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54화 (54/232)

§54. 하얀 꽃과 여든 짝의 관

그 뒤로 이야기는 오로지 평행선을 달렸다.

영 원장은 무언가 껄끄러운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 무엇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캐면 캘수록, 그 비밀이 내가 알고자 하는 것과 전혀 무관한 것뿐이란 것만 드러났다.

그에게는 기꺼운 일이지만, 나는 그가 숨기고 있는 몇몇 개인적인 치부에 전혀 관심 없었다. 더는 물을 가치도 없었기에, 나는 적당히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원장실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저런 보신주의자가 한 시설의 장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런던의 부끄러운 현 세태에 대해 불평을 토하며, 난간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가정부가 아까와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형사는?"

"아래요."

그 가정부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잘 보니 비질하는 위치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태만하기로 꼭 어울리는 고용주와 고용인이었다.

나는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에서부터 알싸한 먼지내가 올라와 코끝이 가려웠다.

지하실은 평생 바닥 한 번 쓴 적 없는 것처럼 매캐했다. 드문드문 썩은 우유 냄새 같은 악취가 섞여 있었는데, 아이 피부 특유의 젖살 냄새가 이토록 끔찍하게 변질한 것이다.

특히나 지하실의 정경은 끔찍했다. 고아원 지하에는 관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아니, 잘 보니 그건 나무 관 모양으로 지은 침대였다. 한 줄에 스무 개씩, 팔십 개나 되는 상자와 얇은 담요가 놓여 있었다. 관 안에서는 띄엄띄엄 낮은 신음이 들렸는데, 몸이 아파서 일할 수 없는 아이들만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윌슨은 그런 지하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가왔다.

"용무는 다 보셨습니까?"

"그래."

그는 담뱃갑은 꺼내서 들이밀었는데, 나는 정중히 밀어내 사양했다.

"담배는 안 피우십니까?"

"입이 텁텁해서 궐련은 안 피우네. 자네야말로 담배를 피우는지 몰랐는데."

"배운지 얼마 안 됐습니다."

그 말은 사실인지, 담배를 꼬나문 자세가 썩 자연스럽진 않았다. 그는 입에 담배를 문 채,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사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나 때문인가?"

"수사국에서는 선생님을 어찌 대할지 방침을 내릴 때까지 접촉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경찰 기관입니다. 전과자에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수사 협조를 드릴 수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윌슨은 말끝을 흐렸다.

"살인을 저질렀지."

"그렇습니다."

내가 억지로 그 말을 이끌어내자, 윌슨은 한숨 쉬었다.

"자네는 속은 거야. 나 같은 노인 한 명 때문에 그 얌체 같은 놈이 고민하고 있을 리가 없지. 지독한 놈이 공연히 아랫사람만 마음쓰게 하는군."

"얌체... 설마 국장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달리 얌체가 더 있나. 여하튼, 그러면 모른 척하면 그만 아닌가."

"그러긴 어렵습니다. 지금 수사국 내에서 선생님은, 아마 선생님께서 예상하고 계신 것보다 더 중요한 인물입니다."

나는 윌슨이 뒷말을 이어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설명 없이 말을 마쳤다.

"그러니 저희가 오늘 만난 건 비밀입니다."

담배와 종이가 타들어 가는 특유의 쓴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자네도 바뀌었군."

"그렇습니까? 외려 선생님께서는 감옥에 다녀오시고도 전혀 바뀐 게 없어 보입니다."

"나야 살 만큼 산 노인이니 당연하지."

나는 그리 말하며 그제야 왜 윌슨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단순하게 말하면, 얼굴이 바뀌었다.

고작 몇 달 만에,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홀로 세파를 맞은 것처럼 새로 생긴 주름과 넓어진 미간, 안구 밑으로 늘어진 살은 이 젊은 형사의 인상을 극적으로 바꿔 놓았다.

"알고 계십니까? 이곳 이스트 엔드에서는 매일 다른 이유로 서른 명씩 사람이 죽습니다. 저는 이곳에 부임하기 전까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제가 얼마나 좁고 편협한 세상을 보고 살았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사그라지는 생명 앞에선 어떤 것도 가치 없습니다."

