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4화 (4/232)

§04. 태엽 장치의 신

───뚜벅 뚜벅.

어두운 지하실 계단에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밖에서 보인 것처럼, 통로는 한 사람 간신히 지날 만큼 좁았고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땅을 다지는 것만 족히 수년은 걸렸을 대공사였을 것이다.

가족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고 하니, 얼마나 오래된 유적일지 나는 쉬이 가늠할 수 없었다. 50년? 100년? 벽면의 곰팡이마저 말라 비틀어져 과거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 생각하고 있자니, 뒤에서 아서가 불평을 내뱉었다.

"필로, 겁낼 거 없어, 뛰라고!"

"내 다리를 보고 좀 말하지 그러나?!"

왼쪽 다리를 잃은 이후로 층계는 언제나 내 가장 큰 적이었다. 명목상 의족은 막대에 끼워놓은 나무쪼가리에 불과했고, 성인 남성 평균에 근접한 내 체중조차 온전히 버텨내질 못했다.

원래 살던 다락방을 떠난 것도 삶의 질을 높여보자는 생각도 있었지만, 도무지 이놈의 다리로 계단을 오르내리며 외출할 마음이 들지 않았던 이유도 컸던 것이다.

"대체 아래에는 뭐가 있길래 이렇게 더운 건가?"

나는 벽에 몸을 기대고는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이마를 쓸어냈다. 한 번에 축축해진 손수건을 어디 넣기도 애매해서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뭐일 거 같아?"

불안한 사람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에서는 시종일관 장난스러운 말투로 쿡쿡 찔러대니 미칠 지경이었다. 뭐냐고? 당연히 모르지. 19세기의 나라면 말이다.

21세기의 기준으로 물어본다면, 이건 미스테리도 뭣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난방실이겠지!

나는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보일러!"

사실 이 대답은 여기가 19세기 영국이란 걸 감안하면 넌센스였다. 21세기 현대인이 상상하는 지하 보일러실이 등장하기에는 아직 한참 일렀다. 10년 전에 에디슨이 라디에이터를 발명하긴 했지만, 그것조차 지하에 대형 보일러를 놓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다시 한 걸음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놈의 지하는 빙빙 돌며 얼마나 깊은지, 족히 2개 층은 내려온 듯했다. 나는 문득 시끄럽던 아서가 조용해졌다는 걸 깨닫고 불안해져 말을 걸었다.

"알트? 거기 있나?"

"아, 미안. 잠깐 생각하느라."

그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갑자기 사색에 빠지다니. 외모야 어떻건 그도 나이를 먹긴 한 것일까. 어쨌거나 나로서는 그가 얌전해진 것이 마음에 들었기에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아서가 조용해지자 다른 곳이 난리였다. 이제는 지하와 어울리지 않는 소란스러운 기차 소리가 들렸다. 아니, 굳이 말하면 군대 행군 소리가 더 비슷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뭐가 됐건 이런 지하에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 우렁차고 규칙적인 소음이었다. 아서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계단을 더 내려가자 계단이 끊겼다. 막다른 길이었다. 계단 위에서도 길을 잃을 수 있나, 나는 당황한 나머지 벽에서 손잡이를 찾았다. 유감스럽게도 벽은 그저 벽이었다.

"알트?"

"문 앞에 서봐."

문? 그건 문이라기보다 벽이었다.

나는 아서가 시키는대로 순순히 문 앞에 바로 섰다. 그러자, 발치가 움푹 꺼지는 느낌이 들더니 달칵, 하는 격발음이 들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내가 커다란 스위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르르륵....

"자동문이군."

나는 솔직히 감탄하며 중얼였다. 압력을 이용한 원시적인 자동문이었다. 원리를 알기 힘든 저택의 정문만은 못했지만, 이것도 19세기의 기술력을 생각하면 제법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아이디어를 구현하려 한 아서에게 놀랐다. 평생 그의 이런 기술자적인 면모를 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내려다 보는 시선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21세기 첨단 문명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19세기의 기술 발전에 감탄하더라도 진심으로 놀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뭐가 나와도 뻔하고 예측되어, '아, 이제 이게 나왔구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작년 말 집 앞에 자동으로 점등되는 전기 가로등이 설치되었는데, 호들갑 떠는 마리에게 나는 "아, 그렇군."하고 짧게 대답하고 말아 공분을 샀던 일이 있었다. 나에게 19세기의 발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반면 아서는 내 혼잣말조차 지나치지 않았다.

"자동문이라."

나는 아서가 내 말을 따라하는 순간을 싫어했다. 그는 항상 날 그런 방식으로 긴장시켰다.

"지금까지 부르던 가압반응형 수평작동 장치보다는 훨씬 낫군그래."

"농담이겠지?"

"학술회에 초청받은 작가는 아직 없어서 말이야. 다들 누가 더 어렵게 말하나 경연하러 온 사람 같다니까."

