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47화 (47/232)

§47. 하물며 시간은 공평하지 않다

나는 지붕에서 소음이 잦아든 뒤에 일어났다.

그 괴조가 쉽게 단념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나가자마자 머리를 씹히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안전하다고는 말 못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 여기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슬슬 준비하게."

"아니요."

남자는 고개를 무릎 위에 처박은 채로 답했다.

"뭐가 아니란 말인가?"

"저는 못 갑니다. 여기서 끝입니다."

그는 침울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당신은 영웅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건 성공한 자가 입에 담는 기만문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특별합니다.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이 모든 일을 겪고도 곧장 앞으로 나가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과 다릅니다. 그냥 인간에 불과합니다."

조금 전까지 그를 사로잡고 있었던 성공에 대한 갈증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열병은 사그라졌고, 대신에 차갑게 식은 체념만이 남았다.

"저는 여기 남겠습니다. 이게 제 한계입니다."

"그렇군."

그는 충분히 이성적으로 보였기에 더 따지고 들 이유가 없었다.

"너무 자책하지 말게. 자네는 충분히 용기를 냈어."

나는 사람을 위로하는 법을 몰랐다. 시도는 해봤지만, 남자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처진 것을 봐서는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내가 실망감을 다 숨기지 못한 탓일 수도 있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뽑아 내밀었다.

"이건 저보다 당신이 가지고 가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권총을 받았다. 몇 번 돌려보며 구조를 살폈는데, 사용하는 게 어려울 것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 일찍이 손에 익힌 권총과 무게가 다르지 않은 덕에 적응하기도 편했다.

"잔탄은 안에 든 여섯 발뿐입니다."

"그래, 요긴하게 쓰지. 고맙네."

나는 객실 문 앞에 섰다. 남자는 이곳에 남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헤어졌다.

─────덜컹 덜컹.

나는 회색 지대에 섰다. 그곳은 열차 안이라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밖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2번 칸과 1번 칸 사이라는 애매한 표현밖에 쓸 수 없었다.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외로운 공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이름 붙지 않은 모든 공간을 우주(Space)라고 불렀다.

우주 속에서는 여전히 수백 마리의 괴조가 열차를 따라오며 맴돌고 있었다. 그들은 크기도 천차만별이라, 보고 있자면 원근감을 영영 잊게 만들 법한 문란한 군무였다.

샨타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그것들의 이름을 알았다.

별과 우주 사이를 비행하며 지구가 아닌 다른 차원에 살면서, 짐승의 대가리와 새의 몸통을 가졌다고 알려진 거대한 부식동물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모독적인 생물이 달리 더 있을 리 없었다. 다름 아닌 러브크래프트의 저서에 기록된 신화 생물 중 한 종(種)이었다.

나는 샨타크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책에 다 쓰여 있지 않은 사실이었으나, 그것들의 크기는 같은 종이 아닌 것처럼 다양했다. 어쩌면 성장하면서 급격히 성장하는 것일 수도 있었고, 크기가 다르고 서식지는 겹치는 여러 아종 무리가 섞여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 때문에, 몰래 지나가려고 하는 여러 시도는 번번이 좌초되었다. 어떤 것은 가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멀었고, 어떤 것은 멀리 있는 줄 알았더니 바로 눈앞에 있기도 했다.

한참동안 기회를 살피고 있었더니, 비행하던 샨타크 한 마리가 입을 쩍 벌렸다. 조류의 치열을 본 적이 있는가. 별빛에 비치는 이빨 틈새 사이의 썩은 고기 조각과, 뱀 만한 기생충은 날 충분히 역겹게 했다.

──────!!!

샨타크의 울대가 떨리며, 입 밖으로 그 끔찍한 울음소리가 다시금 흘러나왔다. 그 선창을 시작으로 주변의 샨타크들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아악!"

나는 온몸에서 영혼이 쥐어뜯기는 느낌을 받고는, 무심코 소리 내서 절규했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는 걸 확인하지 않고는 정말로 혼이 빼앗길 것 같았다.

그리 큰 소리도 내지 않았건만, 포식자는 열차 소음 속에서도 피식자의 음성을 잘도 분간해냈다. 그러니까, 내 목소리 말이다.

수 마리의 샨타크가 내 쪽을 향해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급하게 1번 칸 쪽으로 건너뛰었다. 그리고 내게 쇄도하는 주둥이를 향해, 어설픈 자세로 권총을 발사했다.

─────탕!

─────!!!

그것은 혐오스러운 신음성을 내며 위로 솟구쳤다. 두꺼운 피부 때문인지 크게 다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나는 그 틈을 타 1번 객차 안으로 들어가고, 문을 등으로 막았다.

