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51화 (51/232)

§51. 꿈속의 남자

창밖에 햇빛이 실내로 들어오며, 묵은 책 사이로 새어나오던 얇은 셀룰로스 파편들이 바닥에 찬찬히 가라앉았다.

태엽 풀리는 소리, 시계추가 고점에 이르러 낙하하는 비명, 그리고 리들 경의 늙은 목소리만 실내에 찬찬히 울렸다.

"앞서 말했듯이, 도지슨은 세 자매 중에 앨리스를 편애했네. 세 자매와 세 형제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 모르는 건 눈치 없는 어른들뿐이었지. 하지만 어느 기점부터인가, 그 편애는 급격히 경사지기 시작해서, 집안에 있는 일이 드물었던 나마저 알게 되었네."

리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중에 도지슨은 앨리스만 따로 불러내어 피크닉에 초대하거나,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마당을 산책하거나 이런 식이었는데, 가정교사 업무를 태업한 것도 아니니 그것만으론 비난할 여지가 없었네. 다만 우리 모두가 문자화할 수만 없었을 뿐,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 그는 너무 가까웠어. 그 아이와 너무 가까웠단 말이네."

근육보다는 살가죽이 두꺼운 손 위로 혈관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저주받은 날이 찾아왔지. 앨리스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도지슨과 함께 외출했고, 이상하게도 밤늦게 홀로 집에 돌아왔네. 그 아이의 윤기나는 검은 머리카락은 꾀죄죄했고, 몸에는 주변에 자라지 않는 꽃과 풀잎, 그리고 모래를 잔뜩 묻히고 있었지. 앨리스가 좋아하던 예쁜 드레스는 가지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너덜너덜했고, 모습은 밖에서 수일은 떠돈 사람처럼 형편없이 초라했네. 부인은 깜짝 놀라, 아이에게 어딜 갔다 왔는지 물었지. 그러자 앨리스는 이렇게 대답했네."

리들은 말했다.

"이상한 나라(Wonderland)."

나는 놀란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더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없었네. 나는 해가 밝자마자 곧장 도지슨을 찾아가, 그에게 내 딸들과 사적인 교류를 금한다고 전했네. 그걸 지키지 못한다면, 다시는 내 아이들과 만날 수 없을 거란 조건을 걸면서 말이네. 그는 낙담한 것 같았지만, 결국에는 군말 없이 조건을 받아들였네. 그 협잡꾼 놈한테 완전히 속은 거지."

리들은 축 늘어진 눈주름이 떨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아주 착실하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였지. 워낙 소극적인 인물이니 뭘 생각하는지 몰라도, 다른 꿍꿍이는 전혀 없어 보였어. 하지만 나는 앨리스가 여전히 그와 밀통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 앨리스의 기벽이 나날이 심해져만 간 거야. 어떤 방식인지는 몰라도, 도지슨과 앨리스는 둘만의 암호를 가지고 있었고, 꾸준히 사적인 만남을 이어갔다고 봐야 했네."

"암호 말입니까?"

나는 그 단어를 넘길 수 없었다.

"그래. 도지슨은 언어학적으로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였어. 여러 단어를 짜맞춰 기가 막힌 말장난을 떠올리곤 했지. 그는 그런 재능을 여지없이 발휘해, 몇 가지나 되는 수학적, 언어적 암호를 만들어냈네. 불쾌한 일이지만, 그 중 일부는 나도 익히고 있지. 그가 어떤 사람이건 재능만큼은 진짜였어."

나는 암호 편지를 떠올렸다. 앨리스가 만들어낸 정교한 말장난 같은 암호들이 어디서 시작했을지 알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도지슨을 저택에서 완전히 쫓아냈네. 그뿐만 아니라, 따로 사람을 시켜서 그가 앨리스와 몰래 만나지 않는지 살피게 했네. 이 일로 나를 비난하려 들지 말게. 당시 내 정신을 붙잡은 신경증은 극심해서, 나는 수학 기호만 보아도 소리를 지를 지경이었으니까. 내가 단검을 들고 그를 찾아가지 않은 것만 해도 굉장한 인내심을 발휘한 거란 말이네."

"이해합니다. 제게도 찌르고 싶은 친구가 있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부디 자네도 인내심을 발휘하길 바라네. 여하튼, 그자는 맹세를 지키는 것처럼 보였어. 별로 넓지도 않은 옥스퍼드였지만, 그는 정말로 우리 저택 근처로 얼씬도 하지 않았지. 나는 안일하게 모든 사태가 끝났다고 낙관했네."

리들은 긴 이야기를 마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이야기가 전혀 다른 국면으로 흘러가리라 짐작했다.

