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8
‘빌어먹을 놈들! 저것들을 정말……!’
자신도 모르게 살짝 살기를 뿜었다. 그런데 이를 느꼈는지 일제히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런 제기랄!’
존재가 발각되었음을 깨달은 현수는 나직이 투덜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검은 잠수복 슈트 차림에 물안경을 쓰고, 숨대롱을 입에 문 상태이다.
“허억! 모, 몬스터!”
“흐익! 놀래라. 뭐, 뭐야?”
깜짝 놀란 조장들이 저도 모르게 물러섰다. 생전 처음 보는 수중몬스터의 기괴한 모습 때문에 본능이 시킨 일이다.
수로에서 튀어나온 현수는 검은색 오리발을 신고 있다.
다들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뜬다. 이 순간 현수의 입술이 나직이 실룩거린다.
“매스 스터리지!”
“허억―!”
“으앗!”
“블링크!”
셋 중 둘이 현수의 아공간 속으로 빨려들었지만 나머지 하나는 황급히 거리를 벌린다. 그리곤 목에 걸고 있던 호각을 입에 문다. 비상 상황임을 알리려는 것이다.
어찌 그냥 놔두겠는가!
“블링크! 매스 스터리지.”
재빨라 거리를 좁힌 후 아공간에 담으려 했는데 메뚜기처럼 뛰어가며 또다시 거리를 벌린다.
휘이이이익―!
“이런 빌어먹을! 파워 워드 킬!”
“앱솔루트 배리어! 크으윽! 텔레포트!”
9서클 절대 마법 중 하나가 구현되자 재빨리 방어 마법을 펼친다. 하나 마나의 차이 때문에 내상을 입었는지 한 줄기 선혈을 뿜어낸다.
부상 치료를 위한 리커버리 마법을 썼다면 재차 파워 워드 킬을 구현시키련만 놈은 영악하게도 몸부터 뺀다.
“이런 빌어먹을!”
현수가 나직이 투덜거릴 때 저택으로부터 달려오는 무리들이 있다. 아침조, 대낮조, 그리고 야간조 전원이다.
마법사들이 우르르 달려드는 모습을 본 현수는 모두를 제압하려다 말았다.
아공간에 담겨 있는 싸미라 등이 염려된 때문이다.
“끄응! 텔레포트!”
현수 역시 이동 마법을 써 자리를 비웠다.
“아앗, 대규모 마나 유동이다. 저기야 저기!”
근위대원들이 달려왔을 때에는 모두가 사라진 뒤이다. 이들이 주변을 뒤지려는 찰나 저택 앞 누군가가 소리친다.
“아앗! 2조장님! 2조장님! 정신 차리세요.”
“모두 저쪽으로!”
또 우르르 달려간 근위대원들은 앞섶을 선혈로 흥건히 적신 2조장을 보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다.
누가 있어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9서클 마법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심상치 않은 상태인 때문이다.
“노, 놈이 왔어.”
2조장의 미약한 음성에 다들 귀를 기울인다.
“네? 누가 왔다고요? 2조장님! 조장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이런, 리커버리!”
샤르르르릉―!
마나가 체내로 스며들자 스르르 눈을 감던 2조장의 눈에서 다시 생기가 비친다.
“2조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으으! 놈이 왔나 봐.”
“놈이라뇨?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 핫산 브리프!”
“네에?”
모두가 놀라며 한 발짝씩 물러난다.
핫산 브리프는 로렌카 제국의 마법사들에게 있어 무자비한 사신(死神)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이다.
포위된 상태에서도 9서클 마스터 수십 명을 한꺼번에 아공간에 담아 질식사시켰다. 라이프 베슬을 파괴하기 전엔 결코 없앨 수 없는 최고위급 리치들도 제압했다.
이것만으로도 놀랍다. 그런데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100명이 넘는 9서클 마스터와 200명이 넘는 8서클 마법사의 공격 속에서도 홀연히 사라진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퍼부었던 마법을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다.
막대한 마나가 소요되는 라이트닝 퍼니쉬먼트를 숨 쉴 틈 없이 쏟아내어 제국의 마법사들을 위기에 몰아넣었었다.
