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 ■■■가 오다
그날 밤, 런던 시내마저 음산한 정적에 가라앉은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마리가 내 방에 찾아왔다.
평소라면 잠들 시간이었지만, 나는 방 안에 켜놓을 수 있는 모든 불을 켜놨다. 그녀는 내 손짓에 따라, 아무 말 없이 침대 위에 다소곳한 자세로 앉았다.
책상 위에는 두 권의 노트가 올려져 있었는데, 이는 각각 흑천복음과 마리 퀴리의 노트였다. 평소 보이지 않는 내 작업물이 분명하였고, 마리는 일말의 호기심을 보이는 한편, 애써 자제심을 발휘하여 눈을 돌렸다.
나는 낮부터 많은 말을 준비했지만, 정작 그녀가 나타난 이후로 한참 동안 무슨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처음 나온 문장은 어떤 미사여구도 붙이지 않은 순수한 날것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자네를 죽인 건 나라네."
마리의 수은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몰랐나?"
"...아니요."
구리와 아연을 섞어 만든 그녀의 인공 성대가 조율이 잘못된 악기처럼 스산한 음색을 내었다. 미학적인 소리가 났지만, 인간의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미숙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크게 다친 줄은 알았지만, 몸을 버릴 정도로 다쳤다면 그건 죽은 걸 테니까요. 그리고...."
콜라젠과 방부제를 섞어 채운 그녀의 유리구슬 눈동자가 내쪽을 향해 굴렀다.
"그래, 그날, 내가 자네의 목을 물었네. 송곳니가 동맥을 파고들었고, 과다출혈 끝에 심장마비, 그게 사인이었네."
마리는 겁먹은 듯이 눈을 피했다.
"너무하세요... 어째서 저한테 그런 잔인한 얘기를 하시나요? 여전히 제가 시계를 훔쳤다고 생각하고 계신가요?"
"아니, 그게 아니야."
나는 수줍게 고백했다.
"나는 미쳤네."
"네?"
"나는 이성을 되찾고자, 짐승에게 내 자아를 먹였지만 지금도 온전하다고 말할 수 없네. 눈을 감으면 언제라도 내 두개골 속에 있는 벌레의 소음을 듣는다네. 그것은 착실하게 매 순간 뇌를 사각사각 갉아먹고 있지. 그렇게 나는 미쳐가고 있는 거야."
마리는 눈을 깜빡였다.
"비유인가요?"
"그러길 바라고 있네."
나는 마침내 아서의 고충을 이해했다. 이 모든 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진정한 공포를 마주하기 전에 어떻게 운을 떼어놓아야 하는가.
그저 힘없이 나는 준비한 문장을 읊기 시작했다.
"상상해보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바다로 떠난 마젤란이 여정 끝에 거대한 낭떠러지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나. 인류가 쌓아온 모든 지식이 헛된 몽상이 되고, 대륙의 운명이 해류에 이끌려 언젠가 끝없는 나락 속에 처박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나는 빅토리아 호의 18명의 생존자 중 하나라네. 금단을 넘은 대가로 참혹한 진실을 미리 엿보았고, 인간의 여린 정신은 그 사실을 견뎌낼 만큼 강인하지도 않지."
"저에게는 너무 어려운 말이에요."
마리는, 내가 받은 인상이 틀리지 않다면, 겁 먹은 듯이 사양했다.
"마리, 내가 어째서 자네를 곁에 뒀겠나. 늘 말했지만, 자네는 그렇게 어리석지도 않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미 이해했을 거야. 뭘 말하려는지 눈치채지 않았나."
둘 사이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자네가 오질 않길 바랐네. 자네가 런던을 영원히 떠나서 늦게나마 새로운 삶을 찾기를 기원했네. 나는 평생을 바쳐 자네가 안락한 인생을 즐기도록 도우며, 알량하고 속 편한 속죄를 할 생각이었던 거지. 하지만 자네가 런던에 남기로 한 이상, 나는 더는 진실을 숨기지 않겠네. 원래는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나는 말끝을 흐렸다. 단어가 쓰게 느껴져 혀끝이 저렸다.
