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킹스 크로스 역, 기차의 도착
런던에는 오로지 겨울에만 볼 수 있는 빛깔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우중충한 아침 햇살이다. 런던 가정에서 밤새도록 피워댄 난로 탓에 탁한 매연이 상공에 정체하는데, 아침이 되면 물안개와 섞여 탁한 기류를 형성한다.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창문에 낀 옅은 점막 같은 것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가정부는 아침부터 분주히 창문을 행주로 문지르며, 우중충한 창 유리와 사투한다. 그럼에도 점심쯤 다시 창문은 뿌옇게 변하는데, 런던에 산다는 건 이렇게 반영구적인 시각 장애를 안고 산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햇빛은 온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갯속에서, 기어코 1억 5천만 킬로미터를 가로질러 런던 보도 사이의 잡초에까지 생명을 부여한다.
이런 빛깔은 런던이 아니고서야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다. 나는 그러기에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나의 사랑, 나의 자랑, 두 번째 고향, 런던.
아직 189라는 숫자 뒤에 6보다는 5가 오는 것이 익숙한 새해 어느 날이었다.
내 손에는 두 통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각각 발신인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왕립 베스렘 병원」 「앨리스 플래전스 리들」
공교롭게도 지난달 대학 조사 중에 마주친 두 청년에 관한 편지가 같은 날 도착한 셈이었다. 나는 첫 편지를 뜯었다. 안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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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1월 20일
J.D의 후원인, 필레몬 허버트 남작님께
알려드립니다.
당 병원에 대한 귀하의 후원에 언제나 감사합니다.
저희가 보호 중인 환자는 전날 부로 상태가 악화하여 집중 치료를 위해 뇌수술동으로 옮겨졌습니다.
추가 비용 청구는 발생하지 않으나, 치료 기간에는 면회가 금지됩니다.
여왕 폐하의 충실한 신하에게 건강한 정신이 깃들길.
왕립 베스렘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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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라고 하면, 자신의 눈과 혀를 뽑고 자해하던 그 불쌍한 청년의 가명이었다. 나는 그 이름 모를 청년의 목숨을 끝까지 책임지기로 하고, 그를 정신병원에 보냈다.
왕립 베스렘 병원이라고 하면, 전직 군인들을 위한 왕립 병원이다. 나와 같이 전쟁을 치른 몇몇 병사도 발작으로 그곳에서 신세 진 적 있으니, 달리 이보다 믿음직스러운 시설도 없었다.
나는 다시 봉투 안에 편지를 접어 넣고, 그것을 편지 상자 안에 정리했다.
그리고, 나는 다음 편지를 보자 무심코 한숨이 흘러나왔다.
「앨리스 플래전스 리들」
봉투 위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또박또박 제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당장에라도 잉크에 스며든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귀가 따가웠다. 사람의 귀를 괴롭히는 글자라니, 그녀는 참 놀라운 재주를 가진 셈이다.
나는 편지를 내려놨다.
아침은 더 조용한 시간이어야 했다. 특히나 런던은 저혈압에 빠진 도시가 아닌가.
그리 생각하며, 그녀가 보낸 편지 묶음을 정리하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그녀 혼자 한 달 동안 보낸 편지 묶음이 작년에 정리한 석 달 묶음 편지보다 두꺼운 것 아닌가.
앨리스 플래전스 리들.
사실 엄밀히 따지면 그녀는 플래전스가 아니다. 의아한 일이지만, 그녀의 본명은 앨리스 리들로 기록되어 있고, 미들 네임에 대해서는 그녀 말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이 자신을 플래전스라고 소개했다. 그 미들 네임에 얽힌 사연을 생각하면 아주 의아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그 이름을 선물한 것은 바로 찰스 루트워지 도지슨, 그보다는 루이스 캐럴로 잘 알려진 신사였으니까.
리들 부녀의 알력 싸움에 관해서 내가 더 첨부할 말은 없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앨리스라는 점이다. 일단, 나의 전생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나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다.
당연하지만, 그녀는 내게 편지를 쓸 이유가 없었다. 매정한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나는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대학으로 출근했고, 그녀는 여전히 그 대학 건물에 기숙 생활 중이다.
우리는 화요일과 금요일마다 최소한 30분씩 대화했고, 그녀는 할 말이 없어도 무언으로 꼬박 30분을 채우고 갔다. (그녀는 정말로 시계를 들고 다니며 시간을 쟀다. 이게 무슨...?)
