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5화 (15/232)

§15. 짐승이 사는 거리

달그락.

나는 찻잔을 접시 위에 올려놨다. 잘 보니, 찻잔 표면에 어떻게 생긴지 모를 얼룩이 있었는데, 오래 서 있는 것이 힘들어 설거지를 대충한 탓이었다.

차맛은 형편없었다. 찻잎의 관리를 잘못한 탓에 습기가 차서 눅눅해졌는데, 그냥 마시자니 여간 고약한 것이 아니라 우유를 더 탔다. 그러니 이번엔 양 조절을 어찌 잘못한 것인지, 밀크티라기보다는 그냥 생우유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탕탕!

그래, 이런 소리였다.

그날의 악몽은 이런 식으로 끝났다. 뒤늦게 도착한 군인들은 거리를 일렬로 행진하며, 보이는 모든 것을 쏴버렸다. 그들이 지나간 길에는 피 냄새조차 덮어버리는 짙은 화약 냄새만이 잔류했다.

화이트채플에 가득한 시체는 모두 소각되었다. 인간과 야수가 같은 불 속에서 뒹굴었다. 그리고 셰리 패트릭... 그녀 역시 소각장의 검은 재가 되었다.

짐승은 빛과 소음을 두려워한다. 그렇기에 화약에 저항할 수 없다.

그날 나는 보고 말았다. 이미 완연한 짐승의 모습을 한 자들이 군인 피해 거리의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광경을. 그들은 아직도 런던 골목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만난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걸 구분할 수 있을까.

─────탕탕!

나는 화들짝 잠에서 깨어나듯 플래시백에서 빠져나왔다.

창밖에는 항상 이 길을 지나가던 신문팔이 소년이 서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신문 사시겠어요?"

"글쎄... 어떤 기사가 실렸느냐에 따라 다르지."

"데일리 메일에서 호외가 나왔어요."

"마침내 기자들이 예티를 찾아낸 모양이구나. 한 부 줘보렴."

나는 소년의 손 위에 1실링짜리 동전을 올려줬다. 그는 세상만사 걱정 하나 없는 표정으로 행복해하며 내 손에 신문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창문을 닫고 자리에 돌아온 나는 신문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찻잔을 들었다. 그러다 문득 찻잔 위에 뭔지 모를 검은 불순물이 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내려놨다.

대신에 퍽퍽한 스콘 하나를 입에 욱여넣고 씹어대며 신문에 집중했다.

『적기조례가 폐지되다!』

나는 별 기대하지 않고 본문으로 넘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기자란 무엇으로도 호들갑 떨 수 있는 자들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그것이 착실한 기사란 걸 깨닫고 크게 놀랐다. 적기조례 개정안이 마침내 폐지되었다는 대목에 이르자, 나는 신문을 덮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 시간이 흘렀다.

어느 정도 여름이 남아 있던 당시와 달리,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었다. 차가운 소나기는 더는 레인 코트 한 장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못 됐다. 우산을 챙기는 걸 쉽게 까먹는 내게는 괴로운 계절이었다.

그 사이 나는 마리를 다시 부르지도 못했고, 새로운 가정부를 구하지도 못했다.

나는 여전히 안전하다 느끼지 못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스프링힐드 잭의 소문은 더는 가벼운 풍문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내 일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코,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먼저 사과하지 못함은 아니었다. 나 같은 자가 뭐가 아쉬워 가정부도 없이 생활해야 한단 말인가.

여하튼, 그동안 나는 새로운 일을 얻었다. 은랑백의 추천장이 마침내 힘을 써준 것이다.

올드코트 대학(Oldcourt University).

수도원이었던 이곳은 외부와의 접촉을 엄금하고 자연 철학에 몰두하여, 한때는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북런던을 대표하는 자연 철학 대학 중 하나였다. 나는 그곳에 겨울부터 교사를 맡게 되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은 대학이 가진 기이한 관습이었다. 부지가 좁은 탓에 고작 3개의 칼리지로 나뉘어 있음에도 올드코트는 칼리지 사이를 철저히 분리했다. 학생이나 교사는 타 칼리지에 방문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심지어 커리큘럼과 자료동, 연구실마저도 공유하지 않았다.

