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4
“그래, 가만있어 봐.”
현수는 아공간에서 비누와 샴푸 등을 꺼내놓았다. 어차피 아드리안 왕궁을 가야 하기에 전과 달리 많은 양은 아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아리아니.]
[네, 주인님.]
[로잘린 몸에서 냄새가 좀 나는데 정령들 좀 불러줘.]
[냄새만 없애면 되는 거예요?]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무심코 중얼거렸다.
[일단은. 근데 냄새 안 나게 하는 방법은 없나?]
[냄새 안 나게 하고 싶어요? 있는데 해드려요?]
[있어? 뭐가 있는데?]
[두 가지가 있어요. 바람의 정령에게 부탁하면 냄새 정도는 완전히 없애죠.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오, 그래? 그럼 다른 건 뭔데?]
[물의 정령에게 말하는 거죠. 그럼 몸에서 은은한 향내가 나요. 그것 때문에 다른 냄새가 맥을 못 추는 거죠.]
그러고 보니 테세린을 방문했을 때 로니안 자작과 세실리아 자작부인, 그리고 로잘린의 몸에서도 냄새가 났는데 카이로시아만 냄새가 나지 않았다.
하여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더니 어릴 때 하마터면 오크의 먹이가 될 뻔했는데 그때 목숨을 구해준 엘프 장로의 마법 덕분이라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엘프들의 마법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다. 정령사에 가깝다 할 정도로 정령력을 많이 끌어다 쓴다.
골드 드래곤 제니스케리안의 제자 케이트도 몸에서 악취가 나지 않는다. 체취를 맡아보면 울창한 숲 속에서 느껴지는 그런 상쾌함만 느껴질 뿐이다.
이는 냄새제거마법 디오도리제이션(Deodorization)과 향기발산마법인 이밋 프레이그런스(Emit fragrance) 때문이다. 둘 다 용언 마법이다.
드래곤들의 마법서에 있는 걸 보기는 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아 현수가 간과하고 있는 것들이다.
[어떤 향내가 나는데? 그리고 냄새는 어느 정도로 짙어? 냄새가 진해도 고역이거든.]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드릴 수 있을 거예요.]
아리아니는 정말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럼 말이야, 포인세 향기가 연하게 나게 해줄 수 있어?]
포인세의 향기는 바닐라 향과 페퍼민트 향이 절묘하게 섞여 냄새만으로도 심신을 상쾌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가능해요. 그렇게 해드릴게요.]
‘어라! 이 냄새는……?’
아리아니의 말이 떨어지고 불과 수 초 만에 향긋한 내음이 코를 자극한다. 강렬했던 정수리 냄새는 사라지고 폐부마저 시원케 하는 포인세 향기가 난다.
[당케 쉐엔!]
[내? 그거 무슨 말이에요?]
피차 고맙다는 말을 쓰지 않기로 했기에 독일어로 이야기하자 예상대로 아리아니는 알아듣지 못한다.
[응, 수고했다고.]
[헤헤! 그래요? 저 잘했죠?]
[그래, 수고했어. 이제 좀 쉬어.]
아리아니와의 대화를 마친 현수는 로잘린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쓸 수 있을 거야. 그치?”
“네, 고마워요.”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의복이 약간 구질구질해 보인다. 보아하니 세제도 다 쓴 모양이다.
하긴 헤어져 있는 기간이 길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여 세제를 꺼내주고 워싱과 클린 마법으로 간이 세탁을 해주었다.
“아! 이제 가도 되겠다.”
“네?”
“이제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만나도 된다는 거야. 로잘린이 가서 말씀드려.”
“네.”
로잘린이 쪼르르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는 현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구에서 태어났다면 모두의 시선을 받는 대스타가 되고도 남을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 너무도 현숙하다 느껴진 때문이다.
“내가 마누라 복은 흘러넘칠 정도로 좋은가 보네.”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와 테리나는 모두가 아름답고 현숙하며, 지혜롭고 부드러우며 사랑스런 여인들이다.
카이로시아와 로잘린, 그리고 스테이시와 케이트, 다프네 역시 그에 버금갈 정도이다.
