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증기기관묵시록
─────쿵! 쿵! 쿵!
나는 문 손잡이를 잡고 두드렸다. 그칠 기미가 없는 폭우가 코트를 축축이 적셨다. 매번 빗줄기가 강해질 때마다 동공 안으로 빗물이 흘러 들었다.
"알트! 알트!"
다시 한 번 문 손잡이를 거칠게 내리쳤다.
─────쿵! 쿵! 쿵!
잠시 후,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문 너머 나타난 것은 아서의 이름 모를 쌍둥이 형이었다. 아서에게서 비밀을 들은 이래로, 나는 그와 마주하는 것이 영 거북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필레몬 허버트님."
여전히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노후하다 못해 피부가 흘러내리는 수준이었기에, 표정은커녕 눈조차 마주 보기 어려웠다. 그는 문을 다 열지 않고, 내 품에 들린 마리의 머리를 보고 엄숙히 고개를 저었다.
"손님을 모시고 오실 거란 얘기는 못 들었는데요."
"자네 눈에는 이게 사람으로 보이나?"
나는 어이가 없어서 성내며 물었다.
"예. 이목구비, 전부 제자리에 있군요."
"내가 아서하고 알아서 얘기하겠네."
"그럴 순 없습니다."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했으나, 집사는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힘을 써도 그 건장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문 앞에서 실랑이하고 있었더니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필로? 필로야?"
아서의 목소리였다. 나는 낑낑대며 외쳤다.
"잘 됐군! 알트, 자네 형에게 설명 좀 해주게. 도통 말이 통해야지!"
그는 문 앞에 도착해 나와 집사를 번갈아 쳐다봤다. 집사는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분이 예정에 없는 손님을 대동하고 오셔서...."
"아, 과연. 괜찮아, 들어와도 돼."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서의 말 한마디에 그는 순순히 문에서 물러났다. 그리곤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비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아서는 친한 척하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설명하는 걸 잊었는데, 형은 아직 사람을 제대로 구분할 줄 몰라. 사실 만나본 사람도 열 명이 안 될 거야. 그건 그렇고, 평소 들고 다니던 촌스러운 지팡이는 어디 두고 왔나?"
내 손에 들린 것은 무덤가에서 주운 굵은 나뭇가지였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 이야기, 좋지. 가면서 하자고. 네가 마리인가 하는 여자의 시체를 찾아오겠다고 하고 이틀이나 사라졌으니까, 재밌는 이야기 하나쯤은 들고 왔겠지."
아서는 적잖이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그제야 나는 그의 모습을 살폈는데, 드물게도 그는 실내복을 입고 있었다. 꾸미는 걸 좋아하는 그가 손님 앞에 이런 허름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보아, 어지간히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내 품에 들린 마리의 머리통을 응시했다.
"기대한 것보다 못한데."
나는 기겁했다. 잘린 머리에 대한 첫 평가가 외모 품평이라니. 내가 잘린 머리를 들고 다니는 것이 처음이라 무엇이 정상적인 반응인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것은 아니었다.
"자네랑은 안 어울려. 더 좋은 여자를 찾는 게 어때?"
"당연하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세상에!"
아서는 내가 소리를 지르자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착각이었나?"
"자네가 내 친구가 아니었다면 장갑을 던졌을 거야. 내 명예와 그녀의 명예 모두를 걸고 말이야. 자네마저 숱한 머저리 같은 기자에게 속아났다고 말하지 말게."
"글쎄... 나는 드라마가 있으면 더 재밌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는 능청스러운 말투로 딴청부리며
"사자소생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영웅은 지하 세계에서 자신의 죽은 반려를 찾아 돌아오지."
사자소생.
그 문자가 주는 무게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둘 중 누구 하나 그것이 비현실적이라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 이 저택에서는 감히 입에도 담지 못할 사악한 기적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것만으로 그녀를 살릴 수 있는 건가? 약속대로 머리는 갖고 왔네."
"나야 모르지, 전문가가 아니니까. 그래서 존재하는 학술회가 아니겠어."
아서는 촛대를 아래로 꺾었다. 지하실 입구가 열리며, 안쪽에서 뜨거운 증기 바람이 새어 나왔다.
우리는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평소보다 훨씬 많이 걸은 탓에, 나는 단을 내려갈 때마다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서는 그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고, 심지어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 지하실을 처음 발견했을 때, 오라클 옆에는 대량의 출력물이 쌓여 있었어. 말할 것도 없이, 나의 선친께서 입력해 놓으신 수식의 출력물이었지. 그 양이 얼마나 방대한지 출력물은 지하실 바닥을 가득 메우고 모든 인쇄지를 소모한 상태로도 연산은 끝나지 않았어."
