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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결이 만나고, 낮과 밤의 경계에 놓였으니, 무엇하나 뚜렷하지 않고 흐리멍덩했다.
그러니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육군의 레드 코트가 층층이 쌓여 토류처럼 흘렀다. 어디서나 화려한 군복이었으나, 하늘에는 아지랑이 치는 적광이, 바닥에는 맑은 선혈이 흐르는 이 도시에는 초라한 염료 뭉치에 불과했다.
순수한 적색과 빗대보니 저질스러운 의태였다.
포탄이 하늘을 날았고 그때마다 무고한 피가 쉼 없이 흘렀다. 절규와 비명이 귀청을 때렸다. 우리는 군인들을 피해 그림자 속에 숨어다녔다.
"우리는 런던을 지키러 온 것이 아니었나?"
골목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더니, 한 군인의 한탄이 들려왔다.
"그런데 적은 대체 어디 있고, 어째서 수도에서 국민을 향해 총을 쏘고 있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아아, 나의 여왕이시여...."
우리는 그 군인이 사라진 뒤에야 다시 움직였다.
"사실 천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신문팔이 소년이 말했다.
"그럴 줄 알았네. 그런 거짓부렁에 속기엔 나이도 많고, 자네는 너무 똑똑했거든. 어쩌다 사라졌는지 궁금했네."
"애들이 믿었거든요."
그는 소금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애들이요. 내버려 둘 수 없었어요."
그리곤 내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슬며시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저도 신사가 되고 싶었어요."
분명 내가 했던 이야기였다.
나는 일전에 소년에게 이리 말했다. 신사가 될 수 있다고, 내 말을 따르라고.
그것이 얼마나 가벼운 마음으로 한 말인지 굳이 서술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소년이 말로부터 받은 영향은 막대했다. 내 경솔한 한 마디가 없었다면, 이 소년이 지금 같은 위험에 처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줬다. 주름진 손 위로 파란 정맥이 솟아올랐다.
"자네는 이미 훌륭한 신사야."
"정말요? 하지만 저는 어른도, 귀족도 아닌걸요."
"정확히 말하면, 그들보다 낫지. 자부심을 가지게. 나는 자네가 영국인이란 게 자랑스럽네."
신문팔이 소년은 입을 오물거렸다. 아이 특유의 수줍음을 감추는 동작처럼 보였다.
"도시에 불을 질러야 한다는 얘기에 겁먹고 숨은 아이들이 있어요. 오늘 밤만 지나면 전부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나는 그들의 유아적인 상상력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아이들이 보여준 용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처럼 소속감에 휘둘려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만연한 상황 속에 자발적인 판단을 내린 그들의 행동은 찬사받을 일이었다.
"그 아이들은 어디 있지?"
"세인트 폴 대성당 옆에 있는 그리스 신전처럼 생긴 건물이요."
소년의 묘사를 들은 나는 바로 인상 썼다.
"이런, 왕립 증권거래소야. 병사들이 거길 그냥 지나칠 리가 없는데."
상황은 아주 안 좋았다.
눈에 띄는 빈 건물이라고 숨어 들은 모양이었지만, 런던 중심가에 있는 주요 건물을 수색하지 않을 리 없었다. 대규모 접전이 있었던 타워 힐에서도 아주 가까웠다.
우리는 더욱 서둘렀다.
달리기도 벅찬 나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고, 그런 내 침묵에 심각성을 눈치챈 신문팔이 소년은 긴장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 속에 바람만이 세차게 불었다.
잠시 후, 우리는 패터노스터가街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런던 경제의 중심 역할을 한 거리는 지금 잔불에 덮여 있었다.
"저기예요."
소년은 손가락으로 왕립 증권거래소를 가리켰다. 외각을 대리석으로 만든 덕에 건물은 화재 속에서도 건재했다. 입구에 높이 쌓인 코린트 양식의 흰 기둥 8개는 붉은 도시에서 유난히 을씨년스럽게 눈에 띄었다.
"여기까지 안내했으면 충분하네. 이쯤에서 기다리다가 들킬 것 같으면 도망치게."
"어르신은 어쩌시게요?"
"나도 내 의무를 다해야지."
그렇게 말했지만, 소년은 말없이 내 뒤를 계속 따랐다.
"따라오지 마라니까."
"어르신께 도와달라 하고, 저만 안전한 곳으로 도망칠 순 없어요."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나는 그가 도움되고 말고를 떠나서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 나는 병사의 의지를 존중하는 편이다. 윌슨이나 그 뚱뚱한 관료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제 선택을 오롯이 감당할 수 있는 나이다. 하지만 소년은 어떤가. 내가 보기에 그는 용기와 만용을 구분할 정도로 성숙해 보이지 않았다.