즉, 대학은 서로 다른 서적을 가진 3개의 도서관을 가진 것이다. 나는 이 낡다 못해 불쾌한 관습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이 관습에서 벗어난 것은 학장뿐인데, 그는 전통에 따라 매일 다른 칼리지로 출근했다.

나는 계약서를 받아들고 한참 고민했으나, 나를 받아줄 만한 대학 중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결국엔 그 위에 서명했다. 내가 배속된 것은 성 헨리 8세 칼리지였다.

아직 내가 맡은 강의는 없었지만, 나는 아침 일찍부터 대학으로 출근했다. 요즈음 매일 같은 일과였다.

나는 항상 보는 사서를 향해 목례하고 곧장 계단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3층이었다. 나는 층계 앞에 멈춰 서고 잠깐 숨을 골랐다. 매번 이 순간이 고역이었다.

"도와드릴까요?"

고개를 돌리자, 한 젊은 학생이 내 옆에 다가오고 있었다.

"늙은이 취급하지 말게. 이쯤은 거뜬해."

"필레몬 허버트 교수님이시죠?"

"날 알고 있나?"

"어... 교수님이 취임하신다고 했을 때, 학생들 사이에서도 좀 얘기가 많았거든요."

나는 대충 어떤 대화가 오갔을지 짐작하고 쓴웃음 지었다.

"하지만 저는 환영이에요. 올드코트에는 항상 새 물결이 필요해요."

"고맙네. 자네 같은 친구가 많았으면 좋겠군."

학생은 2층에서 멈췄다. 나는 살짝 고개 숙여 작별하고 그대로 3층으로 올랐다.

3-8번 서고. 나는 웨일스 지역 신문이 수집된 몇 권의 스크랩북을 뽑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목에 건 안경을 쓰고 천천히 읽어가기 시작했다.

지킬 박사의 말에 따르면 셰리 패트릭이 나타난 것은 1년 전, 즉, 1894년의 일이었다. 나는 그가 실수하거나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줬을 가능성마저 고려해 1893년부터 모든 웨일스 지방 신문을 꼼꼼히 찾아갔다.

나는 손가락을 올려 신문의 부제를 하나씩 나열해 읽었다.

실그윈 숲... 늑대... 여인... 서커스....

지난 며칠 간의 조사 끝에, 나는 하나의 기사를 찾고 손가락을 멈췄다. 그리고 신문 발행일과 신문의 부제를 확인했다.

1894년 11월 2번째 주.

『사람인가, 짐승인가? 실그윈 숲에서 나타난 수수께끼의 전라 여인!』

원색적인 문구로 뒤덮인 이 기사야말로 셰리 패트릭을 가리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11월 이후의 신문 위주로 교차하며 확인했다. 내용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브리튼 제도에서 멸종한 걸로 알려진 늑대가 서식한다는 소문이 있는 실그윈 숲. 그곳에서 전라의 여인이 벌목꾼에게 발견되었다.

전형적인 웨일스계 여성의 외모를 한 그녀는 짐승처럼 네 발로 뛰어다녔는데, 곧 지역 사냥꾼들에게 포획당했다. 그녀는 어떤 언어에도 반응하지 않았고, 옷을 입히려는 모든 시도는 수포로 돌아갈 정도로 난폭했다고 한다.

여인의 처분에 대해 곤경에 처한 와중, 자신을 서커스 단장이라고 소개한 한 신사가 찾아와 10파운드에 여인을 사겠다고 제안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에 동의했는데, 10파운드라고 하면 런던에서 기껏해야 한두 달 생활비로밖에 쓰지 못할 돈이었다.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이것이 전부였다. 어느 신문을 봐도 남자가 어떤 서커스를 운영하는지, 둘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기사는 일절 적혀 있지 않았다.

