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4
“흐으음!”
현수는 또 한 번 긴 침음을 냈다.
싸미라 등은 아무런 죄도 없는 여인들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말이 있지만 본인 때문에 애꿎은 목숨을 잃는다면 두고두고 후회될 것 같다.
그런데 구해내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으니 생각이 길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렀다.
“저어, 마탑주님!”
“흠, 왜 그러는가?”
“매일 오후 4시와 밤 12시에 임무 교대가 있습니다.”
“여덟 시간씩 3조 로테이션이군.”
“네! 9서클 한 명, 8서클 두 명, 그리고 7서클이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교대 근무를 합니다. 임무 교대를 하기 직전에 인수인계 작업을 하는데 그때를 노리면 어떨까요?”
“인수인계가 되는 동안은 2개 근무조가 있는데?”
현수의 말처럼 인수인계를 할 때엔 인원이 많다.
“인수인계는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진행됩니다. 그때는 인계조와 인수조 모두가 한곳에 집결하지요.”
“그러니까 놈들이 한곳에 모여 있을 때 몰래 빼돌리자는 말인가?”
라트보라 남작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근데 문제는 인수인계 장소가 공작부인들의 처소 바로 앞이라는 겁니다. 널찍하게 탁 트인 장소이지요. 그래서 말인데 터널을 몇 개 더 팔까요?”
라트보라 남작은 지시만 내리면 즉시 결행할 준비가 된 듯한 표정이다.
10장 맛없는 생선요리
“흐음! 그곳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겠는가?”
“네! 잠시만요.”
잠시 자리를 비웠던 라트보라 남작은 둘둘 말린 파피루스 비슷한 것을 가져왔다. 그리곤 즉시 그것을 펼쳤다.
그리곤 제법 묵직한 문진((文鎭) : 책장이나 종이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눌러두는 물건. 서진(書鎭)이라고도 함.)으로 그것을 고정시켰다.
“호오……!”
현수는 제법 상세한 도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황태자가 하사한 정복자의 길에 있는 핫산 브리프 공작가는 가로 400m, 세로 700m짜리 부지에 건립되어 있다.
평수로 환산하면 약 85,000평이다.
저택은 도면의 치수를 감안해 보면 1층 바닥 면적만 약 3,000평이나 되는 엄청난 대저택이다.
‘┌┐’형태로 지어져 있는데 저택의 전면엔 화려한 조각이 있는 분수와 정원 등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 앞쪽엔 마구간 등이 있고, 그보다 더 앞쪽엔 공작가의 가신들이 머무는 저택들이 줄지어 있다. 그리고 지하엔 마법 수련을 위한 시설이 갖춰져 있다.
1층은 업무 공간과 도서실, 접견실 등이 있고, 2층은 공작과 그 가족들을 위한 주방, 창고 등이 있다.
공작의 침실은 3층이고, 좌우엔 처와 첩들이 머무는 공간이다. 4층은 공작가의 가솔들이 머물도록 되어 있다.
도면을 자세히 살펴보니 라트보라 남작이 파놓은 터널도 표기되어 있다. 이걸 따라가면 저택의 앞쪽 마구간에 당도하게 된다.
고위 마법사들이 직접 경계근무를 하는 곳이기에 안전을 위해 저택에서 약간 떨어진 곳을 목표로 한 듯싶다.
“여기서 저택까지 거리가 100m쯤 되는가?”
“네! 더 가까이 가면 발각될 우려가 있어서 거기까지밖에 못 팠습니다.”
말들은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아도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렇기에 마구간 아래를 택한 것은 잘한 일인 듯싶다.
“그래, 그렇겠지.”
10서클 마스터인 자신도 다가가면 발각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라트보라 남작으로선 이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현수는 도면을 머릿속에 넣었다.
어떤 경로로 저택에 들어갈지 계획을 세우기 위함이다. 문제는 싸미라 등이 놀랐을 때이다.
놀라서 소리라도 치면 즉각 근위대가 들이닥칠 것이니 미리 연통을 해놓아야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마땅치 않다.
하여 현수는 다시 상념에 잠겼다. 이때 라트보라 남작은 현수가 침투 경로를 생각한다 여기고 도면에 손을 얹었다.
오른손은 비밀통로가 있는 마구간을 짚었지만 왼손은 공작가 외곽의 커다란 연못 그림 위에 얹혀져 있다.