오라클. 나는 지하실 벽면을 잠식한 기계를 떠올렸다. 족히 기관차를 움직이고도 남을 증기기관을 달고 간신히 움직이는 그 철제 괴물 말이다.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지. 평소에도 오라클은 다른 수식이 없으면 모든 연산량을 그 계산에 쓰고 있지."
19세기 유일한 컴퓨터. 족히 수십 년은 이전에 존재했을 그 괴물이 최소한 연 단위로 계산하고 있을 수식의 정체가 나는 심히 궁금해졌다.
"있잖아, 오라클은 알파벳과 아라비아 숫자 외에도 수백 종류의 기호를 출력할 수 있어. 나는 공들인 조사 끝에 이게 어느 문명권에서도 사용한 적 없는 문자란 걸 알아냈지. 이집트의 상형문자부터 인도의 데바나가리 문자, 저 서방의 한자까지도 이 문자열과 닮지 않았어. 선친께서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암호를 사용하신 거지."
하지만 아서는 정말 고약한 화자다. 그는 내 호기심을 있는 대로 자극하고는, 곧바로 주제를 돌려버렸다. 만약 내가 여기서 대답을 재촉하면, 그는 성의 없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누락시킨 대답을 돌려주겠지.
"그 출력물도 마찬가지였지. 나는 유럽 전역에서 내로라하는 언어학자들을 한 달간 초빙해 모시고는, 그들에게 그것을 선보였지. 몇 날 며칠을 그것을 필사하며 머리를 싸매던 이들은 한 명씩 내 방에 찾아와 내 고약한 장난을 질책하며 돌아가더군. 아주 실망스러웠지. 저치들은 결국 이름 뿐이었던 거야. 내가 프랑크 학술회를 계획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지."
아서는 실망했다는 표현치고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특히 프랑크 학술회를 발음할 때는 정성스럽게 혀를 굴리는 것이, 그 자신의 업적이 적잖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수단이 없었지. 나는 해독을 포기하고, 그들이 유일하게 알아챈 사실에 주목했지. 길고 긴 출력물은 반복되고 있다는 거야. 세밀한 변화는 있지만, 큰 가지는 바뀌지 않았지.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나조차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문자가 있었어."
그는 뜸들이며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굉장한 비밀을 고백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바로 숫자야. 로마 숫자로 Ⅰ이 적혀 있었지."
이야기는 끝이었다. 아서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는 그가 원하는 반응을 정확히 알았다.
"설마 그게 끝은 아니겠지."
"그리고, 내가 지하실에 내려온 날부터 몇 달 전까지 이 숫자는 바뀐 적이 없었어."
아서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을 이었다.
"나는 오라클을 분해해봤지."
"분해했다고!"
이번에는 진심으로 경악하고 말았다. 그의 무모함은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그런 발상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놀라웠다.
"그래, 그러지 않고선 출력 가능한 기호 같은 걸 어떻게 알아냈겠어. 유감스럽게도 알아낼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지만."
아서는 아까보다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나는 그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그것은 이 시대 존재할 수도 없는 고도의 기술이 접목된 기계 장치였고, 심지어 아서는 기술공조차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큰 수확이었어. 이봐, 필로. 로마 숫자의 구조에 대해선 좀 아나?"
"자네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라고 믿겠네."
"그래, 로마 숫자는 조합이야. Ⅰ, Ⅴ, Ⅹ. 이 세 글자만으로 39까지 표기할 수 있지. 일일이 모든 숫자를 기호화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오라클은 개별 문자를 전부 따로 기호화했지."
그는 어디서 났는지 종이 한 장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안 보여."
"뭐? 제대로 봐!"
그러자, 아서는 굉장히 실망스럽다는 듯이 외쳤다. 그야 그렇겠지. 지금 이 대화를 위해, 그는 어제부터 온종일 이 종이를 들고 다녔을 것이다. 그런데 고작 지하 계단이 어둡다는 이유로 내가 보지 못한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목에 걸은 안경을 쓰고 가늘게 실눈을 떠서 억지로 종이를 살폈다.
"로마 숫자군."
"오라클로 출력할 수 있는 로마 숫자를 전부 출력한 거야."
"13부터는 누락된 건가?"