나는 내 말실수를 알아챘다. 전생자만이 할 수 있는 말실수였다.

자동문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직관적이더라도, 자동문이 보급되지 않은 시대에는 존재할 리가 없는 단어였다. 시제품에 불과한 그것의 상호명을 곧바로 작명하는 건 역시 어색한 일이었다.

감이 좋은 아서는 그 어색한 부분을 바로 잡아낸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 실수가 심각한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반성했다.

문 틈이 갈라지며 안쪽에서 강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는 너무 자극적이라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등뒤에서 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보일러라고 했지? 그건 반쯤 정답이야."

"뭐?"

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내 어깨를 비집고 열린 문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이봐!"

"필로, 우리 가문이 항상 부유했던 것은 아니었어. 이런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 건, 선친의 대에 이르러서야. 그는 선구안을 지닌 사업가로 불렸지만, 나는 그가 그런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지."

내 항의를 사뿐히 무시하며 아서는 언제나처럼 태연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가 평소와 다르단 느낌을 받았다. 평소처럼 즉흥에서 짜내는 언변이 아니라, 준비된 대사를 읽는 것처럼 딱딱한 어투였기 때문이다.

"그자는 아주 끔찍한 경제관념을 지니고 있었거든. 장담컨대, 돌멩이와 다이아몬드 중 더 가치 있는 것도 구분하지 못할 자였어. 나는 그런 자가 어떻게 사업적 성공을 거뒀는지 늘 궁금했어."

아서는 빛을 등진 채, 내 쪽을 돌아봤다. 내 눈은 빛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의 사후에 알게 되었지만, 예상대로 선친께서는 어떤 선구안도 가지지 않았어. 감각 같은 것도 필요 없었지. 그저 그의 곁에 있는 예언자에게 어디에 어떤 공장을 세우면 되는지 물어보면 됐으니까."

아서는 어떤 거대한 물체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것이야말로 광원의 정체였다. 수십, 어쩌면 수백에 달하는 백열전구가 일제히 번쩍였다.

태양조차 이보다 밝을 순 없었다.

"소개하지. 실존하는 유일한 예언자. 우리는 오라클이라 부르고 있지."

그것은 웅크린 괴물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관절이 잠깐도 멈추지 않고 묵묵히 축 운동을 반복하며, 크고 작은 톱니바퀴가 교합을 이루며 그때마다 군홧발 소리처럼 규칙적인 소음을 만들었다. 족히 십 수 미터는 이어진 거체는 좁지 않은 지하실 벽면을 뒤덮고 있었다.

그 끝에 연결된 것은 열차에나 쓰일 법한 거대한 증기기관으로, 자욱한 증기가 쉴 새 없이 뿜어져 천장을 타고 올라갔다. 나는 노집사의 말을 이해했다. 저 증기가 항상 복도에 스며드는 한, 보수는 해봤자 의미가 없을 터였다.

"정식 명칭은 해석기관, 찰스 배비지라는 수학자의 몽상 속에서 탄생했다더군. 선친께서는 그의 후원자를 자처하고 이 강철 괴물을 현실로 구현한 거야."

아서는 천천히 기계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나? 이토록 거대한 지하실을 만들고 그 아래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태엽장치를 숨겨놓았으며, 열차에나 쓰일 법한 증기기관과 산더미 같은 석탄을 쌓아놓는데 얼마나 많은 자금이 필요했을까? 백만 파운드? 이백만 파운드? 그 자금은 다 어디서 나왔지?"

아서의 몸이 휙 돌아갔다. 후광이 강한 탓에 그의 얼굴이 있어야 할 장소에는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이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우리는 이제 막 지구의 음지에 발을 들인 거야."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하지만 고요함은 없었다. 기계장치는 한시도 쉬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시끄럽게 각인시켰다. 다시 말을 시작한 것은 아서였다.

"예언자 같은 거창한 이름을 짓긴 했지만, 쉽게 설명하면 이건 그저 계산기야. 대신 연산 결과를 저장하고 출력할 수 있지. 단지 그뿐이야."

그리고 아서는 말을 멈췄다. 다분히 의도된 침묵이었다. 그는 그 보잘것없음을 강조하여, 내 호기심을 유발하려는 속셈이 뻔했다. 여전히 짓궂은 화법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수작도 통하지 않았다.

우선 나는 이와 같은 물건을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주 비슷한 형태로 완성된 것을 사진 속에서 본 적이 있었다.

19세기가 아닌 21세기에서 말이다.

사진 속의 물건은 오라클이나 해석기관으로 부르는 대신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에니악(ENIAC).

반세기 후에 등장할 최초의 컴퓨터. 오라클은 그것과 아주 닮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오라클을 향해 다가갔다.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각종 부품의 연식이 그리 짧아 보이진 않았다. 철이 이런 색을 띠려면 최소 수십 년은 산화되어야 했다. 나는 이것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존재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감탄 같은 건 없었다. 옛 기술이기 때문에?

