로 경기도 전체 면적의 약 2.5배에 달한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폐목이 쌓여 있겠는가!
50톤짜리 덤프트럭 1억 대는 있어야 간신히 처리할 만큼 어마어마하다.
이실리프 군도에는 겨울이란 계절이 없다. 따라서 난방에 필요한 화목이 필요 없다.
음식을 조리할 때에도 나무를 쓰지 않는다. 파이어 마법진을 이용한 일종의 매직렌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화재로 인한 재해 발생을 고려한 배려이다. 그렇기에 쌓아놓은 것을 모조리 아공간에 담은 것이다.
이러는 동안 빌모아 일족의 손길이 닿은 유려하면서도 견고한 건축물들을 볼 수 있었다.
바실리와 타지마할, 그리고 파빌리온과 루드비히이다.
자꾸 짓다 보니 실력이 늘었는지 지구의 그것보다 더 크고 화려하다. 이것들은 각각의 섬을 다스리도록 파견된 자들의 집무실과 거처로 쓰일 건물들이다.
이것 이외에 경치 좋은 곳마다 그럴듯한 건물들이 지어져 있다. 국왕의 휴식처로 사용될 일종의 리조트이다.
오가며 세어보니 약 200여 개나 된다.
왕가에서 쓴다 하더라도 너무나 많은 숫자인데 그만큼 경치 좋은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실리프 군도의 중심인 코리아도엔 한옥단지가 그럴듯하게 지어져 있다. 이실리프 군도를 다스릴 국왕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과 왕비들이 기거할 법궁이다.
그래서 그런지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상당히 많은 전각이 지어져 있는데 한옥에 대한 이해도가 훨씬 높아졌음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주인이 없어서 그런지 안은 한산했다.
관리하는 자들은 있었는데 매일매일 무성하게 자라나는 풀을 베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입구엔 갑옷을 걸친 수문위병 하나가 서 있고, 정문 안쪽 초소엔 한 명의 기사와 다섯 명의 병사가 근무 중이다.
그런데 더워서 그런지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있다.
현수는 일부러 한옥단지 앞에 쭉 뻗어 있는 포장도로 끝에서부터 문 앞으로 다가갔다.
도로 좌우에 있는 건물들을 살피기 위함이다.
보아하니 대로 좌우의 건물 대부분이 관공서이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분주히 오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
흐뭇한 마음으로 법궁 정문에 다가서니 수문위병이 들고 있던 할버드를 앞으로 내민다.
“멈추십시오! 이곳은 국왕폐하께서 머무시는 왕궁입니다!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습니까?”
현수의 경험으론 왕궁 앞을 지키는 수문위병 대부분은 시건방지거나 고압적이다. 남의 권세를 빌려 허세를 부림을 일컫는 호가호위(狐假虎威)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수문위병은 전혀 그렇지 않다. 상대가 C급 용병 차림임에도 아주 정중하다.
자신의 왕궁이기에 현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수고가 많군. 나는 국왕이네.”
“네? 누, 누구시라고요? 구, 국왕전하, 아니, 국왕폐하이시라고요? 저, 정말이십니까?”
이실리프 왕국엔 국왕이 평범한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번져 있다. 그렇기에 허름하다 할 수 있는 모습임에도 얼른 자세를 바로 한다.
“그렇다네. 내가 국왕이네. 더운데 수고가 많네.”
“헉! 추, 추, 추, 충성! 그, 근무 중 이상 무!”
“그래, 그런 것 같군. 자네 이름은 뭔가?”
“네? 소, 소, 소인의 이름은… 소인의 이름은… 이름은… 죄송합니다. 잊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한국으로 치면 경계 근무를 서던 이병이나 일병이 불쑥 찾아온 대통령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 순간 수문위병의 심장은 더할 수 없이 빨리 뛸 것이고 호흡조차 곤란할 것이다.
“흐음! 날도 더운데 갑옷을 입고 있어 땀이 많이 나는 모양이군. 아이스 포그!”
샤르르르릉―!
마법이 구현되자 그 즉시 주변 공기가 서늘해진다. 그러자 수문위병이 걸치고 있는 갑옷에 물방울이 맺힌다.
공기가 이슬점 이하로 냉각됨과 동시에 포화 상태가 되어 수증기가 물방울로 맺힌 것이다.
“……!”
수문위병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시원함에 눈을 크게 뜬다.
“가, 감사합니다!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 폐하!”
“하하! 그러게. 그나저나 잠깐만.”
“네?”
수문위병이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뜰 때 현수는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곤 항온마법진을 꺼내 갑옷 뒤쪽에 부착시켰다.
“이젠 덥지 않을 것이네. 그나저나 누가 쳐들어온다고 갑옷을 입고 있나?”
“그, 그건… 그건… 죄송합니다. 잊었습니다. 참, 제 이름은 제롬입니다, 폐하!”
“그래, 제롬. 앞으론 갑옷을 안 입어도 되네. 이곳으로 쳐들어올 간 큰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네.”
적어도 아르센 대륙에선 이실리프 마탑주와 적대하길 바라는 인물은 없다. 뒷골목 깡패들은 물론이고 마음씨 고약한 귀족들도 마찬가지이다.
드러내 놓고 반감을 표시했다간 마법사와 기사들로부터 집단 린치를 당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실리프 왕국은 유사시를 대비한 무장이 전혀 필요 없는 유일한 국가이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참, 제 이름은 제롬입니다.”
제롬은 정신이 하나도 없는 듯하다. 방금 전 한 말을 또 한다. 이럴 땐 얼른 사라지는 게 도와주는 것이다.
“제롬! 이름 좋군. 그나저나 안에 하리먼 있는가?”
