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52화 (52/232)

§52. 아이 도둑

1896년 3월.

이번 겨울은 특히나 덥고 우중충했다.

온화한 날씨에 속아 고개를 빼꼼 치든 우둔한 봄꽃은 봉오리를 틔웠다가, 바로 다음 날 찾아온 혹한에 얼어붙곤 했다. 이런 굴곡 있는 날씨가 이어지니, 가뜩이나 우울한 런던 거리는 썩은 꽃봉오리로 한층 더 스산한 분위기를 띄었다.

변덕스러운 날씨로 고생하는 꽃만이 아니었다.

어쩌다 눈이라도 오는 날에는 런던 전체가 앓아누웠다. 눈송이는 온전히 바닥에 떨어지지도 못하고, 늘 반쯤 녹아서 도착했는데 축축한 덩어리가 진흙이나 말똥과 섞여 갈색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눈이라기보다는 하늘에서 내리는 오물이었고, 이 새로운 골칫거리에 일이 배로 늘어난 청소부 아이들은 해가 뜨지 않은 새벽부터 밤까지 울상으로 일했다.

하늘은 토리당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 적기조례를 제정했으니 말이다. 마부들은 언 땅에 말이 넘어져 다치기라도 할까 겁먹어 속도를 내지 못했고, 앞에서 마차가 길을 막으니 자동차는 달리지 못했다.

나는 늘 출발하던 것보다 30분은 일찍 집에서 나와야, 간신히 수업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지팡이 끝이 언제나 축축하여 기분도 늘 불쾌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침에 입고 나온 겨울 코트는 점심쯤만 되어도 애물단지가 되어 옆구리에 끼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프랑스 풍자 화가가, '런던 사람은 코트를 입는 법을 몰라, 가방처럼 들고 다니며 뽐낸다.' 라는 내용의 불쾌한 기사를 실었다는 게 알려진 이후, 한동안 런던에선 반(反)프랑스 정서가 더욱 심해지고 말았다.

파리를 흠집 잡기 위해, 모든 신문사가 에펠탑을 조롱하는 기사를 신문마다 하나씩 찍어냈음은 물론이다.

하늘도, 사람도, 무엇하나 깔끔하지 못하고 축축한 그런 겨울 어느 날이었다.

───탁.

나는 만년필을 내려놨다. 그리고 조금 전에 쓴 문장을 찬찬히 다시 읽었다.

「적색 광선을 마리아선, 녹색 광선을 피에르선이라 명명한다.」

이것이 마지막 구절이었다. 거의 1년 가까이 시간을 잡아먹은, 마리 퀴리의 노트 번역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보람도 느낄 수 없었다.

"적색 광선을 마리아선, 녹색 광선을 피에르선...."

나는 음울한 목소리로 문장을 다시 읽었다. 소리 내어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번역이 끝나지 않았을 때는 희망을 품을 여지라도 있었으나, 이제는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행적에 관해선 조금도 기록하지 않았다.

남겨진 노트는 학술서였고,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감정을 담지 않았다. 아마 그러지 않고는 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퀴리 부인은 마지막에 이르러 인간적인 면모를 여실히 비추고 말았다.

나는 그녀가 마지막에 두 광선에 퀴리 부부의 이름을 나눠주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 의미를 이해할 자는 그녀의 남편, 피에르 퀴리뿐일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노트를 피에르 퀴리에게 보내주기로 결심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이 노트의 필사본을 완성해서 프랑크 학술회에 비치하기로 했다. 나로서는 그녀가 남긴 학문적 성취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녀가 목숨을 걸고 남기려 한 연구 자료를 허투루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학술회에는 그녀의 성취를 이어나갈 수 있는 자가 한 사람 있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

신조차 등한시하며 학문을 쌓아올린 그라면, 틀림없이 퀴리 부인이 남긴 노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자를 찾아야겠지만. 그리고 그건 이 일에서 가장 큰 난국이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실종되었다.

옥스퍼드에서 돌아온 다음 날, 나는 곧바로 프랑크 저택을 찾아갔지만,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일주일 전에 돌연히 자취를 감췄다는 대답만을 들었다.

아예 저택에 눌러앉고는 식객 노릇 하던 그였다. 그런 자가 아무 말 없이 외출하고는 실종되었다고 하니, 추적할 여지가 없었다.

"후우."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1년 전, 마리 퀴리가 내게 찾아온 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학술회 회원들은 하나같이 괴짜라 연락할 수단이 없다고. 그녀가 느낀 답답함을 1년 지난 지금 공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묘지 주변을 맴돌던 때처럼 단순히 어떤 일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라면 그나마 나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에 담긴 비밀과 죄악을 보았다. 그자는 족히 인간을 멸하고도 남을 자이다. 그의 독단은 한없이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졌다.

────똑똑.

나는 창 두드리는 소리에 짧은 묵시에서 깨어났다.

창 너머로 시선을 돌리니, 내가 익히 아는 그 신문팔이 소년이 다가와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소년은 힘없이 인사했다. 평소의 씩씩한 목소리는 어쨌는지, 오늘내일하는 병자처럼 골골대고 있었다.

