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병
이튿날,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저녁이 지나고 마리가 돌아갈 무렵 어렵사리 말을 꺼내놓았다.
"자네, 당분간 나오지 않아도 좋네."
마리는 손을 우뚝 멈췄다.
"뭐라고요? 못 들어서요."
"생활비는 따로 챙겨줄 테니 한동안 한두 달... 아니, 조금 더 쉬다 오게."
사실, 나는 누구와 이런 얘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일평생 남에게 상처 주지 않고 말하려는 노력을 해본 적도 없었단 말이다. 도무지 어떤 식으로 말해야 오해가 생기지 않을지 몰랐다.
그래서 별로 중요치 않은 듯이 말했다. 하루나 이틀 정도 휴가를 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지만 이건 그렇게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말이다.
"주인님, 저를 의심하는군요."
"일단 들어보게."
나는 손을 살짝 들어 그녀를 만류했다. 하지만 한 번 흔들린 신뢰는 붕괴를 가속했다.
"제가 시계를 훔쳤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야."
전날 밤의 사건 이후로, 나는 주변에 너무 무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그림자 위로 발을 걸친 나는 양지의 사람이 아니기에, 내 주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은랑백이 그랬고, 리치먼드가 그랬으며, 그리고 마리 퀴리... 그녀도 그랬다.
나는 신변 정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어제 본 사진 속 여인들의 모습과 마리의 모습이 매 순간 곂쳐보였다. 나는 마리의 갈라진 배와 그 사이로 삐져나온 내장을 보았다. 지금도,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우선 내 말을 듣게."
그리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가 주인님 물건에 손댈 이유가 없잖아요! 저는 지금 임금에 만족하고 있어요!"
"그런 말이 아니야."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몰랐다. 내가 살해 협박을 당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나? 자고 일어났더니 팔이 난도질당했다고? 나는 그것을 말해도 되는지 몰랐다.
말하기 전까지는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두 달 정도 뒤에 범인이 잡히고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불러오면 될 거라고. 하지만 누가 과연 살인자가 밤에 들어와 협박하는 집에서 일하고 싶을까.
마리는 계속 뭐라고 항변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말에 해줄 대답이 없었다. 묵묵히 듣고 있자니, 그것이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같이 들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그놈의 시계, 시계! 그깟 시계가 뭐라고!
"조용히 좀 하게!"
나는 입에서 나온 소리에 놀랐다. 관성을 받은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나가게! 지금 당장!"
마리의 겁먹은 얼굴을 확인한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멀어지는 걸음 소리가 들리고, 짐을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닫혔다. 얇은 유리창 너머로 런던 밤거리의 소음이 고스란히 들려왔지만, 나는 홀로 적막을 느꼈다.
아, 그래, 나는 후회했다.
이 나이를 먹고도 고작 5분 전의 일을 후회할 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표현을 조금 더 신중히 골랐어야 했다. 처음부터 진지하게 말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5분 전까지만 해도 전혀 떠오르지 않던 문장들이 뒤늦게야 하나씩 사고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큰 의미는 없었다. 어쨌거나, 잘된 일이었다. 내가 지구의 음지에 걸쳐 있는 한, 그녀는 언젠가 보내야 했으니까 말이다.
────똑똑.
"나가네!"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팡이를 잡고 급하게 일어나다 넘어질 뻔했으나, 어찌저찌 균형을 잡고 문 앞으로 향했다. 나는 손잡이를 잡았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처음 보는 경관이었다.
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경관께서 야밤에 무슨 일이신지?"
"지금 당장 와주셨으면 합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제야 나는 경관의 창백한 안색을 눈치채고, 평범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직감했다.
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화이트채플, 런던 최대의 빈민굴로 이어진 길은 봉쇄되어 있었다. 수십 명의 경관이 일렬로 선 채 거리를 막고 있었고, 두 명의 기마경찰이 살짝 떨어진 채 혹시 모를 탈출자를 감시했다.
행색이 안 좋은 몇몇 시민이 호소하며 경관에게 다가갔지만, 그들도 곧 나무 경봉을 맞고 도망치듯이 물러났다. 그들은 골목과 건물 안에 숨은 다른 사람들처럼 멀리 떨어져 봉쇄가 해제되기를 기다렸다.
