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40년 인생 넋두리 좀 해보자
안녕하신가. 뇌내 독자 여러분.
갑작스럽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란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어쩌다 뇌내 독자들을 상대로 하소연하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이 이르렀는지 말이다.
우선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아무래도 과거로 환생한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이세계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것을 헷갈리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조만간 설명하겠다. 그 부분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니까.
죽기 전에 나는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아시아 국가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여기는 19세기 영국의 런던이다.
현재는 전생보다 현생이 긴 탓에 서울보다도 고향으로 느껴지는 장소였다.
나는 1855년, 몰락한 남작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전생에 영어를 못한 탓에, 내가 말문을 트게 된 것은 3살 무렵이었는데, 간신히 내 처지에 대해 깨닫자마자 나는 한 가지 인생 목표를 정하게 되었다.
'우선 살고 보자.'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 낭만이 넘치는 벨 에포크 시대라고? 귀족이니까 금수저?
직접 살아보면 알겠지만 완전 웃기는 소리다.
아니, 상상을 좀 해보라.
산업 혁명으로 하층민 인권은 인류사 최저점을 찍었던 시절이고, 팽창하는 제국주의로 세계 곳곳에선 전쟁이 끊이질 않았으며, 풍토병이라도 걸리면 의료고 뭐고 없이 한 방에 훅 가던 시절.
그런 끔찍한 시대에 몰락 귀족의 셋째라고? 21세기에서도 통용되던 말이지만, 귀족이란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나는 우리 집에서 돈 냄새 나는 문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21세기 대한민국 출신이던 나는 성공과 학위를 따로 생각할 수 없어서 필사적으로 공부에 전념했다. 학벌이란 보험이나 마찬가지다. 들고 있으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린 듯한 망나니의 삶을 산 첫째 형과, 어릴 때부터 은행을 다니며 연수하던 둘째 형과 달리 나는 없는 형편에 고집을 부려가며 대학 졸업장을 거머쥐었다. 이전 생의 부모님에게도 그렇지만, 이번 생의 부모님, 그리고 둘째 형에게는 아무리 고개를 숙여도 부족했다. 첫째 형? 그 새끼는 아무래도 좋아.
아무튼, 대학에서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이쁘게 보였는지, 교수님들로부터 유독 사랑받으며 학연을 다진 나는 추천장을 들고 군대에 자원했다. 귀족 사회에서 인맥을 다지려면 장교로 들어가는 게 최고라는 조언을 들은 탓이었다. 대학 졸업하고 군대가는 모습이 익숙해 보인다고? 분명 착각일 것이다.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4년 간의 해군 장교 생활은 내 경력을 확실히 다져주었다. 그리고 의외로, 정말로 의외로 생각보다 적성에도 맞았다. 전투에 참가했다가 왼다리를 날려먹지만 않았으면 말뚝을 박았을지도 몰랐다.
그런 식으로 명예 제대한 나는 1년간 놀고 먹다가 탐험가가 되기로 결정했다.
뜬금없다고? 뭐, 실제로도 그랬다.
"어렵지도 않아. 그냥 2~3년 해외에 나가 있다가 본 걸 그대로 책으로 써서 내면 돼. 요즘은 탐험가가 돈을 버는 법이야. 저 찰스 다윈처럼 말이야."
나는 그 말만 듣고 다음 날, 항구로 나가 무작정 출국일을 결정했다.
그렇다, 나는 무지 귀가 얇았던 것이다.
운이 좋아 장교 시절 인맥으로 나는 마침 암흑 대륙으로 나가는 배에 연구자 자격으로 얻어 탈 수 있게 되었다.
아, 그래, 이 부분이 내 전생의 기억과 다른 부분 중 하나였다. 암흑 대륙이란, 정확히 아프리카를 가리키는 말로 이상할 정도로 개척되지 않아, 산업 혁명이 도래한 현재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장소였다.
여하튼, 그렇게 암흑 대륙과 영국 사이를 4년 정도 왕복하며 지내던 나의 무모한 여정은, 내가 말라리아에 걸리며 끝나게 되었다. 죽었다 생각하고 몇 달 정도 고향집에서 요양하며 지냈더니, 하느님이 보기에도 좀 불쌍했는지 기적적으로 회복하게 되었다.
