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2
“그, 그럼……!”
“굳이 9서클 마스터 수준으로 따지자면 내 손에 제압된 건 한 80명쯤 된다고 봐야지.”
“아!”
스타이발은 입을 딱 벌린다.
현수가 10서클 마스터라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그게 진실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궁극의 대마법사라 불리는 9서클 마스터를 80명이나 제압했다는 건 정말 믿기지 않는다.
게다가 현수는 아주 멀쩡하다.
화후로 따지면 겨우 1서클 차이이다. 그래서 그토록 큰 차이가 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말 대단하다.
“정말 위대하십니다, 로드! 존경하지 않을 수 없군요.”
스타이발은 진심을 담아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머리카락이 땅에 닿을 정도이다.
“나는 놈들을 제압하러 갈 생각이다.”
“그래요? 그럼 저희는 어떤 준비를 할까요? 미흡하겠지만 저라도 따라갈까요?”
9서클 마스터가 바글거리는 곳에선 7서클 유저는 코흘리개 꼬맹이만도 못한 존재이다. 스타이발은 스스로 분수를 알기에 따라 가겠다는 말을 못하는 것이다.
“아니. 소드 마스터들이 떼 지어 가도 놈들을 감당 못한다. 나 혼자 가야지. 그나저나 놈들도 단단히 방비하고 있을 터이니 나도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해야겠어.”
“네, 그러셔야죠. 무엇이든 분부만 내리시면 재까닥 갖출 테니 말씀만 하십시오.”
“준비는 내가 알아서 한다. 너흰 이곳을 내 대신 잘 다스리기만 하면 된다.”
“그건 염려 놓으십시오. 최선을 다해 살기 좋은 왕국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믿고 맡길 수 있어서 좋군.”
“믿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스타이발은 다시 한 번 허리를 직각으로 꺾는다. 로드에게 믿음을 얻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뻐서이다.
현수는 한옥단지의 심처로 걸음을 옮겼다.
가정을 이루게 되면 사용할 곳인지라 둘러보려는 의도이다. 완공되기 전과 무엇이 달라졌는지도 확인할 겸이다.
생활에 필요한 가구들까지 모두 채워져 있다.
아쉬운 건 원목 바닥재에 칠할 도료이다.
한옥인지라 대청마루 등의 바닥재는 원목이다.
함수율((Percentage of moisture content, 含水率) : 수분을 포함하는 고체 중의 수분량. 목재의 강도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크며, 함수율이 감소함에 따라서 강도는 급격히 증가한다.) 6% 이하로 잘 건조시키고 다듬었지만 아무런 도료도 칠하지 않아 습도로 인한 뒤틀림이 우려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문득 아르센 대륙 여기저기에서도 자생하고 있는 아마(亞麻)가 떠오른다.
그것의 종자를 받아 기름을 짜낸 뒤 이를 도포하면 습도의 영향도 덜 받고 부패하는 것도 늦출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아쉬운 건 매트리스이다. 아르센 대륙의 것은 지푸라기를 천 안에 넣은 것이라 탄성이 적은데다 습기에 약하다. 하여 아공간을 뒤져보았는데 지구의 것은 다 꺼내서 쓴 듯 더 이상의 새 매트리스가 없다.
‘이건 지구에 가면 왕창 사와야겠군.’
왕궁으로 지어진 한옥단지엔 방이 상당히 많다.
국왕 일가뿐만 아니라 왕궁에서 기거하는 이가 많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헤아려 보니 적어도 1,000개 이상의 매트리스가 필요하다. 여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 카펫과 러그, 그리고 쿠션 등도 있어야 한다.
나머지는 빌모아 일족의 세심한 손길이 닿아서인지 흠잡을 곳이 거의 없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조명이다.
지구에선 전등을 쓰지만 이곳에선 마나를 이용한 마법등을 쓴다. 누구의 생각인지 알 수 없지만 음향 센서의 원리와 비슷한 마법이 적용된 것이 설치되어 있다. 손뼉을 치면 켜지고 다시 한 번 손뼉 치면 꺼진다.
항온마법진도 적용되어 있어 사시사철 늘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도록 조치되어 있다.
“괜찮군.”
현수는 고개를 끄덕여 흡족함을 표했다. 많은 사람의 노고가 배어 있음을 알기에 까다롭게 보지 않았다.
