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레드 카펫
핏자국은 세실 로드로 이어졌다. (적나라한 풍자 만평 같은 문장이지만, 이건 어떤 익살도 아니었다!)
성 헨리 8세 칼리지 대학동은 거대한 개미굴이었다. 그리고 그 표현은 실로 과장되지 않았다. 개미가 돌로 둥지를 쌓듯이, 수백 년에 걸쳐 수도승들이 쌓아 올린 요새는 블록 하나하나마다 저마다 우주의 법칙을 담고 있었다. 기하학적으로 엉켜 있는 복도는 우주에서 내려다본다면 필히 어떤 도형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만물의 비밀을 엿볼 자격을 얻지 못했다. 개미는 굴의 모양을 알 수 없는 법이다. 그저 촉각에 온 신경을 기울인 채, 길을 잃지 않기를 기도하며 페로몬을 뒤쫓을 뿐이다. 혈향은 인간이 맡을 수 있는 가장 짙은 페로몬이다.
갑작스러운 편집이 내 정신에 돌연 엄습했다.
내가 그저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라면? 신경이 잘려나간 개미처럼 말이다. 그런 망상을 떠올리는 순간, 모든 길이 지나쳐 온 것처럼 보였다. 한때, 내게 방향을 제시해준 울음소리도 이제는 완전히 멀어져, 들리는 소리는 지팡이 끝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와, 나 자신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나는 문득 시선을 느꼈다.
그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불가시한 붉은빛이었다. 위라는 것이 참 애매한 정의라, 나는 그것을 막연히 우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악의적인 눈길은 길 잃은 나를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아예 무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것이 아마 그들이 그토록 말하던 지혜의 본질일 것이다. 지혜란 정말로 우주에서 내려오는 것이니, 지혜로운 자는 지상의 미로에서 헤맬 수 없다는 듯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말하는 것만큼 지혜로운 자가 아닌 모양이라, 도무지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탁 탁 탁
그러던 와중, 저 멀리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경각심이 깨어났다.
광증은 옅어지고, 감각이 예리해졌다. 어떤 학생도 이런 구석진 곳까지 오지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이런 길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할 테지.
나는 탄약 가방에서 총알을 꺼내, 약실 안에 집어넣어 장전했다. 몇 번의 사건 이후로, 나는 발소리에서 상대의 다리가 몇 개인가를 주의 깊게 살피곤 했는데, 이건 분명히 이족보행 하는 자의 소리였다.
나는 총구를 사람의 몸통, 혹은 머리가 도착할 위치에 놓고 겨누었다.
"왁!"
괴성을 내며 나타난 것은 금색 갈기 털의 짐승이었다.
"저예요! 쏘지 마세요!"
아니, 그렇게 생각했더니, 그녀는 몇 번이고 마주쳤던 여학생이었다. 갑자기 멈춘 탓에, 바람에 휘날리던 부스스한 산발이 느릿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총구를 내렸다.
"세상에, 자네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저는... 어... 혹시 저번에 말했던 그 뇌 없는 사람들, 기억하고 계세요?"
"그래. 나는 그놈들을 쫓아왔으니까."
사실 그녀의 조심스러운 질문은 다소 엉뚱한 감이 있었다.
내가 그것에게 붙잡힐 뻔한 것이 고작 며칠 전의 일이다. 며칠이 아닌 몇십 년이 지나도 쉽게 잊을 것 같지 않은데, 그녀는 내가 무슨 치매 환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더니, 또 무슨 생각인지 그녀는 의외라는 듯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갑자기 또 화색을 띠었다. 내가 알던 사람 중 가장 표정이 자주 바뀌는 사람은 마리였는데, 이 학생은 그녀보다도 더 했다. 마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바뀐 이래로, 지금은 독보적이었다.
"자네도 그것들을 쫓아왔나?"
"어, 조금 비슷해요."
"그렇다면 그런 거고, 아니라면 아닌 질문에 비슷하다는 건 또 뭔가?"
그러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졸업생을 쫓아왔어요. 올드코트에서 졸업한다는 게 어떤 건지 혹시 아세요?"
"보이지 않는 괴물에게 턱이 뽑히고, 관절이 꺾인 채로 납치되는 것?"
"아, 절반 정도는 맞아요."
그녀는 깜짝 놀랐다. 내 말에 대충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아주 똑똑한 여성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직접 뛰어와요. 누가 말을 걸어도 무시하고, 아무도 시키거나 붙잡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대학동 어디로 달려가는 거에요. 그 뒤로는, 그냥 실종되어 버리죠. 그 뒤론 누구도 그들에 대해 묻거나 찾지도 않아요. 저는 가끔 신문 실종자란을 뒤져봤는데, 졸업생 이름이 거기 적힌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이상한 일 아닌가요? 어떤 가족도 그들을 찾지 않는 거잖아요."
