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과거를 향한 전진
마리는 자연스럽게 내 뒤를 따랐다.
"자네는 여기 남게."
나는 그녀를 만류했다.
"우리가 떠나면 저들이 분명 허튼 짓거리를 하려 할 거야. 그걸 자네가 말리게."
"저는, 저는 도무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어요. 그저 너무 혼란스러워요."
그녀는 무엇도 기억하지 못했다.
끝없는 시간의 물결 속에서 홀로 멈춰 서 있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그녀의 시간은 일찍이 끝났다. 다름 아닌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마리, 제발."
이 반복되는 시간에서 마리가 다치거나, 혹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녀는 저 부부가 그랬던 것처럼 기적 같이 살아날 수 있을까.
나는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런 끔찍한 경험은 한 번이면 족했다.
"자네는 아주 현명한 여성이야. 이곳에서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을걸세."
일부러 아무 의미 없는 의미심장한 문장을 말했다. 마리가 이런 수수께끼 같은 문장에 약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고민하는 틈을 타, 객실 문을 열고 나갔다. 내 뒤를 살찐 남자가 뒤따랐다.
─────휘이이잉.
객실 문을 열자 거센 모래바람이 휘황찬란하게 몰아쳤다.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어쩌면 수십만 년 전부터 이곳에 있었을 둥근 모래가 속눈썹 사이로 파고들었다. 별이 지배하는 이 공간은 지긋할 정도로 세월에 무심했다.
나는 몇 번 흔들리다가 난간을 잡고 버텼다.
바람은 파도처럼 주기적으로 몰아쳤는데, 내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불다가 넘어지려고 하면 다시 사그라지는 식이었다.
나는 다리가 불편함에도 지금까지 경험을 살려 어렵지 않게 객차 사이를 건넜다. 하지만 그 뚱뚱한 남자는 난간 앞에 선 채로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제발 그놈의 다리를 좀 움직이게."
기어코 내 한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남자는 벌벌 떨면서 객차 사이를 건넜다. 생각보다 유연한 몸을 가졌는지 다리를 길게 찢고, 반대 발을 떼지도 않고 걸었다.
우리는 함께 4번 칸 안에 들어왔다.
혹시라도 남은 4번 칸 승객과 마주칠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헛걱정으로 그쳤다.
"자네."
객실 복도를 관통하며, 내가 말을 꺼내자 남자는 몸을 흠칫 떨었다.
"보기와 달리 강직한 면도 있군."
"네?"
"내가 자네를 질책하긴 했지만, 정말로 다시 봤어."
그는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저를 싫어하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자네가 예쁨 받고 싶어할 나이는 지난 줄 알았지. 그렇게 미움받기 싫으면 칭찬할 일을 좀 하지 그랬나."
내가 퉁명스럽게 답하자, 다시 기가 죽었는지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내가 앞장서 걸었지만, 객실에 들어온 이후로 상황은 반대가 되었다. 나는 다리가 불편하고, 남자는 날 배려하지 않고 걸었기 때문에 그가 나보다 앞서 걸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예 멀어지진 않았다. 그는 걸음걸이조차 자신 없는 자였다. 나는 다리를 다쳤을 뿐이지만, 그는 마음이 다친 자다. 다친 부위는 달라도, 걸음 속도에 한해서는 통하는 것은 있었다.
"이봐, 하나만 묻지."
내 질문에 남자는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걸으면서 해도 되는 얘기야."
그러자 남자는 다시 느리게 앞으로 걸었다.
"뭡니까?"
"어째서 따라왔나?"
내 질문에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 나쁜 의도로 하는 질문은 아닐세. 정말 궁금할 뿐이야. 미안한 말이지만 자네는 빈말로라도 이런 일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게 보이거든. 차라리 자네 말마따나 평범한 실무나 보는 게 어울리지."
그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열차 한 칸을 더 건넜다.
"제 조부께서는 해군이셨습니다. 당신처럼 말입니다."
"내가 해군 출신인 줄은 어떻게 알았나?"
"욕하실 때 알았습니다. 조부께서도 그런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곤 했습니다."