"런던의 음지에는 이미 인간을 족히 파멸시킬 어둠이 산재해 있네. 그리고 셜리 마리, 자네의 이름도 그 안에 있지."
노트에 끼워 놓은 종이를 꺼내 보였다. 그것은 아주 특수한 형식에 맞춰 제작된 인쇄용지였다. 내가 아는 한, 이 시대에 이런 종이를 사용하는 기계 장치는 하나뿐이었다.
"프랑크 백작을 기억하나?"
마리는 고개를 삐걱거리며 끄덕였다.
그날, 셜리 마리는 지하 실험실 한복판에서 깨어났다. 깨어난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자신의 머리를 봉합하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였다. 그 뒤에는 나와 아서가 서 있었고, 그녀는 곧 자신이 나체라는 걸 깨달았다.
어린 처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악몽일 터였다. 아서와 프랑켄슈타인이 차례대로 손님으로 찾아온 것 역시 그녀의 상처를 벌렸을 것이다.
"그는 남들보다 먼저 세상의 비밀을 깨우친 자라네. 그는 인류가 그림자 속에 완전히 빠지지 않을 수단을 강구했고, 그 일환으로 프랑크 학술회라는 비밀 학술회를 조직했지. 나도 그와 함께할 예정이야. 그리고, 학술회의 구심점은 바로 저택 지하에 있는 오라클이라는 기계장치라네. 그래, 그날 자네가 지하에서 나오면서 본 증기를 먹는 괴물 말이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건 고도의 연산 능력을 갖춘 계산기로, 아주 오래전부터 미래에 대해 예측하고 있지."
나는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의 계산대로라면, 마리 자네는 언젠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지도 몰라."
셜리 마리. 그녀가 되살아난 날, 오라클은 수개월 만에 다른 값을 내놓았다.
「Ⅲ」
출력 용지 위에는 이런 문구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자네는... 아마도 그런 것 중 하나가 된 거야. 솔직히, 나는 지금도 자네가 두렵네."
그날 밤, 나는 마리와 몇 마디 말을 더 나눴다.
인류 최후의 생존자가 보게 될 신화적인 광경에 대한 예언부터 시작해서, 깨진 찻잔을 어떻게 채워넣을지 같은 사소한 것까지 말이다. 마리는 내 예상만큼 충격받지 않은 것 않았다.
그녀는 아주 진지하게 자신이 손님을 맞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기도 하고, 말없이 문 여는 시늉을 하며 어느 것이 덜 끔찍한지 물었다. 나는 그녀가 정말로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건지, 아니면 분위기에 취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자해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런던에 불 켜진 건물이 하나만 남을 때까지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비슷한 시점에 서로 입을 다물었다. 모든 이야기가 일시에 증발했고, 무엇에 관한 얘기를 나눴는지도 흐릿했다.
그녀는 말없이 깊은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였고, 그 모습은 정말로 인형처럼 보였다. 나는 자겠다고 말하며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녀가 방을 나서자 창문을 열고 토했다.
그날 밤, 나는 오한에 시달리며 의식을 잃었다. 나는 죽은 자와 춤추는 악몽을 꿨다.
이튿날, 나는 이른 아침부터 외출했다.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생전 그녀는 언제나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출근해 청소를 마칠 정도로 부지런했으니 자고 있을 거로 생각하진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걸 인정했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마차를 잡는 대신에 조금 걷기로 했다.
런던의 겨울 아침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나는 짙은 물안개가 낮게 깔렸다. 숨을 쉴 때마다 기관지에 끈적이는 악취가 눌어붙었지만, 그것이 생각을 정리하기 딱 좋았다.
대학은 멀지 않다. 내 느린 걸음걸이로도 1시간 안에는 도착할 것이다. 나는 위를 올려다봤다. 런던은 내게 하늘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올드코트 대학.