"너무 오래 말했더니 목이 타는군. 밀크티라도 한잔하겠나?"

"저도 점심을 걸렀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편에 놓인 차 주전자에서 식은 차를 따르고 우유를 섞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이빨 때문에 단것은 영 먹기가 힘들더군. 그래서 준비된 다과는 없네."

"괜찮습니다."

우리는 밀크티 한 잔씩으로 입가를 적셨다. 누구도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지 않았다.

"앨리스, 그 아이는 이상했네. 잠깐 말을 생각해 봤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

대신 찻잔이 반쯤 비었을 무렵에, 자연스럽게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컨대, 아이란 하루만 정 붙인 사람이 떠나도, 울고 보채며 며칠을 그리워하기 마련 아닌가. 하지만 앨리스는 전혀 달랐어. 그 애는 도지슨에게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가 떠나고도 전혀 그리워하는 기색이 없었네. 내가 여기서 느끼는 불안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겠나? 아무 실체도 없는 일이 도리어 공포가 되었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이 정상적인지 의심하며 말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이건 굉장히 이상한 이야기였다.

"대신, 앨리스는 아주 많이 자게 되었네. 원래도 잠이 많은 아이였고, 아이는 잘 수록 좋다고 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했네. 앨리스는 내가 보고 있는 한, 언제나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해가 떠있을 때에 자고, 해가 떠있을 때에 일어났지. 나는 그 사실을 수상하게 여겨서 은밀히 그 아이를 추궁했네. 그리고 그 애가 털어놓은 사실은 끔찍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네."

내려놓은 찻잔에 파문이 일었다. 리들 경은 책상 위에 올린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앨리스는 꿈에서 도지슨과 만나고 있었던 거야!"

그는 크게 소리 질렀다. 나는 아까 한 생각을 정정했다. 그의 목청은 여전히 최고 기록을 경신할 줄 알았다.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인지는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그는 그걸 가능하게 했어. 찰스 러트위지 도지슨이 자신의 기괴한 재능을 몇 차례 선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정말로 그 이상의 존재였지. 그가 부리는 흑마술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네. 나는 앨리스에게 거듭 확인했네. 앨리스는 자신이 만나는 것이 루이스 캐럴이라 말했지만, 나는 그게 찰스 러트위지 도지슨의 가명이란 걸 곧바로 눈치챘지. 그녀가 재현한 몇 가지 버릇이 도지슨의 것과 완전히 일치했기 때문이네."

리들은 숨을 헐떡였다.

"아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의 본성에 대해 모를 때, 잠깐 도지슨과 친밀하게 교류한 적이 있네. 그 젊은 신사에게 매력을 느끼면서, 오직 어른만이 눈치챌 수 있는 특이한 습관이나 말투 따위를 기억했지. 아이가 흥미를 느낄 만한 것도, 오랫동안 기억할 만한 것도 아니었건만, 앨리스가 묘사하는 꿈속의 남자, 루이스 캐럴은 틀림없이 찰스 러트위지 도지슨이었어!"

그의 양손이 무언가 조르는 모양으로 바뀌었다. 아마 상상 속 루이스 캐럴의 목을 조르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나는 두 사람의 관계를 끊기 위해 부단히 애썼네.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했네. 성당의 신부님들과 상의하여 퇴마 의식을 벌이기도 했고, 프로이트라는 수상하기 짝에 없는 젊은 신경증 의사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 전해져 온다는 드림캐처를 침대 위에 걸기도 했네. 매주 한 명씩 그녀에게 씐 귀신을 쫓아내겠다고 수상한 수도사들이 저택을 방문했지. 내가 얼마나 절박했는지 알겠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마다, 루이스 캐럴은 내 꿈에 찾아왔네. 그는 언제나 내가 세운 허술하기 짝에 없는 방책을 비웃으며, 눈앞에서 앨리스, 그 아이를 채어 갔지. 나는 머지않아 우리 가족 모두가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는 걸 알았네. 모두가 히스테릭해져 갔지. 앨리스의 검은 머리는 날이 지날수록 선명한 금발로 변해갔네. 부모 중 누구를 닮지도 않은 색깔이었지. 우리 가족은 그때 많은 죄를 저질렀지. 그녀의 금발을 볼 때마다, 루이스 캐럴의 끔찍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 같아서...."

리들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현실의 도지슨을 추궁하고, 발뺌한다면 그자를 죽이려 했네."