"그럴 리가."
나는 정색했다.
"지금껏 나는 밖에서 몇 명이나 되는 올드코트 졸업생과 만났는데, 그들이 졸업장을 위조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글쎄요, 저라고 모든 졸업생 사정을 꿰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제가 기숙 생활한 지난 2년 동안 제대로 된 졸업식이라곤 치러진 적이 없어요. 다들 시끄럽게 소리 지르거나, 미친 사람처럼 뛰어갈 뿐인걸요. ...믿어주실 거죠?"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는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자네는 그걸 전부 보고 있었다고? 이 대학에 남으면서?"
"아, 그게...."
내 질문에 그녀는 멋쩍은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미소였지만, 내게는 그저 불길하게 보였다.
"알고 있나요? 저들은 까탈스러운 언니와 동생보다도 알기 쉽답니다. 그저 눈을 감고 못 본 척한다면 절대로 해코지하지 않아요. 불가시한 존재가 가장 가까운 가족보다 알기 쉽다는 게 참 우습지 않나요?"
그리고 그녀는 재밌는 농담을 했다는 양 깔깔 웃어댔다.
충격적이게도, 나는 약관에 불과한 그녀에게서, 내가 지금껏 만나 온 몇몇 광인의 흔적을 찾아냈다.
필 에식스 백작, 휘트니 리치먼드, 지킬 박사, 프랑켄슈타인 박사... 인간을 초월한 원한과 광기를 품고 있었던 광인 말이다. 지혜도, 삶의 깊이도 턱없이 부족한 그녀가 그들과 이토록 유사한 분위기를 띌 수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광인이 응당 풍기고 있을 악취가 결핍되어 있었다. 터지지 않은 증오로 가득 차, 주변 살까지 짓누르고 있는 크고 고약한 고름 말이다. 참으로 의아한 일이었다.
"자네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뭘 해야 할 지는 정확히 알겠군. ■■■ ■■ ■■■는 학생 두 명을 졸업시켰고, 그 무고한 학생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 이거면 됐네."
"구하러 가시게요?"
나는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그녀는 내 옆에 달라붙었다.
"저도 같이 갈래요."
"안돼, 지금 당장 돌아가게."
"교수님은 어째서 그 사람들을 구하려 하는 건데요?"
"그러는 자네야말로 평소처럼 못 본 척하지 않고 따라온 이유가 뭔가?"
"평소랑 달리, 오늘은 굉장한 일을 만날 거 같았거든요. 그리고 짠, 이렇게 만났네요."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말투를 지적하는 건 나이 든 사람처럼 보이기 마련이니까.
"이제 교수님도 대답해주세요."
"나는 전직 군인이니까.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돕는 게 뭐가 이상한가."
"그것뿐만이 아니잖아요. 사실 다른 이유가 있는 거죠?"
그녀는 예리하게 내가 숨기고 있는 부분을 지적했다. 내가 그들을 도우러 가는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준비를 갖추지 않았더라면 곧장 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이 올드코트 대학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밝힐 기회라고도 여기고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알았어요. 교수님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에요."
"평범하다고 불리기엔 제법 괜찮은 인생을 살았지. 그게 자네 보모를 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고."
아까부터 따돌릴 생각으로 최대한 빠르게 걷고 있었건만, 느린 발로는 도무지 그녀를 떨쳐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내 보폭에 맞춰준다는 느낌마저 들어 살짝 수치심을 느꼈다.
"교수님은 여기 교수로 온 게 아니에요, 그렇죠?"
"자네가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다만, 계약서에 서명할 때까지만 해도 꽤 괜찮은 대학이라 생각했네."
"하지만 교수님은 런던에 일어나는 모든 이상한 사건에 관여하고 있잖아요?"
"런던에 오래 살진 않았나 보군. 런던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부분 이상한 일이지. 얼마 전에 어떤 모자 장수가 절대 구겨지지 않는 실크햇이라면서 통 부분에 철판을 넣어 팔았다는 기사를 봤나? 나는 거기 출자한 기억은 없네만."
그녀는 모종의 확신을 가지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는 내게 의도를 품고 접근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나에 대해 예상보다 많은 부분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게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니 그저 불길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서가 학장에게 품었던 불안감을 이해했다. 간파당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다.
"애초에 교수님은 괴물들을 보지도 못하잖아요. 저는 정말로 도움이 될 거라고 엄숙지게 약속해요."
내가 품게 된 불안감과 별개로, 그녀가 하는 언동은 아이의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아이가 성인을 보챌 때 쓰는 약속 같은 표현도 그랬다. 분명 나이 차이가 그 정도 나기는 했지만, 그런 *약속*을 하기엔 아무래도 그녀 나이가 좀 많았다.
