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과 영원
이렇게, 런던 열차는 두 얼굴을 가졌다.
주일동안 열차는 교외의 노동자를 런던 안으로 분주히 이송한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철마에 실려 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공장이나 작업장으로 옮겨졌다.
이들은 런던에서 집을 구하지 못한 탓에 밤이 되면 지붕과 벤치뿐인 저가 숙소에 앉아 날을 지새웠다. 그렇게 안식일까지 일하고는 모은 푼돈을 금은보화처럼 조심히 챙기고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다음 주일이 되면 새벽 열차를 타고 다시 런던에 돌아오는 것이다.
이토록 다른 둘이지만, 결국 런던을 떠날 수 없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았다.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런던이 있다.
런던은 진정 무한에 이른 도시다.
─────덜컹 덜컹...
열차는 검은 하늘 아래를 달리고 있다. 희뿌연 증기가 굴뚝 뒤로 흩어지며 증기 알알이 별처럼 반짝였다.
양옆으로 펼쳐진 붉은 광야에는 돌풍이 불 때마다 수 미터나 치솟은 모래 먼지가 위로 솟았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보이지 않는 거인이 흙장난하는 것 같았다.
생명이 없는 외로운 공간이다.
바닥에 흩어진 자갈 하나하나가 수천 년간 제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지면이 이토록 평평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렸을지 인간이 가진 유한한 생명으로는 가늠조차 하기 힘들었다.
─────휘이이잉!
객차 테라스로 나오자마자 거센 바람이 몰아치자 거의 쓰러질 뻔했다. 마리가 내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큰일이 났을지도 몰랐다.
"주인님."
"나는 괜찮아, 나는 괜찮아."
깜짝 놀란 나머지 같은 말을 연신 중얼거렸다.
"그 보편사무국 사람의 말이 신경 쓰이시는 거죠?"
"뭐? 아니야. 그런 혈기 없는 작자의 말 따위 귀 기울일 것도 못되네."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저 어둠뿐인 하늘 양 끝에는 흉흉한 쌍성이 놓여 있었다. 두 별은 선로와 선로의 끝에 놓여 우리는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하는 모험가가 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덜컹 덜컹....
낡은 선로 탓에 열차는 계속해 흔들렸다. 대체 이곳에 선로를 놓은 것은 누굴까. 설마 SMR은 아닐 것 아닌가. 열차의 발명이 백 년 채 되지 않았건만, 우리 아래 놓인 선로는 황야가 처음 생겨날 때부터 있었던 것처럼 조화롭게 보였다.
달리 말하면, 아주 낡아 보였다.
─────끼이이이익....
객차 사이를 잇는 연결기가 날 선 비명을 질렀다. 두 겹의 고리와 굵은 체인 하나는 한계까지 팽팽해져 제 길이보다도 길게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승객 사이를 구분하는 건, 손쉽게 벗겨지는 고리 세 개뿐이었다.
"제가 먼저 건너갈게요."
마리는 이번에도 앞장섰다. 그녀는 벌어진 틈 사이 앞에 섰다.
발밑으로는 지면이 시속 140km로 뒤로 달리고 있었다. 떨어진다면 보통 다치는 걸로 끝날 리 없었다. 아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녀는 반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반 발자국 앞으로 걸었다가, 또 반 발자국 물러났다.
전진, 후퇴, 전진, 후퇴.
"내가 먼저 가지."
열차의 발명은 사고를 낳았다. 마차 사고는 이전부터 있었다지만, 수백 톤의 기차에 치이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열차에 관한 온갖 불쾌한 괴담은 런던 전역에 퍼져 있었고, 그녀의 머릿속에도 적지 않게 들어 있을 터다.
"아니요, 제가 먼저 갈게요."
도대체가 그녀는 당나귀처럼 고집을 부렸다. 내가 재촉한 모양새가 되었는지, 그녀는 기세 좋게 열차 사이를 건너뛰었다. 오히려 너무 서두른 탓에 보고 있던 내가 놀랄 지경이었다.
그녀의 목에서 쇠 긁는 듯한 쉰 소리가 났다. 아마도 환호성이나 그런 비슷한 것 같았다.
"보세요."