남자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와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꽤 중후한 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도 티가 나지 않은 것은, 지금까지 돼지 새끼나 낼 법한 소리로 꽥꽥댄 탓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경박스러운 티가 나기는커녕, 귀족 집안에서 잘 교육받은 품이 나는 말씨였다.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어쩌면 그가 객실 안에서 긴장해서 제대로 말을 못했을 수도 있었다고 말이다. 그토록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좋아하면서, 정작 그 본인은 무대 공포증을 앓고 있었다.
그는 군살만큼 비대한 아이러니를 품은 남자였다.
"그분은 진짜 영웅이었습니다. 바다사나이였죠.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님을 도와 침략자 나폴레옹을 몰아내는데 일조하셨습니다."
"놀랍군. 조부가 퍽 자랑스럽겠어."
그러자 남자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얼마 전에도 그런 표정을 짓는 젊은이를 본 적 있었다.
노엘 어거스틴, 그 불쌍한 프랑스 2세 말이다.
훌륭한 아버지를 둔 못난 아들. 상황은 달랐지만 품고 있는 감정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자부심과 열등감, 두 감정은 같은 시작점을 두고도 극적으로 다른 벡터를 가졌다.
"저는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뭘 말인가?"
"당신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제 조부처럼 훌륭한 영웅이었겠죠."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최대한 늑장 부리면서 걸었는데도, 이야기가 길어진 탓에 객차 끝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문을 열려고 하는 남자를 제지했다.
"지금 3번 칸에는 들어가지 않을걸세. 아까 다들 표현은 거칠게 했지만, 그게 과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네. 4번 칸 승객들은 정말 위험해졌어. 우리가 앞으로 간다고 하면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을 걸세."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운전석까지는 앞으로 한참 더 가야 하는데."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얼굴이 단숨에 창백해졌다.
"일단 객차 위로 올라가서 3번 칸을 지나칠 걸세."
"미쳤습니까!"
그는 문자 그대로 펄쩍 뛰며 외쳤다.
"운전석으로 넘어갈 때 한 번으로도 충분한 객기인데, 그걸 두 번씩이나 하겠다고요?"
"꼭 따라오라 한 적 없네."
남자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소중한 것처럼 쥐고 있단 가방을 바닥에 내려놨다. 그는 그 안을 뒤적거리면서 나도 익히 아는 탐험 칼과,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권총 한 정을 꺼냈다.
"웨블리 리볼버군."
"아십니까?"
"현재 군 보급품이니 이름 정도는. 내 연인은 구닥다리 엔필드와 보몬트-아담스였지. 알고 있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들도 꽤 좋은 총이었는데... 내가 마지막에 진창에 빠트리지만 않았어도, 쓸만한 권총 한 정은 있었겠지."
나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권총, 신사의 교양이라 보기는 어려웠지만 어쩌면 그런 걸 상비하고 다녀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이곳에서 살아나가면 반드시 그리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다면 빌려 드려도 제대로 못 쓰시겠군요."
"권총이랄게 거기서 거기지."
"대신 이걸 빌려 드리겠습니다."
그는 선심 쓴다는 듯이 탐험 칼을 내게 건넸다. 나는 기가 차서 감탄했다.
"다리를 저는 노병에게 칼을 주다니, 정말 훌륭한 역할 분담이군."
"곧잘 다루셨잖습니까."
"그래, 검술은 내게 사격술 다음 가는 주특기지.
"익숙하지 않은 총이라 중요한 순간에 빗맞히시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그게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는 눈을 가리고 쏴도 저렇게 큰 표적을 빗맞힐 자신이 없었다. 그냥 무작정 하늘에 대고 쏴도 절반 정도는 맞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내가 군말할 처지는 아니니, 주겠다는 칼이라도 감사히 받기로 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날이 서 있다고 해도 저렇게 큰 새를 쫓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부터 나가는 순간, 2번 칸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멈추면 안 되네."
나는 말했다.
"알겠나, 절대로 멈추면 안 돼."
긴장한 남자에게 몇 번이나 거듭 강조한 뒤에,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덜컹 덜컹.
흔들리는 객차 위에서, 우리는 3번 객차로 건너갔다. 그리고 나는 악력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지붕으로 올라왔다. 뚱뚱한 남자는 그보다 더 걸렸는데, 나보다 비곗덩어리를 수 근은 더 두르고 있는 탓이었다.
"서둘러! 놈들이 우릴 봤네!"