바닥에는 핏물에 흥건히 젖은 남자 한 명이 엎어져 있었지만, 누구도 그를 신경 쓰거나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위에는 점잖은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래에는 속옷조차 입고 있지 않은 추한 꼴이었다.
나는 그 참상에 압도되었다. 이곳은 여전히 런던 한복판이었지만, 나는 전쟁터 한복판에 소환된 군인의 심정을 느꼈다.
"아, 선생님. 드디어 오셨군요."
나는 간신히 익숙한 얼굴을 하나 발견하고 안도했다.
"이보게, 이게 다 무슨 소란인가?"
"지킬 박사님이 옳았습니다. 거리 안에서 셰리 패트릭이 나타났습니다."
전날 밤 사진 속에서 보았던 여인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윌슨은 참담한 얼굴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우리가 늦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복수를 마쳤습니다."
그순간, 저 멀리서 한 남자가 엎드린 채 달려왔다. 엎드려 있는 자와 마찬가지로 신사처럼 차려입고 하의만을 벗은 자였다. 입가에는 침이 질질 흘렀고, 짐승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막아!"
경관들은 앞으로 달려가 나무 경봉으로 그자를 에워싸서 구타했다.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으나 누구 하나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지 않게 된 뒤에야 경관들은 손을 거뒀다.
"보셨습니까? 우리가 늑대인간이라 생각하고 있던 자입니다. 그리고 저런 자가 거리에는 수두룩합니다. 16년 전과 똑같이, 셰리 패트릭은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방법을 손에 넣은 겁니다."
그건 불가능했다. 16년 전의 그것은 원하는 때 원하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그런 편리한 주술 같은 것이 아니다. 어쨌거나 눈으로 직접 보고도 아니라 할 수 없었기에 나는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그러면 가서 막아야지! 뭐하는 건가? 여기 평생 서 있을 셈인가?"
"곧 군대가 도착한다고 합니다."
윌슨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확산을 막기 위해, 그때까지 거리에서 누구도 나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나는 잠시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의무감 하나로 제이콥 섬에 뛰어든 이 젊은 형사를 책망하는 건 어떤 의미도 없었다. 나는 내 총을 두고 온 것을 후회했다.
"내게 총을 주게."
"안됩니다!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그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상황이었다. 그때와 같다면, 나는 이번에도 가야 했다. 나는, 나에게는 의무가 있다.
"이봐, 잘 듣게. 나는 제대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군인이네. 나는 여왕 폐하 앞에서 영국을 수호하기로 맹세했고, 언제라도 그 의무를 수행할 생각이야. 그리고 지금, 저 안에서 무고한 런던 시민들이 죽어나가는 동안 혼자서 안전한 곳에서 방관해야 하는 수모를 당하지도 않을 테고, 맨몸으로라도 들어가겠네."
윌슨은 내 눈을 마주 보며 몇 번이나 표정을 바꿨다. 그리고 결국 뒤에 있는 형사에게 가서 소총과 탄약통을 받아와 나에게 넘겼다.
"마티니입니다. 전에 쏴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 오늘 쏴보게 되겠군."
기존에 쓰던 총과 장전 방식이 다르긴 했지만, 적응하기 어렵지는 않아 보였다.
"내 명예를 지켜줘서 고맙네."
나는 윌슨에게 감사를 표하고 거리 안으로 향했다. 한 경관이 제지하려 다가왔지만, 윌슨의 만류에 그대로 보내주었다. 그는 내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지킬 박사님을 찾으십시오! 그분이 셰리 패트릭을 쫓고 있습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끄덕였다.
거리 입구에서 느낀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화이트채플은 이미 전쟁터였다.
경찰이 거리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란 걸 깨달은 사람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스스로를 보호했다. 모든 건물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앞에는 조잡한 바리케이드가 처져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시체가 몇 구 버려져 있었는데, 나는 정신이 나간 자와 아닌 자를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정신이 나간 자는 여지없이 화이트채플에 어울리지 않는 신사들이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허름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댄 채 흐느끼는 여인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도망치지 않나?"
"어디로요? 밖에는 경관이 깔렸고, 거리의 모든 문이 잠겼는데."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손에는 궐련이 들려 있었는데, 이 고약한 냄새는 분명 우드바인이었다. 런던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싼 담배였다.