이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유니버시티는 19세기를 기준으로 삼아도 유별난 점이 많았다. 당연히 21세기의 관점에서는 어쩌다 이런 경위에 이르렀는지 이해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고로, 나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선진 대학, 케임브리지의 이름을 빌려 짤막한 설명을 하겠다.
당연하지만, 예시로 든 케임브리지가 나의 모교인 것에는 아무 사심도 없다. 배출해낸 것 중 영어사전이 가장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조차 뒤늦게 케임브리지의 앞선 시스템을 본떠갈 정도니, 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하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19세기의 모든 대학생은 칼리지에 속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아는 단과 대학의 개념이 아닌, 대학 내에서 나뉘는 일종의 소속과 같은 개념이다. 각 칼리지는 일정한 부지를 가지고 학생은 자신의 칼리지 부지에 있는 캠퍼스 건물에서 기숙 생활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학과의 개념이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학과는 여전히 별도로 존재했고, 그에 따라 담당 교수가 배정되었다. 케임브리지에서는 한 명의 교수가 적으면 한 명, 많아 봐야 대여섯명 의 학생을 전담했는데, 이는 이 시대 대학이 학문을 수양하는 장소로서 역할이 강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칼리지가 들을 수 있는 강의를 제한하는 일은 없었다.
이쯤되면, 올드코트의 관습이 19세기 기준으로도 얼마나 기이한 것인지 알았을 터이다.
수도원이 최초로 민간에 문을 연 250년 전부터, 그들의 불편한 관습은 현대까지 이어져 왔다. 좁은 부지 탓에 고작 셋밖에 나뉘지 않은 칼리지는 철저한 고립주의를 기저에 두고 단절되어 있었다.
교수와 학생은 타 칼리지에 누가 있으며, 어떤 수업이 진행되고 있고, 또 어떤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소속 교수와 졸업생은 캠퍼스 밖에서도 정체불명의 소속감으로 비밀주의를 고집하여, 자신이 속한 칼리지를 밝히는데 조심스러웠다.
기이한 일이었다. 런던 구석에 이토록 거대하면서 은밀한 공동체가 공공연하게 운영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가 있었다.
■■■ ■■ ■■■.
전날, 아서의 편지를 본 이후로 나는 올드코트에 선입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칼라스 학장 대리의 말이 옳다면, 학장은 왕립 학회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올드코트는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암시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실체는 너무나도 불투명하여,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총도 들지 않고 적이 파놓은 함정에 순순히 걸어 들어가는 셈이었다. 내가 올드코트에 이른 계기는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했지만, 필연치고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나는 흘러가는 운명 속에 어떤 단서도 놓치지 않을 각오를 굳혔다.
여하튼, 나는 이런저런 상념 끝에 성 헨리 8세 칼리지에 도착했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강의실에는 수업 시간을 빠듯하게 맞춰 도착했다. 올드코트의 모든 건물은 미로처럼 복잡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어질 것 같은 복도와 계단도 만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나는 수업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이 작은 대학에서 겨울 학기를 많은 학생이 청강할 리가 없었다. 심지어 나는 구설수에 놓인 것으로 유명세를 탔을 뿐, 학문적으로는 검증된 적도 없는 초임 교수였으니 말이다.
그런 내 예상과 달리, 강의실은 학생으로 가득했다.
좁은 방도 아니었건만, 미처 앉지 못한 학생들이 강의실 뒤편에 밀려나 서서 수업을 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학생은 노트와 필기구를 지참하고 있으니 그들이 잘못 들어온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문을 열고는 그 광경을 당황해 지켜봤다.
그러다가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 쏟아진 후에야, 도살장에 끌려가는 새끼 돼지처럼 강단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나는 괜스레 마른 목으로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진부한 서두를 끊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민족주의와 국제정치학 과목을 가르칠 필레몬 허버트라고 하네. 오늘 수업으로 많은 걸 얻어가길 바라네.
학생들의 순진무구한 박수를 받으며 수업이 시작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수업은 의외로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올드코트 학생들의 탐구심은 케임브리지와 같은 명문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준비해온 것을 하나씩 풀 때 마다 그들의 질문 세례에 답해야 했다.