그러니 그녀가 꼬박꼬박 우푯값을 내가며 편지 보낼 이유는 없었다. 그냥 말로 하면 됐으니까.
따지고 보면 내 입방정이 원인이었다. 나는 혹시나 모를 사고를 대비해, 앨리스 그녀에게 넌지시 주의를 당부했다. 이렇게 말이다.
"나와 아서에게 할 말이 있다면, 편지를 쓰지 말고 직접 찾아오게. 일반우체국에서 프랑크 저택을 오가는 모든 편지를 감시하고 있고, 어쩌면 나도 그 대상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네."
그 이후로 그녀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신비한 세계에 대한 그녀의 동심을 완벽하게 꿰뚫은 한 문장을 말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개발한 암호, 은유, 신조어로 가득 찬 편지를 보냈고... 당연히 나는 그걸 읽을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매번 출근할 때마다 그 사이 그녀가 보낸 편지 한두 통을 끼고 가서, 그 의미를 물어보는 멍청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앨리스와 알게 된 것 말고, 대학 생활은 놀랍도록 여전했다.
칼라스 교수의 존재가 땅으로 꺼지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도 그의 빈자리를 의식하지 않았다. 나는 이전처럼 수업을 진행하고, 학장 대리로서 새 교수를 알아보는 등 늘 하던 일을 했다.
소소하게 변한 점이 있다면, 그가 죽은 뒤로 육혜 시계가 가동을 멈춘 것이었다.
학생들이 졸업을 명분으로 끌려가는 일도 없어졌다. 졸업생들, 그들은 여전히 복도에 있었지만 벽 쪽을 응시하고 가만히 서 있을 뿐,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급한 불이 꺼지니, 내 조사는 이전보다 소극적으로 변했다. 나는 은밀히 다른 칼리지와 접선할 방법을 찾으며 시간을 보냈다.
─────똑똑.
편지를 정리하고, 신문을 집어드니 마리가 방문을 두드렸다.
"차를 준비해 드릴게요."
"그래, 부탁하지."
그녀는 곧잘 말하게 되었다. 내가 실려온 날 이후부터 그랬다.
마리는 방 안으로 들어와, 책상 위에 트레이를 올려놓고 찻잔과 차 주전자, 스콘과 잼을 준비했다. 그러면서 내가 들고 있는 신문에 끈질긴 시선을 보냈다.
"주인님, 또 그 영악한 꼬마에게 신문을 사셨군요."
나는 모른 척 신문을 펼쳤다.
해가 뜨는 족족 신문팔이 소년은 우리 집 창가에 다가와 노크했다. 나는 마리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창문을 열고, 그 부지런한 소년에게 성실함의 대가를 적은 동전으로 보답하고 있었다.
나는 이 새로운 관계에 충실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을 가지고 마리에게 핀잔듣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말이 많아진 것도 처음에는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던 셈이다.
그녀의 지긋지긋한 잔소리마저 돌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 가뜩이나 심장 떨리는 목소리건만, 그 내용까지 끔찍하니 견딜 재간이 없었다.
나는 광고를 넘기고 재빨리 첫 기사를 읽었다.
『스콧 대령의 첫 남극 원정, 실패로 돌아가다! 누구의 책임인가!』
신문에는 예기치 못한 스콧 대령의 근황이 적혀 있었다.
그는 마리를 보고 도망친 이후, 말한 것과 달리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결국엔 이 괘씸한 친구가 말없이 남극으로 떠난 모양이다. 어차피 걱정할 셈이었지만, 그의 무심함이 서운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런던 신문은 제목만 읽고 판단해선 안 됐다.
이번 출항은 원정조차 아니었다. 그는 왕실 지리 학회와 함께 남극 해안선을 측량하며, 남극점 여정의 상륙 지점을 물색했을 뿐이다.
"내가 이 빙판을 밟는다면, 그때는 남극점을 향해 걸을 때뿐이다."
심지어 그는 그렇게 선언하며, 남극 빙판 위로 상륙조차 하지 않고 런던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몰라도,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예전부터 남들에게 뽐내길 좋아하는 성격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나는 이번에 신문사가 보인 추태에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매출 부수를 늘리기 위해, 며칠에 한 번씩 꾸준히 밑바닥을 보였다.
"재밌는 기사가 있나요?"
마리의 질문에 허겁지겁 신문을 넘겼다. 스콧에 관한 기사를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마침 다음 기사는 앞 기사보다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SMR이 LNWR을 인수, 런던 옥스퍼드 직행 시대 개막하다!』
브리튼 남부와 중부 철도 전반을 독점한 거대 회사, 서던&미들랜드 철도(SMR)가 마침내 중부 최후의 독립 철도, 런던 및 북서 철도(LNWR)를 잡아먹은 것이다. 이제 런던에 이어진 모든 직행 철로가 그들의 손에 넘어간 셈이었다.