이 모든 일을 겪고도 그녀는 쾌활했다. 대담한 것인지, 둔감한 것인지, 나는 그녀의 활기찬 면을 발견하고도 기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점점 더 내가 아는 것과 다른 무언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도 아니고, 내가 걸음마까지 칭찬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나는 심드렁하게 테라스에 발을 올렸다. 의족에 감각이 없는 것이 오히려 불안감을 덜어줬다. 오히려 나는 우리가 건넌 뒤에 저 연결기가 끊기지나 않을까, 그것만이 걱정스러웠다.
마리는 내가 이 정도도 건너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지 않고 여유롭게 반대편에 도착했다. 그녀가 실망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말 없이 손을 접었다.
"들어가겠네."
나는, 아니,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봤다.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몰랐다.
나는 마리에게 당부하고는 객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안쪽에서 가래 낀 목소리가 뭉텅이 지어 쏟아져 내렸다. 객실 밖은 바람 때문에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는데, 안쪽도 소란스럽기로는 그 못지않았다.
객실 안에 있는 승객들은 모두 반대편 문쪽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들어온 지도 모른 채, 문 너머를 향해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미처 들어본 적 없는 창의적인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고함 대부분은 아주 고상한 용인 발음을 고집하고 있었기에 퍽 우스운 꼴이었다.
하지만 이건 코미디가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 끔찍한 기억이 플래시백 되었다. 그것은 얼마 되지 않은 싱싱한 것이라, 필연적으로 냄새를 동반했다. 피 냄새. 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안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이보게,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가."
내 부름에 그제야 우리를 눈치챈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십니까?"
"앞쪽 객차에서 상황을 좀 보러 왔네. 나 같은 자가 이미 한 번 들르지 않았나?"
나는 우리보다 먼저 열차 뒤로 향했던 노신사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그들의 안색이 바뀌고, 이상한 눈짓을 시작했다. 내가 아니라 바로 서로 쳐다보며 아주 절박하고도 은밀한 눈빛 교환을 나눈 것이다. 흔히 말하는 공범자의 신호였다. 나는 이곳에서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예, 오셨습니다. 그리고 뒤로 가셨죠."
짧은 눈빛 교환이 오가고 한 남자가 대표해 말했다.
"뒤쪽 객차 말인가?"
"앞에서 찾으러 오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지나가시죠."
남자가 말을 마치자 합이라도 짠 것처럼 인파가 좌우로 갈라졌다. 움직임을 보아서는 미리 합을 맞춘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들은 한 몸처럼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나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마리는 말없이 내 뒤를 따랐다.
"아, 그리고 혹시."
우릴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변했다. 내 어렴풋한 예감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어떤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끔찍한 악행에 관한 비밀 말이다.
나는 확신에 차서 물었다.
"혹시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무슨 말씀입니까? 무슨 일 말입니까?"
"뭐라 말로 하기 어려운 끔찍한 일 말일세. 사람들의 신체가 이어진다거나."
나는 티 내지 않고 눈알만 굴려 면면을 훑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그들에겐 정곡을 찔린 자 특유의 초조함이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모든 게 그저 착각에 불과했다고? 내가 모종의 사건에 너무 예민해진 건가?
"신경 쓰지 말게. 가급적 떨어져 있으란 얘기야."
"네...."
나는 말을 흐리고 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묵직한 문을 밀어 열자, 문틈 사이로 붉은 모래바람이 실내로 몰아쳤다. 가뜩이나 건조한 눈이 바람까지 맞으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부터 바람 소리는 목소리에 비견되고 했다. 그 말은, 바람이 그토록 사람의 흉내를 잘 낸다는 뜻일 터다.
"...."
그러니, 내가 듣고 있는 것은 바람을 틈탄 악마의 장난질인가, 아니면 진짜 사람의 목소리인가.
나는 확신했다.
누군가 저 건너에서 외치고 있었다. 건너편 객차의 테라스에서 말이다.
"도망쳐!"
앞서 나갔던 노신사가 7번 칸, 삼등석 테라스 난간에 매달린 채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몸을 틀었다. 거의 동시에 나와 마리를 향해 손이 날아들었다.
"잡아! 못 움직이게 잡아!"
모래바람 때문인지 눈치채는 것이 한발 늦었다. 나는 이렇다 할 대처를 하기 전에, 어깨와 왼팔을 붙잡히고 말았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 뒤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여자, 사람이 아니야!"