내 외침에 남자는 사색이 되어 뛰쳐나갔다. 지붕에 올라올 때와 달리 잽싼 몸놀림이었는데, 적어도 승마나 럭비 둘 중 하나는 몸에 익히고 있는 유연한 자세였다.
그렇지만 좋은 몸을 갖고도, 시야가 턱없이 좁았다.
그는 앞으로 달릴 줄만 알았지, 주변이나 위를 둘러본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배에 힘을 주고, 바람에 묻히지 않게 고성을 내질렀다.
"머리!"
남자는 확인하지도 않고 제자리에 머리를 싸매고 엎드렸다.
그 직후, 거대한 아가리가 바로 위에 스쳤다.
"멍청한 새끼!"
나는 욕설을 토해냈다. 목숨을 건졌을지언정, 상황은 이보다 나쁠 수 없었다.
앞에서 총알이 날아오는 것도 아니고, 위에서 공격당하는데 웅크린다고 해결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주변을 살피지도, 도망치지도 못하는 최악의 자세였다.
"앞으로 달려! 뒤돌아 보지 말고 무작정 달려!"
나는 거칠게 명령조를 내뱉으며 서둘러 움직였다.
다행히 내가 아주 늦지는 않았는지, 등을 보이며 뛰는 남자에게 달려드는 말 대가리에 탐험 칼을 쑤셔 박을 수 있었다. 새의 목이 위로 꺾이며 공중에서 허우적댔다.
───────!!!
머리는 말과 개를 섞어 놓은 것처럼 생겼지만, 울음소리는 어떤 지상 포유류와도 닮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심해 그늘진 구석에서 들려오는 고래의 낮고 차가운 비명 같은 것이었다.
듣고 있으면 족히 영혼을 빼앗길 법한 그런 싸늘하고 고독한 소리 말이다.
오죽하면 경험 많은 나마저 귀를 틀어막았고, 그 탓에 탐험 칼을 회수할 기회를 놓쳤다. 문제는 저 둔해 빠진 자인데, 겁많은 그가 이토록 처참한 소리를 견뎌낼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아예 다시 바닥에 엎드리며, 귀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달려, 이 얼간아!"
나는 욕설을 내뱉었다.
불호령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남자는 뱃살을 떨면서 다시 앞으로 달렸다. 우리는 아직 안전하지 않았다. 놀라게 해서 새를 쫓아내긴 했지만, 모습을 보아하니 오히려 성질만 돋운 듯했다.
그것은 재빨리 다시 열차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 죽기라도 했으면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죽으려고 하늘에서 몸을 던지는 멍청한 종은 인간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남자는 3번 객차에서 폴짝 뛰어내려, 2번 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뒤좇으며 허겁지겁 쩔뚝거렸다.
그리고 성난 새가 지상에 도착하기 직전에 간신히 2번 칸 문앞으로 몸을 던져 뒹굴었다.
나는 급하게 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이미 문은 닫혀 있었다. 저 멍청하거나 혹은 이기적인 작자는 문을 열어놓을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손잡이를 잡아당겨 안으로 다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자세를 추스를 틈도 없이 마구 기었다.
─────쿵! 쿵! 쿵!
성난 새는 긴 주둥이만 안쪽으로 집어넣어 나를 씹으려 했지만, 나는 이미 진작에 거리를 벌린 뒤였다. 분한 듯이 어금니를 부딪칠 때마다 턱이 바닥에 부딪히며 객차가 흔들렸다.
하지만 결국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는지 체념하고 물러갔다.
"허억... 허억...."
나는 바닥에 앉은 채로, 벽에 몸을 붙이며 거친 숨을 골랐다.
한편, 남자는 객차 구석에 틀어박혀 벌벌 떨고 있었다. 2번 칸의 온도가 바깥보다 낮기는 했지만, 이유가 그것 하나뿐일 리는 없었다.
"맞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그는 대답했다. 이곳에 사람이라곤 나 말고 하나밖에 없었으니, 그 대답이 누굴 향하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저를 두고 가십시오. 저는 여기서마저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라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으려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습니다. 말 그대로 뭐든지 했습니다!"
얼추 보아도 그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는 착란에 빠져 마구 외쳐댔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영웅은 결국 타고나는 것이고, 제 분수는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을! 위대하게 태어나지 않은 제가 조부나 당신처럼 영웅이 되고 싶은 게 욕심이란 말입니까? 그것이 제 잘못입니까?"