삼류 대학 수학과를 졸업할 땐 세상살이가 막막했다. 취업의 문은 너무 좁았고, 경쟁 상대는 너무나 많았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며, 아이를 낳아 기르려면 많은 돈이 드는데 뽑아주는 직장이 없으니 이성 교제는 꿈도 꾸지 못했다.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주머니에 든 게 없으니 누구를 만나든 눈치가 보여서이다.
그러고 보니 그 시절엔 여러 가지를 포기했다.
연애, 취업, 결혼, 출산, 인간관계, 그리고 내 집 마련이다.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거나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꿈마저 꿀 수 없던 너무도 암울한 시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완벽하게 갖췄다.
두 세상을 오갈 수 있는 능력은 아홉 명이나 되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해주었다.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다. 이 모든 건 전능의 팔찌 덕분이다.
‘스승님, 정말 고맙습니다.’
현수는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는 멀린을 떠올리곤 고개를 숙였다.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진심에서 우러난 감사의 뜻을 표한 것이다.
잠시 후, 현수는 로니안 공작 부부를 만나 정중히 로잘린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했다. 지금껏 기다리던 말이기에 흔쾌히 승낙의 말을 들었다.
결혼식은 앞으로 반년 후 이실리프 왕국의 수도가 있는 코리아도 셰울에서 치러질 것이다.
식장은 한옥단지에서 가장 큰 연못인 대한지(大韓池)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대한전(大韓殿)이다.
연못의 중심부에 네모반듯한 돌로 둑을 쌓아 섬을 만든 뒤 세운 전각으로 향후 이실리프 왕국의 중대한 행사가 치러질 곳이다.
국왕의 결혼식, 만조백관이 모인 신년하례식, 왕자의 결혼식 등등이 이곳에서 거행된다.
규모는 당연히 대단히 크다.
조선시대 최대 전각은 경회루이다. 이것은 전면 7칸, 옆면 5칸, 2층 구조로 바닥 면적은 933㎡(282평)이다.
대한전은 지하1층, 지상 3층 구조로 축조되었으며, 바닥 면적은 3,967㎡(1,200평)이다. 경회루의 네 배 이상이다.
지하 1층은 국가의 중대사를 치를 각종 기자재를 넣는 창고와 대소 연회를 지원할 식재료 창고 및 주방 등이 있다.
천장 높이가 무려 15m에 달하는 1층에선 국가의 중대한 행사가 거행된다.
현수의 왕국 선포식이 가장 먼저 이곳에서 치러진다. 곧이어 국왕 즉위식이 거행되고, 그다음으로 다섯 명의 꽃다운 왕비와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2층과 3층은 연회장이다. 각각 7.5m 높이라 답답하지 않은 공간이다. 이곳은 아르센 대륙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풍광이 좋은 레스토랑이라고 보면 된다.
특기할 만한 것은 덤 웨이터((Dumb waiter): 엘리베이터와 같은 구조로 식품·소화물 등을 위층으로 들어 올리는 운반기. 수동식과 전동식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리프트(Lift)라고 부른다.)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수가 준 여러 도면 중 엘리베이터 제작도를 보고 그 원리를 깨달은 빌모아 일족이 수동식으로 만든 것이다.
전기가 없는 곳이라 모터의 원리는 알 수 없는 결과이다. 그래도 과연 대단한 장인 종족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어쨌거나 성혼되었음을 선언해 줄 존재는 드래곤 로드인 옥시온케리안이다. 아마도 가이아 여신도 한몫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성녀가 신부이니 당연한 일이다.
이날의 행사는 대륙 최고의 마법사이자 유일한 그랜드 마스터이며 국왕의 결혼식이다.
신부 중 둘은 제국과 왕국 공작가의 공녀이고, 하나는 성녀이며, 드래곤의 딸과 드래곤의 제자이다.
당연히 아르센 대륙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축하사절을 보낼 것이다. 어쩌면 역사상 최초로 모든 국가의 국왕이나 황제가 한곳에 모이는 일이 될 것이다.
아울러 대륙의 모든 마탑주와 소드 마스터 또한 달려올 것이다.
이쯤 되면 대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이유는 이실리프 왕국과 연을 이어두어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역사적인 장소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 각국의 마법사들과 기사들 또한 모두가 참석하기를 열망할 것이다. 대륙의 끝에서 올 사람도 있으니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넉넉히 시간을 잡은 것이다.
