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226화 (1,225/1,307)

# 1226

“오빠는요?”

“두 분 도련님도 모두 깨셨을 겁니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어떻게 자겠습니까?”

경종 소리는 끊길 듯 끊길 듯하면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놀라서 깨어난 기사와 병사들이 병장기를 챙겨 들고 허겁지겁 달려가는 모습도 보인다.

“그렇긴 하네요. 아빠에게 갈게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로렌스 할아범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간 현수는 에델만 공작을 만나 정식으로 청혼을 했고, 흔쾌히 허락을 받았다. 큰처남 에머랄과 작은처남 일루신은 기꺼운 미소로 둘의 결합을 찬성했다.

현수 덕에 이레나 상단은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상단이 되었다. 현수가 준 찻잔 등이 큰 역할을 했지만 그보다는 이실리프 마탑주의 처가가 된다는 사실이 더 큰 이유이다.

카이로시아는 결혼식 준비를 하는 동안 로이어 영지에 머물기로 했다. 이실리프 왕국으로의 이동은 포털마법진을 이용하면 될 일이다.

로이어 영지와 이실리프 왕국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현수는 에델만 공작가의 식솔들을 위한 아침 식사를 만들어줬다. 치즈가 듬뿍 들어간 달달하면서도 짭조름하고 고소한 샌드위치이다. 다들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릴 정도로 맛있어 해서 현수는 흐뭇해했다.

* * *

“아아! 아아아!”

성녀의 처소에 있던 스테이시 아르웬은 머리가 허연 페룸 신관의 안내를 받아 온 현수를 본 순간 읽고 있던 책을 내던졌다. 그리곤 맨발로 달려와 와락 품속을 파고들었다.

3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만나고 싶어도 볼 수 없던 사랑하는 임이 왔으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스테이시는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으며 현수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는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로부터 현수가 위급 지경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들었기에 혹시라도 신상에 이상이 있나 싶은 것이다.

“미안! 내가 조금 늦었지?”

“아, 아니에요. 이렇게 오셨으니… 흐흑! 고마워요. 이렇게 멀쩡하게 다시 와주셔서요. 흐흐흑!”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스테이시는 다시 현수의 품을 파고들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둘은 뜨겁고 정열적인 첫 키스를 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아득한 느낌에 스테이시는 축 늘어졌다.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황홀경의 바다에 빠져 버린 것이다.

한국 속담에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어떤 일에 남보다 늦게 재미를 붙인 사람이 그 일에 더 열중하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스테이시 아르웬은 올해 29세이다. 아르센 대륙 기준으로 보면 노처녀 중에서도 상노처녀다.

16세만 되면 결혼하여 17세에 출산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29세는 12살짜리 아이가 있을 나이이다.

그런 나이에 처음으로 키스라는 걸 했다. 정신은 아득해지고 온몸은 녹아내리는 것 같다. 한순간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느낌이다. 순도 높은 마약보다도 끊기 어려울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현수의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하여 훗날의 현수는 오늘의 스테이시를 놀린다.

명색이 성녀(聖女)인데 이때만큼은 사내에게 환장한 성녀(性女) 같았다며 놀린 것이다. 그럴 때면 스테이시는 낯을 붉히면서도 다시 한 번 그래 보자고 달려들었다.

스테이시는 현수와 결혼함과 동시에 이실리프 왕국의 제3왕비가 된다. 그래도 가이아 여신의 성녀 신분은 유지된다.

낮에는 엄숙한 성녀로 생활하지만 침실에선 다른 왕비들 못지않은 정열을 보이는 것이다.

현수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일부러 스테이시를 도발하여 더 정열적인 밤을 보내곤 한다.

어쨌거나 스테이시에게도 반지를 주며 청혼한다. 그리고 교황을 만나 정식으로 청혼했다.

교황은 이미 여신의 점지가 있었기에 반대라는 건 생각해 보지도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축하의 말을 건넨다.

라이셔 제국의 신전과 이실리프 왕국에 세워질 가이아 신전엔 포털마법진이 새겨진다.