"상대할 방법은 생각해뒀네."
"그래도 보이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게 좋잖아요."
"진지하게 말하지만, 이건 애들이 장난으로 끼어들 일이 아니라네. 나는 어제 변호사를 통해 유언장 내용까지 확인하고 왔네. 그 정도 각오가 되어 있나?"
"네, 물론이죠. 저도 써놨거든요."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허겁지겁 걷기 시작했다.
"뭐? 뭐라고 했지?"
"세 장 정도 써놨어요. 그러니까 문제없어요."
"그거 끔찍하군. 일이 전부 끝나면 자네 부모를 만나봐야겠어. 자네 아버님의 실수를 이제야 알겠어. 자네를 아예 침대에 묶어놨어야 했는데."
"꼭 그렇게 나이 든 사람처럼 말해야 하나요?"
나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이 긴급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자네를 돌려보내기 위해 돌아갔을 거야."
"그 말은 따라가도 된다는 거네요."
"한 번이라도 도움이 안 된다면, 바로 돌아가기로 약속하게."
"어... 세 번은 안 될까요?"
"지금 돌아가게. 아니면 돌아가겠네."
"아, 알았어요, 한 번이라도 도움이 안 된다면 바로 돌아갈게요."
기어코 약속을 받아낸 뒤에, 그녀는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지금까지 기억을 되돌아보면, 원래 그렇게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던 거 같다. 그러니 지금은 고집을 부린 거로 봐야겠지. 그리 생각하니, 그녀는 첫인상이나 그녀에 대해 내린 평가에 비해 너무 어린아이 같았다.
그 모든 부분이 이상하기 그지 없었다.
한편, 우리가 쫓는 핏자국은 거의 끊겨 있었다. 이것도 안 좋은 징조였다.
길을 놓치게 되는 것은 둘째치고, 출혈이 멎어간다는 것 자체가 맥이 약해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어쩌면 너무 늦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런 핏자국 위로만 걸었다.
피로 이어진 길은 그녀를 위한 레드 카펫이었다. 그녀는 핏자국이 끊기면 그 사이를 폴짝 뛰어넘었다. 아이가 자신에게 규칙을 부여해 노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쾌활한 면모는 어쨌건, 여전히 현실은 참혹했다
우리는 머지않아 낯익은 복도에 도착했다. 사실 처음부터 이곳으로 오게 되리라는 직감은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바로 비밀 방이 숨겨져 있던 그 골목이었다.
"그것이 보이면 바로 말하게."
나는 품속의 훈장을 움켜쥔 뒤, 그것은 손에 건 채 총신을 잡았다. 공장에서 나무와 철을 덧대어 만든 4kg의 무게가 오랜 신뢰 관계를 되새김질해주었다. 지난 20년간 나는 이토록 늙었으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고작 5g도 되지 않는 화약이 제때 점화해주리라 목숨을 거는 아집 같은 것이 그러했다.
내 긴장한 표정을 보고 따라서 진지해진 것인지, 학생은 조금 더 엄숙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좋은 변화였다. 보통은 너무 긴장하여 몸을 못 움직이는 게 탈인데, 그녀는 차라리 더 진지해지는 것이 나았다.
학생은 내 몸을 받쳐 주었다. 홀로 선 채로 조준 자세를 유지하며 움직이기까지 하자니, 이 망할 놈의 목발로는 여간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우리는 골목을 돌았다.
"없어요."
나는 큰 숨을 내쉬며 총구를 내렸다. 그녀는 내게 다시 지팡이를 건넸다.
"안쪽으로 향했군."
"제가, 제가 열게요!"
핏자국은 벽 앞에 끊겨 있었다.
마치 벽을 뚫고 사라진 모양새였지만, 우리는 이 너머에 숨겨진 방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말을 더듬으며 벽 앞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단번에 벽면에 숨겨진 장치를 찾아냈다. 기억력이 좋은 건지, 눈썰미가 좋은 건지 몰라도 대단한 일이었다.
나 역시 그녀가 문을 여는데 동의했다. 나는 무언가 나타났을 때, 곧바로 쏴버릴 수 있도록 핏자국이 끊긴 벽 쪽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드르륵....
벽이 갈라지고,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문 위에는 전에 없던 생생한 핏자국이 채 마르지 않았다.
그르륵, 그르륵.
문 너머에서는 낯선 소음이 낮게 들려오고 있었다. 누군가 안에 있다. 그 사실을 깨닫자, 학생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철문 위로 손을 올렸다.