"늑대인간이 담배 냄새를 싫어한다는 게 사실일까요?"
"큰 도움은 안 될걸세. 경관에게 가서 윌슨이라는 자를 찾게. 허버트라는 자가 보냈다고 하면 그가 보호해줄 거야."
나는 여인과 헤어지고 거리 안쪽으로 향했다. 안으로 갈수록 소동을 걷잡을 수 없었는데, 대부분 건물이 봉쇄되었던 거리 초입과 달리 문이나 창문이 부서진 건물이 늘어났다.
거리 곳곳에는 시체가 놓여 있었고, 그 중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몸을 팔러 온 자들이었다. 런던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낮에는 턱없이 낮은 임금을 받고 가정부나 재봉 공장에서 일하다가, 밤에는 부족한 돈을 보충하기 위해 화이트채플에서 동전 몇 닢에 몸을 파는 것이다. 화이트채플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빈민굴인 동시에 창가였다.
런던에서 여유로운 삶에 익숙해진 나는 이 풍경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런던이 품은 어둠은 그저 비밀 장치가 숨겨진 저택이나 템스 강에 사는 이형의 존재 따위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런던의 저변에 깔린 가장 깊고 오래된 어둠이었다.
16년 전의 사건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해리스 주다와 마틴 패트릭은 대외적으로 훌륭한 신사로 알려졌었다. 그들은 가정적인 가장이자 세간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나, 그 뒤로는 창관에서조차 해소할 수 없는 추잡한 욕망을 키우고 있었다.
한때는 화이트채플에서 저급 창녀를 사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둘이지만, 성욕은 점점 비대해져만 갔고 결국 그들은 무엇에도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우연히 서로의 치부에 대해 알게 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끔찍한 범죄를 계획했다.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을 시행할 자금과 사회적 입지가 있었다.
둘은 존재하지 않는 법인명으로 지하실을 사고,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벽과 천장을 두텁게 공사했다. 그들은 화이트채플에서 흔한 무연고 여성을 돈으로 유인하고, 지하실에 끌어 들여 입에 차마 담을 수 없는 가학 행위를 반복했다.
협박과 회유로 여성의 입을 막은 그들은 서서히 요구의 강도를 높였는데, 그 과정에 여성은 눈과 귀 등 몇몇 신체 부위를 잃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두 남자의 가학심은 채워지지 않았고, 여성은 언젠가 자신이 죽을 것이라 예감했다.
한편, 이런 비밀을 공유하며 두 남자는 우정을 돈독히 했다. 누군가 배신하는 걸 막기 위해 서로 가족을 소개하고 집에 초대하는 등 교류를 이어나간 것이다.
그날의 사건 전까지 두 사람은 이런 우정을 이어나갔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건 세계 최초의 바이오 테러였다.
신문을 통해 두 사람의 증상을 알게 된 나는 문득 그것이 광견병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에 계획된 식인 같은 것이 아니라, 우연의 일치로 두 사람이 동시기에 발작했을 가능성 말이다.
정황상으론 손가락을 빨아가면서까지 먹었다는 표현도 미심쩍었다. 아무리 봐도 먹은 것보다 씹은 것에 가까운 묘사였다. 입이 움직이면 식도가 움직이니 씹히지 않은 신체 부위가 위에서 발견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편지에 두 문장을 적어서 경찰에 보냈다.
'증상이 광견병이 의심됩니다. 잠복기동안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방문했던 장소나 만난 사람을 찾아보는 게 어떤지?'
시기는 1881년, 세균과 바이러스조차 소수 지식인의 막연한 추측 속에만 존재하는 가설에 불과하던 시기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타인을 감염시켜 죽인다는 발상은 쉽게 떠올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경찰은 이 정보를 토대로 두 사람에 대한 정황 증거와 목격 정보를 모아, 사건 발생 10일 전에 그들이 같은 건물의 지하실에 방문했음을 알아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지하실에 돌입한 그들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는데, 그건 감금된 채 썩어 문드러진 진범의 시체였다. 그녀는 광견병 걸린 쥐에게 자신의 몸을 물게 해, 스스로 매개체가 되어 두 사람을 감염시킨 것이다.
그 시체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재판없이 바로 소각되었다.