그들은 나이에 어울리는 순수하고 학문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그중 몇 개는 저명한 교수도 쉽게 답하지 못할 만큼 예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수업의 교수는 나였다.
나는 진땀을 빼며 그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덧붙이기 급급했다. 나는 내 수업이 이보다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진행될 줄 알았는데, 학생들은 오로지 이치만을 따졌다. 그런 학생들에게 민족의 자주성을 설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몇몇 학생은 내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서만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결국 항복을 외치듯이 휴식을 선언했다.
그러자, 몇몇 학생이 필기구를 정리하고 방을 떠났다. 그리고 쉬는 시간 전에는 없었던 학생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칼리지의 학풍이 자유롭다는 건 알았지만, 상당히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놀라셨죠?"
내가 자리에 앉아서 쉬고 있자니, 한 학생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자네는...."
학생의 모습을 살핀 나는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하지만 대학 내에서 학생과 말을 섞은 기억은 거의 없었기에, 나는 상대가 누군지 떠올리지 못했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곧바로 보충했다.
"세 달 전에 도서관에서 만난 적 있는데 기억하시나요?"
"아, 그렇군."
그제야 나는 이 학생을 기억해냈다. 한참 내가 실그윈 숲의 야수에 관한 자료를 모으던 당시, 도서관에서 내가 계단을 오르는 걸 도와준 친절한 학생이었다.
"자네도 와있었나. 수업은 좀 들을만한가?"
나는 일말의 기대를 담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아주 솔직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좀 지루하네요. 더 나아지겠죠?"
새삼 놀라운 일이지만, 나는 충격으로 말문이 막혔다. 내가 가르치면 나이 들고 지루한 교수들보다 나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내가 받은 충격이 다 가시기도 전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올드코트에 새 물결이 들어오는 걸 기대하고 있어요. 다른 학우들도 마찬가지예요. 새로운 교수님이 취임하면 첫 수업을 들으러 오는 건 이제 와선 올드코트의 전통 같은 거예요. 지혜의 세례식이라고 할까요."
지혜, 또 그 단어가 나타났다.
이걸로 지혜라는 단어에 대한 의미심장한 신앙이 칼라스 학장 대리 홀로 품고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다양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모이는 대학에서 어떻게 이런 천편일률적인 믿음이 자랄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자네들은 속 편하겠군. 수업을 듣는 것은 자유롭고, 교수는 성적도 매기지 않으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결국 졸업을 결정하는 건 ■■■ ■■ ■■■ 학장님이니까요."
정말 이상한 말이지만, 우리의 대화는 전부 사실이었다.
칼리지 내부에 한해서, 올드코트의 모든 수업은 열려 있었다. 학생들은 전공의 개념조차 없이 자유롭게 수업을 청강하고 포기했다. 그들은 시험도 보지 않았고, 성적을 매기지도 않았는데, 이들에게 졸업장을 배부하는 것은 학장의 독단이었다.
나는 교수와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조차 게을리하는 학장이 어떻게 전교생의 학습 진척도를 판단하고, 어떤 기준으로 졸업생을 결정하는지도 마냥 의심스러웠다.
"항상 그렇게 성명으로 부르나?"
"■■■ ■■ ■■■ 학장님 말인가요?"
"그래."
"학장 대리까지 하면 학장이 총 네 명인 대학이니까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그럴듯해 보여도 여전히 탐탁지 않은 설명이었다.
"어쩌면 오늘도 만나뵐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오늘은 학장님이 우리 칼리지로 오시는 날이니까요."
"그러면 좋겠군. 난 아직 그분께 인사조차 드린 적 없으니, 학장실에 가면 만날 수 있나?"
그러자, 눈앞의 어린 학생을 깨우침을 얻은 수도사처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학장님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어요. 진정 지혜로운 자라면 말이죠."