"아이 취급하지 말아 주세요. 저도 어르신께 인정받은 어엿한 신사예요."
소년은 내 시선을 읽어낸 것처럼 선수 쳤다. 이렇게 나오니 나는 차마 더 뭐라 할 수 없었다.
"미리 말하지만, 내가 도와줄 수는 없네. 몸은 스스로 챙기게."
우리는 거리를 배회하는 몇몇 군인의 눈을 피해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왕립 증권거래소.
실내는 내가 방문했던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어두컴컴했다.
부르주아의 표본과도 같은 사업가와 귀부인들로 언제나 붐비던 중앙 사각 광장은 쓸쓸할 정도로 한적했고, 양옆으로는 바깥에서도 본 코린트 양식의 기둥이 높게 쌓여 있었다.
쥐 한 마리 다니지 않을 것 같이 조용한 실내에서 숨길 수 없는 인기척이 여기저기 느껴졌다. 긴장한 거친 숨소리, 훌쩍거림, 도무지 숨는데 익숙하지 않은 때 묻지 않은 소음들이었다.
"사람을 불러왔어."
소년은 광장 중앙에서 외쳤다. 변성기가 오지 않은 목소리가 낮게 메아리쳤다.
"믿을 수 있는 어른이야."
"거짓말."
어둠 안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나이로 치면 신문팔이 소년과 비슷하게 들렸다.
"믿을 수 있는 어른은 없어. 넌 또 속고 있는 거야."
"아니, 이번에는 진짜야."
나는 1층의 그림자 속에서 시선 여럿과 마주했다. 반은 호기심이었고, 반은 경계심이었다. 나는 소년에게 말했다.
"서둘러야 해."
"서둘러야 해."
소년은 내 말을 크게 반복했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네. 내 말은 정말로 서둘러야 한다는 거야. 경계가 옅은 지금 떠나야 하네."
"들었지?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다 죽어."
그제야 어둠 속에서 꼬질꼬질한 아이 다섯 명이 기어나왔다. 그들은 오랫동안 굶었는지 마르고 창백했다. 그들은 쌍둥이처럼 똑같이 입술이 텄고, 비슷한 곳에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요한이랑 제인은?"
"죽었어."
신문팔이 소년의 질문에 가장 키가 큰 아이가 대답했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목소리와 같았다.
"정말 도와줄 거예요?"
그녀는 그대로 날 돌아보며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왜요?"
설마 그런 질문을 할 줄 몰랐기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들은 어른의 호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게 어른의 의무니까."
나는 길게 설명하지 않고 앞장섰다.
"서두르지."
여섯 명의 아이는 군말 없이 내 뒤를 따랐다. 나는 목동이 된 것처럼 아이들이 따라오는지 계속해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거리로 나왔다.
우리는 거리를 방황했다.
어디도 안주할 장소는 없었다. 어느 골목을 들어가도 병사와 마주쳤고, 보이는 모든 문을 두드리고 다녀도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하수도에 숨을 곳이 있어요."
신문팔이 소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식인 괴물이 도사리는 지하에 그들을 되돌려 보낼 순 없었다. 저 멀리 등 쪽에서 흐릿한 햇빛이 느껴졌다. 동이 트고 있다. 상황은 더욱 안 좋아졌다.
해가 뜨고 난 뒤에 숨을 장소가 있을까.
그렇게 막연하게 서쪽으로 향하던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마주했다. 맞은 편에서 또 다른 육군 부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동쪽에서도, 서쪽에서도 군대는 합동 작전을 수행하듯이 서서히 좁혀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안쪽으로!"
내 구령에 맞춰 아이들이 일제히 건물 틈 사이로 뛰어들어갔다.
"반대편에도 있어요!"
그 말대로였다. 우리는 건물 틈 사이의 좁은 골목에 갇힌 형국이 되었다. 나는 서둘러 골목을 막듯이 한쪽 길을 막아섰다. 안쪽에서 어떤 아이가 울기 시작했는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울지마, 바보야. 다 죽어."
울음은 멈췄지만 숨소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좋지 않았다.
"잠시 괜찮겠습니까?"
거리를 통과하던 행렬에서 병사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비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골목에서 아이 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제 아이입니다. 군인을 보고 놀라서 운 모양입니다."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자리를 비키면 고아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어디로 보나 멀쩡한 모습이 아니었기에 고아가 아니라 속일 방도가 없었다. 반대로 비키지 않으면 그것대로 수상했다.
"잠깐이면 됩니다."
병사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직후.
내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안쪽에서 무언가 날 밀치며 뛰쳐나왔다.
"고아다!"
