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모든 사람 중 가장 신비한 자
"다음번에는 네가 찾아오도록 해. 직접 와보니 여긴 너무 멀더군."
아서는 그런 오만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하지만 나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몇 가지 비전을 더 나에게 털어놓았는데, 내 정신은 그의 과감하고도 충격적인 발상에 마모되고 말았다. 내가 파우스트라면, 아서는 필시 메피스토펠레스다. 나는 이미 그의 이단적인 계획에 홀려, 악마가 춤추는 브로켄 산 끝자락에 도착해 있었다.
어찌나 오래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는지, 우둔한 쥐 한 마리가 내가 사람인지 사물인지 확인하기 위해 구멍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상념 끝에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아서 프랑크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와 같이 충동적인 자가 이토록 착실하게 자신의 계획을 수행해 왔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나란 말인가. 더 나은 사람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텐데, 아서는 마지막까지 그것만은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고약한 작자 같으니.
────똑똑.
노크 소리는 나를 상념 속에서 건져냈다.
"주인님, 안에 계세요?"
"그래."
마리의 목소리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리의 새 목소리였다. 본래 그녀의 목소리와 아주 닮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것이 그토록 낯설게 들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말할 때마다 내 영혼의 일부가 깎여나가는 듯이 서늘했다.
"방해할 생각은 아니지만, 나갈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아서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아서의 기습적인 방문에 잊고 있었지만,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나는 응접실을 나오고는, 문득 깨진 찻잔을 다 치우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것을 내버려둘 수도 없었기에, 나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내가 도자기 파편을 대충 쓸어놓기만 했던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리, 자네가 치웠나?"
내 뒤를 따라 다가온 마리는 뻣뻣한 움직임으로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 동작은 마리오네트처럼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네, 주인님이 다치실까 봐요."
"손을 보여보게."
푸른 색소가 들어간 그녀의 구슬 같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어서."
쭈뼛거리던 마리는 내 재촉에 마지 못해 손을 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좌우로 돌렸다. 역시나, 매끄러운 그녀의 밀랍 피부 위에는 전보다 긁힌 자국이 많았다.
"앞으로 그러지 말게."
"하지만, 주인님."
"집안일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가서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그... 저... 난초에 물을 준다든지, 그런 것 말이야."
나는 도무지 그녀의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나갔다 오지."
"도와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혼자 충분해!"
외출 준비를 핑계로 나는 허겁지겁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등 뒤에서 들려온 마리의 낮은 목소리는 비수처럼 등에 박혀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러면 저는 대체 뭘 위해...."
올드코트 대학.
런던 북부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이 아담한 대학교는 한때 영국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수도원 중 하나였다. 일찍이 자연 철학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한 수도사들은 이단적일 정도로 과감한 해석을 내놓곤 했고, 그 탓에 이단으로 몰려 대규모로 처형된 기록만 두 손으로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수도원은 요새처럼 변모했다. 당시의 건축물을 보수해 사용하는 지금도 캠퍼스의 각 건물은 비밀 통로나 패닉 룸을 고쳐 쓰는 흔적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아일랜드 성인의 탑은 중세 건축의 절정이었다.
탑 형태의 이 원형 성채는 유일하게 세 칼리지의 교차점에 놓였는데, 교묘한 설계로 모든 복도와 계단이 타 칼리지로 이어지지 않게 되어 있었다. 칼리지 간의 단절을 표방한 그들의 편집적인 전통이 그 이유였다.
아일랜드 성인의 탑 정상에는 학장실이 있었는데, 이 역시 셋으로 나뉘어 이어지지 않았다. 즉, 이 기묘한 대학은 같은 위치에 학장실만 세 개 있는 셈이었다.
───톡.
깃털 펜이 잉크통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꽂혔다. 그 소리는 학장실의 소용돌이 모양 돔 천장에 반사되어 공연히 더 크게 들렸다. 아폴로 그레고리오스 칼라스 교수는 서명을 마친 계약서를 제 쪽에 끌어당기고 안경을 고쳐 썼다.
"민족주의와 국제정치학... 제가 맞게 읽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런던에 갓 상경한 청년처럼 긴장한 채로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칼라스는 계약서 내용보다는 강의명에 흥미를 보이는 듯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웃는 얼굴로 악수를 권했다.