LNWR이라면 내게도 적잖은 추억이 있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가로지르는 대학대표선(Varsity Line)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 아버지의 부고가 담긴 편지를 움켜쥐고 떨리는 몸을 맡긴 기차도 LNWR의 것이었다.
아직도 나는 가축처럼 실려가던 삼등석의 악취가 선명히 떠올랐다.
"재밌다기보다는 어이없는 기사군."
"어떻길래요?"
내 투정에 마리가 목을 앞으로 쭉 뺐다. 그녀가 가까워지자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는데, 그런 내 모습에 그녀도 놀란 듯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나는 지면만 돌려 그녀에게 보였다.
"SMR... LNWR...."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어요. 저한테는 평범한 기사처럼 보이는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LNWR이라면 대학대표선이 대표 노선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거리로 보나, 중요성으로 보나, 종착역은 옥스퍼드가 아니라 케임브리지겠지. 이 기사를 쓴 작자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군그래. 아마 평생 대학 문턱도 밟아본 적도 없는 자겠지."
"하지만 옥스퍼드도 유명하잖아요?"
나는 가만히 마리를 노려봤다.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해, 신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평소에는 글을 빨리 읽지도 못하면서, 이럴 때만 화제 전환거리를 재빨리 찾아냈다.
"새 기차는 옥스퍼드까지 겨우 2시간도 안 걸린다고 하네요."
마리의 말에, 나는 신문을 돌려 확인했다. 그리고 의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건 말도 안 돼. 지금까지 옥스퍼드까지 2시간 45분은 걸렸는데!"
런던에서 옥스퍼드까지 거리는 81마일, 그러니까 거의 130km에 이르는 장거리다. 어떻게 2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잠깐 19세기의 기술에 허무를 느꼈다.
기사는 계속 이어졌다. 노선 통합 후, *초고속* 기차 'SMR 웰스호'가 이번 주 토요일에 첫 운행을 시작한다는 내용이었다. 안전이 검증되지 않은 기차를 타는 건 불안했지만, 마침 시기상 적기였다.
"요즘은 기차를 타고 이틀 정도 교외로 나가는 게 유행이라더군."
"네? 네."
마리는 트레이를 정리하며 대답했다.
"토요일에 나갈 생각이니 외출 준비해두게. 이틀 정도 다녀올 생각이니까."
그리고 그녀는 몸을 멈췄다. 그리고 인형 흉내라도 내는지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킹스 크로스 정거장.
1852년, 캠던 자치구에 들어선 이 정거장은 언제나 교통의 중심이었다. 영국 북부에서 자신감 있게 뻗어 나온 철로들은 어전에 이르러서는 겸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하여 그 모양은 런던을 중심으로 펼쳐진 거미줄 모양이 된 것이다.
플랫폼 역시 신중하고 탐미적인 시각에서 건축되었다.
시계탑을 중심으로 양옆에 아치형 입구를 낀 실험적인 구조와, 모스크바 건축 양식을 본떠 만든 이국적인 지붕은 열차 역이 품은 신비감을 증대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누구도 그 예술적인 조형을 보며 감탄하지 않았다.
시내에서는 신사 숙녀를 자칭하며 거들먹거리던 자들도 이곳에만 오면 품위를 까먹고 허겁지겁 뛰어다니기 마련이었다. 그것이 바로 기차와 역이 가진 마력이었다.
"어쩌죠."
마리는 오늘만 열 번째 같은 말을 입에 담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녀는 머리를 내 쪽에 붙이듯이 하고는 소곤거렸다. 설령 누군가 제 목소리를 듣기라도 하면, 곧장 붙잡아 화형대에 걸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도대체 뭐가 문젠가. 얼굴도 전부 가렸는데."
마리는 여전히 자신감 없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요?"
그녀의 우려는 정당했다. 그녀는 얼굴을 거즈로 덮고, 그 위에 검은 면사포를 두 겹으로 쌓았으니 꽤 희한한 모습이긴 했다. 하지만 플랫폼에선 누구도 그녀를 주목하지 않았다.
비단 플랫폼만이 아니라, 런던에선 누구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처럼 굴었기에, 남에게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당당하게 굴면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조금 이상하게 보이면 어떤가."