이 순간 현수의 머릿속을 섬전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묘수가 있었다.
‘어장검! 그래, 그거야!’
어장검(魚腸劍)은 명공 구야자가 만든 것으로 살수 ‘전제’가 오나라의 왕 ‘요’를 살해하기 위해 생선 속에 감췄던 검이다.
“남작! 수도에서도 생선요리를 즐기나?”
“그럼요! 포탈 마법진과 보존 마법 덕분에 바다에서 갓 잡은 것처럼 싱싱한 생선들을 먹습니다.”
“그래? 종류는 다양하고?”
“네! 상당히 많은 종류를 먹습니다.”
“그럼, 그중에서 가장 맛없는 생선은 뭔가?”
라트보라 남작은 느닷없는 생선 이야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물으면 대답해 줘야 한다.
“페시돈이라는 생선입죠. 생선살이 너무 조밀하여 간이 배지 않습니다. 식감도 퍽퍽한 데다 비린내가 심해서 개도 안 먹는다는 겁니다.”
“흐음! 페시돈이라. 얼마만 한가?”
“40∼60㎝ 정도 됩니다.”
“그래? 그런 거 몇 마리만 구해오게. 싱싱한 놈으로.”
“…네! 알겠습니다.”
라트보라 남작이 페시돈을 구하기 위해 나간 사이에 현수는 저택 도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흐음! 여기서 인수인계 작업을 한다는 거지? 근데 왜 하필 여기야? 골치 아프군.”
싸미라 등의 처소로 접근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곳에서 교대 작업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놈들을 소리 없이 제거해도 문제겠지?”
소리 없이 제거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매일 일지를 작성하여 제국 특수첩보대에 보낸다고 하니 경계근무 중이던 자들이 사라지면 단박에 알아차리게 된다.
그럼 금방 시끄러워진다.
핫산 브리프는 제국의 근간을 뒤흔들고도 남을 인물이기에 최우선 경계 및 조사대상인 때문이다.
따라서 근무조를 제압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흐음! 어장검까지는 좋은데 다음은 어쩌지?”
현수는 연신 턱밑을 쓰다듬었다. 깊은 상념에 잠겼을 때의 무의식적인 습관이다. 그러면서도 도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다.
현수의 동공이 살짝 커진다.
“으음, 이건……!”
현수의 눈에 뜨인 것은 터널이 뚫려 있는 마구간 뒤쪽 인근으로부터 저택의 뒷문 인근까지 흐르는 개울이다.
수심도 표시되어 있는데 깊이 205㎝이다.
‘이 정도면… 근데 내 최대 호흡 길이가 얼마나 되지?’
현수는 다시 도면을 확인했다.
‘충분히 가능하겠어. 근데 옷 젖는 건 싫은데. 제기랄!’
속으로 투덜거린 현수는 아공간에 담긴 물안경과 숨대롱, 그리고 오리발을 확인했다. 산소탱크도 있나 살피려다 말았다. 왠지 오버인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뱀이나 이런 것 없겠지.’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괜히 신경 쓰였다.
“다녀왔습니다, 마탑주님!”
“아! 그래? 페시돈은?”
“여기요.”
“그래요, 어디 보세.”
라트보라 남작이 구해온 페시돈이란 생선을 살펴본 현수는 작은 칼을 꺼내 생선을 갈라보았다.
말한 대로 조직이 상당히 빡빡한 생선이다. 어렵게 살을 발라보니 단단한 뼈가 드러난다.
‘흐음! 잘못 먹다 가시가 목에 걸리면 세상과 아듀하겠군.’
현수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라트보라 남작은 기다리다 지친 듯 입을 연다.
“페시돈 조리법은 구이와 찜 두 가지입니다.”
“회(膾)로는 안 먹나?”
“네? 회가 뭡니까?”
“회가 뭔지 몰라? 아! 그럴 수도 있겠군.”
고개를 끄덕인 현수는 다시 생선을 살폈다.
“이걸 찜으로 조리한 뒤 공작가 문 앞에 가져다 놓도록! 가급적 맛이 없게 조리해야 하네.”
“이걸요?”
라트보라 남작은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핫산 브리프 공작가의 외부에는 경계 근무를 서는 병력들이 상당히 많이 배치되어 있다.
