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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고 보니 크툴루-59화 (59/232)

§59. 42만 7천4백9십9

불! 세상이 불타고 있다!

건물 너머로 그려진 도시의 윤곽 사이로 붉은 불길이 산맥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찬 밤바람이 불때마다, 화사한 불티가 민들레 꽃씨처럼 날아와서는 건물과 도로 위에 살포시 내려 앉았다.

불티가 앉은 자리에는 다시 새로운 어린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재는 그렇게 순식간에 건조한 겨울 런던 전체로 퍼져나갔다. 거리에 젊은 생명력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야!"

"불이에요! 불이 났어요!"

"소방대를 불러!"

"도와주세요! "

웅성웅성웅성...

런던의 붉은 하늘 아래에는 비명과 아우성이 짙게 깔렸다.

잠결에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신사 숙녀들이 속옷 바람으로 집밖에 뛰쳐나오는 추태가 여기저기서 연출되었다. 바지 하나 챙겨 나오지 못한 손에는 갖가지 귀금속은 잘도 들려 있었다.

지금 상황이 자연스럽게 호전될 것이 아닌 건 분명했다. 누군가는 이 상황을 수습해야만 했다.

그런 와중, 혼란을 퍼트리는 주역은 따로 있었다.

하늘에서 바람을 타고 불을 퍼트리는 불씨처럼, 지상에는 작고 영악한 짐승들이 돌아다니며 불을 놓았다. 그 어린 생명이 닿는 곳마다 노후한 목조 건물들이 불 속으로 화했다.

생명의 순환이었다. 이들은 늙고도 추하게 죽을 줄 몰랐던 도시의 자연사를 돕고 있었다.

이런 비상사태에는 전직 군인으로서 할 일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나는 부끄럽게도 집 밖으로 뛰쳐나온 이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 두 눈은 불타는 거리를 향해 있었고, 충격적인 광경에 완전히 넋을 놓고 있었다.

꿈으로 비유하자면 몽정이었다.

불꽃은 어떤 고급 창부보다도 사람을 홀리는 춤을 췄다. 어느 때는 따분하게 천장이나 굽고 있는가 하면, 이따금 내 눈앞까지 치솟으며 깜짝 놀래켰다. 그런 유쾌한 변주는 내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녀의 파괴에는 저만의 미학이 있었다.

"아악!"

날 일깨운 것은 윌슨의 비명이었다.

"이런, 윌슨!"

나는 소리 지르며 몸을 움직였다.

"무슨 일인가!"

골목에는 아직 불이 번지지 않았다. 나는 총을 앞세우고 모퉁이를 돌고, 다시금 끔찍한 현장을 마주했다.

"이 자식 자꾸 움직여."

"죽여, 죽여."

"손가락을 자르자."

*그것들*은 사람과 퍽 닮은 동물이었다.

나는 그들을 직관적으로 뭐라 부르지 못했다. 민담 속에 나오는 작은 악마 임프를 닮기도 했고, 혹은 그저 커다란 쥐새끼 같기도 했다.

뒷다리로 걷는 이족보행 동물이었는데, 키는 어림잡아 내 골반쯤 오고 굽은 허리를 편다면 좀 더 클 것 같았다. 앞다리는 물건을 집기 쉽게 끝이 다섯 가락으로 갈라져 있었다. 잘 보니 몇몇은 가락이 넷밖에 없기도 했다.

특이하게 털이 자라지 않은 매끈한 가죽을 가진 동물이었다. 색은 검었는데 지구상 어떤 동물도 이런 색깔의 맨살을 가지진 않았다. 분명 밝은 피부가 먼지 구덩이 속에 뒹구는 통에 더럽혀진 것이 분명했다.

피부에 대해 말하자니, 외피가 별로 질겨 보이진 않았다. 털도 자라지 않았고 다치기 쉬워보였다. 그 때문인지 몸 위에는 리넨 쪼가리를 걸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노란 털을 가진 동물이었다. 몸에는 털이 없고, 머리 쪽에만 집중적으로 몰려 있었는데, 색이 어둡고 밝고 정도의 차이만 있었다.

눈 색깔도 엇비슷했지만, 나는 그 안을 들여다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감히 그들이 인간과 같이 고등한 사고를 하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저 눈 안에 담긴 슬픔을 보고 나면 그들도 영혼을 가진 존재라 믿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쨋거나,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윌슨을 바닥에 쓰러트리고 각자 사지를 하나씩 잡은 채, 저마다 손에 쥔 날붙이로 그 피부를 긁어대고 있었다. 쇳조각과 유리 파편에는 들러붙은 살점과 핏물이 묻어 있었다.