"셰리 패트릭은 말을 하지 못했군."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사건 이후로 내가 느끼고 있었던 모든 이질감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셰리 패트릭은 백치다!

애초에 문자를 모르는 그녀가 내 팔에 문자를 새길 수 있었을 리가 만무했다. 옷조차 입기를 거부하는 짐승에 가까운 그녀가 런던 경찰의 눈을 피해 모든 복수극을 세우고 실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모든 사건에는 우연이 따라다녔다.

지킬 박사가 찍은 사진에 셰리 패트릭이 찍힌 것도 우연이었고, 그가 사진을 토대로 경찰과 나에게 셰리가 범인이라 각인시킨 다음 날 화이트채플 사태가 터진 것도 우연이었으며, 내가 보는 바로 앞에서 지킬 박사가 셰리를 쏴 죽인 것도 전부 우연이었다.

당연하지만, 이 정도로 우연이 겹친다면 그건 계획이다. 그것도 서서히 인식을 왜곡하는, 정교하게 맞물리는 시나리오 말이다. 만약, 내가 그자의 이름이 헨리 지킬이 아니었다면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나는 그에게 숨겨진 자아가 있음을 알았다.

스프링힐드 잭.

아직도 그는 멀쩡히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폭로해야만 했다.

─────쿵쿵!

그날 밤, 나는 지킬의 자택을 수소문해 도착했다. 그의 주택은 지킬의 편집적인 모습만큼 정결했는데, 인근 주택과 비교해도 두드러지게 깔끔했다.

잠시 후, 빗장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지킬은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허버트 박사님. 이런 밤중에 어쩐 일이십니까?"

"자네였어. 자네가 셰리 패트릭을 런던으로 데리고 온 거야."

지킬은 놀란 기색 한 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절제된 감정 표현 때문에 나는 무심코 그가 나를 유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나는 지킬이라는 인물의 무엇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내가 아는 책 속의 등장인물과 너무나도 달랐다.

"우선 들어오시죠. 우리는 할 얘기가 많아 보입니다."

지킬은 몸을 돌려 현관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순순히 그 뒤를 따랐다. 만에 하나 그가 입막음을 하려 든다 해도, 그와 같은 일반인에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방 안에 들어간 나는 무심코 뒷걸음질 칠 뻔 했다.

깔끔한 건물 외관이나 현관과 달리, 방 안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나는 벽면 가득 채워진 여성의 사진과 그림을 봤는데, 대부분 여성의 나체와 성교를 묘사한 춘화였다. 나는 그 사이에서 셰리 패트릭의 사진을 아주 많이 발견했다.

"알고 계십니까, 인간은 굉장히 모순적인 생물입니다. 선천적으로 잘못 설계된 것이죠. 실수하지 않는다는 신은 인간을 만들 때 그의 미숙함을 드러냈습니다."

지킬은 자신의 방에 대해 변명을 하듯 말했다.

"하지만 저 찰스 다윈의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아직 진화의 과도기에 놓인 것입니다. 짐승에서 인간으로, 본능에서 이성으로 가는 과도기 말입니다."

그는 벽면에서 사진 하나를 뜯어냈다. 그리고 무심하게 타오르는 알코올램프 위에 얹어놓았다. 탄 냄새가 방 안을 채웠다.

"보시다시피 제 안에는 이성으로도 다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 일생은 끝을 모르는 욕망에 비위 맞추며, 이 치부를 숨기고자 하는 투쟁사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보십시오. 그럼에도 제가 인두겁을 쓰고 있는 한, 저는 결코 이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었습니다."

밝은 조명 아래 지킬의 그림자가 아주 짧게 늘어졌다. 그것은 작고 투박한 등 굽은 난쟁이처럼 보였다.

"악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악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안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십니까?"

"변명에 불과하네."