그저 그 뜻깊은 미소에서 그저 불길함만을 느꼈다. 이주 전, 칼라스 학장 대리와 만났을 때와 같았다. 눈앞의 앳된 학생은 한순간에 다른 사람과 교체된 듯했다. 그녀에게는 불쾌한 이질감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내 수업을 들을 줄 몰랐네. 교수가 들어오는 일이 그렇게 없나?"
"아니요, 하지만 오래 남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어쩐지 그 의미만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나는 이 대학을 들를 때마다 온갖 불길한 암시에 둘러싸이고 있었다. 이런 폐쇄적인 분위기 속에 여기 남고자 하는 자는 많을 것 같지 않았다.
"우리 모두 교수님께 기대하고 있어요."
예정대로 쉬는 시간이 끝나고 강연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도무지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몇 분에 불과한 어린 학생과의 대화는 내 마음속 한구석에 타르처럼 눌어붙어 정신을 탁하게 했다. 그럼에도 수업은 쉬기 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달라진 것은 오직 면면뿐이었다. 많은 학생이 떠나고, 그 자리에 처음 보는 학생이 들어섰다. 이런 자유분방한 수업 분위기에 적응하는 것도 꽤 버거울 것 같았다.
벽시계가 11시 15분을 가리킬 무렵이었다.
갑자기 학생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학생의 외모를 잘 기억하지 못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수수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캠퍼스 어딘가에 있는 건전하고 착실한 그런 학생 말이다.
도무지 수업 도중에 사고를 칠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직후,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만큼은 몇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순수한 오르가슴이 얼굴에 떠올랐다.
탐구열로 빛나던 눈빛은 탁하게 물들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환희에 젖은 채 천장의 무언가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 ■■ ■■■가 왔다!"
모든 학생의 시선이 청년에게 꽂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따라 천장을 올려다봤다.
나는 천장에 무엇이 있는지 미처 보지 못했다. 학생의 돌발 행동이 너무 충격적이라, 그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명백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처럼 보였다.
또 다른 학생이 일어나 외쳤다.
"진짜다! ■■■ ■■ ■■■가 왔다!"
그 외침이 기폭제가 되어, 학생들이 연이어 기립했다. 이윽고 강의실 안에는 앉아 있는 학생이 없는 지경이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목이 꺾일 기세로 천장을 올려보고 있었다. 축축한 환희가 내게 쏟아져 내렸고, 그들은 기꺼이 즐겨 외쳤다.
"오! ■■■ ■■ ■■■가 왔다! 오! ■■■ ■■ ■■■가 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급하게 학생들의 면면을 훑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내게 말을 건 학생마저 저 광인의 대열에 섞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포에 질렸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던 학생도, 내 책의 문법적 오류를 지적하던 학생도, 쉴 새 없이 노트에 무언가 적던 학생도, 그 평범하던 자들은 더는 내가 아는 자가 아니었다. 그들 안에 찬 것은 그저 오르가슴뿐이었다.
나는 미쳐가는 학생들을 아연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창문 틈 사이로 삐져나온 작고 낡은 양피지를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것이 수업 시작 전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무작정 다가가 그것을 잡아 뽑았다.
학생들은 내게 무엇을 하건 관심이 없었다.
족히 수십 년은 묵은 듯한 낡은 양피지 위로는 올드코트 대학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 ■■ ■■■가 왔다! 오! ■■■ ■■ ■■■가 왔다!"
"■■■ ■■ ■■■가 왔다!"
"...."
하늘을 향해 목을 꺾고 발작적으로 연호하던 학생들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첫 연호로부터 체감상 수 분이 흐른 뒤였다. 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창가에 서 있는 나를 바라보며 학구적인 표정으로 수업이 재개되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무심코 벽시계를 돌아봤다.
11시 15분.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급하게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인사하거나 질문을 받거나 하지도 않고 도망치듯이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내가 또다시 미친 것인가? 환각을 본 것인가?
나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본능적으로 숨겨둔 양피지의 거칠고 마른 감촉이 손끝을 타고 척수에 흘렀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여기 있다. 나는 환각을 본 것이 아니다.
■■■ ■■ ■■■는 분명 여기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