"썩 꺼지지 못해, 이 개자식들아!"

나는 까마귀를 쫓아내듯 지팡이를 휘두르며 위협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것들은 사람을 피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나는 총을 갖고 있다!"

순 멍청한 짓거리였다. 이러는 사이에도 훌륭한 조력자 윌슨의 목숨은 위협받고 있었다. 생명의 경중을 놓고 봤을 때, 어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소총을 앞으로 겨눴다. 그 뒤는 나보다도 내 몸이 더 잘 기억하는 과정의 재현이었다.

────탕!

공이가 뇌간을 때리자 거센 폭발음이 고막을 관통했다.

화약 타는 냄새가 물씬 흘러나오고, 그걸로 끝이었다.

고작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작은 금속 파편이 그것의 무른 살갗과 얇은 두개골을 뚫고, 뇌 속을 헤집어 놓았다. 쓰러진 주검에서는 피와 섞인 뇌수가 콸콸 흘러나왔다.

"진짜 쐈어!"

"미친 사람이야, 도망쳐!"

그것들은 제 동료가 쓰러져 죽는 모습을 보고는 겁에 질려 우르르 도망쳤다. 내가 약실에서 탄피를 비우고 새 총알을 집어넣을 무렵, 그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싱거운 결말이었다.

나는 곧장 앞으로 걸어가서 윌슨의 몸을 일으켰다. 그는 벽에 상반신을 기댄 채, 거친 숨만 헐떡거렸다.

"이봐, 괜찮나? 걸을 수 있겠어?"

자상은 깊지 않았다. 나는 얼마 전, 한 미국인을 구했을 때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와 상황이 아주 비슷했던 탓이다.

그것들은 살갗을 찢고 갈비뼈만 열심히 긁어댔지, 정작 내장이나 핏줄 같은 치명적인 부위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항파상풍 주사는 맞았나?"

"아니요."

"그러면 운이 좋길 바라지."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우리는 병원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병원이 멀쩡히 운영될 리도, 그렇다고 하더라도 윌슨이 치료받을 만큼 여유가 있을 리도 없었다

나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행동을 재촉했다.

"상처는 깊지 않아. 어서 움직이게. 아침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네."

"아이를 죽였습니다."

윌슨은 말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체를 돌아봤다. 그렇다, 주검이 아닌 시체였다.

"그래, 그렇군."

나는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내가 아이를 죽였네."

"끔찍하군요."

"자네를 구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어."

"알고 있습니다."

윌슨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말없이 옷을 찢어 그의 상처 위에 붕대처럼 감았다.

"괜찮아졌습니다."

"그래."

잠시 후, 윌슨이 그리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그는 다친 몸으로도 날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우리는 다시 불타는 거리로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윌슨의 물음에 나는 곧바로 답할 수 없었다.

"런던에 하루 반나절씩 40만 명 넘는 아이가 숨어 있을 장소가 어디 있을까? 사람으로 가득 차 좁고 미어터지는 이 도시에서 그게 가능한 일인가?"

우리는 막연하게 걷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한 곳 알고 있네."

"저도 그렇습니다."

나는 윌슨을 돌아봤다.

"자네와 내가 같은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우리 발밑에 수백, 혹은 수천 마리나 되는 해저인이 숨어 있는 곳이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짐승으로 변한 사람들이 자주 발견되는 곳은 압니다."

그는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것도 발밑이군."

"그렇습니다."

"어른들은 다닐 수 없는 좁은 길이지. 그리고 냄새가 지독해서 아이에게 푼돈을 건네서 대신 내려가게 할지언정, 스스로는 절대 내려가지 않는 도시만큼 넓은 공간이야."

우리는 한 지점이 이르러 발을 멈췄다. 두 사람의 뜻이 하나로 합쳐지고, 모든 의혹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열린 맨홀 뚜껑.

"런던 하수도. 아이들은 내내 그곳에 숨어 있었던 거야."

그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낮 동안 그 많은 아이들이 어디 숨어 있었는지, 순경에게 들키지 않고 밤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던 방법을, 그리고 지금 일제히 도시 전체에 나타나 불을 지른 방법이 모두 드러났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겠지. 하수도 구조도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몇 주 동안 42만 명이나 되는 아이를 꼬드겨 먹여 살려야 했고, 이런 계획을 결행할 만큼 지도력 있는 자가 개입했다는 뜻이네."

나는 말을 멈췄다.

저 거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우리 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저 거리와 골목 사이에서는 분명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윌슨의 눈을 마주 보며 단언했다.

