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9
“자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아는데 그건 내게 맡기면 되네. 내가 알아서 감당하면 될 일이니까.”
“폐하! 그래도 혼자서 어찌……!”
“방금 전에 말했듯 내가 알아서 하네. 자네와 반로렌카 전선은 포위망만 구축하고 있으면 되네. 알겠는가?”
“…네, 알기는 알았지만… 그래도…….”
뭔가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이지만 현수는 이를 무시했다.
“자네는 지금 즉시 반로렌카 전선에게 연락하여 포위망이나 구축하게.”
“알겠습니다. 폐하!”
요슈프는 고개를 숙여 알았다는 뜻을 표했지만 불안하다는 표정이다. 지름길을 놔두고 일부러 돌아간다는 느낌이 든 때문이다.
“반드시 전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뭐라고 했는지 잊지는 않았겠지?”
“그럼요! 맥마흔 외성으로부터 최소 20㎞는 떨어진 곳에 포위망을 구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꼭 전하게.”
“알겠습니다.”
요슈프와 작별을 고한 현수는 헤럴드를 만나 같은 지시를 내렸다. 헤럴드 역시 지원군의 정체를 알고는 대경실색했다.
아울러 현수 혼자 제국군을 상대하겠다는 것에 큰 우려를 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테라카 요새를 를 떠나 맥마흔에 입성했다.
* * *
조만간 치러질 황위 계승식 때문에 바쁜 시간을 보내던 황태자 슐레이만 로렌카는 황궁 시종장이 건네는 흰 봉투를 받아 들며 묻는다.
봉투의 겉에는 ‘황태자 친전(親展)’이라 쓰여 있다. 참고로, 친전이란 본인만 개봉하라는 뜻이다.
“이건 뭐지?”
“하, 핫산 브리프 공작이 보낸 저, 전서입니다.”
“누구……? 핫산 브리프?”
황태자의 음성이 확연하게 올라간다. 그러자 양위식 준비 문제를 토의하던 공작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린다.
“네! 핫산 브리프 공작이 보낸 것 맞습니다. 봉투의 뒤쪽을 보시면…….”
시종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태자는 봉투의 뒷면을 보고 있다. 거기엔 아래와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귀하로부터 공작위를 받은 핫산 브리프 보냄.
전혀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
“으음!”
황태자는 치솟는 분노를 애써 억눌렀다. 내용이 중요한 때문이다.
급한 마음에 밀랍으로 봉인된 부분을 손톱으로 긁어내려다 멈춘다. 밀랍 위에 찍힌 직인 때문이다.
마법사의 전유물인 로브에 스태프와 검이 교차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는 이실리프 마탑의 문장이다.
‘이건 어느 귀족가의 문장이지? 한 번도 못 본 건데.’
로렌카 제국 이전에도 귀족 중 이런 문장을 사용하는 가문은 없었다. 그렇기에 황태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황태자는 밀랍을 손톱으로 긁어내고 봉투를 개봉했다.
안에 있던 것은 아이보리 색이 살짝 섞인 백지에 황금빛 용(龍)이 도드라진 연하장이다. 이 연하장은 백두마트를 털 때 딸려온 것이다.
“이건 뭐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괴생물체를 형상화해 낸 그림을 보곤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곤 연하장을 펼쳐 보았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 통 보 서 ≫
로렌카 제국의 황태자 슐레이만 로렌카 보아라!
그대가 핫산 브리프로 알고 있는 나는 바다 건너 아르센 대륙의 모든 백마법사의 수장이다.
작고하신 스승님의 뜻에 따라 간악한 흑마법사들을 처단하고자 이 통보서를 보낸다.
로렌카 제국의 건국기념일인 10월 10일, 나는 그날 세상의 모든 백마법사를 대표하여 황제와 황태자를 비롯한 모든 공작과 후작 등의 목숨을 취할 것이다.
비겁하게 도주하거나 숨지 않을 것이라 믿겠다.
-이실리프 마탑 제2대 마탑주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
“이, 이런……!”
슐레이만 로렌카는 분에 겨워 바들바들 떤다. 160년 가까이 살아오는 동안 이런 모욕은 처음인 때문이다.
“힐만 공작!”
황태자의 최측근인 힐만 공작이 얼른 고개를 숙인다.
“네, 전하!”
“이실리프 마탑을 아는가?”
“이실리프라 하면……. 아! 아르센 대륙 제일의 마탑입니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마탑으로 초대 탑주는 아드리안 멀린…….”