그 말에 나는 크게 놀랐다. 설마 그가 스스로 자신의 치부를 고백할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비바람이 치는 밤이었어. 우리 가족은 모두 마음을 합쳐서, 루이스 캐럴을 죽일 방법에 대해 공모하고 있었네. 그런데, 문밖에서 낮은 노크 소리가 들렸어. 그러니까, 내 말은, 정말로 높이가 낮았지.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고 문을 열고 보니, 바깥에는 10살 남짓의 어린 소년이 서 있었네. 아이 같지 않은 불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곱상한 소년이었네."

리들은 그 순간을 떠올린 것처럼 몸을 벌벌 떨었다.

"그는 자신이 황금여명회라 불리는 비밀 결사의 밀사라고 자처했네. 그리고 수십 가지 종교 도표와 상징물을 늘어놓으며 내 정신을 현혹했지. 나는 그 어린 소년이 품은 오컬트 지식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기이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그가 주장한 새벽의 주술 의식에 참여했네. 우리 가족 모두가 참여했지. 누구도 거부할 수 없었어, 그럴 수밖에. 그는 순식간에 우리 가족 전원을 포로로 만들었으니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리들은 루이스 캐럴에게 보인 공포보다, 지금 이 순간 떠올리는 그 기이한 소년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옥스퍼드 북쪽의 포트 미도우에는 별로 높지 않은 언덕이 하나 있네. 전망이 좋은 탓에 많은 사람이 피크닉하러 방문하는 장소지만, 떨어지는 경사가 격해서 발을 헛디디면 크게 다칠 수도 있지. 다른 이름도 있기는 하지만, 토끼풀이 많이 자라는 곳이라 사람들은 그냥 토끼굴이라고 부르고 만다네."

그는 갑자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간결히 말을 마쳤다.

"찰스 러트위지 도지슨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네. 자살이었는지, 타살이었는지, 분분한 죽음이었지. 하지만 우리 가족은 그자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었지. 그걸 위해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해도, 감수할 만한 것이었네."

문득, 방 안에 드리운 정오 햇빛이 조금 어두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은 해방되지 못했네. 앨리스, 그 아이에게서 여전히 루이스 캐럴의 그림자가 보여."

그날 밤, 나와 마리는 옥스퍼드 북쪽의 울버코트 공동묘지에 있었다.

올드코트를 떠나는 열차가 들어오는 시간을 고려하면,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곧 한 묘지를 발견하고 그 앞에 섰다.

단촐한 십자가 묘비가 세워진 무덤이었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지, 그 위에는 잡초가 어수선할 정도로 무성했다. 평생 자신이 순결하길 바라며 살아온 남자는 사후에도 겸손하게 이름 없는 들꽃만을 제 위에 허락했다.

찰스 러트위지 도지슨

1월 14일, 1885년

방년 28세

나와 마리는 각자 데이지 꽃 한 송이씩 내려놓았다.

"주인님."

마리는 나를 돌아봤다. 그녀의 면사포는 죽음이 팽배한 이곳에서 아주 잘 어울렸다.

"이 사람을 찾으러 온 거였죠?"

"그래."

나는 그저 복잡한 심경이었다.

리들 경이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는 숨기는 건 있어 보였지만, 이미 죽은 자를 놓고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내게 이것저것 털어놓은 이유는, 오로지 앨리스 한 사람의 안위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루이스 캐럴은 정말 죄인이란 말인가?

"이보게, 마리. 내가 만약 자네를 숲 속에 끌고 가서 온종일 끌고 다닌 뒤에, 어딜 다녀왔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나?"

마리는 내 질문에 잠깐 고민했다.

"주인님에게 치매가 왔다고 말하겠죠."

나는 그녀를 노려봤다. 그녀는 재빨리 덧붙였다.

"아니면, 평범하게 숲에 다녀왔다고 하겠죠."

"이상한 나라라고 대답할 가능성은 없나?"

"그렇게 근사하게(wonder) 느껴지지 않는데요."

"그렇겠지. 심지어 옥스퍼드는 시내에서 걸어갈 만한 숲조차 없지."

그 둘은 분명 어딘가에 갔다 왔고, 그것이 모든 변화를 일으킨 사건임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정말 토끼굴을 통해서 이상한 나라로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에 리들 경이 말했던 런던에서 한 명의 물리학자와, 한 명의 수학자의 실종된 사건까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온 나는 도리어 몇 개의 의문점만 늘려서 돌아가게 되었다.

"주인님, 서두르지 않으면 기차 시간에 늦어요."

"그래, 가지. 여기 있어 봐야, 더 알아낼 것도 없어 보이는군."

마리가 재촉하자,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우리는 그렇게 묘지와 옥스퍼드를 떠나, 역을 통해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번에는 아무 문제 없는 느린 열차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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