"목적이야 어떻건 이건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된 봉기라네."

"런던 경찰에 알려야 합니다!"

"여기서 화이트홀 4번지까지 달려가겠다고? 아서게. 경찰이 나선다고 해결될 상황도 아닐뿐더러, 지금은 집단으로 움직일 때가 아니야. 생존하기 위해서는 강한 개인이 되어야 하네!"

내 신경질적인 외침에, 윌슨은 놀란 눈으로 날 응시했다. 그는 마침내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기색이었다.

윌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이건 전쟁이 아닙니다."

"전쟁은 이미 시작했네, 형사. 도시가 공격받고 있어."

나는 몸을 돌려 킹스 크로스 역이 있을 방향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가장 가까운 연대가 런던의 이상을 파악하고 출발했겠지. 그들이 기차를 타고 런던에 도착하는 데는 2시간이 걸리지 않을걸세. 또 웰링턴 병영의 3개 근위 보병 연대는 어떤가. 그들은 지금 버킹엄 궁전을 지키고 있을 뿐이지만, 사태 파악이 끝난 이후에는 적극 움직이기 시작하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고작 두어 시간 뒤에 런던은 전쟁터로 변한다네, 병사!"

상황을 파악한 윌슨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는 닳고 닳은 베테랑 형사 흉내를 냈지만, 그 본성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위장하고 있던 만큼 크게 불안해했다.

"사람들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몇이나 구할 수 있겠나? 백? 이백?"

"한 사람이라도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군대가 도착하고 나면 수백 명은 우스울 정도로 대학살이 벌어질 거야. 42만 명까지는 몰라도 반의반 정도는 확실히 죽겠지."

윌슨은 숨이 막히는 것처럼 켁켁거렸다. 그리고 외쳤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전쟁이란 것이 한 사람의 영웅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닌 걸, 선생님께서는 누구보다 잘 아시잖습니까!"

사실, 그는 이렇게 보여도 냉정히 상황을 보고 있었다. 제 안위를 돌보는 것보다 이성적으로 사람을 구할 계획을 세우는 시점부터 뛰어난 인재였다.

"아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나는 그런 그를 내 무모한 계획에 끌어들이는데 적잖은 거부감을 느꼈다. 반대로, 그가 없이는 성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아까도 봤겠지만, 그들은 고작 아이에 불과하네. 한 명이 당했다고 우위 상황에 도망치는 군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어떻게 꼬드겼는지 몰라도 이 계획을 주도한 구심점만 제거한다면 그들은 순식간에 와해할지도 모르네. 그렇다면 아이들은 다시 거리로 돌아올 테고, 적을 잃은 군대가 전투할 일도 없겠지."

내 계획을 들은 윌슨은 무언가 눈치챈 듯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이 도둑...."

"혹은, 천사라고도 부르지."

윌슨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 잘 되겠습니까? 지금 런던을 보시죠. 200년 전의 런던 대화재 이래로 도시가 이토록 무참한 꼴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런 사태를 일으킨 주범들이 항복하고 거리에 돌아왔다는 이유로 풀려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용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나. 그들은 그저 뭉쳐 있는 수십 만 명의 불특정한 아이들에 불과해. 거리에 돌아온 이상, 누가 실행범이고 주모자인지 구분할 수 있겠나? 아무리 런던이 썩어빠진 도시라고 할지언정, 그들을 잡겠다고 무고한 아이들을 죄다 잡아들이진 못할 거야."

내 대답이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는지, 윌슨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와는 저번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지. "

나는 소총을 옆에 끼워 짊어들었다.

"런던은 공격받고 있네, 형사. 또한, 이건 어떤 영광과도 거리가 머네. 고국과 여왕 폐하를 위해 순직할 준비가 됐나?"

"제가 어찌 대답할지는 아시잖습니까."

윌슨은 나지막이 웃었다.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목숨을 거실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전직 군인이라도 누구도 나라를 위해 희생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윌슨이 어째서 그런 말을 꺼냈는지, 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말리려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째선지 내 의욕과 결의를 무참히 꺾어대는 말을 했으니 말이다.

나는 잠깐 망설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특별히 결연한 사람인 것은 아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지나치게 멋 부린 나머지 차마 못 들어줄 정도로 부끄러운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고국의 수도가 공격받는 상황에, 수십만 명의 목숨을 위해 헌신하는 거라네. 나는 이보다 내 목숨을 가치 있게 쓰는 법을 몰라."

거기까지만 말하고, 나는 기껏 다잡은 결의가 더 흐트러지기 전에 움직일 요량으로 맨홀 구멍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몸을 숙여 저 지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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