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옥스퍼드 직행 열차
──────우우우우...
저 멀리, 열차가 선로를 달려오며 경적을 울렸다.
"물러나시오! 물러나시오!"
종을 든 역무원이 분주히 뛰어다니며, 열차가 들어오는 광경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구경하고 싶은 호기심 많은 구경꾼을 뒤로 물렸다.
종이 두 번 울릴 때마다 경적 한 번. 그들은 합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좋은 듀엣이었다.
──────부우우우!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굳이 역무원이 더 애쓸 필요 없었다.
노선 가까이 서 있던 승객들이 경적 소리에 놀라 혼비백산하며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말로만 듣던 증기 기관차가 이토록 크고 빠르고 시끄러울 줄 몰랐던 자들은 입을 헤벌린 채 연신 감탄했다.
평생 성당을 다니면서도 일절 경건할 줄을 몰랐던 이들의 눈에 신앙이 깃들었다. 육중한 검은 철체에 압도된 나머지 공포와 경외 어린 시선을 보냈다.
흔히 말하는 도시뜨기(Urban hick)였다.
모든 게 해결되는 런던에서 일평생 살다가 처음으로 도시를 나가는 자들 말이다. 이틀이나 사흘 정도 런던 밖으로 여행 다녀오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한 이래, 주말마다 흔히 볼 수 있는 정거장 풍경이었다.
그런 한편,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익숙한 중산층 이상의 신사 숙녀는 도시뜨기들이 보이는 추태를 탓했다. 그들은 진작 철로 밖에서 뒷짐 지며 기다리다, 역무원의 안내에 따라 그제야 선로 쪽으로 느긋이 걸었다.
열차는 이렇게 탑승하기 전부터 사람을 구분했다.
승차장은 작은 사회였다. 여기서는 천국보다 세분화하여 사람을 나눴다.
게으른 베드로는 그저 천국행과 지옥행만을 나눈다지만, 열차는 도착지가 같음에도 기어코 사람을 셋으로 분류했다. 일등석과 이등석, 그리고 삼등석으로 말이다.
모든 사람은 좁은 플랫폼 안에서 제 분수를 다시 확인했다. 기관장이 보내는 정차 신호에 맞춰, 열 명의 역무원이 열 개의 입구에 발맞춰 섰다. 캔 안에 든 견과처럼 승객들은 자신이 있을 자리로 스스로 향했다.
우선 일등석 대기 줄부터 보자.
그들은 뭘 해도 우아하다.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느리게 걷는다. 보폭이 좁을수록 고상해진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도 거의 없거늘 줄이 생기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물론 밀거나 재촉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열차 전방 3칸은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칸마다 8명은 족히 들어갈 만한 방이 2개씩 있었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은 주로 두세 명에 불과했다.
다음은 이등석 대기 줄이다.
이등석에는 다양한 사람이 모였다. 인상도, 의상도 각양각색이라 보는 재미가 있다. 돈주머니를 꽉 쥔 근검한 사업가도 있고, 차마 삼등석의 족속들과 상종할 수는 없지만 일등석에는 가지 못한 영락한 귀족도 있다. 어쩌다 분수에 넘치는 거금을 만진 기술공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양복쟁이다.
열차 중앙 3칸은 그들을 위해 있다. 좌석은 2인석으로 총 6개 놓였고, 두 좌석씩 서로 마주 보게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모르는 사람과 합승은 비일비재했다. 좌석 사이에는 열차에 고정된 철제 테이블이 하나씩 놓였는데, 그것이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는 유일한 칸막이였다.
어쨌거나, 적어도 그들에겐 소파가 있었다. 페르시안 양식 덮개가 씌워진 따뜻한 소파 말이다.
마지막으로 삼등석이다.
그들에겐 좌석이 없다. 열차 말미 4칸에는 수용 한도 없이 승객이 꾸역꾸역 들어찼다. 그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보였는데, 실제로 둘을 놓고 구분하라고 하면 그리할 자신이 없었다. 허름한 복장도 그랬고, 제대로 씻지 못해 땟국물이 흐르는 얼굴도 그랬으며, 무엇보다 표정이 비슷했다.