외부의 침입을 막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내부에서 외부로 나가려는 사람들을 제지하는 한편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배치된 기사와 병사들이다.
둘레가 제법 되기에 배치된 병력은 무려 2,500명이나 된다. 무려 1개 연대 병력이다. 따라서 생선을 요리해서 가져다 놓으면 당장 감시 대상이 된다.
라트보라 남작은 반 로렌카 전선이 수도에 심어놓은 핵심 인물이다. 누군가의 조사를 받거나 추적을 당하는 것은 극도로 피해야 한다. 그런데 벌어진 악어 아가리 안에 머리를 들이밀라는 말에 대경실색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에도 현수는 전혀 긴장하지 않은 표정이다.
“그래! 가져다 놓을 때 쪽지 하나 끼워 넣게.”
“쪽지요? 뭐라고 적습니까?”
“‘이거 먹다 목에 가시나 걸려라’라고 쓰게.”
“네에?”
라트보라 남작이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자네가 가라는 게 아니네. 적당한 사람 시켜서 공작가 정문 앞에 가져다 놓으라는 말일세. 그런 쪽지를 남겨야 안까지 가지 않겠나?”
“참! 마탑주님, 생선에 쪽지 같은 걸 넣으면 바로 발각될 겁니다. 아무리 목에 가시나 걸리라는 쪽지를 넣어도요.”
“그렇겠지. 알겠네. 참고하겠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트보라 남작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려는지 알 수 없어서이다.
“그럼 바로 조리하면 되겠습니까?”
“아! 잠깐. 내가 잠시 생선을 손볼 테니 주방에 기별을 하게. 바로 보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라트보라 남작이 물러난 후 현수는 잠시 생선을 주물럭거렸다. 손에서 비린내가 심하게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라트보라 남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밖으로 물러났다. 그의 곁엔 주방에서 페시돈을 직접 조리한 벙어리 줄리가 쟁반을 들고 있다. 귀족가에서나 쓸법한 고급스럽고 깔끔한 접시가 올려진 쟁반이다.
줄리는 뭔가 지시를 받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꾸벅 고개를 숙이곤 밖으로 나갔다.
“어쩌면 오늘 저녁 식탁에 오를지 모르겠습니다. 놈들은 그러고도 남을 테니까요.”
현수의 손에 죽은 마법사들의 가문에선 핫산 브리프 공작가를 사갈((蛇蝎) : 뱀과 전갈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서 남을 해치거나 심한 혐오감을 주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시 한다.
하여 심심치 않게 여러 가지를 보냈다.
죽은 뱀이나 쥐의 사체를 보내는 경우도 많았고, 먹기만 하면 3초 내로 목숨을 잃을 정도로 강력한 독이 담긴 음식을 보내기도 했다. 심지어 잘린 머리를 방부 처리하여 보낸 경우도 많았다.
페시돈은 아무리 조리를 잘해도 맛없는 생선이다. 게다가 퍽퍽한데다 질기기까지 하다.
누가 봐도 조롱의 의미가 담긴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핫산 브리프 공작가에 배달될 페시돈 요리는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안에서 경계 근무를 하는 황실 근위대원들은 결코 손대지 않을 것이다. 기름진 산해진미를 놔두고 그걸 입에 댈 이유가 없는 때문이다.
물론 다른 검사는 할 것이다.
독이 든 음식을 안에 들였다가 싸미라 등 공작부인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근위대원 전부가 목이 잘릴 일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외부로부터의 쪽지나 암호가 있는지 여부도 확실하게 조사할 것이다.
그게 주된 임무인 때문이다.
어쨌거나 화살은 쐈다. 그게 표적에 명중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성공하면 좋지만 실패해도 할 수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승패에 관계없는 결행뿐이다.
현수는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그러는 내내 도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가상 침투 연습을 반복한 것이다.
‘물이 너무 차갑지 않았으면 좋겠네.’
이미 한서불침을 이룬 몸인지라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라도 상관없다. 그럼에도 혹시라도 불상사가 있을까 싶어 괜스레 중얼거린 말이다.
현수가 도면을 보고 있을 때 핫산 브리프 공작가의 근무조장 한센은 킬킬거리고 있다. 9서클 대마법사이고, 나이도 많지만 경박한 성품인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