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7
1장 마인트 원정대
“이만하면 준비는 다 된 건가? 좀 적지 않을까?”
라세안의 시선은 헤츨링을 제외한 대륙의 모든 드래곤에게 향해 있다. 이들은 현재 옹기종기 모여서 로드인 옥시온케리안으로부터 주의 사항을 듣고 있는 중이다.
현재 말하고 있는 내용은 마인트 대륙에 갔다 오는 동안 절대 개별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인트 대륙의 모든 드래곤이 흑마법사들에 의해 사냥당했으며 드래곤 하트가 적출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겁을 주려는 의도인지라 뻥도 섞여 있는데 그중 하나는 죽은 드래곤의 사체를 흑마법사들이 요리해 먹는 내용이다.
뒷다리는 굽고, 앞다리는 찌며, 날개와 꼬리는 삶고, 눈알은 튀겨낸다. 몸통 부분을 가장 먼저 먹는데 죽기 직전이라면 가죽을 벗겨 낸 뒤 예리한 칼로 회를 친다고 했다.
수컷 드래곤의 경우는 성기를 잘라다 독한 술에 담가두었다가 흐물흐물해질 정도가 되면 꺼내서 얇은 육편으로 만들어 술과 함께 먹으면 정력이 왕성해져서 흑마법사들이 특히 좋아하는 안주라는 이야기를 했다.
암컷 드래곤은 그런가 하는 표정이지만 수컷들을 일제히 자신의 성기를 내려다보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때문이다.
암컷들은 애기집이라 할 수 있는 자궁을 적출하여 칼집을 낸 뒤 그 자리에서 바로 숯불에 구워먹는다는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당연히 노기 어린 눈빛이다.
이 자리엔 아르센 대륙의 모든 드래곤이 집합해 있는 상태이다. 물론 헤츨링은 제외이다.
옥시온케리안이 로드의 권능으로 대륙의 모든 드래곤을 소집했고, 대지의 여신이 나서서 거들어준 결과이다. 이는 지난 수천 년간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다.
로드의 권능에 의한 소집은 대륙이 존폐의 위기에 처했을 때만 발휘되는 것이며, 대지의 여신은 드래곤들의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어쨌거나 지금까지는 드래곤의 개체수가 약 70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물론 헤츨링을 제외한 숫자이다.
그런데 소집 결과는 이보다 훨씬 많은 214개체이다.
물론, 로드와 라세안을 포함한 숫자이다.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레어 안에서 마나로의 회귀를 기다리며 은둔하고 있던 드래곤들에게도 가이아 여신의 신탁이 내려진 결과이다.
이들의 뒤에는 드래고니안들이 무리지어 있다.
7서클 유저 이상인 마법사와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이상만 추렸는데도 그 숫자가 상당하다.
드래곤이 많으니 그들의 자식들 또한 많은 것이 당연한 일이다. 파악해 보니 7서클 이상이 311명이고, 거의 소드 마스터 급인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이상은 519명이나 된다.
이들의 뒤쪽에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쭈뼛거리며 무리지어 있는 인간들이 있다.
드래곤과 드래고니안들의 기(氣)에 눌려서 이런다.
이들 인간 중에 마법사는 없다.
7서클 유저 이상인 마법사가 없어서가 아니다.
로만 커크랜드의 뒤를 이어 나머지 6대 마탑주 전원도 8서클을 이루었다. 당연히 현수의 도움을 얻은 결과이다.
이들은 현재 늘어난 서클에 적응하는 중이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 이 자리에 빠져 있다.
그리고 각각의 마탑은 현재 밀려드는 자유 마법사들을 받아들이는 일로 정신이 없다.
아르센 대륙의 7대 마탑은 최근 명칭이 모두 바뀌었다.
영광의 마탑, 혈운의 마탑 같은 기존의 명칭 대신 이실리프 마탑 아드리안 분원, 이실리프 마탑 카이엔 분원, 이실리프 마탑 라이셔 분원 등으로 개칭되었다.
이실리프 마탑이 대륙의 모든 마탑 위에 우뚝 선 것이다. 이전엔 마탑 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시기와 알력이 있었는데 현수 덕분에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모두가 동료인 셈이라 마법사들 사이의 분쟁이나 암투가 사라진 것이다.
어쨌거나 대륙의 마탑들은 몹시 바쁘다. 그래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드래곤과 드래고니안 뒤쪽에서 쭈뼛거리고 있는 인간들 전부는 소드 마스터이다.