10년 전,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광견병은 치료되며 식인 사건의 악몽은 잊혀졌다.
이제 인간은 짐승이 되는 병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욕망에 빠져 짐승이 된다. 인간과 짐승의 경계란 이토록 허술한 것이었다.
─────탕!
마티니에서 튀어나온 총탄이 광인의 몸통에 직격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신사처럼 차려입고 하의만을 벗은 자였다. 나는 자세를 유지하기 위에 팔꿈치로 기대듯이 세워둔 지팡이를 다시 잡았다.
"경관 주변으로 도망치게, 빨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격 당하던 여성은 내가 왔던 길로 달려갔다. 나는 지금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정말로 셰리 패트릭이 돌아온 것인가? 복수하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것은 지금 상황에 대해 무엇도 설명할 수 없었다. 광견병은 잠복기가 아주 긴 바이러스고, 이렇게 사람을 식인 괴물로 만드는 병도 아니었다. 16년 전의 우연처럼 동시다발적으로 터트리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늑대인간.
나는 불현듯 그 단어가 떠올랐다. 정말로 늑대인간이 실존하는 건가.
나는 이 사건이 아주 쉬운 사건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늑대인간이나 스프링힐드 잭과 같은 어린아이를 속여먹기 위한 헛소문부터, 지킬 박사를 본 순간 하이드의 존재를 떠올리며 그가 진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어떤 해답도 가지지 못한 채, 무작정 시체와 비명만을 쫓아갔다. 피 냄새를 쫓아가는 짐승처럼 말이다. 인간도 짐승도 되지 못한 자들의 비통한 꽥꽥거림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아,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다, 혼돈의 근원지!
나는 피와 육편으로 뒤덮인 그 악몽 속에 떨어졌다. 익숙하던 풍경은 마치 지옥과 합쳐져 혐오스러운 기시감을 선사했다.
런던 병원, 150년 전통을 유지한 화이트채플 중앙 사거리의 병원은 악마에게 바쳐지는 제단이 되어 있었다.
병원에서는 핏물이 넘쳐 흘렀고, 그 앞에는 시체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창문에서는 미처 도망치지 못한 환자와 의사가 연이어 투신했다. 몇몇 의사는 마지막까지 환자를 밖에 던지다가 무언가에 습격당해 안쪽으로 끌려갔다.
"하아... 하아...."
충격적인 광경을 뇌가 거부하듯이 시야가 흐려졌다. 이것은 역시 평범한 병이 아니다. 그보다 사악한 의지가 이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병원에 다가갈수록 들려오는 비명에 고막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 순간, 나는 3층 창문에서 내가 찾아 헤매던 자를 찾았다.
"셰리 패트릭...!"
헝클어진 흑발을 가진 전라의 여인, 그녀는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바로 그 뒤를 어떤 남자가 뒤쫓았다. 뒷모습뿐이었지만 나는 그가 지킬 박사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병원 정문으로 향했다.
"살려...." "아파...." "하아... 하아...."
시체 더미 속에서 아직 죽지 못한 환자들의 비통한 애원이 들렸다. 그것은 사람을 뭉쳐 만들어놓은 생명체 같이 꿈틀거렸다.
"미안하네."
나는 살아날 가망이 없는 그들을 애써 외면하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1층 복도에서 살아 있는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가득 찬 핏물은 1층 바닥을 가득 채우고 실외까지 흘러넘쳤다.
2층. 육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광인들은 이미 사람보다는 짐승의 형상에 가까웠다. 늑대인간, 나는 다시 그런 단어를 떠올렸다. 목발과 지팡이 짚는 소리로 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오직 팔심에 의존해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3층. 2층과 달리 3층은 적막했는데, 계단을 경계로 공간이 잘린 듯이 어색했다. 나는 마티니 소총을 양손으로 잡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아, 그리고 나는 병실 안에서 그것을 목격했다.
보이는 것은 지킬 박사의 등이었다. 그는 소총을 들고 있었고, 핏물에 젖어 있었다.
"이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한 전라의 여인이 엎어져 있었다. 머리에 뚫린 구멍에서는 피와 뇌수가 새어나와 바닥을 적셨다. 지킬은 아무 흥분도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셰리 패트릭은 죽었습니다. 사건은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