언제든 오갈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 * *

“케이트, 나와 결혼해 주겠어?”

“네에, 그럼요!”

기다렸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케이트는 현수가 끼워주는 반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스승인 제니스케리안은 여성체이기에 상당히 많은 보석을 보유하고 있다. 산더미는 아니지만 적어도 1톤 트럭 적재함을 가득 채울 정도는 된다.

그렇기에 상당히 많은 보석을 견식한 바 있다. 그중엔 10캐럿짜리 사파이어보다 더 큰 것도 많다.

하지만 현수가 끼워주는 것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이다.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이제 케이트는 내 여자야. 이리 와.”

“네에.”

현수는 케이트를 안고 진하게 키스했다.

스테이시처럼 정신을 못 차린다. 3년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어서 결혼도 하기 전에 과부가 되었거나 소박을 맞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끔 우울해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우려가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후련함까지 더해져졌기에 정신없이 현수의 품을 파고든다.

한참 후, 현수는 제니스케리안에게 정식으로 청혼의 말을 건넸다. 장모가 아니기에 마땅한 칭호가 없어 애를 먹었다.

본인의 스승이 아니니 스승님이나 사부님이라 부를 수 없고,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마땅하지 않은 때문이다.

“케이트를 잘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케이트를 많이 아껴줄 것으로 믿네.”

“당연히 그래야지요.”

이처럼 서로 간에 호칭 없는 대화를 마쳤다. 잠시 후, 셋은 포인테스 영지로 텔레포트했다.

아르가니 에이런 판 포인테스 공작성 역시 로이어 영지의 그것처럼 바뀌어 있다.

포인테스 영지는 미판테 동단에 있는 유서 깊은 영지이지만 먹을 것이 부족한데다 영주의 적극적인 치세가 없어 나날이 피폐해 갔다.

현수가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모든 가축이 전염병으로 죽어 오크 고기를 먹었다.

그런데 지금 에이런 공작성은 로이어 공작성과 버금갈 정도로 멋있게 지어져 있다. 미판테 국왕이 공작위를 제수하면서 상당히 많은 하사금을 준 결과이다. 물론 사위가 될 하인스 마탑주를 염두에 둔 호의이다.

어쨌거나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

“먹고살 만해진 것 같지?”

“네, 정말 멋있어요.”

케이트는 새로 지어진 성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잠시 후, 현수와 케이트, 그리고 제니스케리안은 공작 일가와 마주했다.

아르가니 에이런 판 포인테스 공작의 가족 입장에선 둘 다 몹시 어려운 존재이다.

현수는 하늘같은 위저드 로드이고, 제니스케리안은 말이 필요 없는 위대한 존재이다. 하여 절절매는 가운데 정식 청혼을 했다. 당연히 OK이다. 오히려 케이트를 받아들여 줘서 고맙다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다음은 포털마법진 설치이다. 하여 이실리프 왕국과 언제라도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먼 미래에도 포인테스 공작성을 넘보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 순간부터 이실리프 마탑과 적이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수가 살아 있는 동안이라면 세상 모든 마법사와 기사들의 적이 되는 것이다.

케이트 역시 공작성에 남기로 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본격적으로 신부 수업을 받기로 한 때문이다.

제니스케리안도 남았다. 포인테스 영지에 수시로 출몰하는 몬스터들을 정리해 주기 위함이다.

잡아봤자 아무런 쓸모도 없는 몬스터들만 우글거리니 아예 깊고 깊은 산중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이다.

* * *

“어서 오십시오, 마탑주님!”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궁전 현관까지 나와서 기다리던 홀랜드 커드버리 폰 미판테는 아주 정중히 허리 숙여 예를 갖춘다. 이실리프 마탑주는 국왕이나 황제와 동격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요. 마탑주님이시니까요.”

“제 아내 될 다프네가 이곳에 있다기에 찾아왔습니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별하겠습니다.”

“그전에 그간 다프네를 보살펴 주신 점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무슨 말씀을……. 다프네 님의 신부 수업은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이신 라이세뮤리안 님의 뜻이었습니다.”