─────쿵! 쿵!

객차 바로 앞에 무거운 것이 떨어진 것처럼 열차가 들썩이더니, 등 너머로 묵중한 충격이 잇달아 일었다. 샨타크가 몸을 부딪칠 때마다 그 충격으로 내장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헉... 헉...."

결국, 문이 열리지 않으니 단념한 것인지, 아니면 교활하게 매복하고 있는지 문밖은 곧 잠잠해졌다.

"우웩."

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헛구역질했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 직접 맞닿은 적이 없었지만, 두터운 문 사이로나마 알게 되었다. 저것들은 정말로 맹수였다. 맨몸으로 부딪친다면 무딘 몸통이 부서지고 말 것이다.

나는 통증이 가라앉은 뒤에 몸을 일으키고,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1번 칸은 이형의 공간이었다.

처음 온 것도 아니지만, 나는 이제야 똑똑히 알았다. 모든 것은 객차 끝에 놓인 검은 비석을 중심으로 했다. 세상은 비석을 중심으로 서서히 얼어붙고 있었다. 이건 어떤 비유나 착시도 아니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이 불가사의한 현상을 눈앞에 두고, 운 좋게도 미래에서 온 나는 한 가지 발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전에 들어본 바가 있었다.

열역학 법칙, 엔트로피가 품고 있는 시간의 비밀 말이다.

아, 그렇다. 시간조차 결국은 분자의 움직임에 불과하다.

세상 만물이 엔트로피에 따라 정렬되고 있기에, 우리는 미래로 나아가거나 과거로 되돌아가거나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차가운 공간에서는 분자조차 느리게 움직였다. 이곳은 저(低)엔트로피의 세계다! 이 타르타로스에서는 시간조차 자유롭지 못한 죄수였다.

거기까지 착상에 이르자, 나는 불현듯 또 다른 진실과 접했다.

10번 칸, 반대로 그곳은 열의 세계였다.

모든 분자가 사방팔방으로 충돌하며 튀어 다녔고, 열은 끊임없이 상승하며 시간을 가속했다. 살과 가죽은 열에 의해 녹았고, 아이는 청년이, 청년은 노인이 되었다. 불안정한 고(高)엔트로피의 세계였다.

나는 그 모든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쳤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SMR이 어떤 의도로 이 열차를 만들었건, 하나의 공간에 시간을 무참히 토막 내어 놓았다. 나는 객차 끝에 이르러 검은 비석을 집었다.

「8」이라 적힌 녹색 형광이 빛나고 있었다. 「∞」이라 읽을 수도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8」이 편했다.

만약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나간다면, 이 비석은 열차에서 있었던 사건을 해석할 단초가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것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억지로 밀어 넣은 탓에, 앨리스가 써준 소개장이 구겨지고 코트 안주머니 실밥이 뜯어졌다.

─────덜컥!

나는 세차게 문을 열었다. 보일러 밸브 사이로는 희뿌연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 머리 위쯤에 도착해서 순식간에 냉각해서 비처럼 쏟아졌다. 수분 없는 건조한 이 세계에는 어쩌면 처음 내리는 빗방울일지도 몰랐다.

차가운 물방울, 혹은 반쯤 얼은 둥근 우박을 헤치며, 나는 앞으로 뛰었다. 지팡이는 더 쓸모가 없었기에 내려놓았다. 나는 암벽을 등반하는 용맹한 모험가처럼 석탄고 벽면을 기어올랐다.

────치이익!

저 멀리 1번 객차에서 날 기다리던 샨타크 무리가 내 쪽으로 날기 시작했다.

나는 권총 첨단을 초조하게 어루만졌다.

"침착하게, 다가오는 순간에 한 발이다...."

나는 열차를 기면서 스스로 다독였다. 아까도 그랬지만, 샨타크의 가죽은 아주 두꺼웠다. 권총의 약한 화력으론 지척에서야 겨우 그럴싸한 화력을 낼 터였다.

첫 번째 샨타크가 근처까지 다가왔다.

─────탕!

총성이 울리고, 탄환이 샨타크의 안구 옆 광대뼈에 박혔다. 눈을 노리고 쐈는데 빗나간 것이다. 나는 곧바로 총구를 옮겨 다시 쐈다.

─────탕!

─────!!!

검고 쭈글거리는 눈알이 팍 하고 터져나가자, 그 커다란 샨타크는 몸부림치다가 바닥에 처박혔다. 죽었을 리는 없지만 따돌리기는 한 것이다.

나는 이 틈을 타서 운전석 쪽으로 더 움직였다.