지구와 비교하면 미흡한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정 부분에선 지구보다 낫다.
밋밋하기만 한 벽 대신에 의미를 가진 부조들이 그중 하나이다. 한옥단지의 벽에는 세상에 번진 현수와 관련된 일화가 모두 담겨 있다.
가장 먼저 알베제 마을을 찾아 흉포한 맹수 샤벨 타이거를 길들이는 모습이 있다.
다음엔 바벨강을 건너면서 엘리터들을 사냥하는 모습이다.
라세안과 친구 먹은 이야기는 가장 장황하게 묘사되어 있다. 인간이 드래곤과 교분을 맺는 몇 안 되는 스토리이며, 후세에 자랑할 만하기 때문이다.
막심 백작의 갈리아 영지군에 의해 하렌 자작의 영지가 풍전등화일 때 성의 뒤쪽을 급습한 몬스터들을 상대로 한 헬 파이어도 묘사되어 있다.
몬테규 가와 케플렛 가의 해묵은 분쟁을 끝내준 일화도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테리안 왕국의 국왕이 바세른 산맥 아랫자락에 이실리프 자치령을 할양하기까지의 스토리도 멋지게 새겨져 있다.
가이아 여신이 직접 발현하여 성녀 스테이시를 배우자로 점지해 준 이야기도 잘 표현되어 있다.
파이렛 군도의 해적을 모두 제압하는 모습도 보인다.
드래곤 로드인 옥시온케리안과 담판을 지어 이실리프 자치령은 인정받는 정면도 있다.
이 밖에 거대 해양몬스터인 크라켄을 사냥하는 장면도 멋있게 묘사되어 있다.
부조가 새겨지지 않은 벽들이 있다.
이곳엔 이실리프 국왕이 되는 장면과 기타 자랑할 만한 것, 그리고 인세에 드문 일들이 새겨지게 될 것이다.
이곳의 부조 중 상상의 산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린 현수가 전대 마탑주인 멀린을 만나 마법을 익히고 이실리프 마탑을 물려받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것엔 수많은 마법사가 부복해 있는 장면도 있다.
하인스가 제2대 이실리프 마탑주가 된 것을 소속 마법사들이 경하하는 장면이다. 나이즐 빌모아가 직접 새긴 이것엔 약 500명의 마법사가 있는데 얼굴이 모두 다르다.
과연 장인 종족이라 할 만한 솜씨이다.
이 중 특기할 만한 것은 500여 명의 마법사 중 300여 명이 자신의 키보다 큰 스태프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오리 알만큼 굵은 마나석이 박힌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마법사들이 들고 다니는 스태프에도 불문율이 있다.
자신의 키보다 긴 것을 든다는 것은 본인이 7서클 이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무언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실리프 마탑에 7서클 이상이 300명쯤은 있을 것이란 세인들의 예상이 반영된 부조이다.
세심히 한옥단지를 다 둘러보고 나선 현수는 정문 위 편액을 보고 피식 웃었다.
광화문(光化門)이라 쓰여 있기 때문이다. 현수가 준 사진을 보고 그대로 그려 넣은 듯하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건립 당시엔 사정문(四正門)이었다. 그러다 세종 7년에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의 광화문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래, 광화라는 게 나쁜 뜻은 아니지. 그냥 써도 되겠네.”
아르센 대륙에도 ‘광화문’이 존재하게 되었다.
내친김에 국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정사를 논하는 커다란 홀과 국왕 집무실 및 접견실이 있는 바실리를 둘러보았다.
대륙의 어느 왕궁 못지않게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걸어 곳곳을 둘러보았다.
나이즐 빌모아에게 일러준 포장도로가 쭉 깔려 있어 비가 와도 질퍽거리는 일은 없을 듯하다.
바실리를 나와 다른 곳도 두루 살펴보았다.
아르센 대륙에 와서 여러 수도를 둘러보았지만 이곳만큼 잘 정비된 곳을 없다 자부할 만큼 깨끗하고 정갈했다.
사람들의 의복 또한 다른 곳과 달리 너저분하지 않다. 곳곳에 공공목욕탕이 지어져 있어 위생 상태도 괜찮다.
아카데미로 사용하는 파빌리온을 가보니 수업이 한창이다. 한쪽에선 검을 든 기사학부생들이 열심히 수련하는 중이다.
