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9
그간 등산화를 신고 다녔는데 아무래도 디자인이 문제될 것 같아 황학동에 갔을 때 몇 켤레 산 걸 신은 것이다.
“평생 수발을 들며 주인님의 뜻을 따르겠어요. 부디 버리지 마시고 거두어 주셔요.”
“아가씨! 대체 왜…….”
현수의 말을 중간에 끊겼다. 처연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던 파티마와 시선이 마주친 때문이다. 물기를 머금은 눈은 영롱한 빛을 반사시키고 있어 신비로웠다.
“제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모두 지배해 주셔요. 저는 이미 당신의 것!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마인트 대륙에선 키스한 사내로부터 버림을 받은 여인을 ‘와이퍼(Wiper)’라 부른다.
와이퍼는 영어로 ‘닦개’ 또는 ‘걸레’라는 뜻이다. 이곳 마인트 대륙어로는 ‘모두가 주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와이퍼는 누가 자신을 원하든 그에 응해야 하는 것이 관습이다. 다만 키스는 제외이다.
이렇기에 도도하고, 콧대 높기로 이름났던 헤르마 최고의 절세미녀가 이처럼 무릎까지 꿇은 채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현수가 거둬주지 않으면 뿔난 양의 엉덩이를 드나드는 거의 모든 사내의 노리개가 될 것이 뻔하다. 거의 모두 파티마를 노리던 사내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행복한 삶과는 영원히 아듀이다.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치마끈을 풀어야 하는 삶이 어찌 행복하겠는가!
“아가씨!”
“파티마 이브라힘이에요.”
“그래요, 파티마! 내가 왜 그대를…….”
“저와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눠요.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모두의 시선이 쏠려 있다. 파티마의 운명이 결정될 상황인 때문이다.
아름다운 여인이 무릎까지 꿇고 애원하는 모습을 모두가 보는 건 자존심 문제이다. 그렇기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안내해요.”
“네! 이쪽으로…….”
파티마는 자신의 방으로 현수를 안내했다.
둘러보니 전과 다를 바 없다. 지푸라기를 깔아놓고 두툼한 천으로 덮어놓은 침상과 의복 등을 넣어둘 상자 두 개, 그리고 다용도로 쓸 테이블 하나가 전부이다.
벽에는 의복을 걸 수 있는 못 몇 개가 박혀 있다.
방의 크기는 여섯 평 남짓하다. 전체적으로 허름하지만 정돈은 잘되어 있다.
“아, 앉으세요.”
현수가 침대에 걸터앉자 파티마는 다시 무릎을 꿇는다. 말리려 했지만 보는 눈도 없어 내버려 두었다.
“하인스 님이 저를 거둬주시지 않으면…….”
잠시 파티마의 말이 이어졌다. 그중 마인트 대륙의 관습에 관한 것도 있었다.
키스를 하면 여인에 대한 지배권이 생긴다는 것과 버림받으면 ‘와이퍼’가 된다는 이야길 듣고는 정말 이상한 동네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미개한 아프리카 대륙에도 없는 관습인 때문이다.
“흐흑! 그러니 제발…….”
파티마는 눈물 작전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현수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흑마법사들의 씨를 말리러 온 거지 여인을 거두러 온 게 아닌 때문이다.
파티마는 분명 발리우드((Bollywood) : 인도 뭄바이의 영화 산업을 일컫는 용어. 인도 뭄바이의 옛 지명 봄베이(Bombay)와 할리우드(Hollywood)를 합성해 만든 용어.)의 여신이라 불리는 디피카 파두콘과 흡사한 외모와 몸매를 가진 절세미녀이다.
꽤 안목이 높은 사내라 할지라도 침을 질질 흘리며 꽁무니를 쫓아다닐 정도이다. 하지만 현수는 결코 웬만한 안목의 소유자가 아니다.
절세미녀 중의 절세미녀라 할 수 있는 카이로시아, 로잘린, 스테이시, 케이트, 그리고 다프네를 아내로 맞이할 사람이다. 따라서 안목이 무지하게 높다.
그렇기에 파티마 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거둬달라고 읍소를 해도 표정에 변화가 없는 것이다.
“파티마! 지금 뭔가를 착각하는 것 같아.”
“네? 그게 무슨…….”
“파티마와 술내기를 해서 내가 이긴 것은 맞아. 지면 키스하기로 했던 것도 맞고.”
“네, 알아요.”