윌슨은 한탄하는 것처럼 말을 쏟아냈다.

"자네에겐 형사가 맞지 않을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일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천연덕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예전의 그였다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

"아이 도둑 말입니다."

"그가 정말로 실존하나?"

나는 의심을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눈치채셨군요. 맞습니다, 항간에는 연속 실종 사건이 아이를 봉투에 담는 괴인의 소행처럼 소개되고 있습니다만, 수사국에서는 다른 쪽의 단서를 잡고 있습니다. 애초에 개인이나 일개 단체가 저지른 일이라 보기에는 영역이 너무 넓었습니다. 각각의 사건은 개별 사건으로, 이젠 일종의 사회 현상이라 봐야 합니다."

"더 자세히 말해보게."

윌슨은 잠깐 망설였다. 나는 그 짧은 틈에서 정보의 가치를 점쳐보았다. 앞선 정보도 그랬지만, 이건 특히나 수사국 내부에서만 비밀리에 돌고 있는 내용임이 분명했다.

"됐네. 어차피 나는 외부인이니, 말할 수 없다면 하지 않아도 되네."

"이전처럼 선생님께 수사 협조를 드릴 수 있다면 편하겠군요."

내가 작정하고 삐친 티를 내니, 고민하던 윌슨은 결국 승복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금발이나 흑발의 건강한 소년은 5파운드, 붉은 머리는 4파운드. 소녀는 머리 색과 상관없이 건강하면 4파운드. 미국 노예상이 제시하는 업계 평균 매입가입니다."

나는 영 원장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자가 무고함을 호소하던 5파운드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최근, 아일랜드에서 활동하던 미국 노예상들이 기어코 영국 본토까지 발을 뻗치기 시작했습니다. 수사국에서는 불법 노예상 한 명을 검거했고, 해방을 거래 조건으로 하여 이런저런 정보를 얻어냈습니다. 그자의 말에 따르면, 런던 고아는 가장 거래하기 쉬운 상품이라고 합니다. 실종되어도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긴 항해 동안 먹는 양도 적으니 음식 선적을 덜 해도 되며, 순순하니 다루기 편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개새끼들이군."

나는 무심코 한 마디 내뱉었다. 윌슨은 곧바로 따라했다.

"그렇습니다. 아주 개새끼들입니다."

"이런, 내가 자네의 순수한 언어관을 더럽혔군. 입조심 하겠네."

윌슨은 웃지 않았다. 그의 입술에 맺힌 담뱃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차가운 돌 바닥 위에 잿불이 힘없이 사그라졌다.

"저는 두렵습니다. 이 지하실을 보시죠. 이렇게 삭막한 풍경을 보고 자란 아이들 마음속은 얼마나 메말라 있겠습니까? 그들이 사랑을 이해할까요? 언젠가 공장으로 나가, 평생을 압착기와 톱니바퀴 사이에서 일하다가 죽겠죠. 그런 사랑을 모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또 어떻겠습니까? 그들이 만약 우리 사회까지 진출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우리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서서히 움트던 목소리가 덜덜 떨려왔다. 이곳은 생명이 자라건만, 마음이 죽는 무덤이었다.

아이들은 그렇기에 관 위에 누워 자는 것이다. 그들이 지상으로 올라갈 때, 매미 유충이 노폐물을 모두 버리고 가는 것처럼, 아이들은 관 속에 인간을 묻고 떠났다.

"저는 차라리 아이 도둑이란 괴인이 실존하고, 그자를 총으로 쏴버리면 모든 일이 끝나면 좋겠습니다."

"안될 게 뭐 있나."

윌슨은 물끄러미 날 쳐다봤다.

"늑대인간도 있는 마당에, 괴물 유괴범 쯤이야."

나와 윌슨은 낮게 웃었다. 지상으로 오르지 못한 웃음소리가 지하실에 갇혀 메아리치다 사라졌다.

윌슨과 헤어진 뒤에, 나는 귀갓길에 올랐다.