"목소리가 작구나."

"안녕하세요, 어르신!"

나는 걱정해서 한 말인데, 소년에게는 재촉처럼 느껴졌는지, 아니면 정말로 내가 귀가 먹었다고 착각이라도 하는지, 그는 억지로 목청을 쥐어짜 마른 목소리로 외쳤다.

"혼내는 게 아니니, 평범하게 말해도 된다. 그나저나 못 본 사이에 엉망이 됐구나."

조금 더 자세히 살피니, 지난 며칠 사이에 그는 완전히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물론, 원래 단정한 편은 아니었지만,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핼쑥한 것이 정상은 아니었다.

"병이라도 들었나?"

"아니요, 어르신. 저는 건강해요."

그는 병에 걸렸다고 하면 쫓겨나기라도 할 것처럼 곧바로 답했다.

"부모님은 어쩌시고."

"저는 펜처치 소년의 집에 살아요."

"아, 그렇군."

나는 그의 대답에 당황하며 급히 말을 마무리 지었다. 소년의 집이라면, 보통은 고아원에 붙는 이름이었다. 런던에서 일하는 아이 태반이 고아라는 건 알았어도, 면 대 면으로 대화할 일은 없었으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소년은 말없이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타인의 행동을 기다리는데 아주 익숙해 보였다. 사랑받은 적 없는 소년이 으레 짓곤 하는 표정이었다.

"밥은 제대로 먹고 있니?"

"네, 영 어르신께서는 아주 잘해주세요."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는 걸로 봐서는, 영이라는 자가 아이들을 잘 가르치기는 한 모양이었다. 잘 대해주는지는 제쳐두더라도 말이다.

나는 아이의 마른 얼굴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잠깐 서있거라. 바쁘진 않겠지?"

"얼마나 기다리면 될까요?"

"아주 잠깐이면 돼."

나는 창문을 닫고는, 쩔뚝거리며 방 밖으로 나갔다.

"마리, 어디 있나."

내 부름에 복도 끝에서 마리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가 조명이 닿지 않는 복도 구석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모습은 매번 보면서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나는 놀란 심장을 달래면서 애써 말했다.

"아침에 먹고 남은 빵 없나?"

"시장하시면 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그냥 빵만 주게."

그녀는 주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마른 빵 한쪽이 올려진 접시를 내게 건넸다. 그 위에는 먹음직스럽게 잼이 발라져 있었다.

"이렇게 자꾸 군것질을 하시니 위가 안 좋아지시는 거예요."

마리는 입맛 떨어지는 잔소리를 더 얹어주었다. 심지어 이건 내가 먹을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실로 억울했으나, 소년에게 빵을 건네주려 한다는 게 들킨다면 더 심한 잔소리가 돌아올 테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 안으로 도망쳤다.

닫힌 창 너머로는 여전히 소년이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그 사이로 빵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배를 좀 채우렴."

나는 감사의 말이라도 한 마디 돌아올 줄 알았는데, 소년은 양손으로 빵만 잡고는 허겁지겁 물어 뜯었다. 작은 손이 꾸물거리며 조금이라도 더 빨리 빵을 입 안에 우겨 넣으려는 모습은 추하기보다는 딱하기만 했다.

"케헥, 켁."

역시나, 딱딱하고 마른 빵을 저렇게 급하게 삼키려 하니, 목이 막히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기침하다가 커다란 빵 조각을 바닥에 뱉어냈다.

"안 돼."

나는 소년의 시선이 바닥에 꽂히자마자 말했다.

"거지 놈들이 아니고서야, 땅에 떨어진 걸 주워 먹는 게 아니야. 심지어 입안에서 나온 것 아닌가."

"하지만 전 거지인걸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경솔한 단어 선택이었다. 나는 애써 다시 말을 이었다.

"신사가 되고 싶니?"

아이는 선망이 담긴 눈으로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내 말을 들어라."

그는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했지만, 잘 이겨내고는 다시 빵에 집중했다. 얼마나 굶주려야 저런 맛대가리 없는 마른 빵을 걸신들린 것처럼 먹을 수 있을까.

소년의 입에서 무언가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빵 조각이 아니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방금 그건 이빨 아닌가?"

"아, 네. 맞아요. 덜렁거리던 이빨이 빠졌어요."

그러고 보면 소년은 아직 유치가 다 빠지지도 않은 아이였다. 나는 새삼 그가 얼마나 어렸는지, 그리고 이가 빠진 것보다 빵 한 조각에 관심이 많은 소년에게 두 번 놀랐다.

잠시 후, 그는 더러운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 먹은 뒤에, 그제야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소년의 인사에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신문 사시겠어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한 부 주게."

소년은 신문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신문 한 부를 꺼내 내밀었다. 나는 소년에게 동전을 넉넉히 쥐여주었다. 그중 얼마가 그에게 돌아갈지는 몰랐지만, 영리한 소년이니 알아서 처신하리라 믿었다.

나는 소년을 떠나 보내고 신문 제목을 빠르게 훑었다.