로니안 공작 부부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은 현수는 잠시 로잘린과 함께했다. 결혼할 사이이지만 함께한 시간이 적었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슈퍼포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로잘린은 눈빛을 반짝였다. 아름다운 모습을 오래오래 유지한다는데 어찌 관심이 가지 않겠는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성녀와 드래곤의 딸, 그리고 드래곤의 제자에 관해선 꼬치꼬치 캐물었다. 공작가의 공녀가 되었지만 아무래도 한 수 뒤진다는 느낌이 든 때문이다.
현수는 잘 다독여서 상대적 박탈감, 또는 열등감 내지는 패배의식을 갖지 않도록 해줬다.
이 과정에서 현수는 로잘린이 매우 아름답고 선량하며, 풍부한 감성을 가졌다며 계속해서 칭찬했다.
대놓고 면전에서 칭찬을 해주자 처음엔 좋았으나 차츰 몸 둘 바가 모르겠는지 교구를 배배 틀었다. 그런 그녀가 너무 귀여워서 와락 안아주었다.
그리곤 아주 정열적인 키스를 해줬다. 결국 로잘린은 현수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그런 그녀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맺혀 있다. 지극한 행복감이 꿈에서도 이어지는 모양이다.
* * *
“잘 다녀오세요. 여긴 걱정 마시구요. 준비 잘하고 있을게요.”
“그래, 또 봐.”
로잘린과 로니안 공작 부부는 현수의 신형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 현수가 완전히 보이지 않자 그제야 큰 숨을 몰아쉰다.
“휴우! 이제 되었군.”
“호호, 네. 우리 딸이 아드리안 왕국의 제2왕비가 된다니 저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요.”
“나도 그래. 변방의 자작이던 내가 공작위를 받게 된 것도 다 사위 덕이지. 로잘린, 너는 절대 투기 같은 거 하지 마라. 알았지?”
“네, 아빠. 전 그런 거 안 해요. 하인스 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니까요.”
“그나저나 이실리프 왕국 선포식과 국왕 즉위식, 그리고 우리 딸 결혼식에 입을 옷을 준비해야겠어요. 명색이 공작부인이고 국왕의 장모인데 아무 거나 입을 순 없잖아요? 그렇죠? 그러니 여보, 돈 좀 내놔요.”
“저도요, 아빠! 저도 공녀이면서 왕비가 될 사람이니 엄마랑 옷과 장신구 좀 사게 돈 주세요.”
“헐!”
공작이 된 이후 둘의 씀씀이는 전과 달라졌다. 자작부인과 공작부인 차이만큼이나 대폭 늘어났다. 하지만 로니안 공작은 호탕하게 웃음 짓고 돈을 내놓았다.
그런데 또 내놓으라니 텅 비어버린 금고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렇기에 저도 모르게 한소리 한 것이다.
“당신 돈 많은 거 다 아니까 엄살 피우지 말아요. 공작이 된 다음에 국왕전하는 물론이고 다른 귀족가에서도 엄청 예물 보낸 거 다 알거든요. 남자가 치사하게 마누라랑 딸 몰래 딴 주머니 차려는 건 아니죠? 그렇담… 흥흥! 내일부턴 국물도 없을 줄 알아요.”
“아, 알았어! 알았다고! 누가 안 준대? 주긴 주는데 얼마를 줘야 하는지 생각하느라 그런 거야.”
로니안 공작은 곧바로 꽁지를 내린다. 사랑하는 아내 세실리아를 두고 각방을 쓰는 건 지옥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럴 즈음 현수는 카이로시아의 집무실에 당도했다.
“준비는?”
“다 되었어요.”
“그럼 갈까?”
“네!”
잠시 후 현수는 카이로시아와 함께 로이어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성 근방으로 텔레포트했다.
“여기 정말 많이 변했네요.”
오랜 동안 외지 생활을 한 카이로시아는 아련한 시선으로 영주성을 바라본다.
고색창연하던 옛 모습은 사라졌다. 예전엔 크기는 했지만 밋밋한 외관이었다. 늘 내부에서 생활하니 외관보다는 내부 인테리어에 더 신경을 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