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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1225화 (1,224/1,307)

# 1225

그런데 카이로시아의 눈에 보이는 건 새로 지은 것처럼 산뜻하면서도 웅장하고 화려하다.

로이어 백작은 공작이 된 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건물 앞에 훨씬 더 큰 새 건물을 지었다.

백작과 공작의 위상 차가 크기 때문이며, 사위가 이 세상 최고의 인물이기에 그에 걸맞은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다.

당연히 성문도 앞쪽으로 확장 이전된 상태이다. 그렇기에 카이로시아의 눈에는 완전히 달라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게 전과는 다르네. 새로 지었나 봐.”

“그렇죠? 전 제 기억에 문제가 있나 했네요.”

말을 하며 슬그머니 기대면서 팔짱을 끼려 한다. 현수는 그 손을 떨치고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자연스레 카이로시아의 팔은 현수의 허리를 휘감는다.

카이로시아는 아늑하면서도 행복함을 느끼며 살짝 미소 지었다.

“자기랑 이렇게 있으니까 좋아요.”

“그래? 나도 그런데. 그나저나 우리 장난 좀 쳐볼까?”

“장난이요? 무슨 장난이요?”

“그런 게 있어. 잠깐만.”

아공간을 열어 C급 용병 의복을 꺼냈다.

카이로시아에겐 떠돌이 여인들이 걸치는 커다란 숄과 아바야 로브((Abaya robe): 이슬람식의 긴 여성 의상.)를 꺼내주었다.

음흉한 사내들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한 이것은 야간엔 이불 대용으로도 사용되는 것이다.

현수와 카이로시아는 킥킥거리며 의복을 갈아입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13장 썩을 놈들! 기다려라

“호호! 이런 복장 참 오랜만이에요.”

“그래? 로시아가 이런 걸 입어봤어?”

“여기 살 때 바깥이 궁금해서 몇 번이요.”

임금이 미복((微服): 지위가 높은 사람이 민심을 몰래 살피러 다닐 때 입는 남루한 옷.) 차림으로 잠행을 나선 것처럼 카이로시아도 영주성 바깥을 둘러본 모양이다.

“그때 뭘 봤는데?”

“로이어 영지는 농지가 부족하여 늘 먹을 게 부족했어요. 아빠는 영지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많은 곡식을 들여왔지만 그래도 넉넉하진 않았어요. 어렸을 때…….”

로시아는 상단에서 일하기 전에 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처음으로 아빠 몰래 성 밖으로 나가서 본 풍경은 로시아의 상상을 산산조각 냈다.

책에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얼굴에 버짐 핀 아이들은 하나같이 깡말라 있었다. 한껏 뛰어놀아야 할 나이지만 모두가 고된 일을 하고 있었다.

힘겨워 일하는 속도가 늦어지면 어른들은 게으름 피운다면서 아이들을 닦달하였다.

의복은 남루했고, 생기 없는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러다 한 아이와 그 아비가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근데 아부지, 요즘은 왜 점심나절에 암것두 안 먹어유?”

“배 많이 고프냐?”

“네! 증말 많이 고파유. 뱃가죽이 등가죽하고 달라붙을 정도로유. 우리 뭣 좀 먹고 하면 안 되유?”

“에구, 이 녀석아! 이젠 하루에 한 끼 먹는 것도 다행으로 알아야 혀. 곳간 텅 빈 거 못 봤냐?”

“봤쥬. 근데 그럼 언제까지 굶어야 혀유?”

“봄 되면 먹을 수 있는 풀이 나니 그때까지는 참아야지.”

“에에?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되었는디 봄까지 참아야 한다구요? 그때까지 어찌 참는대유? 지금도 배가 고픈디.”

“없으니 어쩌냐. 가만있어 보그라. 숲에 올무를 놨는디 거기에 뭔가 걸리면 먹것지. 아! 근데 줄 똑바로 못 잡냐? 이것 봐라. 삐뚤빼뚤해졌잖아. 이렇게 하믄 감독관이 보면 야단친다는 거 몰라?”

“죄송허구만요. 근데 아부지, 올무에 뭐 잡혔을까요?”

둘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이의 아비가 올무를 놓은 것은 보름 전이다. 매일 한 번씩 들여다보지만 한 번도 뭔가가 잡힌 적이 없다.