현수의 요청에 따라 아르센 대륙의 제국과 왕국들이 파견했는데 총인원 34명이다. 소드 마스터 유저 이상만 모였다.
이로써 마인트 대륙의 흑마법사들을 정벌하기 위해 떠나는 총인원은 1,080명이다.
현수와 현수의 곁에 서 있는 가이아 여신의 성녀 스테이시 아르웬을 포함한 숫자이다. 훗날 ‘마인트 원정대’라 불릴 이들은 지금 출발 직전인 상태이다.
현수를 제외하곤 마인트 대륙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기에 주의 사항을 들으려 모여 있는 것이다.
라세안은 마인트 대륙에 9서클 마스터만 100여 명이고, 8서클도 300명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심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이나 드래고니안 중에 9서클 마스터급이나 소드 마스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때문이다.
인간이라도 9서클 마스터에 이르면 일대일로 드래곤과 대결할 능력을 가진다. 경우에 따라 드래곤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현수의 스승인 멀린이 그 예이다.
그런데 저쪽엔 드래곤을 사냥해 본 9서클 마스터가 즐비하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우려 섞인 표정인 것이다.
자신이 사냥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때문이다.
이런 라세안의 내심을 읽은 현수는 피식 웃음 짓는다.
“라세안! 괜찮을 거야. 자네들은 외곽에서 도주하는 무리들만 처리하는 역할이니까 나만 믿게.”
“정말 그래도 될까? 그래도 우리 숫자가 너무 적잖아.”
4서클 이상이 최소 30만 이상일 것이라 들었다.
토끼가 아무리 많아도 호랑이 한 마리를 상대하지 못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토끼보다 덩치가 작은 쥐로 바꾸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971년에 발표되었고, 2003년에 리메이크된 윌러드(Willard)라는 공포영화가 있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음모를 꾸며 회사를 빼앗은 악덕 사장 밑에서 종업원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윌러드가 굶주린 쥐 떼를 이용하여 복수하는 내용이다.
이 영화의 말미엔 쥐 떼에 의해 산 채로 뜯어 먹히는 악덕 사장의 모습이 보인다. 인간의 덩치가 훨씬 크지만 쥐 떼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해 비명을 지르다 뼈만 남는다.
현수의 말처럼 마인트 대륙에 4서클 이상인 마법사가 30만 명 이상이라면 9서클 마스터급 드래곤이 30명이나 있어도 상대하는 것이 여의치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힘 또는 마나가 소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 가면 우리를 보조해 줄 인간들이 있을 것이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맞붙는 게 아니니까 여차하면 몸을 빼게.”
“…드래곤 체면이 있지 어찌 도망치라는 말을 하나?”
“세(勢)가 불리하면 훗날을 기억하고 후퇴하는 것이 병법의 하나이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말도 모르나?”
“병법(兵法)?”
“그래! 내 고향 어스 대륙엔 전쟁이 많아서 병법이 발달했지. 그중 제법 이름난 전략가가 만든 병법이 있는데 그것의 맨 마지막 방법이 뭔지 아나?”
“그걸 내가 어찌 알겠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36개의 계책 중 마지막은 주위상(走爲上)이라는 것이네.”
“주위상? 무슨 뜻이지?”
“간단히 표현하자면 불리하면 도망치라는 것이네.”
“뭐어? 도망을 쳐? 전쟁을 하다 말고?”
라세안은 그게 정말 유명한 전략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냐는 표정이다.
“그렇네. 살아 있어야 복수도 할 수 있지. 질 것이 뻔함에도 달려드는 건 만용이라 하네. 불리하면 일단 몸을 뺐다가 다시 기회를 보아 반격하라는 의미의 말이네.”
“아! 그런…….”
라세안은 이해되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난 이번 원정에서 친구인 자네를 잃고 싶지 않네.”
“……!”
라세안은 말을 계속해 보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만일 위급한 지경에 이르거든 그 즉시 도주하게.”
“이보게, 친구! 그래도 드래곤 체면이라는 게 있네.”
어찌 도망을 치겠느냐는 뜻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은 이어지고 있다.
“그곳에 도착하면 포위망을 구축하게 될 것이네. 이번 원정대의 숫자는 1,080명이고, 포위망의 길이는 270㎞ 정도 되네. 원정대를 골고루 분산시킬 경우 250m마다 하나씩씩 배치되겠지.”