"열게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한 철문에 덧대어진 그녀의 얇고 하얀 손에 엄지 중수골 윤곽이 선명히 드러났다. 끼익, 거리는 녹슨 소리와 함께 불빛이 복도로 스며 들어왔다.
실내의 전경이 드러났다.
그르륵, 그르륵.
안에 있는 것은 한 남자였다.
그가 남자라는 걸 알아보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는데, 그 얼굴이 처참한 탓이었다. 그의 두 눈은 텅 비어 있었으며, 크게 열린 입안에서는 잘린 혓바닥 단면이 펄럭이며 핏물을 튀기고 있었다.
그르륵, 그르륵.
그의 손에는 실톱이 들려 있었는데, 그 실톱 끝으로 자신의 전두부를 벅벅 긁고 있었다. 이마 쪽엔 이상하게 출혈량이 적었는데, 혀로 피를 쏟아내고 절묘하게 핏줄을 피해 가는 부분을 깎고 있는 탓이었다.
그르륵, 그르륵.
뼈를 잘라내는 소음은 그 어떤 악몽 속에서도 들어본 적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기분 나쁜 것은 남자의 표정이었다. 나는 그와 같은 표정을 전에 본 적이 있었다. ■■■ ■■ ■■■. 그자를 볼 때 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환희에 젖어 자해하고 있었다.
나는 절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딘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딘가?"
"네?"
나는 초조하게 다시 물었다.
"어딜 쏴야하나! 그 망할 괴물 새끼들이 어딨는지 묻고 있네!"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고함을 질러댔다.
나는 문득 살핀 학생의 표정에서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건 없어요."
그녀는 말했다.
"저 사람은 자해하고 있어요. 전부 자기 혼자 하고 있는 거예요. 팔을 잡고 있는 괴물 같은 건 없어요."
"젠장!"
나는 욕설을 토해내며, 총신을 거꾸로 잡고 개머리판으로 상대의 팔을 때렸다. 묵직하게 뼈가 부러지는 감촉과 함께, 남자의 목청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의 손에서 실톱을 빼앗아 방구석으로 던졌다.
"골프 가방 안에 나이프가 있네!"
남자가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하면서, 나는 재빨리 코트를 벗었다. 학생은 그 사이에 쓰러지는 골프 가방을 온몸으로 받치고는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와."
"구경하지 말고, 나이프만 찾아 건네게!"
여우에게 닭장을 맡긴 격이었다. 나는 소리 지르며, 입고 있던 셔츠 팔 부분을 찢어서 남자의 입에 쑤셔 넣었다. 아침부터 입고 다닌 옷이긴 했지만, 런던의 오염을 뒤집어쓴 코트를 상처에 대는 것보단 나았다.
그녀는 뒤늦게 사냥칼을 건넸다. 탐험가 시절에 쓰던 것으로, 워낙 험하게 다룬 탓에 이제는 거의 골동품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코트를 여러 조각으로 자르는 것 정도는 곧잘 해냈다.
나는 남자의 팔다리를 코트 조각으로 묶어, 더는 자해하지 못하게 한 뒤에야 상황을 둘러봤다. 남자는 내가 쫓아온 졸업생과 다른 자였다.
"자네가 쫓아온 졸업생이 이 사람인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자는 또 다른 졸업생이었다.
"살 수 있을까요?"
"모르지. 이자를 병원에 데려다 줄 수 있겠나?"
학생은 고개를 저었다. 하긴, 죽기 위해 지금도 몸부림치는 저자를 체격도 더 작은 여자 혼자 옮기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그를 데리고 돌아가자니, 끌려간 다른 한 명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 남자는 외견에 비해, 상처는 크지 않았다.
눈을 뽑히고도 아직 살아 있다면, 상처부가 깔끔해 신경이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일테고, 설령 그 부분은 다쳤다고 해도 현대 의학으로는 손쓸 수단이 없다. 그렇다고 하면 두개골을 깍아낸 것과, 혀를 뽑은 것 뿐인데 둘 모두 곧바로 목숨과 직결될만한 상처는 아니었다.
결국 나는 모든 일이 끝난 뒤에, 돌아가는 길에 그를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쓰러진 청년을 움직일 수 없게 벽에 고정해 놓았다.
"의지를 가지게."
나는 문득 말했다가, 그가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해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잊어버리게. 자네는 힘내지 않는 게 낫겠어."
나는 고개를 돌려, 방 안에 나 있는 통로를 돌아봤다. 또 다른 졸업생과 보이지 않는 괴물들은 저 너머로 들어갔다. ■■■ ■■ ■■■, 아니면 왕립학회는 이 대학에서 끔찍한 실험을 벌이고 있다.
그 실체가 저 너머에 있었다. 검고 악취나는 통로 너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