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8
“알았다, 알았어.”
주방을 나온 파티마는 다시 홀로 들어섰다. 새로 온 손님이 있으면 주문을 받아야 하는 때문이다.
그런 파티마의 눈에 낯선 사내가 뜨인다. 쪼르르 다가가며 보니 낯이 익은 것 같으면서도 설다.
“이봐요. 손님! 헤르마에 처음 왔어요?”
“네? 아뇨, 처음은 아닙니다.”
현수가 부인했지만 이런 손님을 응대하는데 이골이 난 파티마는 아니라는 걸 안다는 듯 대꾸한다.
“에이, 아니긴요. 내가 처음 보는데. 뭐 주문할 거예요?”
“뭐가 있죠?”
“으음! 그냥 내가 가져다주는 걸로 배를 채워요.”
“네? 그게 무슨……?”
“말해봤자 뭔지 모를 테니 그냥 주는 걸 먹으라고요.”
여전히 불친절한 선술집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수는 처음 온 사람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음식값은 4실버 30쿠퍼예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값을 치르는데 왠지 데자뷰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처음 왔을 때에도 파티마는 자신이 주는 걸 먹으라 했다.
그때 5실버를 냈더니 팁을 제 마음대로 챙겼다. 오늘도 그런가 싶다.
“5실버네. 잔돈은 내가 가져도 되죠? 그럼 기다려요.”
“헐……!”
그때 했던 말과 거의 똑같다.
“근데 우리 어디서 보지 않았어요?”
“네? 난 오늘 이곳이 처음인데…….”
현수는 짐짓 왜 그러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호오, 이상하네. 왠지 낯이 익은데……. 아무튼 기다려요, 곧 갖다 줄 테니까요.”
파티마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방으로 향한다.
이때 현수는 한 칸 건너에 있는 칼리드 일행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맥마흔으로 정해진 기일 내에 당도하지 않으면 항명죄로 처벌한다는 거지?”
“그래! 그러니까 돈 아껴서 써. 포탈 사용료 올랐다더라.”
“또 올랐어? 으이씨, 어떻게 맨날 올리지? 가끔은 내리거나 공짜로 쓰게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러게, 황제께서 부르신 건데. 쩝! 할 수 없지. 그나저나 세반, 아까 자네에게 황명을 일러준 사람이 누구라고?”
칼리드의 말에 세반은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렇지 않아도 누군지 생각해 내려 애쓰고 있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때문이다. 그러다 혹시라도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을까 싶어 그러는지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현수와 시선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이내 다른 곳을 바라본다. 자신의 기억에 없는 얼굴인 때문이다.
오늘 수도에서 온 전령이라고 신분을 속이고 4서클 마법사들 전부 집결하라는 칙령을 전한 사람은 현수이다.
이미지 컨퓨징 마법을 써서 얼굴을 봐도 좀처럼 생각나지 않게 하고 만났다.
그리고 그때의 얼굴과 지금 얼굴은 다르다.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자신을 기억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파티마는 메모리 일리머네이션 마법으로 기억이 지워진 상태라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모습으로 와도 상관없는 것이다.
“이 친구야? 상대가 정말 중앙에서 내려온 전령 맞아?”
세반의 물음에 칼리드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분명 그렇게 들었어.”
“혹시 사기당한 거 아냐? 전령이라면 이곳 총책임자이신 라쉬드 님에게 말을 전해야 하는 거잖아.”
세반은 혹시라도 장난이 아닌가 싶은 표정이다.
“그래! 그렇긴 해. 근데 전할 데가 너무 많아서 라쉬드 님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면서 그 말만 하고 갔네.”
“그게 이상하잖아. 이곳 헤르마는 자유영지이고, 4서클 이상 마법사는 모조리 라쉬드 님 휘하에 있잖아. 따라서 라쉬드 님에게 명령문을 전달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하여간 그렇게 말하고 갔어.”
“에이, 그럼 그거 사기일 확률이 높아. 순진한 자네가 사기를 당한 거라고.”
세반의 말에 칼리드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5서클 마법사인 내가 순진하다고?”
“순진한 거 맞네! 자넨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확인도 안 했어, 근데 그가 한 말은 그대로 믿고 있잖나.”
“……!”