눈이 많이 내리는 바람에 먹이를 찾을 수 없는 짐승들은 모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겨울 내내 올무에 뭔가가 걸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외출을 마치고 성 안으로 들어간 카이로시아는 큰오빠인 에머랄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를 했다.

그리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던 아이의 집에 먹을 걸 좀 보내달라고 했다.

당시 에머랄은 난감했다. 카이로시아의 청을 받아들이면 누군 주고 누군 안 주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먹을 것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다.

자칫 사소한 일로 영주에 대한 존경심이 흐려질 수 있음을 잘 알기에 한참을 고심했다.

다음 날 퍼거슨 에델만 드 로이어 백작은 곳간을 열어 창고 대방출을 했다. 칭송이 자자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신 백작가의 식솔들은 겨우내 거친 음식으로 식사를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이로시아가 음식 투정을 부린 적이 있다. 매일 귀리로 만든 오트밀 같은 것만 주니 기름진 고기가 없다고 투덜거린 것이다.

이에 에델만 백작은 카이로시아를 데리고 성 밖으로 나갔다. 영주의 행차에 모두가 극고의 예를 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에델만 백작은 굶은 영지민이 있는 것 같으냐고 물었고, 카이로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의 표정이 확연히 밝아져 있음을 본 것이다.

그때 에델만 백작은 영주성 곳간을 연 것과 지금의 식사, 그리고 영지민들의 표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무엇인지를 가르친 것이다. 그날 이후 카이로시아는 바뀌었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려 애쓰는 현재의 착한 로시아가 된 것이다.

카이로시아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장인어른과 큰처남이 아주 잘 가르치셨어. 마음에 들어. 로시아는 아주 좋은 왕비가 될 것 같아.”

“……!”

“우리 이실리프 왕국의 왕국민도 그렇게 대해줘.”

“고마워요, 칭찬.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게요.”

카이로시아는 현수의 품을 파고든다. 현수는 그런 그녀를 마다하지 않고 보듬어 안아주었다.

“흐음! 우리 로시아, 하루라도 빨리 슈퍼포션을 먹여야 하는데. 그치?”

“네? 슈퍼포션이요?”

로시아의 얼굴이 금방 붉어진다.

슈퍼포션을 복용하면 홀랑 다 벗고 현수가 전신을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고, 그 일이 끝나면 곧바로 현수의 여자가 됨을 알기 때문이다. 처녀이니 부끄러운 것이 당연하다.

“오늘이라도 장인어른에게 허락을 받으면 그렇게 할까?”

“저, 저, 저…….”

로시아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현수의 입가엔 미소가 매달려 있다.

“하하! 하하하! 일단 가자.”

둘이 성문 앞에 당도한 것은 이른 새벽이다. 테세린은 밤이지만 이곳과는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멈춰라! 이곳은 로이어 영주성이다! 용무는?”

수문위병이 고압적으로 수하하자 현수는 대꾸 대신 로시아에게 속삭였다.

“거봐. 저런다니까. 우리가 귀족 복장을 하고 왔으면 아마 달랐을 거야.”

“저도 알아요. 근데 저 사람들은 저럴 수밖에 없잖아요. 너무 공손하면 영주이신 아빠의 위상을 깎아먹는다 생각해서 그런 걸 거예요.”

“진짜 그럴까? 두고 보면 알지.”

자신의 말에 즉각 대꾸하지 않고 속삭이는 모습을 본 수문위병은 쌍심지를 켠다.

“이놈! 지금 성문 앞에서 뭐 하는 것이냐? 무슨 용무로 이곳에 왔는지 묻지 않았느냐!”

“영주님을 뵈러 왔네.”

“뭐? 왔네? 어디서 이런……! 니가 지금 감히 영주님의 성을 지키는 본관에게 왔네라고 했나?”

“내 말의 꼬투리를 잡을 게 아니라 왜 만나러 왔는지를 묻는 게 우선 아닌가?”

현수가 짐짓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이로시아가 옆구리를 슬쩍 꼬집는다. 수문위병 역시 아빠의 수하이기 때문이다.

“쳇! 너무하잖아요. 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모른다고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

“그래도요. 자기가 이러다 저 사람 혼나면 어떻게 해요? 보아하니 가정도 있는 것 같은데.”

“에구, 알았어. 알았다구.”

