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나의 이름은 케이시 오' 제럴드
다행히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중적인 의미로 정신 차렸다.
갓 깨어나기도 했으며, 뇌리를 잠식하던 광증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어느 쪽이건 크게 기대하지는 않던 일이었다. 나는 작위적일 정도의 신음을 흘리며 실눈을 떴다.
"아아... 머리가 끔찍하게 아프군."
마치 누가 내 관자뼈 부위를 힘껏 두들겨 패기라도 한 듯이 아려왔다. 입 밖으로는 낮은 신음이 강물처럼 쉬지 않고 흘렀다.
"주인님? 정신 차리셨어요?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 곁에서는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것에 의아하다, 곧 그것이 마리의 새 목소리라는 걸 떠올렸다. 곧바로 눈치채지 못한 사실에 적잖은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나는 그걸 비밀로 하기로 했다.
여하튼, 내 마지막 기억은 분명 올드코트 대학 학장실에서 끊겼건만, 정신을 남겨둔 육신은 멋대로 수 킬로미터나 떨어진 자택에 도착해 있었다.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내 이마 위로 서늘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얹어졌다. 냄새를 맡아보니 양초에서 나는 그것이었다.
"열은 없는 것 같네요."
"마리."
가까스로 목소리를 짜냈다. 숨을 쉴 때마다 목청에서 가래가 들끓었다. 런던 거리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기라도 한 것처럼 목이 아팠다.
"내가 지나치게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그다지 말하고 싶지는 않네만...."
"말씀하세요."
내 말을 듣기 위해 마리가 몸을 가까이 붙였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귀가 입술 바로 앞까지 도착한 것을 느낌으로 알았다.
"자네 손으로 체온을 잴 수가 있나? 내 생각엔 안 될 거 같은데...."
마리의 몸이 내게서 멀어졌다.
"숨넘어가시면서 처음 하는 말이 그거예요?"
"그러게 적당히 멍청한 짓을 해야지...."
"저는 유언이라도 하시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내가 이러다 고열로 죽으면 얼마나 웃기겠나. 허튼짓 말고 체온계나 갖고 오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잘 뜨이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벌려, 마리가 있을 방향을 돌아봤다.
그녀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마치 인형처럼, 그것이야말로 진정 기괴한 모습이었다.
마디 마디 나뉜 손가락은 오므렸다 펴졌다가를 반복했고, 고개는 간간이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위로 오르길 반복했다. 그 움직임은 아주 느리면서 반복적이었다. 당장 저주받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모독적인 광경이었다.
"자네, 지금 우나?"
"저는 주인님이 죽은 줄 알았어요."
"왜, 수업이 재미없어서 학생들이 날 창밖에 던지기라도 할 줄 알았나?"
그녀가 낮게 웃으며, 인공 성대의 현이 불안하게 튕겼다.
"프랑크 백작님을 불러올게요."
"아서? 그 녀석이 여기 있다고?"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세한 건 그에게 물어보지. 가보게."
"다른 거 더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아서를 부르지 않는 게 가장 도움이 되겠지만, 그게 안 되겠다면 식힌 밀크티나 한 잔 갖다 주게. 그리고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이따 체온계 좀 갖고 오게."
그녀는 공손히 고개를 푹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문밖에서 누구라도 들을 수 있는 큰 소음이 들렸다. 긴 보폭으로 자신감 있게 걸어온 그 발소리는 문 앞에 멈춰 섰다. 나는 문이 열리기도 전에 그가 누군지 알았다.
덜컥.
"필로, 자네는 내가 얼마나 신사다웠는지 알아야 해. 주인이 이토록 오래 방치하는데 얌전히 기다리는 손님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나. 나는 차 석 잔을 마시고, 스콘 두 개나 먹은 탓에 속이 느글거린다고."
아서는 그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열정적으로 고백했다. 아주 소리를 질러댔는데, 수치심을 모르는 연애였다.
"목소리 좀 낮추게, 머리가 찢어질 것 같단 말이야."
"아, 그럴 만도 하지."
그는 납득하고는 목소리를 두 톤은 낮췄다. 그럼에도 여전히 컸다.
"그게 무슨 말인가?"
"머리말이야. 그렇게 세게 얻어맞고 아픈 수준에 그친 걸 다행으로 알라고."
나는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자네 학생 말이야, 수업에 영 불만이 많았나 봐? 오죽했으면 총 개머리판으로 후려쳤을까."
나는 기억 속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학생에게 내 소총을 건네고, 내가 완전히 미쳐버리기 전에 쏘라고 말했지. 그다음에, 나는 그녀의 목을 졸랐고, 아, 과연. 그녀는 상상 이상으로 터프했던 모양이다. 머리에 총알이 박힌 것보다는 나았지만.
"영리한 학생이야."
나는 낮게 한숨 쉬며 말했다. 아서는 킬킬대며 덧붙였다.
"그래, 왜 진작 생각 못했을까. 마음에 들지 않는 교수가 있으면, 머리를 후려치면 됐는데. 나도 20년만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걸."