"좋습니다. 1895년 12월 2일, 오늘부로 올드코트에 정식으로 취임하신 걸 환영합니다."
긴장이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칼라스는 내 다리를 보고는 손을 내저었다. 나는 그의 배려를 받아들여 앉은 채로 악수했다. 거의 닿지도 않은 손이 위아래로 한 번 왕복했다.
칼라스 교수는 다시 자리에 앉고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학장 대리로 실례했습니다. 저는 역시 계약서보다는 책을 들여다보는 것이 마음 편한 것 같습니다."
노교수는 긴장했단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마음껏 표정을 풀었다. 그는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자신의 허점을 보일 줄 아는 자였다.
"학장님께서는?"
"그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저보다도 더 하죠. 천생 학자라고 할지, 사무에 도통 관심이 없으셔서 세 칼리지의 학장 대리에게 모든 업무를 위임하고 계시죠. 심지어 저는 그분께서 계약서에 친필 서명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습니다. 왕립 학회의 주요 논문에는 빠짐없이 서명을 실으시는 분이 말입니다."
"실례지만, 저한테 학장 서명이 담긴 편지가 몇 통 온 적이 있었습니다만."
"아, 그것도 제가 쓴 겁니다. 이제는 제 이름으로 서명하는 것보다, 학장님 이름으로 서명하는 게 쉽더군요."
칼라스는 짧게 일축했다.
"좋군요. 제가 그분에 대해 아는 것은 필기체뿐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이해합니다. 정말 불가사의한 분이죠. 학장님은 제가 아는 모든 사람 중 가장 신비한 자입니다."
내 대답에 칼라스는 크게 웃었다. 나는 그의 지중해 출신다운 과장된 반응이 썩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나저나 간신히 시간을 맞추셨더군요."
"실은 꽤 놀랐습니다. 아직도 제 자리가 남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몇몇 어리석은 이들은 당신을 쫓아내라고 탄원서를 보내긴 했죠."
칼라스는 눈썹을 으쓱거렸다.
"하지만 교수진과 학생 대표는 만장일치로 당신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올드코트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었죠. 우리는 지혜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지혜란 맑은 물과 같아서 고이는 순간 썩게 됩니다. 시대가 흐르는 한, 올드코트에는 새로운 물결이 들어와야 합니다."
나는 그 말에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히 전에도 여기서 들어본 적 있는 문구였다.
"혹시 그건 유명한 문구입니까?"
칼라스는 멀뚱히 눈을 떴다.
"이 대학 내에서만 통용되는, 그런 구호 같은 것 말입니다."
"아, 오시는 길에 이미 누군가와 대화하셨나 보군요."
"정확히 말하면, 몇 달 전 도서관에 들렀을 때 어떤 학생에게 비슷한 말을 들었습니다."
내 대답에 칼라스는 입을 떼었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는 어떻게 말하면 학생이 알아듣기 쉬울지 고민하는 교수처럼 행동했다. 실제로 그는 교수였으니, 그의 그런 버릇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음...."
그가 고민하는 동안, 나는 잠깐 시선을 돌렸다. 실은, 학장실에 들어온 이래로 신경 쓰이는 물건이 있었다. 그것은 벽면에 설치된 기계식 시계였는데, 나는 그걸 시계라고 불러도 괜찮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은 여태껏 내가 봐온 기계 장치 중 두 번째로 복잡하게 생긴 것이었다.
그 모양새는 프라하의 천문 시계와 닮았는데, 일찍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예술적인 벽시계로 알려진 그것조차 이 장치와 비교하면 단순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것은 시계라기보다 차라리 예술 작품이라 부르는 게 나아 보였다.
당장 눈에 보이는 상징물만 하더라도 로마 숫자, 교차하는 황도와 백도, 그리스식 성도, 예수와 그의 사도들, 카발라 등 끝이 없었는데, 곧 그 자리에는 또 다른 낯선 상징물이 들어섰다.
표기되는 상징물은 제각기 다른 태엽으로 도는지, 짤깍거리는 소리는 무수히 겹쳐 소음에 가까웠다. 본디 조용해야 할 학장실은 그 장치 하나만으로 런던 시내 한복판만큼 시끄러웠다.
상징물들은 매 순간 형이상학적인 교류를 이루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때문에 시계는 초 단위로 다른 물체로 바뀌는 듯한 착시가 일어났다. 이래서야 도리어 원하는 정보를 알아내는 게 불가능했다.