모두들 진지한 자세로 수업에 임하고 있어 조용히 발을 돌렸다. 좋은 수업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타지마할의 서가엔 대륙 곳곳에서 수집해 온 책들이 꽂혀 있고 열람실엔 많은 사람이 독서 삼매경 중이다.
도서관인데 시끄러운 곳이 있어 가보니 아르센 공용어를 가르치는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어린아이 반도 있고, 어른들을 위한 반도 있다.
개중엔 키 작은 빌모아 일족도 섞여 있다.
왕국민이라면 누구든 읽고 쓸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이행하는 모양이다.
여기저기를 다 돌아보고 나니 왕국이 제대로 성장하고 있다는 걸 확실할 수 있었다.
“웬만큼 기틀이 닦였으니 왕국 선포만 남았군. 그런데 왕비들이 없네.”
현수는 카이로시아가 있는 좌표를 확인했다. 그리곤 곧바로 텔레포트했다.
“로시아!”
“어머, 자기야! 흐흑! 흐흐흑! 왜 이제야 왔어요? 흐흑!”
자신의 집무실에서 상단 거래 내역을 훑고 있던 카이로시아는 현수는 보자마자 후다닥 달려와 품에 안긴다.
그리곤 이곳저곳을 만져본다. 혹시라도 어느 한 구석 잘못된 곳이 있나 싶은 것이다.
하긴 3년이 넘는 긴 세월이 지나도록 소식 한 번 전하지 않았다. 하여 아주 적극적으로 현수에 대한 소문을 캤다.
그 결과 대륙의 남쪽 어딘가에 있는 미지의 땅에서 수많은 흑마법사와 대결을 펼쳤다는 소문을 들었다.
대결에서 이겼다면 벌써 소식이 왔어야 한다. 그런데 3년이 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불안한 생각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 믿기에 애써 마음을 다잡고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이나 일기 불순한 날만 되면 현수의 신상에 안 좋은 일이 생겨 혹시 과부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마다 눈물을 한 바가지씩 쏟았다.
애써 참으려 해도 저절로 솟았다. 그럴 때마다 이레나 상단 종사자들은 걸음도 살금살금 걸었다.
로시아를 배려한 것이다.
아무튼 카이로시아는 마음이 다 타서 재가 된 듯한 느낌을 받은 날이 많았다. 세상을 다 산 듯한 허무함 때문인지 조금 늙었다는 느낌이다.
“에구, 우리 로시아! 얼굴이 많이 상했네.”
현수의 얼굴에 시선을 준 로시아는 너무도 멀쩡한 모습에 살짝 얄밉다는 느낌이 든다.
“흐흑! 흐흐흑! 미워요. 이렇게 멀쩡하면서 왜……? 흐흑! 난 자기야가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흐흑!”
카이로시아의 예쁜 두 눈에서 한없이 눈물이 샘솟는다.
이러다 체내 수분 부족 현상이 빚어지거나 탈진하여 실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로시아, 울지 마. 예쁜 얼굴 퉁퉁 붓잖아.”
말하며 슬쩍 품에서 떼어내려 하자 현수를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싫어요! 싫어요! 이제 자기 품에서 안 떨어질래요. 흐흑!”
얼마나 생각했는지 확연히 느껴지는 말과 행동이다. 현수는 자신의 무심함을 새삼 깨닫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로시아…….”
“싫다구요. 자기야 품에서 안 떨어질 거예요.”
“…그럼 키스를 못하는데?”
“……!”
슬그머니 현수를 잡고 있는 손아귀에서 힘이 빠진다.
슬쩍 로시아를 품에서 떼어낸 현수는 잠시 로시아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품에 보듬으며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으읍……!”
로시아의 키스는 3년 치를 한꺼번에 보상받고야 말겠다는 듯 아주 정열적이었다. 설왕설래가 이어지는 동안 로시아의 눈물은 서서히 말라갔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렀다.
“미안해. 내가 너무 오랫동안 소식을 못 전했지?”
“네, 그래도 괜찮아요. 이렇게 멀쩡하니까요.”
한국에선 2년도 안 되는 군복무 기간에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아가씨가 많다.
그걸 알기에 한결같은 카이로시아가 너무도 사랑스럽다. 하여 와락 품에 안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아아! 아아아!”
현수는 자신의 등을 격정적으로 쓰다듬는 카이로시아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사랑과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이 동시에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