슬슬 운전석 안쪽의 열기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안에서는 운전수 이인조가 쉴 새 없이 화실 안으로 석탄을 퍼 나르고 있었다.

"열차를 멈춰!"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건지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내 말이 안 들리나! 그 엿같은 삽을,"

─────탕!

나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한 마리를 또 쫓아내긴 했다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눈대중으로 살펴도 얼추 네다섯 마리나 되는 샨타크가 날아오고 있었다. 남은 잔탄은 두 발뿐이다.

또 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짧게 연명하는 방법도 있었다. 선두의 두 마리를 쫓아내고, 운전석에 도망친 뒤에 그들을 멈추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멈춰줄까? 그리고 시간에 맞을까?

아니, 잠깐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나는 살 방법이 없다.

그걸 깨닫고 나니, 차라리 더 확실한 수단을 취하기로 했다. 나는 권총을 다른 손으로 잡고, 침착하게 목표를 향해 두 발을 꽂아넣었다.

─────탕! 탕!

기계처럼 움직이던 운전수들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제 석탄이 들어가지 않으니 화실의 열기는 점차 가라앉을 것이고, 언젠가는 멈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것은 어둠이었다. 아니, 목청이었다.

내 오랜 여정은 여기서 막을 내렸다.

몸통은 무참히 씹혀서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어졌다. 팔과 다리는 샐러드처럼 고르게 뒤섞이고 있었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폐가 뭉개진 탓에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완전히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에, 샨타크의 입술 너머로 기이한 것을 목격했다.

황야 한복판에 놓인 검은 점이었다.

좀 더 자세하게 살피니, 그것은 사람이었다. 미국 외판원 같은 단정하고도 발랄한 양복을 입은 마른 남자였다. 말랐다고는 해도 그는 아주 건강하고 생기 넘쳐 보였다.

그는 어쩌면 불모지를 밟고 선 있는 유일한 생명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느꼈지만, 풀 방법은 없었다. 열차가 느려지는지, 의식이 멀어지는지, 모든 것이 서서히 느려지는 와중에, 나는 죽었다.

─────삐이이익!

"기차가 들어옵니다!"

나는 옥스퍼드 기차역에 도착해서 눈을 떴다.

열차가 서서히 느려지는 관성과 웅성거리는 인기척은 사람을 곧잘 깨우곤 했다. 창밖으로는 간촐한 역 건물과 줄지어 뭉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기차가 들어옵니다! 물러나세요!"

역무원은 종을 들고 다니며 분주히 사람들을 선로에서 몰아내고 있었다.

"주인님, 도착했어요."

마리가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날 깨웠다. 현실감이 멀어지는 아득한 음성이었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깜빡거렸다.

나는 샨타크의 입안에서 으깨져 죽은 게 아니었단 말인가?

"마리."

"네?"

"자네는 아무것도 기억 안 나나?"

그러자 마리는 입을 다물고 고민하다가 문득 한 마디 내놓았다.

"나쁜 꿈을 꾸셨나 보군요."

꿈이라고?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다고?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세상은 평화로웠다. 하늘 위로는 겨울 새가 구름을 등지고 날아다녔고, 역에 선 사람들은 저마다 바쁜 삶을 살고 있었다.

풍경을 둘러보던 나는 역에 세워진 기둥 시계를 보고는 기가 막혀 중얼거리고 말았다.

"정말로 딱 1시간 36분 걸렸군."

잠시 후, 열차가 완전히 멈추자, 사람들은 자리에 앉은 채 박수를 쳤다.

물론 이 시대에 열차가 안전하지 않다지만, 어지간한 시골뜨기가 아니고서야 열차가 멈춘 것 정도로 손뼉 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왠지 모르게 그들에 동조해 박수를 치고 말았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신께 감사하기도 했지만, 어째서 그러는지 자신도 모르는 눈치였다.

마리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어색한 동작으로 나를 따라 손을 마주쳤다.

박수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우리는 열차에서 마지막으로 내렸다. 문 너머로 장시간 함께 한 승객이 한 사람씩 사라졌다.

노신사, 부르주아 부부, 냄새나는 부자, 홀로 여행하는 여인, 그리고 뚱뚱한 남자.

아주 긴 시간 함께한 사람들이었지만, 나는 그들 중 누구의 이름도 몰랐다. 인파 속에 섞이고 나면 더는 찾을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열차는 세상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지만, 그 안에서 사람 간의 거리는 이전보다 멀어졌다.

"갈까."

내가 말하자 우선 바깥쪽에 앉은 마리가 일어났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나는 걸 도와줬다. 우리는 열차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마리의 독특한 인상착의 때문에 잠깐 시선이 쏠렸지만, 대부분은 스쳐 지나갈 뿐인 시선이었다.