“하, 하리먼이라면 초, 총리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우리 이실리프 왕국의 초대 총리 맞네.”
“총리님은 현재 저기 저 관저에 계실 겁니다. 폐하께서 오셨다고 말씀드릴까요? 제가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말만 떨어지면 정말 달려갈 기세이다.
“하하, 아닐세, 아니야. 자넨 그냥 근무나 서게.”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참, 제 이름은 제롬입니다.”
“알겠네, 제롬! 내 자네의 이름을 꼭 기억하겠네.”
“감사합니다. 무상의 영광이옵니다, 폐하!”
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제롬을 뒤로하고 길을 따라 걷는 현수의 입가엔 미소가 배어 있다.
제롬의 모습이 웃겼던 것이다.
“하리먼, 국왕이네. 지금 즉시 궁으로 오게.”
마나에 의지를 실어 보내곤 한옥단지를 둘러보았다.
경회루, 근정전, 천추전, 조화전처럼 큰 건물도 많지만 아담한 사이즈의 건물도 많다.
그중 하나를 열고 들어가 보니 작업지시서에 명기한 대로 공간 구획을 아주 잘해놓았다.
현수가 들어간 곳은 왕비의 수발을 들어줄 시녀들이 머물 공간이다.
시녀 1인에게 주어지는 바닥 면적은 대략 20평이다. 두 개의 방과 하나의 다용도실로 꾸며져 있다.
더운 곳인지라 건축물의 높이가 있어 복층 구조로 꾸며졌기에 제법 널찍한 다락방도 있다.
각자의 처소와 처소 사이엔 욕실과 화장실, 그리고 간이 주방이 갖춰져 있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한다.
겉은 한옥인데 내부는 현대식 구조로 되어 있다.
“괜찮군. 빌모아 일족이 고생했겠어.”
화장실과 욕실은 지구처럼 도기 세트를 쓰는 것은 아니다. 아직 그런 걸 만들 만한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마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상하수도는 현수가 그려준 도면에 따라 파이프를 제작했다. 건축물까지는 진흙을 구워 빚어낸 토관이다.
연결 부위는 씰 마법으로 수밀이 되도록 했다.
건물 내부는 갈대처럼 생긴 식물의 줄기를 장어처럼 생긴 물고기의 껍질로 감싼 파이프이다. 수도꼭지는 빌모아 일족과 마법사들의 협조하에 만들어졌다.
변기엔 정화 마법이 적용되었고, 매일 궁궐 외곽 분뇨처리장으로 가져가 퇴비화해 유기농 비료도 쓴다.
간이 주방엔 화재 발생을 염두에 매직렌지를 설치했다.
이런저런 세심한 고려와 배려 속에서 설계되고 지어진 건물들은 눈으로 보기에도 견고해서 현수를 기분 좋게 했다.
천천히 걸어 중심이 되는 건물로 들어가 보았다.
국왕으로서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돌보는 건물은 경회루처럼 지어져 있다.
바닥은 석재이고 국왕을 위한 멋진 테이블과 신하들을 위한 테이블들이 질서정연하게 진설되어 있다.
“이게 옥좌인가?”
현수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누군가 대답한다.
“네, 폐하. 참으로 오랜만에 알현하옵니다. 신 하리먼, 국왕폐하를 다시 뵙게 되어 무상의 광영이옵니다.”
“아! 하리먼!”
뒤를 돌아보니 바깥으로부터 여러 사람이 들어서고 있다.
내무대신 컬리와 군부대신 로드젠, 그리고 시녀장 라이사 등이다.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다시 뵙게 되어 참으로 반갑사옵니다.”
“폐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모두의 인사를 받은 현수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다들 잘 있었나 보군. 건강해 보여 다행이야.”
“폐하, 이번엔 어디 가시지 말고 오래오래 계시옵소서.”
“폐하가 안 계셔서 나라가 텅 빈 것 같았사옵니다.”
“네, 그 자리에서 저희를 잘 영도하여 주세요.”
모두들 한마디씩 하는데 다들 걱정 많이 했다는 눈빛이다. 바다 건너 이곳까지 소문이 번진 결과이다.
인사를 받고 있는데 뒤쪽에서 또 다른 인물들이 헐레벌떡 다가온다.
미판테 왕국의 옛 수도 에른에 당도했을 때 만난 소년 카시발과 루시가 선두에 있다. 각각 15세와 16세가 되어 있다.
미판테 왕국의 변경백 중 하나인 스트마르크 백작의 아들이자 창공기사단 소속 기사 하인스와 그를 연모하던 실비아도 달려오고 있다.
에드몬드 지안 반 루이체 백작의 작은아들 왈로드 역시 일행 중에 끼어 있다.
호마린 영지의 영주 에드워드 코린 반 호마린 자작의 아들 스미든 코린 반 호마린도 달려온다.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에 머물 때 경비단장으로부터 현수의 제자로 오인받았던 로스톤 팔머 드 홀로렌도 보인다.
“폐하, 이토록 오랜만에…….”
“폐하, 신 하인스 후안 반 스트마르크가 폐하의 존체를 뵈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폐하, 신 왈로드 지안 반 루이체 역시…….”
“신 스미든 코린 반 호마린…….”
“로스톤 팔머 드 홀로렌이 위대하신…….”
모두가 한마디씩 하여 잠시 소란스러웠다.
다시 보니 모두가 반가운 얼굴들이다. 하여 한마디 하려는데 또 누가 들어선다.
“고모부!”
카이로시아의 조카 이냐시오 에델만 드 로이어가 후다닥 달려든다. 그의 곁에는 아드리안 왕국 최남단 영지 콘트라에서 온 피터 그루 폰 콘트라와 유모 엠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