더는 조사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윌슨의 말이 틀림없다면, 신문팔이 소년의 실종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조차 아니었다. 그저 수사국이나 군인을 믿는 수밖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당장에라도 대서양을 건너는 소년의 모습이 그려졌다. 앙상하게 마른 얼굴로 범선 짐칸에 실린 채, 파도가 칠 때마다 이파리처럼 흔들리는 모습 말이다.

나는 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정말 사람을 찾는 데 소질이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드니,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토록 런던의 겨울은 유독 낮이 짧다.

도시에 빼곡히 들어선 고층 건물은 해가 살짝만 기울에도 긴 그림자를 만들었고, 오후 서너시만 되어도 도시는 그림자 속에 잠기고 마는 것이다.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해가 진 뒤에, 이스트 엔드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탈바꿈한다. 나같이 몸이 불편한 노인이 환영받는 거리는 분명 아니었다.

열심히 쩔뚝거리며 걷던 나는 급하게 발을 멈췄다.

"살려주세요!"

좁은 골목 안쪽에서 들려오는 외침이었다. 허가되지 않은 난개발로 어지러운 이 거리에서 골목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가까운 소리라고는 해도, 실제론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아악! 아악!"

부름은 이제 비명으로 바뀌었다. 나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골목 안으로 뛰었다. 다행히 목소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골목 안에는 90도로 꺾인 단방향 모퉁이가 있었는데 비명은 그 너머에서 들려왔다.

한편, 벽 위에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얼추 보아도 대여섯쯤 되는 인영이 비쳤다. 충분히 상대할 만한 숫자였다. 선수를 쳐서 한두 명만 빠르게 눕혀 놓는다면, 이런 좁은 길에서 어렵지 않게 쫓아낼 수 있었다.

그런 계산 하에, 나는 지팡이를 무기처럼 움켜쥐고 모퉁이를 휙 돌았다.

"거기, 뭐하나!"

나는 기선 제압할 요량으로 일부러 크게 외쳤다. 치켜든 지팡이는 언제라도 상대를 찌를 준비가 됐지만, 정작 거리가 닿으니 뻗을 수 없었다. 대신에 메두사와 마주친 무수한 바보처럼, 그저 날 지켜보는 눈들 앞에서 석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야 그렇겠지, 어떻게 이 참혹한 광경을 보고 태연할 수 있겠는가.

그림자의 정체는 아이였다. 저무는 햇빛에 비쳐 늘어진 그림자를 보고 잘못 판단한 것이다.

여섯 명의 아이였다. 그들은 뭣도 모르는 순박한 얼굴로, 장년 남성 한 명을 바닥에 눕혀 놓고 유리조각으로 번갈아 찌르고 있었다. 그들의 꾀죄죄한 얼굴에는 핏물이 튀어 흘렀고, 작고 오밀조밀한 손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그들은 내가 당황한 틈을 타서, 못된 장난을 들킨 아이처럼 소란스럽게 달아났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황급히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쉴 새 없이 신음하며 손으로 바닥을 긁어댔다.

"자네, 괜찮나? 걸을 수 있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지만, 겉보기와 달리 그의 상태는 위급해 보이지 않았다.

복부에는 자상이 여럿 있었지만, 흉기가 짧기도 했고 무작정 배만 찌른 탓에 내장까지 다치진 않은 모양이었다. 탄탄한 복근도 한몫했을 것이다. 굳이 지혈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출혈도 적었다.

"괜찮아, 이 정도로 사람이 죽지는 않네. 어서 일어나게! 바로 앞이 런던 병원인데 여기서 쓰러져서 되겠나!"

나는 그를 일으키며 독려했다. 남자가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심리적인 이유뿐이었다. 나는 계속 말로 재촉하며, 남자가 생각을 정리할 틈도 주지 않았다.

남자가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그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 그려진 조악한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돌인지 분필인지 모를 것으로 칠해진 다섯 꽃잎을 가진 하얀 꽃 그림이었는데, 아직 안구에 잔상으로 남아 있는 참상과 겹쳐 어쩐지 기괴하고 불길하게 느껴졌다.

나는 남자를 이끌고 도망치듯이 서둘러 떠났다.