순간적으로 논리에서 밀린 칼리드는 잠시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좋아! 내가 사기를 당한 거라고 치세. 수도로 집결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도 유언비어라고 치자고.”
“그래! 유언비어 맞을 거야. 국가가 위기 상황에 처한 것도 아닌데 황제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실 리가 없잖아. 그러니 자네가 잘못 들었거나 유언비어인 것이 확실하네.”
세반은 자신이 논리적으로 승리했다 느꼈는지 우쭐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때 칼리드가 조용히 속삭인다.
“좋아! 그럼, 자넨 수도로 안 갈 거야?”
“당연히 안……. 아! 그건…….”
이번엔 세반이 말을 끊었다.
소집령이 유언비어라고 생각하여 수도에 가지 않았는데 그게 진짜라면 항명죄로 다스려진다. 목이 잘린다.
따라서 유언비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무조건 수도로 가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끄응! 가긴 가야 하는 거네.”
“그래! 그러니 일단 한잔하고 라쉬드 님께 말씀 전하자.”
“그래! 그게 좋겠네. 쩝! 유언비어가 아니었으면 좋겠네.”
“왜? 난 유언비어라도 상관없네. 최소한 맥마흔 구경은 해보고 오는 거니 말이네.”
“그래! 맥마흔. 길바닥에 쭉쭉빵빵한 천하절색들이 즐비하다는 곳이지. 가보세. 가보자고.”
세반의 말이 마쳐졌을 때 골빈탕과 쉰 술이 나왔다.
칼리드는 파티마에게 찝쩍거리는 대신 맥마흔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수도에 가면 파티마 같은 애들 널렸겠지?”
“아마도……! 그러니 임자 있는 파티마는 포기하라고.”
“쩝! 괜히 비싼 거 시켰네. 근데 이거 왜 이래?”
칼리드가 이맛살을 좁힌다. 골빈탕의 뒷맛이 묘한 때문이다. 한 달쯤 짓무른 무를 먹는 것처럼 말캉말캉한 식재료가 있는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어서이다.
“뭐 말인가? 아! 수도의 미녀들? 내가 전에 들은 말이 있는데 수도에서는 바지의 아랫단을 접고 다니면…….”
세반은 어디선가 들은 진짜 유언비어를 유포했다.
맥마흔에선 남자가 바지의 왼쪽 아랫단을 5㎝쯤 접고 다니면 오늘 기꺼운 마음으로 한잔 사겠다는 뜻이다.
어떤 여인이든 원하기만 하면 사줄 테니 신호만 보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물론 그 대가는 뜨거운 밤이다.
맥마흔은 성적(性的)으로 상당히 문란한 도시이다.
정숙한 여인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많다. 그래서 지구로 치면 원 나잇 스탠드가 보편적인 일이다.
그런데 바지를 걷고 다닌다 하여 늘 성사되는 것은 아니다. 마법사를 의미하는 로브를 걸치고 있어야 확률이 높다. 여인들 입장에선 신분 상승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우린 흑마법사잖아. 게다가 5서클이고. 그러니 수도에 가서 바지만 걷고 다니면……. 흐흐흐!”
“흐흐흐흐!”
세반이 음흉한 웃음을 짓자 칼리드 역시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곤 미친 듯이 골빈탕을 퍼 먹는다.
수도에 가서 절세미녀들을 품는다는 상상만으로도 식욕이 동한 것이다.
“흐음! 여긴 이 정도면 되겠군.”
건너편 테이블에 있던 현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때 파티마가 돈까스 비슷한 음식과 라덴주 한 병을 들고 왔다.
탕, 턱―!
“음식 나왔어요. 근데 우리 전에 본 적 없어요?”
“우리가요? 글쎄요? 난 이곳이 처음인데?”
현수는 짐짓 모르는 척했다. 파티마와 엮여서 노닥거릴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소기의 목표가 달성되었으니 식사만 마치면 곧바로 텔레포트하여 다음 장소로 이동할 생각이다.
하여 가져온 음식을 입에 넣고 씹었다. 전과 같은 맛이다.
무슨 고기로 만든 요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린내도 나지 않고, 상당히 괜찮은 맛이다.
우걱, 우걱! 쩝쩝, 쩝쩝! 꿀꺽, 꿀꺽―!
“캬아아!”
12도짜리 라덴주도 여전한 맛이다.