그는 자신의 농담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금 되풀이했다. 나는 그의 거슬리는 말장난에 어울려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녀는 어디 갔나?"
"아, 여기 있어. 지금 불러와야 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 아픈 와중에 두 괴짜를 동시에 상대하고 싶진 않았다.
"뭐, 그렇다면야."
아서는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는 그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아주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있었다. 내 다리를 아예 깔고 앉지 않은 것만으로, 그는 집주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보이고 있는 셈이었다.
"사실 자네가 깨어나기 전에, 여러 가지 묻고 싶었는데."
아, 심지어 그 어린 여학생은 아서의 말벗까지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건 아마 오늘 있었던 여정 중 가장 험난한 고난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동정했다.
"이봐, 필로. 내가 못 생겼나?"
아서는 맥락 없는 질문을 던졌다.
"마음은 꽤 못 생긴 편이지."
"그래, 나는 잘 생겼지. 그렇다면 이상한 일 아닌가? 잘 생긴 얼굴에 재치 있는 농담, 그리고 돈다발까지. 그 모든 걸 가진 남자를 어떻게 그토록 매몰차게 대할 수 있을까. 그녀는 올드코트 제일의 불가사의야. 내가 벌써 하나 찾아냈군."
그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연극조로 불평을 쏟아냈다.
"그녀가?"
"그래, 그녀가. 나하고는 거의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 하더군. 자네를 개머리판으로 후드려 팬 사실을 알아내는 데만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몰라."
아서의 헛소리는 제쳐두더라도, 그게 사실이라면 의외였다. 그녀의 괴짜 같은 감성에는 나보다 아서가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녀가 낯을 가리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아서에게도 낯을 가린 건가? 그렇게 낯가림이 심한 그녀가 어째서 내게만 살갑게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영리한 학생이라고 말했잖나."
"아,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
그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보기보다 자존심이 심하게 상한 모양인지, 평소라면 넘어갈 농담에도 민감하게 굴었다.
"그래도 그녀가 내 근처에 머무른 건, 아마 자네 가정부랑 같이 있기 싫어서 그랬을 거야. 나쁘게 생각하지 마. 우리야 그것이 태어나는 순간을 지켜본 산모라지만, 그러지 않은 자에게 그녀가 어떻게 보이겠어. 아, 그래, 마침 가정부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그녀랑 같이 마차를 타고 어디 나갈 생각은 하지마. 그 정도일 줄 알았으면 그냥 차를 탔을 거야. 운전 연습이나 할 겸에 말이야."
나는 횡설수설하는 아서의 말을 듣고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잠깐, 자네가 마리와 마차를 탔다고?"
"그래. 그러면 자네 몸이 여기까지 날아온 줄이라도 알았나 보지?"
아서는 한껏 비아냥거렸다.
"오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제, 늦은 밤에 누가 저택에 찾아왔더군. 나는 또 그놈의 조사원인 줄 알았지. 그래서 축객령을 내리러 나오니, 그, 자네의 가정부, 이름이 뭐라 했더라?"
"마리."
"그래, 편의상 메리라고 부르지. 아무튼 그녀가 서 있더군. 혼자서 마차를 타고 내 저택까지 온 거야. 얼굴을 비롯해 피부란 피부는 전부 가리고 있었지만 나는 곧바로 알아봤지. 그녀만큼 죽음의 기색을 몰고 다니는 자는 더 없으니까. 마부와 말도 본능으로 아는 모양이더군. 그 가엾은 마부의 얼굴을 자네도 봤어야 했는데."
"제발 본론이나 좀 말하게."
"...그녀가 말하길, 자네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거야. 참 지극정성이 아닌가? 아무튼, 나는 뭔가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직감하고는 곧바로 합석했어. 아, 그게 실수였지. 겁먹은 말이 1분마다 멈춰대는 거 아닌가. 성난 마부를 달래고 그 입을 막으려고 팁을 얼마나 많이 줬는지, 사흘, 아니, 나흘 전에 회의에서 아낀 돈이 무색할 지경이었어."
"돈이라면 내가 나중에 갚을 테니 이야기나 계속 하게."
"아무튼, 우리는 올드코트 대학에 도착했지. 정문이 칼리지 별로 셋이나 있다더군. 성 헨리 8세 칼리지 정문에 도착해보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네와 그 학생을 발견했지. 정확히 말하면 자네하고 또 다른 남학생 한 명을 바닥에 질질 끌면서 나오고 있더군. 메리는 자네가 시체가 된 줄 알았어. 얼굴이 그렇게 창백했으니 당연한 일이지. 우리는 곧장 자네와 그 남학생을 데리고 자네 집에 돌아온 거야. 프랑크 저택에 들이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그 학생의 정체를 모르는 이상, 그렇게 하고 싶지 않더군."
언제까지 말하나 내버려두니, 아서는 정말 끝도 없이 말했다.
그는 한참 불평을 쏟아낸 뒤에, 뭘 더 바라냐는 듯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그제야 그 길고 긴 일장연설이 끝났다는 걸 깨닫고 그가 한 말에 대해 곱씹었다.