아니.

나는 오롯이 순수한 공포를 느꼈다.

이것은 이 시대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기술이다. 운이 좋았다든가, 우연이라든가 하는 변명이 통용되는 수준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있었지? 50년? 그러면 100년 일찍 완성된 건가? 뭘 위해서? 그동안 뭘 연산했지?

아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대단한 물건이 수십 년간 명세표나 뽑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실존 여부조차 알 수 없는 고대 신 따위보다, 이 낡은 기계장치가 나에겐 더욱 큰 공포였다.

아니, 이것이야말로 이미 만들어진 신이었다.

"기계 장치의 신...."

"아니."

내 짧은 탄식을, 아서는 기쁜 듯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신조차 알지 못하는 미래를 예측하니, 인간이야말로 진정 신이라 불러야겠지."

그 순간, 나는 아서에게서 인간이 아닌 이형의 존재를 보았다.

나는 애써 환시를 떨쳐냈다. 아서의 비현실적인 망상에 너무 시달린 탓이다.

나는 조금 더 현실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있었다. 구체적으로, 아서의 의도 같은 것 말이다. 그는 많은 말을 했지만, 여전히 무엇도 말해주지 않고 있었다. 학술회란 뭔지, 그의 연구란 뭔지, 심지어 나에게 뭘 바라는지조차 말이다.

"...그래서,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건 이건가?"

직전까지의 열기가 거짓말처럼, 내 입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도, 보여주고 싶었지. 좀 더 중요한 건 더 안쪽에 있지. 그 전에, 사실은 학술회의 회원도 소개해주고 싶지만."

아서는 사뿐히 오라클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뜨거운 기계에 붙어 있었던 탓에 비라도 맞은 것처럼 축축히 젖어 있어서 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출석률이 저조해. 다행히 한 명은 소개해줄 수 있겠군."

그의 시선 끝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뭐가 그리 바쁜지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한참을 떠든 우리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하니, 대단한 집중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와 아서는 천천히 여인을 향해 다가갔다.

"아, 프랑크 회장님."

아서를 알아본 여인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영어로 말하고 있지만 어색한 부분이 많았다. 외국인, 아마도 러시아 계통인가? 러시아 어라면 몇 마디 할 줄 알았다.

"회장님, 이쪽 분은?"

다행히 내가 굳이 서툰 러시아 어를 쓸 필요는 없었다. 여인의 발음은 서툴렀지만, 말 자체는 아주 능숙해 보였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격식을 갖춰 나에 대해 물었다.

사실 그 점은 어쩔 수 없었다. 얼추 보아도 여인과 나는 최소 10살 이상 차이 나 보였으니까. 오히려 내가 가르치는 대학생이라고 생각하는 게 어울리는 외견이었다.

거기다 기이할 정도로 어린 외모인 아서까지 함께 있으니 내 존재가 너무 어색하게 느껴졌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젊은이 사이에 주책 맞게 끼어든 늙다리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아서, 이쪽 여성 분은?"

나는 말투를 정돈해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초면의 여인 앞에서 애들처럼 서로 애칭이나 불러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다행히 아서 역시 그 정도 교양은 갖췄는지 진중한 말투로 응했다.

"혹시 아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 왕립 학회로 동상을 보내는 일은 없을 거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군.

아서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만 보이게 윙크했다.

...뭐? 어쩌라고?

나는 불길함에 미간을 확 좁혔다. 그는 여인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아주 격조 있는 동작으로 나를 가리켰다.

"부인, 이쪽은 저명한 플록시노시니힐리필리피케이션 남작이라네."

"아! 플록, ...네?"

아서는 여전히 교양이 없었다.

그리고 잠깐이라도 그를 신뢰한 나는 끔찍한 바보였다.

나는 오해가 쌓이기 전에 서둘러 정정했다.

"필레몬 허버트, 허버트라네. 방금 멍청이는 무시하게."

"그건 신사답지 않은 말투인데."

"닥치게나."

나는 내가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얼굴이 새빨갰을테니 말이다. 마치 내가 아서와 이런 유치한 장난을 짜기라도 한 것 같지 않나. 짠 것은 맞지만, 그건 20년 전 일이다!

아서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뻔뻔하게 여인을 소개했다.

"그리고 필레몬, 이쪽은 여인은,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프랑스에서 온 물리 지질학자라네."

"마리 스워도프스카 퀴리, 잘 부탁...."

나는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다 우뚝 멈춰 섰다.

"지금 뭐라고, 퀴리라고?"

"오, 알고 있었나. 그녀가 바로 피에르 퀴리의 피앙세였다네. 경사스럽게도 올해로 퀴리가 되었지."

나는 멍청하게 말을 되풀이했다.

"뭐라고, 퀴리 부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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