병사가 외쳤다. 그 작은 아이를 향해 총포가 쏟아졌다. 작은 소년이 피를 뿌리며 바닥에 픽 쓰러졌다. 보나 마나 즉사였다.
"무슨 짓을 한 건가!"
"역시 고아를 숨겨주고 계셨군요. 그들은 나라의 적입니다."
병사는 오히려 날 탓하듯이 말했다. 그는 날 힐끗 바라보고는 그대로 지나쳤다. 군인들은 아이의 시체에 별 관심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행렬이 완전히 지나간 뒤에, 나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 아이의 몸을 뒤집었다. 신문팔이 소년이었다. 잠깐 사이에 몸이 식어 살아있던 사람의 것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살아 있어요?"
아이들은 한쪽 무릎 꿇고 앉은 내게 다가와 등 뒤에서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낙관적인 질문에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 죽었네."
────부우우웅....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 소리는 템스 강에서 들려왔다.
어느덧 강 위에는 짙은 뭉게구름이 얹어져 있었다. 거리를 태우는 불길도, 별밤의 어둠도 닿지 않는 짙고 탁한 안개 너머에서 쉴 새 없이 증기가 쏟아져 부풀어 올랐다.
안개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거인의 것이었다. 크기는 국회의사당을 방불케 했으며, 느릿하게 강물을 타고 흘러오는 모습은 일 년 전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다.
쏟아지는 폭우. 거센 비바람. 뭍을 때리는 파도. 가라앉는 섬. 창문 너머 비린내 나는 거인의 손. 데이곤. 데이곤! 날 벌하러 온 것인가?
발끝부터 차오르기 시작한 검은 액체가 몸 안에서 찰랑거렸다. 절명에 이르는 한기가 종아리를 타고, 무릎을 타고, 허벅지를 타고, 오금을 타고, 골반을 타고, 대장과 소장을 타고, 심장 끝에 맺혔다. 심장이 이완할 때마다 내 안에서 파문이 일었다. 죽는다면 질식사보다 동사였다. 차갑게 식은 피가 온몸에 퍼졌다.
────부우우웅....
도시의 하늘에 다시 한 번 우렁찬 경적이 울렸다.
처음에는 하나뿐이었던 그림자가 어느샌가 넷으로 늘어나 있었다. 나는 그 웅장한 침략을 눈 뜨고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한낱 인간의 몸으로 별 사이를 걷는 거인의 행선을 어찌 막겠는가.
그렇게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관망할 무렵, 안갯속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노란 광선이 공격해 왔다.
멀어지는 적색을 가르는 황색은 분명 빛이었다!
그럴 리가!
내가 아는 그들은 추한 모습을 숨기고자, 태양 빛조차 닿지 않는 심해 밑바닥에 처박힌 존재들이었다. 빛과 열은 그들의 세계와 상극이거늘, 어떻게 그들의 불경스러운 아버지가 빛을 만든단 말인가.
심지어 나는 빛에 기시감을 느꼈다. 이런 종류의 빛을 어디선가 봤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 경력에 의한 지식이 아니었다. 그보다 먼 미래이자 과거, 형용할 수 없는 시간의 양극에 선 21세기의 것이었다.
모든 의문은 곧 풀렸다.
촘촘한 안개가 좌우로 퍼지며, 막을 가르고 뾰족한 철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제왕절개로 갓 태어난 아이처럼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선두가 지나고, 다음은 철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미에 이르기까지.
거선이 빠져나온 안개구름은 재생력 없이 깊게 뚫린 터널 같았다. 빛이 닿지 않는 굴속에서는 숨은 거선이 차례대로 빛 속으로 빠져나왔다. 불타는 거리를 반사하는 철체가 불길한 적색으로 빛났다.
두 척. 세 척. 네 척이 더 나타난 뒤에야, 선체에서 흘러나오는 증기가 다시 터널을 메웠다. 연기로 촘촘히 봉합된 모습 때문에 배들은 안개를 몰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수중에서 임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수면 위까지 첨벙첨벙 들렸다.
톱니를 돌려 안개를 만드는 기계로다!
무심코 그리 착각하고 말 광경이었다. 철체 위에서는 쉴 새 없이 푸시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 파이프 틈새 사이로 증기가 흘러나오는 뜨거운 소리였다.
빛의 정체는 탐해등이었다.
그리고 군 생활의 절반을 배 위에서 지낸 나는 이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았다. 이제 막 태동한 탐조 기술이 조선에 접목되기엔 한참 이르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군함이라도 그렇고, 민간 선박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광 신호를 주고받을 만한 대규모 해군 작전은 시행되지 않았고, 하늘에는 전투기가 날아다니지 않는 시대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먼 미래에 런던 상공을 뒤덮을 폭격기를 예언이라도 하듯 큼직한 광조등을 네 개씩이나 달고 있었다.