"설마 전쟁터에 다녀오신 박사님께서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습니다. 설마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 울부짖는 저 바깥의 낙관적인 멍청이들과 같은 말을 하실 겁니까?"

나는 지킬의 혐오감 어린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던 와중에, 저는 한 소문을 접했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마침내 그녀를 찾게 된 것입니다. 셰리 패트릭!"

지킬이 설명을 계속하는 와중에도 알코올램프는 타고 있었다. 그 위에 놓인 플라스크 안에는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체가 끓고 있었다.

"멋지지 않습니까? 저것이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그것은 검었다. 쉽게 말하는 흑색 따위가 아니라, 빛의 존재마저 망각하게 하는 순수한 어둠이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요동쳤는데 그 탓에 나는 원근감마저 잊고 말았다. 그것은 플라스크 안에 갇혀 있었지만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가 점처럼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모든 충동과 욕망을 절제한 순수한 이성의 정수입니다. 우리 뇌 속에 잘 숨어 있었지만, 결국은 찾아냈죠. 저는 하이드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하이드, 그것은 요염하게 꾸물거렸다. 나는 역겨워 토할 뻔했다.

"셰리 패트릭,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지킬은 담담히 고백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브리튼 제도에서 마지막 대형 야수가 목격된 게 400년 전인데, 지역민은 아직도 실그윈 숲에 사는 무언가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겁니다, 숲 속에 사는 어떤 형용할 수 없는 야수의 존재를. 무엇으로도 표현할 방법이 없느니, 그저 늑대라고 부르고 말았던 겁니다."

그는 벽면 한쪽을 쳐다봤다. 거기엔 셰리 패트릭의 사진이 가득했다. 대부분은 지킬의 추악한 외설에 대한 것이었으나, 일부는 차마 말로 형용하지 못할 사악한 고문과 실험으로 가득했다.

"셰리 패트릭은 16년 전, 숲 속에서 그것과 바꿔치기 당한 겁니다. 그녀는 한때 인간이었지만, 15년 뒤에는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녀가 인간과 짐승, 이성과 본능의 경계에 대한 해답을 쥐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녀를 사왔습니다. 만약, 그녀가 인간에서 완전한 짐승이 된 것이라면, 그녀가 가진 모든 성질을 인간에게서 절제한다면 인간은 영원히 욕구와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지킬이 바라보는 사진 사이에서 사람의 형태를 한 고깃덩어리를 발견했다.

"그래서 저는 실험했습니다."

그것은 해부대 위에 구속된 채, 전신이 해부된 셰리 패트릭이었다.

"실험 끝에 셰리 패트렉에게서 추출한 원액의 성분을 정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수천 년간 화학자들이 연구했던 어떤 원소와도 달랐고, 오히려 그 해답은 미신적인 연금술사들의 서적에 나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안에서 어떤 성분이 무엇이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고 또 인간으로 만드는지, 많은 임상시험 자료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늑대인간 사건을 일으킨 거군."

내가 노려보자, 지킬은 사소한 실수를 지적당한 사람처럼 수줍어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피험자 선정은 신중했고 한 번의 실패는 큰 대가를 낳았죠. 조금이라도 배합을 실수하면 피험자는 야수가 그 자체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화이트채플 사건 이전에 일어났던 식인 사건, 나는 사진 속 여인들의 튀어나온 내장을 떠올리고 인상 썼다.

"그 실수로 저는 경찰에 쫓기게 되었고, 실험은 아직도 많은 실패를 요구했습니다. 아주 빠르게 대량의 표본이 필요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화이트채플을 노렸군."

"맞습니다. 밖에서는 신사라 불리며 꾸미는 자들이 그 거리에서는 정욕에 눈이 멀어 허리를 흔들어대고 있더군요.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자들이었죠. 좋은 기회였습니다. 충분할 정도의 자료를 모았고, 저는 셰리 패트릭을 처리해서 후사의 염려도 없애기로 했습니다."