아서는 고개를 돌려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필로, 반대야. 내가 직전에 한 말을 까먹었나? 로마 숫자는 문자 3개로 39까지 숫자를 표기할 수 있다고. 그러니 12까지 채워져 있는 거야말로 이상한 거지!"
그의 말이 맞았다. 그저 숫자를 표기하기 위함이라면, 이렇게 번잡한 수를 쓸 필요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숫자를 표기하는데 로마 문자를 사용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라비아 문자는 고작 10가지 문자로 얼마든지 큰 숫자도 표기할 수 있으니까.
"내 가설은 이래. 첫째, 애초에 오라클은 저 연산식을 계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거야."
아서는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깨닫고 외쳤다.
"과연, 12까지밖에 표기되지 않는 게 아니라, 12까지밖에 표기할 필요가 없었던 거로군."
"...그래, 그게 내 두 번째 가설이었지. 로마 숫자는 저 출력만을 위해 넣어진 기호라는 거지."
자신이 할 말을 뺏긴 아서는 손가락을 접으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꿍얼거렸다.
"아무튼, 내가 지하실에 내려온 이후로 숫자는 언제나 Ⅰ이었어. 그리고 얼마 전, 그것이 마침내 Ⅱ로 바뀌었는데 그게 언제라고 생각하나?"
나는 이것이 본론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그토록 많은 곁다리를 거치고 지나와, 마침내 하고 싶은 말을 할 준비가 된 것이다.
"제이콥 섬이 템스 강에 가라앉은 날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필로? 수식은 고정값이 아니야. 런던에 무슨 일이 생기면 식은 곧바로 반응하는 거야."
우리는 계단의 끝에 도착했다.
아서는 전에도 보았던 *가압반응형 수평작동 장치*... 내 표현대로라면 자동문 위에 올랐고, 마침내 지하실의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쏟아지는 증기의 습기에 나는 기침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이 설명을 하는 이유는 뭔가?"
"둘이야."
아서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첫째로, 저번에 내가 이 설명을 하기 전에 자네가 허리띠만 남겨두고 무례하게 도망친 바람에 설명할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고."
그는 아까 내가 말을 끊은 것에 대한 보복을 하듯이 비아냥거렸다. 나는 그의 짜증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하나는, 지금부터 행할 것들이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
나는 진실을 깨달았다!
아서는 경고하고 있었다. 그 모든 숫자와 오라클에 대한 신변잡기는 오로지 이 하나의 경고만을 위한 준비였다. 그럼에도 그는 내 섣부른 말실수를 이유로 정말 중요한 사실 하나를 숨기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건, 오라클의 숫자가 올라간 것에 대해 그는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모종의 단초라고 짐작했다.
"신에게만 허락된 생과 사의 영역에 발을 들인 인간은 모두 처절한 최후를 맞이했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그랬고, 아스클레피오스와 히폴리투스가 그랬듯이."
아서는 특유의 장황한 화술을 이어나갔다. 흘깃 살핀 아서의 옆모습으로는 두려워하는 듯이, 환희에 젖은 듯이 난해한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벼락을 맞고 죽었다지. 하지만 피뢰침 아래에 우리는 천벌조차 극복했어. 과연 신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벌할까."
나는 그가 얼마나 이중적인 존재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크툴루 신화.
그는 반은 인간이되, 반은 신인 것이다.
"필레몬, 내가 저번에 한 말을 기억하나?"
그리고 아서는 신 중에 누구보다 열정적인 모반자였다.
"내가 셜리 마리, 그 보잘것없는 여성을 되살리는 일에 동의한 것은, 비단 자네를 아끼는 마음 때문만은 아니야. 우리는 오늘에 이르러, 신의 영역에 발을 디디는 거야.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신이 되는 거지."
나는 다시금 그에게서 이형의 존재를 봤다. 다리였다. 분명히 절지동물 특유의 양지형 부속지가 몇 개고 모습을 비췄다 감추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한 가지 연구를 하고 있어. 그건...."
─────덜컥.
천장 위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지하실 비밀 계단이 열리는 소리였다. 무거운 물체가 돌계단을 타고 쓰러지듯 떨어지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왔다.
"나중에 얘기하지. 오늘의 주빈이 온 것 같으니."
아서가 중얼였다. 나는 바보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허버트 웨스트인가?"
그러자 아서는 알아듣지 못하며, 미간을 좁혔다.
"누구와 착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이름은 프랑켄슈타인이라네.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