“근데 나는 파티마와 키스를 한 적이 없어. 그러니까 파티마는 나한테 이러지 않아도 돼.”
“그게 무슨……? 동생인 야흐야가 하인스 님께서 저를 안아 제 방까지 데리고 갔다고……. 그러면서 저랑 키스를 하신다고 했잖아요.”
파티마의 말은 사실이다. 누나가 술내기를 지자 야흐야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현수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눴다.
“혀엉―! 정말 우리 누나랑 키스할 거예요?”
“그럼! 해야지. 누나 방은 어디냐?”
“뒤채 이 층 가운데 방이에요!”
파티마가 언급한 것은 바로 이 대화이다.
“그것도 맞아! 그런데 키스는 안 했어. 생각해 봐. 파티마는 나랑 대작하다가 먼저 취해서 왕창 토했어. 그치?”
“네, 그렇다고 들었어요.”
“파티마 같으면 토한 입에다 키스하고 싶겠어?”
“그럼……?”
파티마가 정말이냐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 키스 안 했어. 그러니까 이럴 필요가 없는 거지.”
“저, 정말인가요? 정말 저랑 키스 안 하셨어요? 내기에서 졌는데. 나중에라도 하자고 그럴 거 아니에요?”
“혹시 기억나는지 모르겠는데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어.”
“뭐라고요?”
현수는 당시 나눴던 대화를 그대로 재현해 냈다.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야. 오늘 처음 여길 왔어. 그러니 이곳에 대해 설명해 줄 사람이 필요해. 파티마가 그래 줬으면 좋겠는데 어때? 말해줄 수 있어? 아님 키스를 하고.”
현수는 잠시 말을 끊었다. 파티마가 기억해 낼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함이다. 하지만 시간은 짧았다.
“생각나지? 그때 파티마는 바로 이 방에서 내게 이곳 마인트 대륙에 관한 이야기들을 해줬어.”
“…그,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럼 정말 안 하신 거예요?”
“그래! 키스 안 했어. 그러니까 나더러 데리고 살아달라고 말할 필요 없는 거야. 알았지?”
“……!”
파티마는 현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늙든 젊든 사내란 사내들은 모두 자신을 어쩌지 못해 안달을 낸다.
그런데 현수는 너무도 초연하다.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전혀 욕정의 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런 남자는 만나본 적이 없다. 어찌 흥미가 돋지 않겠는가!
“그냥 키스해 주시면 안 되나요?”
“뭐라고?”
“아! 내기에서 졌으니까……. 아, 아니에요. 말실수예요.”
파티마는 얼른 고개를 흔든다. 본인조차 가늠하기 힘든 여심 때문에 입이 제멋대로 움직인 때문이다.
“그래! 그럼 이제 가도 되지?”
“어디로 가시는데요?”
그냥 무의식적으로 물은 말이다.
“여길 뜨면 누라하 영지와 카이젠 영지 등을 거친 뒤 맥마흔으로 갈 예정이야.”
실제로 이동할 동선이지만 현수 역시 무의식적으로 답변한 것이다.
“배를 타고 가실 건가요?”
“아니! 산을 넘어야지.”
“네에? 산이 너무 높고 험해서 길도 없는데요?”
“그래도 가는 수가 있어. 자! 이제 난 갈게. 잘 있어.”
“……!”
파티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현수만 바라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밖으로 나온 현수는 헤르마 외곽으로 향했다.
라쉬드가 있으니 가까운 곳에서 텔레포트를 하면 또 귀찮은 일이 빚어질 것 같아서이다.
* * *
“흐음! 어디가 적당할까?”
누라하 영지로 텔레포트한 현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 ‘발정난 고양이의 콧구멍’이란 이름의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훔친 밀 포대에 핀 한 송이 꽃’이라는 괴상한 이름의 선술집 주인 자하라가 본인의 얼굴을 알기 때문이다.
삐이꺽―!
“와글와글, 와글와글, 와글와글……!”
문을 열자마자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난다. 다들 얼큰하게 취해 있어 큰 소리로 떠드는 때문이다.
“어서 오슈! 뭘 드실 거유?”
자하라만큼 뚱뚱한 여인이 퉁명스런 표정으로 주문하라고 한다.
“라덴주 한 병, 그리고 적당한 안주 하나 주세요.”
“3실버 50쿠퍼네요.”
“싸네요.”