둘이 또 속삭이자 수문위병이 화를 버럭 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수문위병은 꼬나들고 있던 할버드로 둘을 위협하려는 몸짓을 한다. 여차하면 공격하겠다는 의도가 확실하다.

“저 봐. 저러니까 안 된다는 거야. 수문위병은 그 성을 처음 대하는 사람에겐 얼굴과 같은 존재야. 따라서 저런 태도는 올바르지 못해. 공손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정중하기는 해야지. 수문위병이 벼슬인 건 아니잖아?”

현수가 이런 말을 하는 의도는 다분히 한국의 공무원을 의식한 것이다. 행정관서 민원실에 가보면 친절한 공무원도 많지만 틱틱거리는 자들도 있다.

민원인의 편리를 위해 존재함에도 관의 위세가 제 것인 양 고압적인 태도이다. 때론 윽박지르거나 겁박하기도 한다.

민원인이 저학력자이거나 빈한해 보일수록 이럴 확률이 높다. 그런데 전 국민을 상대로 이런 태도를 보이는 대표적인 공무원을 꼽으라면 국회의원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국가의 발전과 미래를 걱정하는 국회의원도 있겠지만 일부는 사사건건 나라에 해나 입히는 국회의원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부패와 연루되어 있고, 패거리 정치를 하며, 늘 권력을 탐한다. 제 배나 불리려는 소인배들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매관매직과 다를 바 없는 방법으로 공천헌금을 내곤 유권자들 앞에서 굽실거린다.

그렇게 국회에 입성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작태를 보인다. 개만도 못한 새끼들이다.

“알았어요. 아빠에게 말씀드려 저렇게 못하도록 할게요.”

카이로시아가 슬며시 팔짱을 끼며 웃음 짓는다. 이런 애교에 어찌 녹아내리지 않겠는가!

“아무튼 들어가자.”

“네.”

“이놈! 무슨 용무로 왔느냐고 묻지 않았느냐!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수문위병의 고압적인 태도에 현수는 이맛살을 좁혔다. 이때 카이로시아가 먼저 나선다.

“이분은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세요. 나는 카이로시아 에델만 드 로이어구요.”

“이런 미친! 누구라고? 어디서 감히 누굴 사칭하는 거야? 죽고 싶어? 엉?”

수문위병은 떠돌이로 보이는 한 쌍의 남녀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였는지 화를 버럭 낸다.

“말로는 안 되겠군. 로시아, 이리 와.”

“네.”

현수는 카이로시아를 안은 채 플라이 마법으로 성문을 넘어갔다. 이를 본 수문위병은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곁에 있는 경종을 마구 두드린다.

적이 공격을 가하거나 수상한 자의 침입이 있을 때만 울리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땡땡, 땡땡땡땡, 땡땡땡땡, 땡땡땡땡땡땡땡땡―!

요란한 타종 음이 새벽의 고요를 깨고 있을 때 현수는 내성 입구에 당도했다. 이곳에도 수문위병이 있기에 아예 내성의 문도 넘어 저택 현관 앞에 내렸다.

이때 마침 문이 열리면서 나이 든 사내가 나선다.

“뭐야? 무슨 일이지? 새벽부터 웬 종이야?”

로이어 영지가 공작령이 된 이후 사실상 경비 병력을 갖출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긴 누가 감히 이실리프 마탑주의 장인이 다스리는 영지를 넘보겠는가!

그렇기에 경비 병력의 숫자를 5분의 1로 줄였다.

예전엔 5인 1조가 되어 성문 경비를 맡았다. 1일 3교대 근무였다. 현재는 혼자서 경비를 서며 1일 4교대이다.

그럼에도 아무런 이상도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경종이 울릴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서려는데 누군가 앞을 막아서자 흠칫하며 물러선다. 이때 카이로시아가 나섰다.

“로렌스 할아범.”

“누구? 헉! 아, 아가씨! 카이로시아 아가씨가 맞습니까?”

“그래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간 잘 있었죠?”

“그, 그럼요! 근데 어떻게 이런 새벽에……. 헉! 마, 마탑주님! 어, 어서 오십시오!”

이전에 면식이 있어 그런지 단번에 알아본다.

“아버지 일어나셨어요?”

“아마도 그러실 겁니다. 종소리가 요란하니까요. 영주님은 잠귀가 밝으신 분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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