남자는 혼잣말 끝에 오열했다.
"아니. 자네는 큰 착각을 하고 있네."
나는 품에서 수통을 꺼내며 대답했다.
"자네한테는 그저 시간과 경험이 부족했을 뿐이야. 자신이 영웅이 아니란 사실을 이해할 시간과 경험 말이네."
남자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자네가 날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훌륭한 인물이 아니야. 영웅은 아닐뿐더러, 따지고 보면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나는 수통 뚜껑을 열고 입에 털어 넣다가, 위스키를 진작 다 마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낮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쿵! 쿵! 쿵!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흔들렸다. 보아하니 한동안 객차에서 벗어날 수 없어 보였다. 나는 수통을 다시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뭐든지 안주머니에 넣고 보는 이런 습관도 아주 오래전에 생긴 것이었다.
"16년 전, 나는 지옥에 있었네."
나는 담담히 말했다.
"사르데냐의 여름은 잔혹했어. 섬에 고립된 지 2달이 지나니 어떤 보급품도 남아 있지 않았고, 사방에는 우리를 죽이려는 적군으로 가득했네. 추격자를 따돌리기 위해 며칠씩 땅속에 숨어 있는 일도 비일비재했지. 다행히 사르데냐의 울창한 숲과 빽빽한 산맥은 우리 편이 되어 주었고, 덕분에 2년 가까이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
남자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추한 몰골로 내 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해 여름, 처음 맞는 여름만은 견디기 힘들었어. 우리 중 누구도 숲 속에서 먹을 것을 구하는 방법은 고사하고, 생존하는 법조차 몰랐네. 보급품이 떨어지는 경험은 처음이었지. 점심을 먹고 입가심할 차와 비스킷이 없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아나?"
나는 농담할 셈이었는데, 남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나는 머쓱하여 다음 말을 서둘렀다.
"지중해에 가본 적 있나? 그곳의 여름은 런던과 전혀 다르다네. 프랑스와도 다르지. 런던의 냄새나고 불쾌한 여름과 비교해도 온도는 5도는 더 높았고,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였는데도 건조한 공기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었지. 그런 상황에서 휴식은 고사하고 우리는 온종일 걸어야 했고, 피로에 절은 병사들은 열병에 시달렸네. 어쩌다 수원지를 발견하더라도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순찰하는 적병을 피해 다시 내줘야 했네."
더위를 말하면서도 객차의 한기에 몸이 떨렸다. 과거를 말하면서도 전진하는 아이러니 또한 있었다.
"비라도 시원하게 내리면 좋겠건만, 하늘마저 건조한 날이 이어졌네. 마지막으로 비가 내린 지 2주가 지날 무렵, 병사가 한 명씩 쓰러지기 시작하더군. 쓰러진 전우의 몸은 땀 때문에 물속에서 막 건져낸 것처럼 축축했는데, 우리는 그걸 뭍에서 익사했다고 말했네. 그 지경까지 가면 살릴 방법도 없었으니, 차라리 못 마신 물에 빠져 죽었다고 말해주자 한 거지."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늙은 탓인지 말하면서 목이 낮게 잠겼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차라리 병사를 이끌고 다 함께 항복하자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네. 그래야 했을지도 몰라. 개죽음을 당했을지 몰라도, 혹시 모르잖나. 그들이 우리를 포로 대우하고 본국에 보내줬을지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네. 그랬다면 전쟁은 더 길어졌을 테고, 더 많은 젊은이가 죽었을 테니까. 젊음의 객기였는지, 여왕 폐하를 향한 충성심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전쟁의 광기에 휩쓸린 건지 모르겠지만, 결국 우리가 버텨준 끝에 전쟁이 끝났으니 의미 없는 희생은 하나도 없었던 셈이지. 나는 그 공훈으로 여왕 폐하로부터 직접 수훈 받기까지 했네. 하지만 아직도 내가 그 여름에 한 일이 가치 있는지는 모르겠군."
언젠가부터 그해의 일이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떠올리는 지금도 그저 끔찍한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고 말뿐이었다. 나는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저 그 순간에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하며 살았을 뿐이야. 이래도 나를 영웅이라 부르겠나?"
"저는...."
그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 대신 결론을 내려줬다.
"이 세상에 영웅 같은 건 없어. 그게 현실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