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5
“수고가 많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스타이발 내무대신과 스멀던 외무대신, 그리고 가가린 군부대신과 하일라 궁내 시녀장은 안에 있나?”
“네! 네 분 모두 입궁해 있습니다. 전하!”
“그런가? 알았네.”
현수가 없는 동안 왕국의 대소사는 이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결정되고 있다. 의견 조율은 정부청사라 할 수 있는 바실리에서 행해진다.
하일라는 인간이 아닌 엘프이다. 그럼에도 이런 회합에 참석하는 이유는 여성 특유의 세심함이 있기 때문이다. 사내들이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집어주는 역할을 맡는다.
“추웅! 국왕 전하를 알현하옵니다.”
“추우웅―! 그, 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바실리의 입구엔 두 병의 위병이 있었다. 그런데 걸치고 있는 의복이 눈에 익다.
홍(紅), 황(黃), 흑(黑), 백(白), 청(靑)색이 조화된 눈에 뜨이는 복장이다.
머리 위엔 검은 모자를 쓰고 있는데 황색과 적색 수실로 장식되어 있다.
허리에는 바스타드 소드가 달려 있고, 등에는 화살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신고 있는 신발은 가죽으로 만든 검은색 부츠이다.
이런 복색은 하루에 두 번 실시되는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에서 볼 수 있다.
‘끄응! 너무 많은 참고를 했군.’
한옥단지 조성을 위해 덕수궁 등 고궁을 찍은 사진을 참고자료로 줬는데 그중 수문장 교대식 장면을 보고 위병들에게 이런 복장을 갖추게 한 것이다.
‘뭐 나쁘진 않군.’
헐렁한 튜닉보다는 몸에 맞춰진 한복이 훨씬 더 보기에 좋다. 고개를 끄덕인 현수는 천천히 걸어 바실리 내부로 들어섰다.
건물의 외관도 예술적이지만 내부 역시 화려했다. 벽과 기둥, 그리고 천정까지 장식되어 있다.
더 이상 손 볼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특히 벽마다 장식되어 있는 부조 등은 그냥 예술이다.
누구든 천재적인 솜씨라는 찬사가 저절로 쏟아져 나올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굳이 비교하자면 마인트 대륙에서 만났던 말라크의 그것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이다.
현수가 생각하기에 멸망한 화티카 왕국의 후손인 말라크는 이 분야 최고의 예술성을 지닌 천재이다.
굳이 지구인에 비교를 하자면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급이다. 그런데 바실리의 벽에도 그에 못지않은 예술품들이 채워져 있다.
천정에도 멋진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이실리프 마탑의 근본인 아드리안 멀린 드 나이젤의 일대기를 상상하여 그려놓은 것이다.
그중엔 미쳐 버린 드래곤을 사냥하는 것도 있다. 하늘에선 운석들이 떨어지고, 땅에선 용암이 솟구치고 있다.
색깔이 잘 입혀져 사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사서에 이실리프 왕국의 개국시조로 기록될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의 활약상도 멋진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알베제 마을에서 맹수 중의 맹수인 샤벨 타이거를 복종시키는 장면도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현수가 보기엔 약간 과장된 듯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사실에 근거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본인이 주인공이라 남 보기에 남세스런 것을 빼면 아주 흡족한 예술품인 때문이다.
복도 입구에 있던 위병들은 현수를 보자마자 할버드를 바로 세우며 큰 소리로 외친다.
“추웅 서엉!”
“추웅 서엉! 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복도 입구에서 터져 나온 구호를 들었는지 스타이발 내무대신 등이 우르르 달려 나온다.
“신, 스타이발! 위대하신 전하를 알현하옵니다.”
“신, 스멀던! 위대하신 존체를 뵈옵니다.”
“숲의 일족 하일라 토틀레아가 세계수 잎의 주인이신 전하를 흠모의 마음으로 알현하옵니다.”
모두가 한 무릎을 꿇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난 충성심이 느껴진다.
“모두 일어서라.”
“추웅! 전하의 명을 받자옵니다.”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매일 보는 얼굴이 아니라 그런지 안위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현수의 위아래를 훑어본다.
“나는 괜찮다. 회의 중이었는가?”
“네! 전하, 이실리프 왕국의 개국을 준비하는 회의를 했사옵니다.”
“아! 그런가? 얼마나 진행되었는가?”