런던 병원. 화이트 채플에 있는 150년 전통의 병원.

반년 만에 다시 찾은 이곳은 몰라볼 정도로 처참한 흉가가 되어 있었다. 입구에는 부랑자들이 진을 치고 앉아 있었고, 청결해야 하는 실내도 쓰레기에 묻혀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한때는 전 층에 환자를 꽉 채우던 것과 달리, 이미 2, 3층은 폐쇄되어 계단 위로 오를 수도 없었다. 1층 복도만 보아도, 벽과 바닥의 핏물이 다 빠지지 않았는지 여전히 피 냄새가 옅게 남아 있었다. 전구 불빛을 반사하는 실내는 은은한 분홍빛이 감돌아 깨끗한 내장처럼 보였다.

"환자입니까?"

지친 기색이 역력한 간호사가 투박하게 환자를 접수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의료진이 몹시 지쳐 있을뿐더러, 너무 지친 나머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이래서야 누가 환자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한편,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유대감으로 이어져 있었다. 간호사는 접수 후에도 제자리에 앉아 있기만 했는데, 어디선가 듣기라도 한 듯이 들것을 든 의사와 간호사가 찾아와 남자를 눕혀 갔다.

마치 하나의 생물 같았다. 잘 보면, 이들은 육체도 서로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붉은색이 빠지지 않은 신발과 가운이 바닥에 닿아 병원 건물과 이어진 생물처럼 보였다. 그들이 지나는 길에는 핏빛 잔향이 페로몬처럼 맴돌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과거에는 런던 각지에서 몰려온 환자로 붐볐는데, 지금은 띄엄띄엄 앉아 있는 부랑자뿐이었다. 조금 더 위급해 보이는 환자도 있었는데, 그 모습은 괴한이라 불러도 손색없었다.

나는 그들이 치료비나 제대로 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아마 그들의 궁핍함과, 병원의 조잡한 실내 설비가 완전히 무관하진 않을 터였다.

이건 저주였다.

지킬 박사, 그가 자행한 비인도적인 인체 실험이 남긴 저주가 이 병원의 저변에 짙게 깔려 있었다. 늑대인간 사건 당시에, 이 병원은 그 어느 곳보다 큰 피해지였다.

숙련된 의료진 절반이 도망치지 못하고 죽었으며, 각 계층의 후원인과 연관된 환자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보복으로 생존자들은 어떤 시설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피투성이 병원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벽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러 액자가 걸려 있었지만, 그중에 가장 먼지가 덜 쌓인 액자 안에는 왕실 훈장이 들어 있었다. 훈장 자체는 명분이고, 병원 시설을 재가동할 지원금을 제공하는데 의의가 있었을 터였다.

이렇게 왕실의 전폭적인 자금 지원으로 시설 자체는 가까스로 살아났다지만, 누구도 환자가 떼죽음 당한 병원에 오고 싶어하진 않았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저주라는 표현은 전혀 과장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의료진은 이 저주받은 병원에 영원히 묶이고 말았다. 이 가엾은 지박령들은 평생 피곤한 얼굴로, 한 푼도 내지 못하는 화이트 채플 빈민들이나 상대하다가 죽을 것이다.

나는 수술실에 들어간 남자가 멀쩡히 걸어나올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다행히 내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창백한 얼굴로 수술실에 실려갔던 남자가 혈색 도는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나는 몇몇 특이 경력 덕분에 조금이나마 외과 수술에 소양이 있었는데, 그런 내 눈으로 봐도 시술은 제대로 이뤄진 것처럼 보였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나오자마자 다짜고짜 내게 감사를 표했다. 부상은 깊지 않았다지만 작은 수술은 아니었을 텐데, 체력이 굉장한 남자였다.

"당신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도왔을 뿐이네. 병원비는 있나?"

그는 잠깐 눈을 멀뚱거리다가, 내 말을 이해하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까지 내달라 하지는 않을 겁니다. 마음 같아서는 사례금이라도 드리고 싶습니다만."

나는 그가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미국 남부 출신인가? 어쩌다 들렀는지 몰라도 큰돈은 없겠지. 이해하네."