마리를 붙잡은 이들이었다. 그들의 눈이 광기에 젖어들고 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마리는 아주 잘해줬다. 나를 그저 노인이라 생각했는지, 날 붙잡은 청년은 멍청히 마리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나는 관성을 이용해 들고 있던 지팡이를 위로 던져 역수로 잡고, 전직 해군 장교를 얕보면 어떻게 되는지 톡톡히 보여주기로 했다.
"악!"
지팡이 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으로 보아하니, 간이 있는 곳을 제대로 찌른 모양이다. 그러니 한동안 꼼짝도 못할 것이다. 나는 다시 지팡이를 칼처럼 고쳐 잡아, 멍하니 날 바라보는 또 한 명의 목젖과 명치를 차례대로 찔렀다.
"켁!"
또 한 명이 허무하게 쓰러지자, 그들은 마침내 내가 만만한 노인네가 아니란 걸 깨달은 눈치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마리, 내 뒤로 오게."
마리는 총총걸음으로 내 뒤에 딱 달라붙었다.
기선제압은 성공적이었다. 아무리 악한 목적으로 공범이 되었다고 해도, 지도자 없이 즉석에서 짜맞춘 결속력이란 이런 법이다. 누구도 선뜻 덤빌 생각을 하지 못했다.
"주인님이 이렇게 잘 싸우실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말했잖아, 검술을 좀 배워뒀다고. 무려 왕립 해군 검술이라네."
나는 일부러 해군이라는 발음을 강조해서 말했다. 여기 겁먹어줘서 망정이지, 다칠 생각을 하고 누가 덤벼들었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잠깐만요, 들어주세요. 모두에게 좋은 이야기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한 사람이 나서서 설득하려는 듯이 화두를 꺼냈다.
"그런 이야기는 나와 가정부를 기차 밖에 던져버리려 하기 전에 했어야지."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억울하다는 듯이 호소했다.
"생각해 보시죠.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얼마나 더 가야 우리가 아는 장소에 도착하는지 아십니까? 저는 영국 전역을 다녀봤지만, 이런 황야에 대해서는 들은 적도 없습니다. 하물며 런던과 옥스퍼드 사이에는 더더욱이요."
"노인과 아녀자를 열차 밖으로 던지기엔 부실한 변명 같은데."
"반면 기차는 영원히 달리지 못합니다. 석탄이 다 떨어지면 멈추고, 우리는 여기 고립되는 겁니다. 아까 밖에 괴물 같은 새가 지나가는 걸 보셨습니까? 저들은 우리가 멈추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잡아먹으려고요!"
"고작 새의 주목을 돌리려고 사람을 밖에 던지려 했다는 말인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같은 거리를 가더라도, 무거울수록 석탄이 많이 필요합니다."
나는 그제야 그들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깨닫고 경악했다.
"객차를 아예 뜯어내려 했군! 저들은 그걸 막으려고 테라스에 서 있었던 거고!"
"누군가 희생을 해야 한다면 저들이 먼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이럴 때를 위해서 객차마다 차등을 두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저들도 사람이야!"
그런 식으로 뜸을 들이고 있으니 뒤쪽 칸에서 노신사와 등 굽은 삼등석 승객들이 머뭇거리며 하나둘씩 건너왔다.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듯이, 같은 객차 안에 있어도 그들은 서로 섞이질 않았다.
객차의 이등석 승객들은 그 모습에 겁먹고는 구석으로 몰려났다.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형국이었다. 나는 그들을 열차 밖으로 집어 던지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았다.
"내가 그토록 큰 소리 치고 나갔는데, 오히려 도움을 받아버렸군그래... 고맙네."
평생 그렇게 목소리를 낮춰본 적이 있을까 싶은 노신사가 의기소침하게 감사를 표했다. 조금 전까지 객차 채로 버려질 뻔했다는 사실에 기가 죽은 모양이었다.
"건너올 사람은 이게 전부입니까?"
"우리는 7, 8번 칸, 그러니까 삼등석 앞에 2칸 승객뿐이네. 그 뒤쪽 칸에도 사람은 있지만...."
노신사가 말을 흐렸다.
"거기는 가지 말게."
"무슨 뜻입니까?"
"저곳은, 저곳은 무언가 이상해. 이 장소는 이상하지만, 9번 칸부터는 특별히 더 이상해. 내가 이렇게밖에 설명하지 못해서 미안하네만,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사지로 보낼 순 없네."