이제야 확신이 들었다. 그날의 사건은 모두 연출이었다. 지킬은 병동에서 누군가 자신을 쫓아올 때까지 기다리며, 풀어놓은 셰리 패트릭을 쫓아다니며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지 않은 희생이었습니다만, 결과물과 비교하면 아주 소소한 수준입니다. 인류는 마지막 진화를 한 발 앞두고 있습니다. 20세기에 인간은 욕구에서 비롯된 비이성을 벗어던지고, 오로지 합리의 시대로 나아갈 것입니다."

지킬은 플라스크 속 내용물을 앰풀에 살짝 따랐다. 아주 적은 양만을 따랐는데도, 그것은 안에서 증식하며 앰풀을 가득 채웠다.

"필레몬 허버트 박사님. 당신은 학자이며 본능보다 이성으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제 말이 옳다는 것도 아시겠죠."

그는 앰풀을 내게 건넸다. 나는 손에 쥔 그것을 내려다 봤다. 앰풀 안에 든 것은 비명지르는 인간이었다.

"아니, 나는 자네를 경찰에게 넘길 걸세. 자네는 여전히 추악한 짐승이야."

지킬은 미간을 좁혔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군요."

─────툭.

그 순간, 창문 너머로 무언가 부딪쳤다.

"뭐지?"

지킬은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자, 창문이 깨지며 검은 형체가 지킬의 머리 위로 엎어졌다.

그것은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의 형체를 한 숯덩어리였다. 육체는 완전히 불에 타 간신히 그 형체만 유지하고 있었고, 안면의 이목구비는 두개골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두피에는 몇 가닥 남지 않은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봤다. 그녀는 셰리 패트릭이었다.

그녀는 가슴과 배 부근에 있는 어떠한 부위로, 문자 그대로 몸으로 지킬을 감쌌다.

"완전히 소각했다고 들었는데 놀라운 생명력입니다. 몸을 찾으러 온 건가? 그런 성질도 있나 봅니다."

지킬은 침착하게 그녀의 행동에 대해 분석하며 문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의 눈앞에서 문을 닫았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제대로 판단하세요. 저것은 위험하지 않습니다. 별로 힘도 없습니다. 판단하세요. 제대로 판단하세요! 이성적으로 생각하란 말이야! 문 열어!"

문 너머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인체에서 나는 소리라기보다는, 나무를 압착할 때 나는 그런 종류의 소리 말이다. "문 열어...." 그 사이로 낮게 들려오던 목소리는 곧 사그라졌다.

문 너머 열기가 느껴졌다. 화재였다. 나는 짐승과 지킬 박사의 최후를 직감했다. 지킬은 응보를 받았으나, 짐승의 운명에 대한 사악한 호기심은 나를 움직였다.

나는 문을 활짝 열었다.

방 안은 짐승이 날뛰고 가기라도 한 듯이 어지러워져 있었다. 책상과 서재는 바닥으로 엎어지고, 마구잡이로 펼쳐진 연구 자료 위로 알코올램프가 쏟아지며 불길이 치솟았다. 플라스크가 깨지며 흘러나온 액체에서 고약한 독성 연기가 뿜어졌다.

셰리 패트릭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지킬 박사는 창틀에 손을 올린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돌아갈 수 없는 각도로 목을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친 뒤에, 그대로 창 너머로 뛰어내렸다.

창밖에서 인간도 짐승도 아닌 것의 울음소리가 울렸고, 그에 화답하듯 짐승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아아!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 아래 잠든 포식자에 대한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화재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방 안에 가득했던 화학 약품들은 불길에 호응하듯 폭발했고, 이내 불길은 템스 강 맞은 편에서도 보일 만큼 거세졌다. 지킬 박사의 광기 어린 연구와 그 산물은 내 손에 쥐어진 작은 앰풀을 제외하곤 무엇도 남지 않았다.