미판테 국왕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라이세뮤리안만큼 대하기 어려운 이실리프 마탑주로부터 감당하기 힘든 감사의 말을 들은 때문이다.

“라수스 협곡을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은 아시지요?”

로니안 공작으로부터 이미 전갈받은 게 있는지라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요. 모든 게 마탑주님 덕분입니다. 왕국의 물류가 한결 가뿐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에구! 감사 받자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라수스 협곡엔 라세안, 아니, 라이세뮤리안의 자식들이 사는 마을이 있습니다.”

“네, 들었습니다. 소드 마스터도 여러 분 계시고 8서클에 오르신 분도 여럿 있다 하더군요.”

드래고니안은 하프 드래곤이긴 하지만 인간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로 여긴다. 그렇기에 국왕이면서도 낮추지 않는다.

“그 친구들이 미판테 왕국의 홍복이 되길 바랍니다.”

“네, 저희가 성심으로 대하면 그분들 또한 협조적일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현수와 국왕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다프네는 치장을 마치고 나왔다.

쿵, 쿵, 쿵―!

국빈 접견실 의전을 맡은 시종장이 의전용 스태프로 바닥을 두드리곤 큰 소리로 외친다.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이신 라이세뮤리안 님의 영애 다프네 옥타누스 폰 라수스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

현수와 미판테 국왕의 시선이 문으로 쏠린다.

이 순간 문이 열렸고, 우아하면서도 도발적인 미모를 갖춘 다프네가 한껏 치장한 모습으로 들어선다.

“…오랜만에 보셨을 터이니 저는 이만 빠지겠습니다.”

국왕이 손짓하자 수신호위들이 일제히 물러난다. 이제 이곳엔 다프네와 현수 둘만 남았다.

“국왕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무슨 말씀을……. 당연한 일입니다.”

국왕 또한 정중히 예를 갖추고 돌아선다.

모두가 물러갔을 때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온 다프네는 말없이 현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잘 있었지?”

“네, 괜찮으신 거죠?”

“그럼. 할 말이 있어서 왔어.”

현수는 아공간에서 반지 함을 꺼냈다.

“나하고 결혼해 줄래?”

진한 보랏빛 반지에 잠시 시선을 주던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인다.

“평생 현숙한 아내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고마워요.”

미판테 왕궁에서도 길고 긴 키스가 이어졌다. 잠시 후 둘은 라수스 협곡으로 텔레포트했다.

라세안은 둘의 결혼을 당연히 허락했다.

이렇게 다섯 신부를 모두 챙긴 현수는 이실리프 왕국으로 텔레포트했다.

하리먼 등이 알현을 청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집무실에 칩거하던 현수가 자리를 턴 것은 이틀이 지나서이다.

“이제 슬슬 가볼까?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스르르 사라진다. 다음 순간 블랙일 아일랜드에서 돋아났다.

확인해 보니 기존의 마법진은 파괴된 상태이다.

현수는 섬 전체에서 마법이 구현되지 않을 안티 매직필드 마법진을 그려놓고 눈에 보이지 않도록 감췄다.

마인트 대륙의 흑마법사들이 아르센 대륙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흐음! 이 정도면 되겠군.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또 한 번 현수의 신형이 흩어진다. 다음 순간 마인트 대륙 북단에 위치한 자유영지 헤르마에 도착한다.

“흐음! 아주 제대로 말살시켜 주지.”

나직이 중얼거린 현수는 컨퓨징 마법으로 평범한 얼굴로 외모를 바꿨다. 아직 단 하나의 10서클 마법도 창안해 내지 못했지만 복수의 시간을 늦출 수 없어서이다.

“너희만 꼼수를 쓰는 게 아냐. 어디 한번 해보자고.”

으드드득―!

10서클 마스터이자 그랜드 마스터이며 보우 마스터이기도 한 현수는 나직이 이를 갈았다. 복수가 시작되었다.

『전능의 팔찌』 51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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