실제로, 나는 아까부터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기를 썼지만, 우연히 지나가는 시침 하나를 발견하는데 그쳤다. 분침과 초침도 어딘가에 있는 건 분명한데, 그것이 어디서 어떤 형태로 표시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신경 쓰이십니까?"
내 시선이 아무래도 노골적이었는지, 칼라스는 내게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나는 무례했음을 인정하고 그에게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누구나 저걸 처음 보면 그렇게 반응하죠."
칼라스는 묘한 자부심을 내보이며 말했다.
"저것은 학장님께서 직접 설계하신 육혜 시계(Hexasofia clock)입니다."
"육혜, 말입니까?"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표현이었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이 설명을 시작했다.
"혹시 육감에 대해 아십니까?"
"제가 해군 복무하고 있을 때, 몇몇 철없는 신병들이 그런 것을 신봉하곤 했죠."
"아, 그렇군요. 그에 대한 박사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그들이 눈먼 총을 맞고 전사한 이후로, 그런 말을 꺼내는 자와 가급적 상종하지 않으려 합니다."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도리어 칼라스는 놀라며 사과했다.
"유감입니다."
"십 년도 더 된 일입니다."
실수였다. 신사답지 못했다. 아침에 본 마리의 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탓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예민한 반응에 대한 변명이 되진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육감은 그런 유사 과학과는 다릅니다. 말 그대로, 인간의 여섯 번째 감각을 말하고 있죠."
"예를 들어, 균형감각 같은 것을 말하는 겁니까?"
"지혜입니다. 인간의 오감에 이은 육감이죠."
칼라스의 늙은 눈이 총명하게 빛났다.
"지혜가 있는 자는 그렇지 않은 자보다 많은 것을 봅니다. 통상적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의 지평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죠."
"그건 철학입니까?"
내 질문에 칼라스는 싱긋 웃었다.
"육혜 시계는 언제나 여섯 가지 정보만을 표기합니다. 하지만 진정 지혜로운 자라면, 그 너머에 있는 무수히 많은 정보를 거기서 이끌어낼 수 있죠. 여섯 가지로 족히 천 가지를 알 수 있도록 설계된 걸작입니다."
"제게는 썩 추상적으로 들리는군요."
"아니요. 실제로 가능합니다. 저도 육혜 시계에서 몇 가지 정보는 언제든지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직까지 육혜 시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은 학장님밖에 본 적이 없습니다."
이 경력 많은 늙은 교수가 허풍 떨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놀라운 일이었다. 내게는 그저 정신 사납게 보일 뿐인 저 복잡한 장치가 누군가에게는 정말로 쓸만한 벽시계라는 뜻이니까.
"그리고 당신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분명 저보다도 더 많은 걸 보시게 될 거라 장담합니다."
칼라스는 자연스럽게 윙크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교수임이 분명했다.
"어쩌다 보니 설명이 길어졌군요.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았나요?"
"아니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작별하기 위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는 칼라스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학장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모처럼이니 인사드리고 싶습니다만."
"오늘이라면... 제임스 타운 칼리지에 계시겠군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셔야겠습니다."
"잠깐 가서 만나는 것도 안 됩니까?"
칼라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이를 들다 보니, 정작 중요한 걸 놓치는 일이 잦군요. 처음부터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그는 안경을 벗어 닦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올드코트는 지혜를 추구합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도 좋습니다. 뭐든지 말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원칙만은 준수하셔야 합니다."
칼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경을 고쳐 썼다.
"절대 다른 칼리지 구역으로 넘어가선 안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몰라도, 나는 이 사람 좋은 노인에게서 공포를 느꼈다.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칼라스의 눈에 맺힌 빛깔은 내가 지금까지 만나 온 광인들과 비슷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칼라스 교수는 다시 표정을 풀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오늘이 학장님께서 성 헨리 8세 칼리지에 방문한 날이라고 했어도, 그분을 만나뵐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군요."
"무슨 뜻입니까?"
"곧 알게 될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저도 아직 그분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의 얼굴에 그려진 것은 지금까지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기분 좋은 미소였지만, 내게는 이전만큼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 미소에는 깊은 비밀이 맺혀 있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올드코트 학장, ■■■ ■■ ■■■는 모든 사람 중 가장 신비한 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