펜을 잡을 만큼 체력이 회복된 나는 지금까지 배운 학문과 보고 들은 것을 결합해 몇 권의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어쩐지 나는 영국에서 꽤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머리가 나빠 아무리 공부해도 따지 못했던 박사 학위도 모교에서 인정해주며 명예 박사가 되었으며, 군대에서 다리하고 바꿔 먹은 훈장 덕분에 꼬박꼬박 연금도 나오고 있었고, 책의 인세도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들어왔다. 명예 박사를 인정받은 덕에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들어와 부수입도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을 바쁘게 지나니,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된 나는 생각했다.
'이제 인생을 좀 즐기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
나는 이 정도면 진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중간중간 운도 따랐고, 몇 번을 해도 이보다는 더 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임대받아 살고 있던 다락방을 나와, 런던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뭐, 여기까지가 내 일생이다. 이 정도면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충 알았을 거라 생각한다.
1895년, 머지 않아 20세기가 찾아온다. 그리고 나는 그 격동의 시기를 견뎌내기 위해, 모든 준비를 다했고 이제 인생의 안정기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다.
불과 엊그제까지는 말이다.
자, 그러면 지루한 아저씨 넋두리는 여기까지로 하고, 여기부터가 중요한 이야기다.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뇌내 독자들을 향해 주절주절 떠들 수밖에 없는 이유를 포함해서 말이다.
어디서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까.
그래, 모처럼 소설이니, 소설처럼 시작하는 것도 좋겠지.
모든 것은 나의 오랜 친구, 아서에게서 온 편지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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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필레몬에게
안녕하신가, 강녕한가?
물론 그렇겠지. 지난 몇 년간 자네 이름을 들을 때마다 1 파운드씩 모금받았다면, 그 돈으로 썩어가는 저택 지붕을 뜯어내 새로 짓고도 잔돈이 남았을 테니까.
아무튼 나는 멋대로 자네가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겠네. 내가 걱정한다고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니지 않나.
예의가 없는 것은 용서하길 바라네. 자네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무례하지 않게 편지 쓰는 법'따위의 책을 사서 읽었네만, 도통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자네도 내가 편지 쓴 날의 날씨 이야기나, 정원의 상태가 어떠니 하는 이야기에 관심 없으리라 믿고 과감히 생략하겠네.
나로 말하자면 요즘 아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네.
지난 십년간 계속했던 연구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중대한 발견을 했기 때문이지.
덕분에 매일같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네. 아주 행복한 비명을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자네의 화려하고 즐거운 인생에 찬물을 뿌릴 생각은 없네만, 내가 이렇게 편지를 쓴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네가 꼭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그렇다네.
정확히 말하면, 박사 수준의 학식이 있으며, 해외를 두루 돌아본 넓은 견문을 가졌으며, 군인의 강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네.
마침 자네가 딱 적임이 아닌가!
자세한 사항은 편지를 쓰는 시간이 아까워 만나서 이야기 하도록 하지.
저택의 위치는 자네가 아는 그 장소에 그대로 있네. 뭐, 발이 달린 것은 아니니까.
당신의 벗, 아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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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독한 악필로 쓰인 그 편지를 해독하듯이 정성을 기울인 끝에 마지막 문장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글씨체만큼 난잡한 내용에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아서 프랑크.
그와는 대학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나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보다 더한 기인을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냐?
글쎄... 그에 대해 한 문장으로 표현해보자면 이런 식으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이 같은 이기심과, 고양이 같은 호기심, 그리고 끝을 모르는 꿈을 가진 몽상가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더해도 그가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만은 못할 것이다."
상상이 가는가? 아마 잘 되지 않을 것이다.
학생 시절을 그와 함께 보낸 나는 요즘도 종종 그가 내 꿈 속에 등장한 인물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친절히 편지지에 사진 한 장을 동봉해서 보내줬다.
나는 5분 정도 그 흑백 사진이 뭘 나타내는지 이해하려다 포기했다. 무슨 사람이 앉은 모양의 동상 같은데, 사진기가 흔들린 탓에 피사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버튼만 누르면 바로 찍히는 사진기도 있는데...."
나는 중얼거리며 불평했다. 아서는 최신 문물에 약했다. 아직도 몇 분이나 기다리지 않고는 상이 잡히지 않는 구식 카메라를 쓰고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몇 년 사이에 어디든 들고 다니며 바로바로 찍을 수 있는 사진기가 나온 것은 참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의 발전이란 참 대단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스마트폰이 있던 시대에서 온 사람치고는 참 잘도 적응한 셈이었다.
"이래서야 사진을 보내는 의미가 없잖아."
나는 사진을 팔랑거리며 불평했다.