헤르마에선 술 한 병과 안주 한 접시에 4실버 30쿠퍼였다. 한화로 환산하면 4만 3,000원이다. 그런데 이곳은 3만 5,000원이라니 18.6%나 싸서 저도 모르게 한 말이다.
“싸요?”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싸다는 말을 처음 들어본 듯하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돌린다.
“저쪽 망할 년이 하는 가게보다 싸다는 거죠?”
“네? 망할 년이라니요?”
“자하라 말이에요. 뚱땡이 자하라! 나이도 어린 게 싸가지가 밥맛인 년이요.”
여인은 갑작스레 몹시 흥분한 듯한 표정이다.
“아! 훔친 밀 포대에 핀 한 송이 꽃이요?”
“한 송이 꽃은 무슨……! 한 덩이 똥이죠. 그리고 그년이 밀 포대를 훔친 년이라오.”
“네? 그게 무슨……!”
“그년은 소싯적에 우리 가게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점원이었는데 밀 한 포대를 훔쳐 가지고 그걸 불리고 불려서 저 가게를…….”
몹시 흥분한 듯 빠른 속도로 지껄이는데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다. 주어가 없을 때도 있고, 목적어나 보어 없이 두루뭉술한 표현을 하는 등 횡설수설한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하라와 이 집 여주인은 앙숙 관계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추론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집 사내와 자하라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사내가 두 집 살림을 하면서 일은 여자들에게 시키고 본인은 놀고먹으며 노름판을 전전한다. 현수가 이런 결론을 내고 있을 때 웬 사내의 음성이 들린다.
“엘마! 또 수다야?”
“어떤 개자식이 감히……! 아, 자기예요? 수다 떠는 거 아니에요. 주문 받는 중이에요. 라덴주와 안주라 하셨죠?”
“네? 아, 그럼요. 라덴주와 안주 맞아요. 자, 여기요.”
현수가 3실버 50쿠퍼를 내밀자 엘마라 불린 여인은 얼른 받아 챙긴 후 사내에게 쪼르르 다가간다.
“호호! 자기 왔어요? 오늘은 여기서 잘 거죠?”
“너 하는 거 봐서. 그나저나 돈 좀 있지?”
“어머! 또 다 잃으신 거예요? 잠깐만 기다려요.”
엘마는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돈을 한 움큼 꺼내든다. 사내는 들고 있던 자루를 연다. 이런 상황이 아주 익숙한 듯하다.
“근데 겨우 이것뿐이야? 장사가 잘 안 돼?”
“네! 요즘 장사가 잘 안 되네요. 저쪽에 있는 머시기 때문에……. 근데 이거 좀 적죠?”
“그야 당연히 적지. 이거 가지곤 두어 판밖에 못 해. 쩝! 할 수 없군, 자하라에게 가면 좀 있으려나?”
사내가 돌아서려 하자 여인은 얼른 팔뚝을 부여잡는다.
“자, 자기! 그러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봐요. 내가 안에 들어가서 꿍쳐 둔 거 꺼내 올게요. 근데 그거 자기 몸에 좋은 보약 지어 먹이려고 모은 건데.”
“보약은 무슨! 난 그런 거 없어도 되는 거 몰라?”
사내가 퉁명스레 대꾸하자 엘마가 뚱뚱한 몸을 배배 튼다. 나름 교태를 부리는 것이다. 슬쩍 바라보니 사내 역시 뚱뚱하다. 처먹고 놀기만 하니 살이 쪘을 것이다.
얼굴도 잘생겼다 할 수 없다. 그런데 여자 둘이 죽고 못 사는 듯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밤일은 잘하는 모양이네.’
엘마가 후다닥 내실로 들어가자 사내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런 상황을 짐작이라도 한 듯싶다.
슬쩍 창밖을 보니 자하라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씩씩거리고 있다. 보아하니 저쪽 먼저 뜯고 온 모양이다.
‘저 사내가 뭐가 좋다고……. 나야 알 바 아니지. 근데 뭐 한다고 했지?’
술집만큼 말이 빨리 번지는 곳이 도박판이다. 노름을 하면서 지껄이는 말이니 나중엔 누구 입에서 나온 건지 파악하는 것조차 힘들다. 다들 돈 따는 것에만 눈이 벌건 때문이다.
엘마가 꾸물거리는 동안 사내는 주점을 쓱 훑어본다.
그러다 현수와 시선이 마주쳤다. 현수는 짐짓 순진한 표정으로 라덴주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 노름판에서 호구가 될 인물로 낙점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