삼등석 손님은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서로 노려보며, 자신의 주머니를 품에 꼭 안았다. 그들은 몇 시간이고 그렇게 서 있은 탓에, 기차에서 내릴 즈음엔 타기 전보다 어깨가 살짝 더 굽어 있었다.
그 때문에 열차의 앞뒤를 구분하기도 아주 쉬웠다. 말미에 붙은 삼등석 칸에는 신체 일부가 항상 삐져나와 있었다. 사람은 그렇게 많거늘 안에선 수 시간 동안 거친 숨소리와 기침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10칸 열차가 영국 어느 정류장에도 들어가는 가장 보편적인 표준 규격이 되었다.
우리가 탄 것은 다섯 번째 칸이었다. 그러니까, 이등석 정중앙 칸 말이다.
나는 가운데 자리, 그중에 열차 정면을 바라보는 의자 앞에 멈췄다. 마리는 그런 내 모습을 멀뚱히 쳐다봤다.
"자네가 안쪽에 앉게."
"그래도 되나요?"
"열차를 타고 창밖을 구경한 적은 없을 거 아닌가."
마리는 기꺼이 안쪽에 앉았다. 아마도 들뜬 표정을 지었을 텐데, 그녀의 얼굴이 온전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었다. 그녀는 창밖을 둘러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이렇게 좋은 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속삭였다고 하기보다는 평소 목소리에서 음계만 낮아진 꼴이었다. 도통 감정을 담기 어려운 성대다. 그나마 감상적인 표현을 써보자면, 그것은 음산하고 울적한 단조 음을 내는 플루트 같았다.
"그러면 자네를 삼등석에 세워서 보내고 나 혼자 이등석에 앉아 가라는 건가?"
"하지만."
마리는 말을 씹었다.
"말벗 하라 데려왔다고 생각하게. 자네에겐 그럴 자격이 있어."
"하지만 주인님은 돈도 없으시잖아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대화를 언젠가 했던 거 같은데, 그때 내가 뭐라고 돌려줬더라. 분명 나라면 제대로 되갚아 줬을 텐데, 기억나지 않는 것만이 분했다.
우리가 말 없이 다른 곳을 바라보는 사이에, 객실에는 또 다른 승객이 들어왔다. 우리 맞은 편에 앉은 것은 한쌍의 부부였다. 그들은 연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은지 풋풋한 사랑을 꽃피웠는데, 은근히 맞닿은 손등이 참 그 나이대답구나 싶었다.
그들은 전형적인 벼락부자처럼 보였는데, 의상은 말끔하지만 장신구와 어울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행동거지도 서민이나 다를 것이 없었지만, 노력은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뒤에 들어온 것은 한 노신사였다. 그는 약간 불안 증세가 있는 것 같았는데, 주름의 깊이만큼 타인에 대한 불신도 깊어 보였다. 그는 곧장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는 다른 승객 모두를 경계하듯이 제 망상증을 드러냈다.
그런 노신사의 맞은 편에 앉은 불운한 여인은 드물게도 홀로 여행하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의자 바깥에 걸쳐 앉았는데, 언제라도 복도로 뛰쳐나올 준비가 된 자세였다. 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여인 혼자 여행하며 저렇게 겁먹어 있을까.
우리 바로 뒷좌석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는데, 대신 그 맞은 편에 거름 냄새나는 두 남자가 앉았다. 가축을 기르는 부자 같은데, 그들이 들어오기 전과 후의 객실 냄새가 많이 달라졌다. 안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출발합니다!"
열차 밖에서 역무원의 외침이 들렸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그러더니 경적이 울리고도 조금 뒤에 한 뚱뚱한 남자가 부산스럽게 객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광이 날 정도로 훔쳤다. 그리고 뒤뚱뒤뚱 걸어와 우리 바로 뒷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걸로 모든 승객이 탑승했다. 역무원과 기장의 목소리. 경적 소리. 주말의 열차.