나는 내가 목적지에 와 닿아 간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가 찾는 것이 그런 겁니다. 지치셨다는 건 알지만, 다녀올 동안에 저들이 허튼짓하지 못하게 감시해주실 수 있습니까?"
이등석 승객들은 완전히 몰려서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그들을 구타할 것 같던 삼등석 승객들은 가까이서 본 말끔한 옷차림 같은 것에 위압되었는지, 도리어 기가 죽은 모양새였다.
"당연하지! 아까는 속아서 넘어갔다지만, 이제는 그렇게 못 할 거야! 만약 저항한다면 한 명씩 열차 밖으로 던져버리겠네!"
구석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상황이 이런데 굳이 겁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나는 진지해."
노신사는 더 물을 것도 없이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런던을 사랑하지만, 영국인들은 이게 문제였다. 나는 40년째 그들이 진지한 건지, 진지한 척 농담을 하는지 구분할 줄을 몰랐다. 나는 노신사가 영국인 특유의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으리라 믿고 다음 객차로 나아갔다.
7번칸.
모든 사람이 6번칸에 가 있는 탓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 하얀 자갈 같은 것이 반짝였는데, 땀이 증발하며 남은 소금기였다. 나는 좋은 구두를 신고 온 것을 절절히 후회했다.
"아까 그 말 사실인가요?"
"무슨 말 말인가?"
"왕립 해군 검술 그거요."
"자네는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바다 위에서 몇달이고 주구장창 보내는 건 생각보다 지루한 일이라네. 지루한 남자들, 그리고 군에서 지급받은 세상에서 제일 근사한 세이버. 그걸 가지고 뭘 하겠나?"
나는 태연히 지팡이를 칼처럼 잡고 휘둘렀다. 그녀는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7번칸을 벗어났다.
8번칸.
이곳에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왜 그러세요?"
"자네는 냄새를 못 맡아서 좋겠군."
하지만 곳곳에 묻은 불쾌한 오물 냄새는 더욱 심해져 속이 매스꺼울 지경이었다.
"고마워 하라는 뜻인가요?"
"아니, 아니, 그런 말은 아니야! 아까부터 말을 왜 그렇게 하나!"
나는 마리의 말에 화들짝 놀라 손사레 쳤다.
"농담이에요."
모든 영국인은 자신이 농담을 잘한다고 믿는데, 나는 그 사실이 너무 지긋지긋했다.
우리는 8번칸을 벗어났다.
8번 객차의 테라스에 이르니, 이제 열차는 아까보다 더 빠르게 느껴졌다.
흘러가는 풍경은 선보다도 면이 되었고, 면은 곧 색채가 되었다. 나는 테라스 사이의 틈을 내려다보았는데, 선로의 침목과 붉은 지면이 섞여 썩은 핏물처럼 이도 저도 아닌 탁한 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테라스를 조심스럽게 건넜다. 난간에서 손을 놓기라도 하면, 그대로 색의 탁류에 휩쓸려 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9번 칸.
어두운 객실 안에서는 오로지 기침 소리만이 들렸다. 노인의 기침 소리다. 어째서 그들이 다른 삼등석 승객처럼 앞으로 가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힘없는 노인이었다. 어떻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하지 못할 것 같아, 나는 그들을 밟지 않게 신중히 걸었다.
덥석.
그런 와중에, 누군가 마른 손아귀로 내 발목을 잡았다. 놀라기에는 너무 약한 악력이었다.
나는 상대의 모습을 살폈다.
그는 기이할 정도로 늙은 노인이었다. 머리털은 송두리째 빠져나가 듬성듬성 비어 있었고, 이빨 중 온전한 것은 눈에 보이는 걸로만 3개뿐이었다. 얼굴에 생긴 길고 늘어진 주름 때문에 눈을 뜨기도 어려워 보였고, 삐뚤어진 콧방울 때문에 입으로만 숨을 쉬고 있었다.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자였는데, 옷은 어울리지 않게 작업용 멜빵이었다. 그마저도 마른 몸 때문에 헐렁거려 입지 않느니만 못해 보였다.
"누구 신진 몰라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쇼."