내 말에 마리는 억지로 가슴을 앞으로 내밀어, 더 이상한 걸음걸이가 되었다. 이제는 정말 수상하게 보였다. 그러고 있자니, 한 남자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쪽 숙녀분은 기차가 처음입니까?"
넓은 이마가 돋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어딘가 중요한 자리에 참석한 사람처럼 턱시도에 여우 털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하얀 옷이 일주일이면 검게 변하는 런던에서는 전위적인 옷차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런던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외지인이거나, 말도 안 되는 부자라는 뜻이었는데, 나는 과감히 후자의 손을 들어줬다. 그가 사용하는 영국 사교계 억양이 너무 완벽했던 것이다.
"아가씨?"
마리는 나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얼굴을 보이지 않고도 애절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평생 런던에서 살다 이번에 처음 나가봅니다."
나는 대신 답했다. 실제로 그런지는 몰랐다.
"아, 좋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정말 완벽한 첫 경험이 될 테니까요. 쾌속 열차 SMR 웰스호는 로켓호 이후로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차입니다. 그리고 현대 최고의 기차이기도 하죠. 절대 멈추지 않고, 어떤 오차도 허락하지 않고, 안전하고 안락한 상태로 손님을 도착지에 옮겨주니까요."
그는 자부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나는 무심코 되물었다.
"실례지만, SMR 관계자이십니까?"
"아, 이것 참. 제가 소개도 하지 않고 경망스럽게 떠들었군요. 저는 조지 허드슨 주니어입니다."
나는 그가 내미는 손을 가볍게 마주 잡았다.
"필레몬 허버트 남작입니다. 이쪽은 제 사용인 셜리 마리입니다. 남들 앞에서 말을 못하는 성격이니 양해 바랍니다."
"아, 그렇군요."
그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마리의 복장은 빈말로라도 사용인이라 보기 어려웠다. 그는 순식간에 뭔가 부적절한 드라마를 머릿속에 그렸는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가 멋대로 착각하게 두었다.
"그나저나 조지 허드슨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제가 아는 다른 사람이 떠오르는군요."
나는 가볍게 운을 띄웠다. 그러자 그 남자의 기름진 얼굴에 윤택이 감돌았다.
"철도왕 말입니다."
"제 선친께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곤 했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은 저 역시 철도왕입니다. 왕위 세습을 한 셈이죠. 오늘 출발할 SMR 웰스호의 설계자가 바로 접니다."
과연, 예상대로 그는 엄청난 부자였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SMR의 관계자 수준이 아니라, 주요 이사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가 철도왕에게 물려받은 건 막대한 재산뿐만이 아닌 듯싶었다.
그는 재능과 열정으로 무장한 자 특유의 위풍당당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혹시 아십니까? 기차는 종교적인 예술 작품입니다."
"그런 관점은 처음 듣는군요."
"당연히 그렇겠죠. 제가 주장하기 시작한 말이니까요. 저는 그뿐만 아니라 저 미켈란젤로나 갈릴레오와도 빗댈 수 있는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그들이 성당을 칠하고 조형한 것처럼, 저 역시 현대의 성당을 설계하는 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요즘 안식일에 성당을 방문하는 대신 정류장으로 몰립니다. 그들은 번잡한 도시를 눈 깜짝할 사이에 벗어나고 목가적인 시골에 도착해 마음의 평화를 누립니다. 저 검고 묵중한 증기차야말로 현대인의 성당인 된 겁니다."
그의 예술관에 대한 자부심이 어떻건, 그가 썩 예술에 소양 있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일단, 갈릴레오는 성당 벽화를 그린 적이 없다.
"혹시 어디까지 가십니까?"
"옥스퍼드입니다."
"몇 등석을 탑니까?"
"그게 중요합니까? 결국 열차는 같이 움직이는 건데요."
허드슨은 턱을 뒤로 뺐다. 숨길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순순히 털어놓았다.
"2등석입니다."
"아, 그러면 정확히 1시간 36분 걸리겠군요. 옛날 같았으면 며칠씩 걸렸을 테지만, 지금은 2시간도 걸리지 않는 겁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그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을 거라는 듯이 당당히 분 단위로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러니 내가 의심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 것도 과장이 아니었다. 허드슨은 그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걸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말했잖습니까, SMR 웰스호는 절대로 늦지 않는다고. 어떤 경우에도 멈추지 않습니다, 절대로!"
저 멀리 플랫폼에 들어오는 기차가 경적을 울렸다. 나는 문득 그것이 허드슨의 목청과 닮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