나는 주변 시민들을 깨워 대피시켰다. 화재를 목격한 런던 소방대가 도착해 불길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끝없이 비대해질 것이다. 지킬 박사가 품었던 광상을 땔감 삼아, 런던의 필연적인 몰락을 예언하듯 밤새도록 타오를 것이다.

아아, 그렇다. 짐승은 여전히 런던에 살고 있다.

실그윈 숲의 짐승과 그것에서 비롯된 피조물들은 인간도 짐승도 되지 못한 채, 런던의 뒷골목에서 방황할 것이다. 그들이 빛과 소음을 두려워 하는 한, 우리도 그들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적기조례가 폐지된 런던은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러웠다.

하지만, 단 하루라도 자동차가 거리를 달리지 않고,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런던이 침묵에 잠긴다면, 그들은 다시 거리로 기어나올 것이다.

어둡고 조용한 골목에 다가가지 않는다면, 아직은 그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아직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쥐고 있었다. 지킬 박사는 내면의 하이드를 꺼내지 않았고, 그는 스프링힐드 잭이 아니었다. 셰리 패트릭은 그저 짐승에 불과했다.

그러면 대체 그자는 누구란 말인가.

늑대인간으로 착각될 만큼 사악한 야성을 지녔으며, 인간의 교활함을 함께 갖춘 악마는 여전히 런던 밤거리를 배회하며 내 주변을 얼씬거리고 있었다. 내가 잠드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그 순간 보았다!

런던의 밤하늘, 화재에 빛나는 저 적색 하늘에 악마가 있었다! 짐승같이 웃으며 지붕과 지붕 사이를 뛰어다니는 악마 말이다! 저자야말로 스프링힐드 잭 본연이다!

나는 홀린 듯이 그 뒤를 쫓았다. 아니, 실제로 나는 악마에게 홀렸다. 저자는 언젠가 나를 집어삼킬 테고, 내가 먼저 그를 죽여야만 했다.

어디로 갔지? 빈 런던 시내를 어지럽게 둘러보다가 골목 너머로 사라지는 인영을 목격했다. 과연, 짐승처럼 네 발로 뛰는 자였다.

런던의 사나운 바람이 거칠게 몰아치며 그 속에 짐승 울음소리를 실었다. 어느 틈에 모자가 벗겨져 있었다. 템스 강에서 불어오는 강풍에 날아간 것이다. 바람에 도둑맞은 유실물을 런던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것보다는 스프링힐드 잭이다. 나는 서서히 이 추격전이 끝이 다가옴을 직감했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은 나의 아파트다. 그자는 흉계를 품고 나와 가정부를 해할 생각으로 아파트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아, 그 사악한 계획을 미리 알아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아파트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집 열쇠가 문 구멍 사이에 꽂혀 있었다. 나는 품속을 뒤졌다. 없었다! 그자는 어떤 교묘한 술수로 내 열쇠를 몰래 빼간 것이다!

나는 문을 크게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짐승이 날뛴 것처럼 어지러웠다. 아주 짙은 흙먼지 냄새가 풍겼다. 마치 짐승이 체취를 지우기 위해 먼지구덩이 위에서 뒹군 것처럼 말이다.

현관에 찍힌 족적을 보고 하나의 진실을 깨달았다. 아, 그래! 그는 다리 하나가 없다! 그렇기에 네 발로 뛰어다닌 거다!

방 안에서 소리가 났다. 인기척, 나는 곧장 문을 열어, 그 흉물과 마주하였다!

내 얼굴이 털로 뒤덮인 광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거울이었다.

"그래...."

광견병의 또 다른 이름.

"나였어... 나는, 나는 미치지 않은 게 아니야...."

공수증.

"내가 바로 스프링힐드 잭이었어!"

"주인님?"

마리?

"늦은 밤에 죄송해요. 아마 믿기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제가 시계를 찾은 거 같아요. 이게 왜 제 침대 밑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제가 훔친 게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안돼, 오지 마! 내게 오지 마!"

"주인님? 도대체 왜...."

나는 기쁜 마음으로 마리의 목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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