힐만 공작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핫산 브리프가 그 마탑의 마탑주라 한다. 백마법사의 수장으로서 황제 폐하와 나를 시해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네에? 어디서 감히 그런 불경한…….”
힐만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을 때 황태자는 손에 쥐고 있던 연하장을 건넨다.
“이건……!”
길고 복잡한 내용이 아닌지라 힐만은 불과 몇 초 만에 내용 파악을 끝냈다.
“이, 이런 예의도 모르는……!”
“힐만 공작! 폐하의 경호에 만전을 기하라.”
“네! 전하!”
힐만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인다. 측근에 머문 지 오래되었기에 척하면 척이다.
“타 대륙 정벌을 위해 준비한 것들까지 모조리 동원한다. 이번엔 놈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
“무슨 뜻인지 알았습니다. 전하!”
힐만이 재차 허리를 꺾는다.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공작 및 후작들은 대체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때 힐만 공작이 그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핫산 브리프가 불경스럽게도 건국기념일에 공격을 하겠다는 통보를 해왔소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놈은 10서클 마법사요. 따라서 이 순간부터 최상급 비상령을 발동하라는 전하의 어명이 떨어졌소이다.”
“최상급 비상령을……?”
누군가의 반문에 힐만 공작은 고개를 끄덕인다. 이때 뒤쪽의 황태자가 입을 연다.
“모든 공작과 후작은 이 순간부터 황실 경호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시오.”
“네! 전하.”
모두의 허리가 꺾인다. 잠시 후 힐만 공작이 주축이 된 비상회의가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서 모든 공, 후, 백, 자, 남작과 그들 휘하의 마법사와 기사들의 배치가 결정되었다.
아울러 스켈레톤과 구울, 그리고 다크 나이트와 본드래곤, 키메라 등이 총출동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황제와 황태자를 중심으로 8서클 이상이 24시간 경호하기로 했다. 1일 2교대이다.
“브리프 공작가의 계집들을 놓친 근위대원들은 전원 효수형에 처한다.”
“존명!”
분노한 황태자의 시선을 받은 귀족들은 부르르 떤다.
평상시엔 엄격한 듯하면서도 일면으론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는 황태자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 아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노화를 터뜨리곤 했다.
지구로 치면 분노조절장애가 있어 누구든 역린을 건드리면 폭발하는 것이다. 황태자가 그토록 총애하던 차비(次妃)가 식재료가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걸 알 수 있는 것은 황태자의 표정이다.
늘 느긋한 표정인데 분노하면 딱딱하게 굳는다. 아울러 형형한 눈빛을 발한다. 지금이 그러하다.
제국의 황권이 도전받았다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모욕으로 느껴진 것이다.
“힐만 공작! 건국기념일이 지나면 대륙을 샅샅이 뒤져 싸미라 등 계집들을 찾아 요리로 대령하라.”
현수와 인연이 있는 것들 모두 먹어버리겠다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힐만 공작이 다시금 허리를 꺾는다. 이러는 동안에도 비상령이 긴급히 전파되어 내려갔다.
9서클 마법사 전원은 황제와 황태자 인근에 배치되었다.
8서클들은 이들보다 약간 외곽에, 7서클은 조금 더 먼 곳에 배치되는 순이다.
대결을 하는 동안 거치적거릴 것 같은 3서클 이하 마법사들과 일반 평민들은 맥마흔 바깥으로 쫓겨났다.
궁에는 황제와 황태자 일가를 위한 시녀 몇과 시종들만 남았는데 그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언데드 병력인 스켈레톤과 좀비, 구울 등은 최외곽에 배치되었는데 그 숫자만 물경 4,000만이 넘는다.
이들보다 안쪽에 배치된 것은 30만에 달하는 와이트(Wight)이다.
다음은 다크 나이트와 데스 나이트들이다. 각각 20만을 상회할 만큼 많은 숫자이다.
이들 대부분은 멸망당한 왕국의 기사였다.
생전에 소드 익스퍼트 상급 이상인 존재들이 상당히 많기에 아주 강한 전력이라 할 수 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흑마법의 산물인 각종 키메라도 배치되었다. 온갖 기괴한 모습을 한 이것들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날개 달린 오우거이다.
체구는 아르센 대륙에 비해 약간 작은 편이지만 흑마법으로 제련된 이것들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다.