나는 열차에 탄 다른 승객들을 돌아봤다.

일등석에서 내리는 자들은 전혀 흐트러진 모습이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그들에게는 방 밖의 혼란도 그저 남의 일에 불과했다.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고작 한두 시간 여행한 정도로 고귀한 그들이 품위를 잃을 리는 없었다.

반대로 삼등석에서 내리는 자들은 처참한 몰골이었다. 한참이나 인파 틈바구니에 끼어서 가축처럼 실려온 탓에, 땟물과 모든 체취가 뒤섞여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메스꺼운 악취, 굽은 등과 좁은 어깨, 주름진 손, 그리고 지친 얼굴은 그들을 영락없는 노인으로 만들었다.

아니, 그들은 실제로 노인이었다.

여섯 살이면 일하는 성인이 되었고, 서른 살이면 임종을 기다리는 노인이 되었다.

시간은 공평하지 않다.

우주의 기본적인 원리조차 인간의 손에선 악의적으로 왜곡되었다.

"그 사람도 있을까요?"

마리가 말했다.

"이름은... 이름은 분명 노먼 아담 히긴스인데...."

나는 그녀를 돌아봤다.

"제임스 쿡이란 사람도 있었어요. 그리고 앤서니 그린, 피터 자블링... 어째서 제가 이 사람들을 다 알고 있죠? 평생 한번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인데."

그녀는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열차는 사람 사이를 더 멀게 했다. 수 시간 합승한 승객의 이름조차 알 수 없는데, 다른 칸에 탄 사람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어떤 선한 자는 기억했다. 어느 책에도 적히지 않을 이름을 외우는 자가 있었다.

나는 그런 자가 아니다. 어떻게 그녀가 그 모든 이름을 외우고 있는지, 외울 수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셜리 마리, 그녀는 분명 사람이었다.

"그에 관해서는 나중에 조용한 곳에서 얘기하지. 자네는 그냥 나쁜 꿈을 꾼 거야. 나처럼 말일세."

"꿈이요? 그럴 리가...."

나는 그녀를 달래며,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역 위를 걸었다.

우리 사이의 어색한 침묵을 깨트린 것은 제삼자였다.

"잠깐, 잠깐만요!"

같은 객차에 탔던 그 살찐 남자였다. 그는 멀리서 어떤 양복쟁이들과 말하고 있었는데, 내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권총을 꺼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따졌다.

"무슨 속셈인가?"

"네? 아니, 아닙니다! 그런 의도가 아니라!"

남자는 당황하며 실린더를 열었다. 안쪽에서 여섯 개의 탄피가 우르르 쏟아지자, 남자는 엎드려서 허겁지겁 그걸 주워 모았다. 그는 주운 탄피를 내게 보였다.

"그건, 그건 꿈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권총을 맡겼고, 장전한 여섯 발 전부 발포한 흔적이 있습니다!"

"총알값이라도 청구하겠다는가? 좋아, 기꺼이 내지."

"아니, 그게 아니라...."

그는 초조한 듯이, 그러나 좀처럼 자신의 말을 정리하지 못하고 머리만 벅벅 긁었다. 나는 사실 그와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

보편사무국.

이 허술한 남자는 자신의 소속을 그렇게 밝혔다. 그는 남들보다 많은 것을 알았고, 군용 장비를 숨기고 다니기도 했다. 이번에 그와 함께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지만, 믿고 안심하기에는 수상쩍은 면이 너무 많았다. 적어도 보편사무국이라는 수상한 정부 기관의 실체를 밝혀내기 전까지는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가 생각을 다 정리하기 전에 떨쳐낸 셈으로 그를 지나쳐 걸었다. 마리는 내가 상대를 대놓고 무시하자 깜짝 놀란 듯이 나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다, 결국엔 서둘러 내 뒤를 쫓았다.

"그렇습니다, 이름! 이름을 말해주세요!"

남자는 내 뒷모습을 향해 급하게 외쳤다.

그때, 왜 이 단어가 떠올랐는지 모른다. 그의 절박한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장난기가 돌았는지도 몰랐다. 이유야 어쨌건, 나는 또박또박 이렇게 대답했다.

"플록시노시니힐리필리피케이션."

"네?"

"폴란드 이름이라네. 못 들었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말해주지, 플록시노시니힐리필리피케이션이라네."

마지막으로 돌아보니, 남자는 제자리에 선 채 "프, 프." 하고 바보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주 웃기는 광경이었다. 마리는 날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나는 그저 낄낄 웃고 말았다.

투둑, 하고 안주머니 실밥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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