“대륙의 모든 마법사를 통해 왕국과 제국, 그리고 공국에 이실리프 왕국이 개국됨을 알렸사옵니다.”
본시 테리안 왕국의 후작이었던 외무대신 스멀던의 보고에 카이엔 제국의 영광의 마탑주이자 후작이었던 내무대신 스타이발이 말을 잇는다.
“대륙의 7대 마탑 마법사들 전부가 동원된 일이옵니다.”
“그런가?”
“네! 마탑주들뿐만 아니라 토틀레아 일족의 장로들이 총동원되어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하는 중이옵니다.”
인간과 엘프의 협력 작업이 진행되었음을 보고하는 말이다.
현수는 하일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잡음은 없었나?”
“네, 전하! 왕국 선포에 관한한 저희 토틀레아 일족은 만사를 제쳐 두고 무조건 협력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사옵니다. 하여 일체의 잡음 없이 진행되고 있사옵니다.”
하일라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스타이발이 다시 말을 받는다.
“라이세뮤리안 님의 자제들이신 라수스 마을의 드래고니안분들도 협조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고마운 일이군.”
말은 이렇게 했지만 드래고니안의 협조는 현수가 드래곤 로드와 라세안에게 한 말이 있어서이다.
“하면 개국 선포는 언제가 좋겠는가?”
“그게 아직 결정되지 않은 일이 있사옵고, 조금 복잡한 문제도 있어서 저희가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가? 무엇이 결정되지 않은 것이지?”
“첫째는 전하의 의중이십니다. 언제가 좋을지 하명하지 않으셔서 저희 마음대로 날짜를 잡을 수 없었사옵니다.”
“그런가? 그럼, 아드리안 공국에서 왕국으로 선포하는 일이 마쳐진 이후로 날짜를 잡게.”
“네! 전하의 명대로 하겠사옵니다.”
“좋아, 조금 복잡한 문제라는 건 뭐지?”
“지금껏 이실리프 군도의 대소사를 결정해 온 초대 총리 하리먼이 사의를 표한 것이옵니다.”
“하리먼이 사의를 표해?”
무슨 뜻이냐는 말에 스타이발은 송구하다는 표정이다.
“네! 저희 때문인 듯하옵니다.”
“자네들 때문에?”
스타이발 후작을 바라보는 현수의 눈에는 의혹이 빛이 가득하다. 전혀 짐작되지 않은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하리먼은 5서클 마법사이옵니다.”
“으음! 무슨 말인지 알겠네.”
스타이발은 7서클이고 하리먼은 5서클이다. 마법사들의 세상에선 하늘과 땅만큼 어마어마한 차이이다.
스타이발이 내무대신을 맡았고, 하리먼은 총리대신을 맡았다. 명칭은 다르지만 하는 일은 거의 같다.
마법수정구을 이용하여 스타이발과 하리먼은 자주 통신을 했고, 때에 따라선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오가기도 했다.
하리먼은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 사의를 표한 것이 분명하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하리먼은 그간 애를 많이 썼고, 일도 잘 처리했습니다.”
스타이발은 잠시 말을 끊는다. 차마 뒷말을 잇고 싶지 않아서이다. 하나 현수가 바라보고 있으니 다시 입을 연다.
“전하께선 두 개의 이실리프 왕국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 된 왕국을 바라십니까?”
머리 좋은 현수는 단숨에 저의를 파악했다.
“하나 된 왕국이 다스리기 편하겠지. 백성들도 그게 좋을 것이고.”
“하리먼을 내무차관에 임명해 주십시오. 제가 잘 가르쳐서 제 후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세.”
현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자 스타이발은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쉰다. 현수가 본인의 뜻을 곡해하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전하! 이실리프 군도의 군부대신을 맡고 있는 로드젠 역시 사의를 표했사옵니다.”
“…그래, 그도 가납하지. 로드젠 역시 군부차관에 임명하겠네. 그럼 되겠는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현수의 시선을 받은 가가린이 황급히 허리를 숙인다.
“잘 가르치게. 하리먼이나 로드젠 모두 고생이 심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충분히 배려해 주고.”
“물론입니다. 전하! 저희가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차기 대신이 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사옵니다.”
“하일라! 저쪽의 궁내 시녀장 라이사는 괜찮은 거지?”