핫산 브리프 공작이 사라진 후 제국의 마법사들은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결이 5분만 더 이어졌다면 전부 마나고갈 현상이 빚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패자는 제국의 마법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제국의 마법사들은 핫산 브리프를 ‘셀란토스(Selantos)’라 부른다. 마인트 대륙인들의 죽음을 관장하는 사신의 이름이다.
“2조장님! 방금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하, 핫산 브리프라 말씀하신 겁니까?”
“그, 그래! 세, 셀란토스 핫산 브리프! 으으! 푸아아!”
선혈을 분수처럼 뿜어내는 걸 보니 조금 전의 리커버리로 치료가 안 된 모양이다.
“리, 리커버리!”
다시 마법이 구현되자 2조장의 눈빛이 다시 맑아진다.
“2조장님! 분명 셀란토스라 하셨습니까?”
“1조장과 3조장은 놈은 아공간에… 푸아앗!”
또다시 선혈을 뿜는데 무언가 섞여 있다. 조각난 위와 창자인 듯싶다. 이를 본 마법사들은 나직한 침음을 낸다.
“으으, 이런……!”
이런 부상은 리커버리 마법으로 회복시킬 수 없다.
리커버리는 신체의 문제 있는 부위를 원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지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이 아닌 때문이다.
얼른 배를 째고 치유할 부위에 컴플리트 힐 마법을 반복한다면 가능성이 있다. 하나 이곳은 부술(剖術)이 발달하지 않은 곳이다.
“으으으! 으으으으……! 놈은 괴물이었어. 절대 대항하지 마라. 우리의 전력으론……. 으으! ……!”
“2조장님! 정신 차리세요.”
“조장님! 정신 차려요. 이렇게 가시면 안 됩니다.”
얼른 다가가 2조장을 흔들었지만 대답이 없다. 과도한 출혈로 인해 사망한 것이다.
“어서! 어서 황궁에 보고하러 가자.”
“네! 알겠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모두들 놀란 기러기처럼 황궁을 향해 쏘아져 간다. 2조장의 말대로 핫산 브리프가 이곳에 있다면 살아 있어도 산 목숨이 아니므로 얼른 따라간 것이다.
한편, 황궁으로부터 약 30㎞ 정도 떨어진 곳으로 텔레포트한 현수는 서둘러 라이트 마법으로 주위를 밝힌 후 컨테이너부터 꺼냈다.
그런데 눈에 거슬리는 것이 뜨인다.
조금 전에 아공간에 담았던 1조장과 3조장이 컨테이너에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9서클 대마법사라 할지라도 호흡을 하지 못하는 죽는다.
그런데 숨을 쉬고 싶어도 아공간엔 공기가 없다. 그렇기에 신선한 외부 공기를 접하자마자 입부터 벌린다.
“흐아암―!”
“허어업―!”
허파 가득 신선한 산소를 흡입하던 조장들의 귀에 현수의 나직한 음성이 들린다.
“파워 워드 킬! 파워 워드 킬!”
“커흑―!”
“크으윽―!”
쿵, 쿵―!
부지불식간에 시전된 궁극 마법은 둘의 목숨을 단숨에 끊었다. 시신이 나뒹굴자 현수는 얼른 아공간에 담았다.
여인들이 보기에 좋은 모습이 아닌 때문이다.
끼이익―!
컨테이너의 문이 열리고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싸미라 등이 튀어나온다.
“다들 괜찮은 거지? 싸미라! 괜찮아?”
“네에! 전 괜찮아요. 그런데 아만다가……!”
아만다 프러페 반 도델은 아르센 대륙 북쪽에 위치한 도델 왕국의 공주이다. 왕궁에 머무는 동안엔 어둡고 폐쇄된 공간 속에 있어본 적 없이 살았다.
그런데 이곳 마인트 대륙으로 납치되어 올 때 그런 상황에 처했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 사내들의 노리개가 된다는 말을 들었기에 어둡고, 좁은 곳에 갇혀 있는 동안 심리적 충격으로 암소공포증과 폐소공포증이 생겼다.
그래서인지 얼굴은 창백하고,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는 아만다에게 다가간 현수는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만다! 이제 괜찮아. 여긴 안전한 곳이야.”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휴우우!”
아만다는 가쁜 숨을 조절하려 애쓰더니 이내 긴 한숨을 몰아쉰다.