열차가 출발하지 않은 객실은 소요 직후의 적막이 감돌았다.
그들은 다들 열차에 제때 올라타고 더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시대 열차는 경외의 대상인데, 경외란 공포를 동반하는 감정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속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지금 올라탄 것이 검증되지 않은 영국 최고속 열차라고 하면 더더욱 두려워 할 만하지.
나는 지친 눈으로 창가를 돌아봤다.
플랫폼 한가운데서 허드슨은 무언가 소리 지르고 있었는데, 잘 보니 타이가 어긋나 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어떤 면에서는 천재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면에서는 뭔가 허술했다.
그야말로 철도왕 2세라고 부를 만한 비범한 면모를 가진 자였다.
"피곤하신가요?"
"그래, 아주, 아주 피곤하군."
"많이 걸으셔서 그래요. 가시는 동안 한숨 주무세요."
나는 한쪽 장갑만 대충 벗고, 눈가를 어루만졌다. 평소 운동이 부족했던 건지, 아침부터 역까지 걸었을 뿐인데 다리보다 정신이 피곤했다. 품속에서 새로 산 수통을 꺼내고, 그 안에 담긴 위스키 한 모금을 목에 흘렸다.
목이 타는 듯하니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피곤하다고 자꾸 위스키를 마시니까 피로가 안 풀리는 거에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전에도 그런 말 한 적 있지 않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곤 했죠."
"아니, 내 말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열차 경적이 울리며 말이 끊겼다. 열차의 굴뚝에서 증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하며, 기관의 동력이 열차 바퀴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지상에서 가장 무거운 물체가 온전히 제힘으로 세차게 달려나갔다. 처음에는 사람 걸음만도 못했지만, 서서히 탄력을 받기 시작하더니 말보다도 빨리 달렸다.
창밖으로 오직 열차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공간이 뒤로 쫓겨나는 광경 말이다. 한때는 말을 타던 귀족들 사이에서만 은밀히 전해졌던 환상적인 광경이 열차를 통해 모두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객실의 긴장은 다 풀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불안한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거나, 두 손을 모아서 누군가에게 바치는지도 모르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열차가 무사히 도착한다면 다 함께 기립 박수하지 않을까 하는 광경이었다. 노신사는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담배를 꺼냈는데, 손을 떨다가 떨어트리고는 주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리는 가만히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작은 호기심이 일었지만, 인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넌지시 물었다.
"열차는 처음인가?"
"아니요. 그렇지만 이렇게 여유롭게 구경하는 건 처음이에요."
그럴 리가.
그녀는 나와 처음 열차를 타는 게 아니다. 전에도 이등석에 탄 채로, 이렇게 창 너머를 구경하며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게 언제였는지, 도통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어느새 열차는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 길을 달리고 있었다.
도시를 벗어나면 이렇게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것을 잘 알건만, 일상의 번잡함 때문에 런던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 처지가 기구할 따름이었다. 더는 런던의 음울한 분위기와 악취도 우릴 따라오지 못한다.
──────부우우우!
한껏 여유로운 분위기에 우렁찬 기적 소리가 재차 울렸다.
나는 문득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빨라. 너무 빠르군."
그리고 홀로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알 수 없었지만, 열차가 빨라질수록 내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내 심장은 마치 증기기관과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덜컹!
열차가 위아래로 크게 들썩였다.
"안 돼."
"망할."
"아, 안 돼요!"
"아버지, 가면 안 돼요."
"콜록."
"세상에, 진짜였어, 진짜였어."
"이곳에 남아 있어라. 이곳에."
"여보, 침착해. 우린 살 수 있어."
객실은 어둠에 잠겼다.
누군가 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검은 우주에는 불길한 쌍둥이별이 우리 존재를 비웃으며 교교히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