"주인님, 무슨 일이세요?"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집에서 일해주는 가정부 마리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물었다.
"아니, 내 옛 친구가 편지를 보냈는데, 아주 못된 장난을 쳐서 말이야. 볼 수 없는 사진을 찍어 보냈지 뭔가."
"볼 수 없는 편지요?"
"그래, 사진 찍는 솜씨가 아주 엉망이야. 혹시 자네는 이게 뭔지 알아보겠나?"
나는 별 다른 기대없이 사진을 가정부에게 건넸다.
"무슨 사람이 앉아 있는 모양의 동상 같은데."
"사람이요?"
그러자 마리는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이건 전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걸요."
"그럴 리가. 어딜 봐도 사람이야. 팔도 있고, 다리도 있고."
내가 사진을 손가락으로 집으며 말하자 마리는 더욱 알 수 없다는 듯이 눈살을 구겼다.
"제가 주인님보다 똑똑할 리는 없으니...."
"아, 또 시작이군. 그냥 말하게. 나는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똑똑한 사람이 아니고, 설령 그런 사람이라도 뭐든지 아는 건 아니야."
"하지만 알다시피, 주인님은 언제나 제가 말하면 아니라고 말하지 않나요?"
"제발 좀. 뭐가 또 불만인가. 꽁치 파이를 만드려고 한 걸 막은 것 때문이라면 사과하겠지만, 난 그걸 절대 먹진 않을거야."
마리와 나는 잠시 쓰잘데 없는 신경전을 유지했다. 그녀는 내가 굉장히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이미 전생보다 현생이 길 정도로 오래 살았지만, 여전히 내가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은 바로 식사 부분이었으니까. 현대의 온갖 먹거리를 즐기다, 19세기의 투박한 영국식을 먹고 있으니 입이 즐거울 리가 없었다.
"좋아요. 제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머리? 부분 때문이예요."
"머리?"
내 시선이 마리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이게 사람이라면 이건 머리가 되겠죠?"
"그렇지."
"하지만 사람의 머리는 이렇게 크지도, 일그러지지도 않았어요."
나는 잠깐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잠시 후,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21세기에는 다양한 미디어 매체로 여러 형태의 그림을 보게 되며, 데포르메적 기법에 익숙해지곤 한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근대 영국은 그렇지 않았다. 만평이나 캐리커쳐 같은 그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저질 문화로 여겨져 일상적으로 접할 물건은 아니었다.
그런만큼 현대인은 근대인보다 형상을 보고 '인간이다', 라고 생각하는 허용의 폭이 훨씬 넓은 셈이었다.
이 비인간적인 머리를 보고도 팔 다리 같은 게 달렸으니, 인간이다, 라고 확신한 나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걸 만든 사람은 근대, 혹은 그 이전 시대의 사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인간을 묘사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성의 접근이었다.
"확실히 그렇군... 놀라워...."
"주인님이 어쩐 일로 순순히 인정하시는군요."
내 감탄사에 마리가 놀라며 말했다.
이 대화로 말미암아 뇌내 독자 여러분이 오해가 없길 바란다. 나는 사용인에게 아주 친절하고,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는 사람이다.
...아무튼, 그 독백에 기분이 나빠진 나는 마리에게서 사진을 뺏어, 편지 봉투에 다시 집어 넣었다.
"지금부터 외출할거야."
"늦게 들어오시나요?"
"가까운 곳은 아니니 아마 그렇겠지. 어쩌면 자고 올 수도 있어."
"기차를 타시나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마차를 타고 갈거야."
"잘됐군요."
잘됐군요? 무슨 뜻이지? 나는 더욱 기분이 나빠져 외출용 지팡이를 잡고 일어났다. 그런 나를 향해 다가온 마리는 롱코트를 입혀줬다. 나는 코트를 입은 뒤, 그녀가 내미는 모자를 챙겨 머리에 썼다.
나는 마리의 배웅을 받으며 절뚝거리며 현관으로 나왔다. 그리고 문득 생각나 뒤돌아보며 말했다.
"돌아갈 때...."
"문단속은 잘하고, 굴뚝도 확인할게요."
"창문...."
"창문걸이도 걸어놓고, 커튼도 치란 말이죠?"
아주 심통이 난 나는 문을 쾅 닫으며 나갔다.
...다시 말하건데, 나는 사용인에게 아주 친절하고,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는 사람이다.
부디 오해가 없길 바란다.
여하튼... 나는 그 길로 아서 프랑크에게 향했고, 내 인생은 격변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