“이제 괜찮은 거지?”
“……!”
아만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시선을 들어 현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현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상태가 나아졌는지 확인하느라 아만다의 별빛 같은 눈빛을 스친 것이다.
한편, 아만다는 자신을 선택해 준 이 위대한 인간의 모습을 뇌리에 새기고 있다. 전에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먼발치에서 보았거나, 옆에서 본 것이 대부분이다.
정면에서 볼 수도 있었지만 그때는 부끄럽거나, 당혹스러워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피했었다.
따라서 지금 보는 것이 최초라 해도 무방하다.
핫산 브리프 공작가에 기거하는 동안 싸미라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있었고, 근위대원들의 대화도 많이 들었다.
세상에 누가 있어 136명의 9서클 마스터에게 둘러싸인 채 공격을 받아보았겠는가! 이때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것은 8서클 마법사 300여 명이다.
이 밖에 9명의 리치도 있었다.
어쨌거나 대결이 있던 그날, 현수는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증발한 것으로 소문이 났었다.
분노한 9서클 마스터 100명과 8서클 300명의 공격이 한 몸에 부어졌으니 이런 소문이 날 만하다.
그리고 이를 믿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라이트닝 계열 마법으로 정신을 잃게 한 후 윈드커터 계열로 살은 물론이고 내장과 뼈까지 완전하게 토막 낸 다음 헬 파이어 같은 마법이 중첩되어 구현되었다면 가능한 일이다. 이건 현수가 사라진 뒤 시신이 증발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죄수 중 하나를 세워놓고 했던 실험을 통해 증명된 일이다.
그날 현장에 있던 마법사들의 능력이라면 충분하고도 남는 일이니 믿는 이가 많은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싸미라는 그 말을 단 한 번도 믿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인 핫산 브리프는 분명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며 반드시 자신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되돌아올 것이라 힘주어 강변했다.
아만다 등은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싸미라는 어렸을 때 만났던 현자 이야기를 했다.
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 정처 없는 발길로 마인트 대륙을 유람하고 있다는 이름 모를 현자는 어린 싸미라를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주 예쁜 아가씨구만! 어디 보자. 어디 보자.”
마치 사이비 점쟁이처럼 싸미라의 얼굴과 손금 등을 살핀 현자는 말을 이었다.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오르겠어. 허어! 어쩜 이렇게 좋을 수가……! 성장하는 동안 곤궁함을 겪을 것이나 장성해서는 귀인을 만나 하늘 끝까지 오를 관상이네.”
“어머! 정말요? 그럼 제가 황태자비가 되는 건가요?”
당시에도 늙은 황제는 어전회의에 참석치 않았다. 젊은 모습을 한 황태자가 황제를 대신하여 국사를 논하곤 했다.
황태자에겐 정비와 차비가 있으며, 일곱 명의 비와 열여섯 명의 후궁이 있었다. 이 밖에도 황태자의 승은((承恩) : 신하가 임금에게서 특별한 은혜를 받거나 여자가 임금의 사랑을 받아 잠자리를 같이하는 일.)만 기다리는 여인들이 기백이나 줄 서 있다 하였다.
어린 시절의 싸미라는 자신이 황태자비가 되면 몰락한 가문이 다시 일어설 것이며, 만조백관들의 하례를 받는 위치에 오르는 것으로 알았다.
현자는 철없던 싸미라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아무튼 아가씨는 아주 귀한 여인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야. 그때 너그럽지 못하면 버림을 받을 것이니 늘 착하게 살아야 한다.”
“네에! 현자 할아버지. 그럴게요.”
어린 시절인지라 싸미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요, 현자 할아버지, 전 오래 사나요?”
“왜에? 일찍 죽을까 봐 겁이 나나?”
“네! 죽는 건 너무 무서워요. 그래서 오래오래 살고 싶은데 저는 몇 살까지 사나 봐주세요?”
“글쎄? 어디 보자, 어디 보자……. 어이쿠! 아주 오래오래 살겠는데?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겠어.”
“어머, 정말요? 히히, 신나라! 아빠, 저 오래 산대요. 벽에 똥칠할 때까지요. 근데 벽에 똥을 칠하면 냄새나지 않나요? 제가 왜 벽에 똥칠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