「격해지는 SMR 웰스호 논쟁, 고속 열차의 시대는 오는가?」

「"아문센은 스웨덴 얼간이", 스콧 입을 열다!」

제목만 살펴도 눈을 끌어당기는 여러 기사가 있었다. 하지만 당장 내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아주 기이한 문장이었다.

그 문장은 너무나도 난해하여, 어떤 실패한 시인이 기자로 전직한 뒤에, 자신의 역작으로 남을 마지막 예술혼을 이 한 문장에 풀어 담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해당 기사 제목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이 도둑이 나타나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

그간 내 일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몇몇 번거로운 사건에 휘말려 분주했던 근 1년이었으나, 사실 내 인생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었다.

번역 작업이 끝난 덕에, 남은 시간 동안 미뤄뒀던 몇몇 논고를 써서 잡지에 투고하기도 했다. 칼라스 교수의 빈자리를 채우진 못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대학 일도 아주 순조로웠다.

한 가지 아쉬운 일은,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찾는 일이 조금도 진전되지 않는 점이었다.

그는 어딜 가더라도 소문이 날 법한 외견의 소유자였지만, 이 사람 많은 도시에서만큼은 아니었나 보다. 사람을 찾는 일은 내 특기도 아니었으니, 나는 그를 찾는 일을 거의 단념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 일상에서 바뀐 것은 하나뿐이었다.

"요즘은 신문을 안 읽으시네요."

마리의 질문에, 나는 무심코 창밖을 쳐다봤다. 창 너머로는 지나가는 통행객들 옆 모습만이 보였다. 정면으로 다가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문을 팔러 오질 않는단 말이지...."

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신문팔이 말인가요? 잘 됐네요. 이제 주인님도 정가에 신문을 사시는 법을 배우시겠네요."

"매번 신문을 가져다주니 수고비를 좀 줘도 괜찮잖나.."

"주인님이 신문값의 두 배씩 내지만 않았어도, 저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걸요."

그녀는 쪼잔하게 신문값 한두 푼으로 아우성이었다. 그녀는 잠깐 말없이 서 있다가 말했다.

"혹시 아이 도둑이 잡아간 거 아닐까요?"

그녀의 상상력을 여실히 발휘한 순진한 대답이었다.

"그, 있잖아요. 신문에 나오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녀에게 그 기사가 담긴 신문을 준 것이 바로 나였으니까.

아이 도둑은 그녀의 스크랩북 한편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나는 그녀가 산전수전을 다 겪고도 그런 기사를 모으는 것이 영 못마땅했지만, 뭐라 할 자격이 없었기에 순순히 신문을 바치고 있었다.

대신에 나는 정체 모를 괴인을 향해 불평을 토했다.

"마음에 안 드는 이름이야."

"아이 도둑이요? 그렇네요, 왜 유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요?"

나는 마리의 질문에 세차게 콧방귀 뀌었다.

"본질을 놓치고 체면에만 급급한 몇몇 얼간이 놈들 때문이지. 영어의 순수성이니 뭐니, 허튼소리를 하면서 미국에서 온 말을 멸시하는 거야. 위에서 배웠다는 놈들이 그런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 멍청한 기자 놈들이 그대로 따라서 멍청한 문장을 짜내는 거지. 그렇다고 해도, 더 나은 표현이 수십 개는 더 있었을 텐데."

그들이 이런 표현을 쓴 이유는 너무 자명하여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이를 물건 취급하는 거야."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기분이 나빠 보이니, 영리한 마리가 말을 멈춘 것이었다. 그녀는 이 시대 사람, 특히나 하류층 사람이니 아이가 형편없는 취급을 받는데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혹시 자네가 뭔가 했나?"

마리는 말없이 내 쪽을 돌아봤다.

"알다시피, 자네는 아이가 보기엔 조금 무섭게 생겼으니까. 얼굴을 보고 오지 않게 됐을지도 몰라. 뭔가 짐작 가는 일은 없나?"

"이젠 제가 괴물 흉내라도 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그냥 얼굴을 보면 무서워할 테니까...."

"그래요, 전부 제가 이상하게 생긴 탓이겠죠."

"아니, 자네 왜 자꾸 이러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조심하겠네."

마리는 요즘 자신의 처지를 이용해, 나를 핍박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말았다. 요즘에는 무슨 말을 해도 그녀의 눈치가 보이니, 이것이 서둘러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찾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그녀가 혹시라도 무슨 말을 더 할까 봐,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출하시나요?"

"그래, 잠깐 밖에 나가서 알아보고 오지. 해가 질 때쯤에는 돌아오겠네."

그녀는 내 코트를 입혀주고, 현관까지 배웅 나왔다.

"조심하세요."

혹시 그녀는 내가 어딜 가는지 알았을까. 그건 내 목적지를 생각하면 아주 적절한 배웅 인사였다. 내가 지금부터 향할 곳은 바로 런던 최악의 빈민굴이었으니까 말이다.

런던의 동쪽 끝. 모든 쓰레기가 모이는 치안 공백 지대.

이스트 엔드 오브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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