지름 20㎝짜리 통나무를 젓가락 부러뜨리듯 하고, 이걸 뽑아서 휘두르기도 한다.
다음으로 많은 것은 샤벨 타이거의 몸통에 히드라의 머리가 달린 괴물이다. 기동성과 공격성을 염두에 둔 키메라이다.
어쨌거나 이것들의 숫자도 약 30만에 이른다.
마법사 전력을 제외한 나머지만으로도 아르센 대륙의 모든 국가를 쓸어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이들의 공격을 받는다면 강력한 힘을 가진 카이엔 제국조차 홍수에 휩쓸린 토용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언데드 병력을 가진 것은 로렌카 제국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죽은 자들의 시신을 수집한 결과이다.
3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수집된 시체 중 어린아이와 젊은 여인들의 사체는 주로 식재료가 되었다.
사내들의 시체 중 절반 이상은 흑마법에 의한 언데드가 되었고, 일부는 사냥한 몬스터들로 만들어놓은 키메라의 식량이 되었다. 시체까지도 알뜰하게 재활용한 것이다.
맥마흔이 긴박한 움직임을 보일 때 현수는 마인트 원정대와 반로렌카 전선의 수뇌들 간의 회합을 주도했다.
이 자리에서 장장 270㎞에 이르는 포위망의 배치가 결정되었다. 해산하자마자 드래곤과 드래고니안, 그리고 아르센 대륙에서 원정 온 소드마스터들은 반로렌카 전선과 힘을 합쳐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이런 움직임을 보일 때 현수는 맥마흔에서 50㎞ 정도 떨어진 외딴 산속에서 자신만의 준비를 하고 있다.
“흐음! 생각보다 쉽지 않네.”
맥마흔을 공격하기 위한 구상을 하던 중 현수가 중얼거린 말이다.
이번 작전에 성공하려면 여러 개의 마법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플라이, 아공간, 라이트 웨이트, 매직 캔슬, 텔레포트 마법 등이다.
현수는 비록 10서클에 해당하는 마법을 하나도 모르지만 10서클 마스터 수준인 것만은 분명하다. 100명이 넘는 9서클 마스터와의 대결이 그것을 증명한다.
트리플 캐스팅을 넘어 쿼드러플 캐스팅까지는 어떻게든 구현시켰는데 그 이상은 좀처럼 되지 않는다.
“끄응! 또 결계를 치고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외부 시간으론 이틀 정도 여유가 있다.
결계 속 시간으론 360일이다. 거의 1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그 안에 머물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여러 번 경험해 봐서 아는 일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번 공격을 성공시키려면 5중첩 혹은 6중첩 마법까지 동원되어야 한다.
“제기랄!”
현수가 나직이 투덜거리자 아리아니가 끼어든다.
“오라버니! 무슨 고민 있어요? 아까부터 뭐라뭐라 투덜거리신 거 아시죠?”
“마법이 마음대로 안 돼서.”
“오라버니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있어요?”
“그래! 내가 신(神)은 아니잖아.”
“뭔데요? 뭔데요?”
두 번 반복해서 묻는 걸 보니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다. 이럴 때 대꾸해 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물을 것이다.
“여러 개의 마법을 한꺼번에 구현시켜야 해. 플라이, 아공간, 라이트 웨이트 등이야. 근데 그게 조금 어렵네.”
“…에? 방금 플라이라고 하셨어요?”
“그래! 내가 하늘에 뜬 채로 뭘 좀 해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다른 마법을 구현시키는 게 쉽지 않아. 참! 아리아니가 날 좀 하늘에 띄워줄 수 있어?”
아리아니의 앙증맞은 날개를 보고 하는 말이다.
“저 하나는 되지만 오라버니까지는…….”
아리아니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잇다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을 짓는다.
“오라버니! 바람의 정령왕 세리프아를 불러볼까요?”
“세리프아? 부르면 가능할까?”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알았어, 어차피 할 말도 있고 하니 4대정령들 다 불러.”
“네에, 잠시만요. #983125;♩#983127;~#983132;#983124;#983124;#983127;~♩♬!”
아리아니가 나직한 휘파람을 불자 기다렸다는 듯 스르르 나타나는 존재들이 있다. 4대정령왕이다.
“엘레이아가 주인님을 뵈어요.”
“마스터! 이프리트입니다.”
“노이아가 마스터께 인사드립니다.”
“주인님! 세리프아가 문안을 여쭈어요.”
정령왕들은 아르센 대륙에 온 것이 너무나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