“그럼요! 거기에도 궁이 다르니 시녀장은 당연히 별도로 있어야겠지요.”
하일라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시녀장이 하는 일은 궁내의 시녀들을 총괄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식재료, 생활용품 등의 출납도 관장한다.
왕비 자리가 결정되면 왕의 밤일이 끝날 때까지 곁을 지키는 일도 한다. 하루라도 빨리 국본을 생산케 하고, 더 많은 왕자들이 태어나게 하는 것도 시녀장의 일이다.
이곳에서는 자신이 알아서 하겠지만 이실리프 군도에선 라이사가 알아서 할 일이다. 생각보다 일이 많은 자리인 때문이다. 그렇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럼 왕국 선포에 관한 이야기 좀 해보자고.”
“네, 전하! 안으로 드시지요.”
현수를 비롯한 일행은 잘 꾸며진 회의실 안에서 제법 오랜 시간 동안 회의를 거듭했다. 그러는 동안 마법수정구를 통한 통신으로 여럿과 대화를 나누었다.
* * *
“친애하는 내빈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를 빛내주기 위하여 먼 곳으로부터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신 귀빈 여러분!”
단상에 오른 현수가 말을 시작하자 일제히 시선을 모은다. 대륙 전체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사람의 발언인 때문이다.
“아르센력 2859년 9월 21일인 오늘, 아드리안 공국과 카이엔 제국 사이의 인연의 사슬을 풀려고 합니다.”
말을 마친 현수는 카이엔 제국의 황제에게 시선을 준다.
“카이엔 제국의 황제이신 알렉산드리아 폰 카이엔 님께 여쭙겠습니다. 아드리안 공국에 대한 지배권을 놓아주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현수의 시선을 받은 제국의 황제는 고개를 끄덕인다.
“기꺼운 마음으로 아드리안 공국에 대한 영향력을 거둬들임을 대륙의 모든 황제와 국왕 앞에서 선포하는 바입니다.”
황제의 대꾸가 끝나자 현수는 다시 만장한 내외 귀빈들을 둘러본 후 입을 연다.
“이제 아드리안 공국은 왕국이 되었습니다. 이실리프 마탑의 제2대 마탑주인 나는 아드리안 왕국이 주권을 가진 하나의 국가인 것을 인정하는 바입니다.”
현수는 다시 말을 끊고 단상 아래를 바라본다.
내빈석 맨 앞줄엔 4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데 현재 모두 비어 있는 상태이다.
두 번째 줄엔 오늘의 주인공이 앉아 있다.
아드리안 왕국의 국왕 아민 멘데스 폰 아드리안과 그의 왕비들, 그리고 왕자와 공주들이다.
날이 날인 만큼 한껏 성장한 모습니다.
이들의 좌우엔 아드리안 왕국에서 문(文)의 최고봉인 로레알 파드린느 폰 아젤란 공작 부부와 무(武)의 중심인 필립스 아인테스 반 크리엘 공작부부가 배석해 있다.
바로 뒤엔 왕국의 귀족들이 앉아 있다.
공후백자남작의 순서로 부부 동반이다.
이들의 뒤에는 어른 허리 높이쯤 되는 화려한 꽃이 피어 있는 화단이 조성되어 있다.
내빈석과 귀빈석을 가르는 일종의 경계이다.
귀빈석의 맨 앞줄엔 아르센 대륙의 세 제국인 카이엔 제국, 라이셔 제국, 그리고 크로완 제국의 황제와 황후들이 무리 지어 앉아 있다.
세 제국들 사이 사이엔 가이아 여신을 섬기는 교황과 성녀 스테이시 아르웬 및 다른 신을 모시는 교황과 성녀들이 끼어 앉아 있다.
카이엔 제국이 나머지 두 제국과 전쟁 중인 상태라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들의 뒤쪽엔 미판테나 테리안 같은 왕국들의 국왕과 왕비들이 함께하고 있다. 이들 역시 예복 차림이다.
다음은 대륙 7대 마탑의 마탑주와 부탑주의 좌석이다.
이들 바로 뒤엔 또 하나의 화단이 조성되어 있다. 귀빈도 등급이 있음을 표시해 주는 일종의 경계이다.
이 화단 바로 다음엔 제국의 황자와 황녀들이 있고, 각 교단의 추기경급 사제들이 그 사이에 끼어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