로렌카 황성에 대한 이야기와 포위망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들은 바 있기에 라세안은 고개를 끄덕인다.
“자네의 좌우엔 로드와 제니스케리안이 배치되도록 되어 있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드래곤 3인방이지. 그중에서도 자네가 제일 중요하여 좌우에 그들을 배치한 것이네.”
“고맙네. 친구! 그리 생각해 줘서.”
라세안은 진심을 담은 눈길로 현수를 바라본다.
골드 드래곤인 옥시온케리안과 제니스케리안은 드래곤 전력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한다.
만일 라세안이 위기에 처한다면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베풀 정도로 친밀해진 상태이다. 물론 현수 덕분이다.
“로드와 제니스, 그리고 자네의 힘으로도 감당이 안 되면 그때는 지체하지 말고 알파 포인트로 자리를 옮기게. 그곳도 안전치 못하면 베타 포인트로 가고. 무슨 뜻인지 알지?”
현수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두었다.
하여 알파, 베타, 감마, 델타, 그리고 오메가 포인트를 정했다. 위험이 닥쳤을 때 안전하게 피해 있을 수 있는 곳이라 생각되는 곳들의 좌표이다.
알파 포인트도 안전치 못하면 베타 포인트로 이동하고, 그곳도 아니라면 감마, 델타의 순으로 이동하라고 했다.
마지막 오메가 포인트는 마인트 대륙 유일의 자유 영지인 헤르마 외곽에 자리 잡은 퍼시발 산맥의 깊은 곳이다.
정상까지 높이가 무려 10,000m나 되며 산과 산이 중첩되어 있는 이곳은 그랜드 마스터인 현수도 며칠이나 걸려서 넘어갔던 곳이다.
이곳에 1,080개의 초장거리 텔레포트 마법 감응진을 그려놓을 생각이다.
이것들은 시한부이며, 단방향이고, 일회용 마법진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마법진이 파훼되며, 한 번 사용하면 다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의 특징은 각자에게 배분된 스크롤을 찢기만 하면 마법진이 구동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좌표로 이동했는지 알아낼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만일을 위한 조치이다.
스크롤만으로도 충분히 초장거리 마법을 구현시킬 수 있음에도 감응진을 준비한 것은 이유가 있다.
원정대원 중 누군가가 9서클 마스터인 흑마법사에게 제압당할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때 찢기만 하면 곧바로 아르센 대륙으로 갈 수 있는 스크롤을 소지하고 있다면 어떤 일이 빚어지겠는가?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감응진 근처에 있지 않으면 마법이 구현되지 않는 스크롤을 준비한 것이다.
“그나저나 10서클 마법을 창안했나? 자네 혼자서 그 많은 것들을 정말 상대할 수 있는 건가?”
드래곤 로드도 같은 의문을 표했다. 원정대가 가기는 하지만 흑마법사들을 직접 상대하는 것은 아니다.
외곽에 포진해 있다 도주하는 놈들만 잡아내기만 한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다.
“그렇네. 얼마 전에 전무후무할 마법을 창안했지.”
현수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자 라세안이 정색한다.
“그런가? 어떤 종류의 마법인가? 대상 마법이 아닌 범위 마법이겠지? 물 속성인가? 아니면 불 속성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번개? 바람? 뭔가?”
현수는 머릿속으로 뭔가를 떠올려 보며 대꾸한다.
“흐음, 물은 아니고 불과 번개, 그리고 바람이 망라된 것이라고 해야 할 거야.”
“세상에 그렇게 다(多) 속성인 마법도 있나?”
“그러니까 10서클 마법이지.”
현수의 태연한 대꾸에 라세안은 잠시 갸웃거린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전에 없던 것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듣는 사람도 한 번도 못 본 것을 떠올리는 건 어렵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떠나야지?”
“그래야지. 그런데 로드의 말씀이 좀 기네.”
“끄응! 하여간 골드 일족은…….”
벌써 세 시간째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으니 교장 훈시보다도 더하다. 그래서인지 라세안은 질린다는 표정이다.
“그곳에 가면 자네 좌우에 있을 존재가 바로 골드 일족이네. 그만 투덜거리고 가서 말리기나 하게.”
“알았네, 알았어!”
라세안은 어슬렁거리며 연설 중인 옥시온케리안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중대한 말을 전하는 것처럼 귓속말로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