노인은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 이름은 노먼 아담 히긴스입니다. 노먼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형이 가진 이름이고, 아담은 세례받은 성당 신부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제가 런던에 처음 올라온 것은 8살 때입니다. 처음에는 굴뚝 청소를 하면서 먹고 살았지만, 몸이 자라 굴뚝에 맞지 않게 된 이후엔 목탄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제 나이는 올해로 스물이지만 맨얼굴로 온종일 열을 받으며 일한 탓에 얼굴은 이렇게 쭈글거리게 되었고, 하도 불을 오래 쳐다본 탓이 눈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평생 런던에서 일했습니다만, 제 가족은 여전히 키들링턴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매달 한 번씩 돈을 모아 돌아가고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그는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말을 마쳤다.
또 다른 노인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그의 다리는 O자로 굽어 있어, 서 있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저는 베이워쓰에서 온 제임스 쿡이라고 합니다. 원래 이름은 존이지만, 존 쿡은 발음하기도 어렵고 흔한 이름이라 스스로 제임스라고 개명했습니다. 어릴 적에는 아침 동안 신문을 팔고, 밤에는 하수도에서 쥐를 잡는 일을 했습니다. 12살이 된 해에는 임금이 올라 쫓겨날까 봐 나이를 속이고 15살까지 일했습니다. 더는 나이를 속일 수 없게 되자, 템스 강 적재소에서 짐을 나르는 일을 했습니다만, 작년부터 강에 배가 들어올 수 없게 되어 구빈원에 들어가 뱃밥 꼬는 일을 했습니다. 손 가죽은 완전히 벗겨졌고, 온종일 다리에 오크 나무를 끼우고 일한 탓에 다리는 이렇게 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몸이 망가지고 더는 일하지 못하게 되어 십 년 만에 가족 품에 돌아가 소소하게 도움되는 일을 하려 했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쓰러지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는 오스니에서 온 앤서니 그린입니다. 월요일 새벽 기차를 타고 와서 섬유 공장에 출근하고, 공장 집단 숙소에서 숙박하다가 토요일 밤에 집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세인트 클레멘츠 거리에 사는 피터 자블링입니다. 절삭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손가락이 잘려서 쫓겨났습니다. 공장 숙소에 머물 수 없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노인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노인이라고 하나, 고작 서른도 되지 않은 자가 대부분이었다. 시간은 런던 공무원과 같아 유독 가난한 자에게만 가혹했다.
나는 그들을 애써 외면하며 앞으로 걸었다.
"마리?"
"저는, 남아 있을게요. 제가 들어줄래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마리의 무거운 몸이 느릿하게 앞으로 걸었다.
"죽은 자들에게 끌려가지 말게."
우리는 9번 칸을 빠져나왔다.
아, 이제 세상엔 색채조차 남지 않았다.
열차는 무한 위에서 달리고 있다. 오로지 우주와 시간만이 가질 수 있는 속성이었다.
우리는 10번 칸 테라스 위에 올랐다. 마리는 여전히 이전 칸이 신경 쓰이는지 뒤를 돌아보고 있었지만,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문 손잡이는 뜨거울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다. 가죽 장갑을 넘어서 화상을 입을 정도였는데, 안에서 불이 나고 있다고 해도 이토록 뜨거울 수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세차게 문을 열었다.
실내는 아비규환이었다. 지옥조차 이보다 처참할 순 없었다.
살아 있는 승객은 모두 살 채로 녹아내려 얽히고 기워져 있었다. 개인을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는 살점 덩어리가 된 이들은 모든 고통을 함께 공유했고, 입에서는 비탄과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역겹고 하찮은 합창단이 만들어내는 아우성은 절묘한 불협화음을 이뤄 듣는 이를 미치게 했다.
나는 객실 안에 발을 들였다.
구두 밑창에 질퍽하고 살점이 달라붙었다. 나는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불빛에 홀린 부나방처럼, 객실의 끝을 향해 허우적거리며 걸었다. 매 걸음 살점이 짓이겨진 합창단이 비명으로 화음을 이뤘고, 나는 절묘한 지휘자가 되어 그로테스크한 음악 세계를 헤엄쳤다.
그리고 마침내, 살점으로 뒤덮인 객차 끝에서 빛나는 비석을 손에 쥐었다.
나는 그 위에 묻은 온기 있는 살점을 떨어트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 위에는 「8」이라 적힌 녹색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