사실 이야기의 중간부터 집중하기 어려웠다. 메리, 아니, 마리 때문이었다. 그녀가 생전에 내게 충직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그녀가... 부활, 한 뒤로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내가 그녀를 죽인 이후로는 나를 원망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그녀가 보여준 충성심에 대한 일화는, 나를 정말 놀라게 했다. 솔직히 감동했다. 그런 동시에, 죄책감이 더욱 무겁게 마음을 짓눌렀다.
"이제 자네가 말할 차례야."
아서는 말했다.
"대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두 학생과 자네는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내가 올드코트에 도착하기 직전에 봤던 물결치는 하늘, 그 모든 것이 다 무엇인지 설명해 줘야겠어."
"그래... 긴 이야기지."
"긴 이야기는 언제나 좋지. 자네가 말을 재미없게 한다고 해도 말이야."
나는 충격에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이런. 저번에도 이런 얘기를 들었나 본데?"
"두 번 정도."
"아, 운이 좋았군. 내 생각보다 훨씬 적게 들었잖아. 괜찮아, 필로. 여자들은 전직 군인한테 말솜씨를 바라지 않거든."
전혀 위로할 생각이 없는 아서의 헛소리를 들으며, 나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알아낸 모든 진실에 대한 서두를 꺼냈다.
"아폴로 그레고리오스 칼라스 교수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네."
"처음 듣는 이름이군."
"나도 그가 그런 끔찍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 몰랐네. 그는 지혜에 집착한 나머지, 성 헨리 8세 칼리지 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지혜를 키우고 뇌를 빼낸 거야.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그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뇌를 바치게 하고, 남은 육신으로는 보이지 않는 괴물... 졸업생이라 부르는 뇌 없는 자들을 양산했지."
"뇌? 머릿속의 그거 말인가?"
"그래, 그는 지혜가 뇌에서 온다고 믿었으니까. 그것이 사실인지, 그리고 그 뇌를 모두 어디에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칼라스는 다른 칼리지에까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게 분명하네. 적어도 제임스 타운 칼리지에는 그의 동조자가 있었어. 그곳의 학생들은 뇌를 뽑히는 대상이 아니라, 뇌를 뽑는 공범자로 사회로 졸업할 수 있었던 거야."
나는 잠깐 생각하고 외쳤다.
"그래, 사회에서 만난 '졸업생'들은 내가 칼리지 이름을 말한 걸 깔본 게 아니었어! 성 헨리 8세 칼리지의 교수라는 걸 깔본 거야! 언젠가 뇌가 뽑힐 대상이니까! 세상에, 그들은 정말로 다 공범자였군...."
아서는 낮게 헛기침했다.
"유레카를 외치는 것도 좋지만, 자네 혼자 아는 이야기를 그리 중얼거릴 필요는 없는 것 같지만. 그래서 칼라스라는 자는 어떻게 됐지?"
"죽었네. 내가 쐈지. 그 시체는 설령 프랑켄슈타인 박사라도 살려낼 수 없는 방법으로 분해되었네. 그가 만든 졸업생 군단도 상당수 해치웠지. 나는 한동안 학장 대리로 더 일하면서 올드코트의 남은 비밀을 파헤칠 생각이야."
"자네가 학장 대리였다고? 그건 처음 듣는 사실인데."
실제로 그랬다. 그에게는 말한 적 없는 사실이었다. 별 이유는 없었지만, 그저 말할 기회가 없었다.
"여하튼, 올드코트 대학에는 여전히 숨겨진 비밀이 많네. 제임스 타운 칼리지와 십이사도 칼리지. 그 공범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악의적인 핏자국이 더해진 대학 문양, 멈췄던 시간, 그런 것들 말이야."
몇 가지 불가사의가 나열되자, 아서의 눈이 반짝였다.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그런 느낌이었다.
"이야기를 끊어서 미안하지만, 가장 중요한 걸 빠트린 것 같은데."
"무엇 말인가?"
"달리 뭐가 있겠어, 케이시 오' 제럴드 학장. 그자 말이야."
나는 그의 지적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자는 내가 아는 자 중 가장 신비한 자야. 나는 심지어 학장 대리를 맡고 있지만, 여태껏 그자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그가 대학 일에 관여하는데 별 흥미가 없다는 건 알겠지만...."
내 대답이 이어질수록, 아서는 점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끝인가?"
"케이시 오' 제럴드 학장에 대한 이야기 말인가? 글쎄,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가 열렬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라는 이야기도 있더군."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봐, 필로. 혹시 그가 몇 살인지는 아나?"
"알려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모르겠군.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실 그가 몇 대 학장인지도 모르네. 올드코트 대학의 역대 학장은 모두 케이시 오' 제럴드라고 부르니까."
그는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다리를 떨다가, 다시 손가락을 접었다.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몰라도, 곧 단념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학장에 대해서도 앞으로 계속 조사해줘. 너무 깊이 파고들지는 말고."
"꼭 그래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서가 학장에게 보이는 편집에 의구심을 품으며, 못마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