현수가 돈까스 같은 음식의 절반 정도를 먹을 때까지 파티마는 테이블 곁에 서 있었다. 현수를 보면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그게 뭔지 구체적이지 않았던 때문이다.
쩝, 쩝, 쩝쩝―!
꿀꺽, 꿀꺽, 꿀꺽―!
“캬아아!”
파티마가 서 있든 말든 배를 채운 현수는 남아 있던 마지막 한 점을 입에 넣고는 우물거렸다. 잔에 남은 술도 딱 한 번만 더 마시면 비워질 정도이다.
꿀꺽, 꿀꺽, 꿀꺽―!
“캬아아!”
현수는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이곳에서 볼 용무가 없으니 선술집을 나서면 적당한 장소를 찾아 텔레포트할 생각이다.
“잘 먹었소.”
현수는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서려했다.
“저기요. 하인스 님! 하인스 님이시죠?”
파티마의 음성이 조금 컸기에 모두의 시선이 모아진다. 파티마는 모두의 관심을 받기 때문이다.
“하인스님! 하인스 님……! 하인스 님이시잖아요. 그쵸?”
이번엔 현수에게도 시선이 쏠린다.
“뭐야? 저 친구가 파티마의 주인이라는 그 친구야?”
“외출자라며?”
“그럼 룩셔의 고수인 거잖아.”
여기저기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린다.
“파티마의 주인인데 왜 안 데리고 살지?”
“그러게! 나 같으면 하루 종일 끼고 살 텐데.”
“외출자는 대개 고위층 자녀와 결혼하잖아. 파티마가 예쁘긴 해도 겨우 선술집 딸내미니까 관심 밖인 거지.”
“쩝! 부익부 빈익빈이라더니. 우린 파티마 한번 꼬셔보려고 몇 년째 이 집 매상이나 올려주고 있는데 누군 남아돌아서 거들떠도 안 보니……. 세상 참 불공평해. 그치?”
“그러게! 불공평한 거 맞아. 나는 파티마랑 같이 살 수만 있으면 뭐든 다 줄 수 있는데. 누군 저러니. 쩝! 속 쓰리니 술이나 한잔하자고.”
“그래! 잔이나 비우자.”
여기저기서 단숨에 남은 술을 비우는 모습이 보인다. 이때 파티마가 등 돌리는 현수의 옷자락을 잡았다.
“제 주인이시잖아요. 왜 모르는 척해요? 네?”
지난번에 현수가 맥마흔으로 향하고 있는 동안 거수자가 최초로 출현한 이곳 헤르마엔 줄마 공작이 파견되었었다.
소문의 근원을 찾은 끝에 줄마 공작은 파티마를 만났다. 그런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각 마법 때문인 것을 파악한 줄마 공작은 현수가 시전한 메모리 일리머네이션을 캔슬시켰다. 현수가 기억 삭제 마법에 제한을 걸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기억을 되찾은 파티마는 현수에 관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줄마 공작을 따라왔던 자의 노리개가 되었을 것이다.
실컷 가지고 논 뒤엔 목숨을 빼앗을 것이고, 죽은 뒤엔 육편으로 저며져 식탁에 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줄마 공작이 파티마의 모든 기억을 되살려 놓은 건 아니다. 키스를 하지 않는 대신 정보를 달라는 말을 했던 이후의 기억만 복원시켰다.
그런데 지금 파티마는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매직 캔슬이 서서히 작용된 결과이다.
하여 현수와의 만남 이후를 모두 기억한다. 다만 한 가지 흐릿한 것은 현수와 키스를 했는지 여부이다.
내기에 진 후 자신의 처소로 옮겨진 뒤부터 아침까지의 기억은 끊겨 있다.
그때 너무 취해서 인사불성이었던 때문이다.
2장 키스 안 했어요?
그날 이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파티마는 하인스와 키스를 했다. 자신이 평생토록 수발들고, 믿고 따라야 할 남자가 확실하게 결정된 것이다.
남들도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파티마 본인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인스 님! 저는요,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길 수 없어요. 그러니 절 데려가 주세요.”
느닷없는 말에 현수는 벙 찐 표정이 되었다.
‘헐!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내가 왜……?’
현수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파티마는 털썩 무릎을 꿇는다. 그리곤 현수가 신고 있는 군화에 입을 맞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