"알아보시는군요."

남자는 새삼 놀랐지만,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추측이었다.

그는 누가 들어도 알 법한 미국 남부 귀족 같은 어투로 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가 단기 여행을 왔을 뿐이라 짐작하는 것도 간단했다. 누릴 걸 전부 누리고 있는 남부 귀족이 뭣 하러 영국에 이주 오겠나.

"저는 윌밍턴에서 온 마이크 데이비스라고 합니다."

"필레몬 허버트라네."

나는 데이비스와 악수했다. 그는 손을 힘껏 잡고 흔들었는데, 갓 수술한 사람치고는 힘도 좋았다. 나는 살짝 손을 터는 시늉하며 그의 잘못된 매너를 지적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가? 어쩌다가 아이들이 자네를 공격한 거지?"

"모르겠습니다."

데이비스는 고개를 저었다.

"거리를 걷고 있었을 뿐인데 공격당했습니다.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대처하지 못했더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팔다리를 아이들에게 잡힌 채 골목으로 끌려가...."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 뒤는 나도 알고 있었다.

"돈을 훔치거나 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이들은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데이비스는 외국인이다. 그런 그가 단시간에 원한을 사고, 보복 범죄의 대상이 되었을 것 같지 않았다. 가장 현실적인 것은 금품을 노린 강도 범죄인데, 그렇다고 하기엔 설명되지 않는 점이 너무 많았다.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무언가 떠올린 듯이 문득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은 따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

"네, 다 같이 무슨 동요 같은 걸 불렀는데."

데이비스는 어설픈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흐응... 흐응... 톰... 흐응... 흐응... 제니... 사실 가사가 있었는데, 잘 기억나질 않아서요."

결국, 그는 두 소절도 다 부르지 못하고 멋쩍게 웃으며 관뒀다. 하지만 나는 그 짧고 어설픈 재현에도 그 노래가 무엇인지 곧바로 알았다.

그야 당연한 것이, 고작 몇 시간 전에 바로 앞에서 들은 노래이니 잊을 리가 없었다.

"혹시, 아침에 태어난 불쌍한 톰, 이런 가사였나?"

"맞습니다. 혹시 영국에서 유명한 노래입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내가 들어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이 노래를 오늘 처음 들었건만, 벌써 두 번째 듣게 되었다.

그것이 평범한 우연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나는 혹시 모르니, 데이비스에게 경찰에 대해 알려주고, 이스트 엔드 쪽에 다시 오지 말도록 당부하고는 병원을 나섰다.

런던의 음지에서 또다시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챌 무렵, 늘 그랬듯이 그림자는 발목까지 차올라 첨벙였다.

그날 밤, 나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잠들기 직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에서 작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는데, 그는 때 묻지 않은 해맑은 어조로 노래를 이어갔다.

"아침에 태어난 불쌍한 톰.

저녁에는 땅에 묻히지.

아침에 태어난 불쌍한 제니.

저녁에는 고아가 되지.

불쌍한 톰, 불쌍한 제니.

둘이 어디 갔는지 물으면,

천사가 데려갔다 하겠지."

언젠가 멎을 줄 알았던 그 작은 노래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는 같은 소절을 반복해서 불렀다. 계속. 계속. 계속.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밤에 멀리서 들려올 정도로 큰 소리로 노래하고 있다면, 다른 주민이건, 순경이건 반드시 눈치챘어야 했다. 아이 혼자 템스 강을 등지고 적막한 거리에서 노래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다. 나는 눈을 떴다. 지금도 실체를 확인하기에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창밖을 돌아볼 순간 보았다.

창 너머로 침대 위의 나를 바라보며, 입을 창문에 댄 채 노래하는 아이의 모습을.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장난을 들킨 아이처럼 도망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다가갔다. 창문을 확인하던 나는 잠금장치가 있는 부분이 실톱으로 긁혀 있는 걸 발견했다.

그 아이는 창문을 열기 위해 톱질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그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아이는 항상 창밖에 서 있었다.

내가 잠들기를 기다리며 줄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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