탐해등은 본연의 목적에 맞지 않게 지면을 내리쬐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강렬한 빛과 웅장한 터빈 소리에 압도당한 민중은 혼란에 빠져 어수선거렸다.
"배."
누군가 탄식하며 흘린 한 단어만이 지금 상황을 정확히 대변했다.
그것은 배였다.
어느 강보다 많은 배가 다니던 템스 강 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철갑선이 유유히 떠 있었다. 강폭에 딱 맞는 선체는 마치 템스 강 위에 띄우기 위해서만 만든 것 같았다.
물줄기가 틀어막힌 탓에, 강은 살아 분노하는 생물처럼 거세게 물길을 흘렸지만 배는 흔들릴 뿐이었다. 뱃길을 틀어막은 격류조차 이토록 거대한 배를 뒤집진 못한 것이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달랬다.
작년 여름, 제이콥 섬에서의 악몽은 잊히고, 필름처럼 선명한 현상만이 남았다. 안갯속에 숨어 있던 것이 흉물스러운 신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강폭에 맞춰 설계된 배는 템스 강 밖으로 나갈 수도,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지난 일 년 동안 이 네 척의 거선은 어디서 숨겨져 있었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런던이 혼란에 빠진 작금에 나타난 것인가.
────푸시식...!
철갑선 쪽에서 다시금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경적이 아닌 파이프 이음쇠 사이로 증기가 새어나오는 소리였다. 우리는 불안한 눈으로 철갑선의 다음 행동을 관망했다.
직후, 철갑선에서 하얀 선이 뿜어졌다.
그것은 도시의 지면에 닿자마자 희뿌연 안개로 변해서 사방을 뒤덮었다. 도무지 액체인지 기체인지 알 수 없는 그것에서는 매캐한 석회질 악취가 감돌았다.
"콜록, 콜록!"
사방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바람이 불고 연기가 걷혔다.
사람들은 이제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철갑선 위에 붙어 있는 증기 펌프였다. 거기서는 증기보다 탁한 액체를 파이프 관 속으로 밀어내어 사방으로 분사했다. 그리고 그것이 닿는 거리마다 불길이 삽시간에 사그라 들었다.
나는 그제야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사염화탄소, 위대한 기술이 재앙을 극복하는 장엄한 광경이었다.
군인들은 주술이 풀린 목각 인형처럼 하나씩 총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두 팔을 번쩍 들고 울며 기뻐했다.
"만세!"
"끝났다!"
거리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강 위로 수십 개의 모자가 일제히 날아들었다.
"런던 소방대 만세!"
"여왕 폐하 만세!"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하지만 내 불안은 멈추지 않고 고조되었다.
저건 이물이다.
런던 한가운데를 부유하는 위풍당당한 철갑선은 차라리 침략자처럼 보였다. 그것은 런던의 풍경으로 자리매김할 생각인지 임펠러를 멈추고 제자리에 붙박였다.
아홉 개 보험 회사의 로고를 옆면에 부착한 철갑선은 그렇게 유유히 템스 강에 정류했다.
...밤이 끝났다.
불은 끝내 도시를 정화하지 못했다. 무정한 하늘에서 하얀 구름을 내려 지상의 불을 끈 탓이었다. 결국, 무수한 피가 흐르고도 런던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바뀌었다.
바람, 바람이 불었다.
지난 200년, 런던을 맴돌며 악취를 풍기던 썩은 공기는 열을 받아 하늘로 산개했고, 그 빈자리를 도시 밖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서풍이 채웠다.
잿빛 구름이 걷히고, 저 멀리 동이 텄다.
흐린 하늘이 익숙한 런던 주민 모두의 눈을 멀게 할 강렬한 햇빛이 동쪽 하늘에 떠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홀린 것처럼 태양을 바라봤다.
나방파리처럼.
모든 사건이 끝난 후, 런던은 여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그날의 상처는 내게도 적지 않은 여파를 끼쳤는데, 거주하던 아파트와 가재가 모두 타버린 탓에 다시 집을 구할 때까지 여기저기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런던이 지금만큼 피난민으로 들끓었던 적이 없었다. 나는 가까스로 인맥을 통해 여기저기 거처를 옮겨 다니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 아이 다섯을 데리고 다닐 수도, 끔찍한 보육 시설로 돌려보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이들을 임시로 프랑크 저택에 위탁했다.
아이를 싫어하는 아서를 설득하는 건 어렵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의외로 아이들을 맡기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우선 아서의 반대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어떤 의견도 낼 수 없는 상태였다.
나의 악우, 아서 프랑크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야밤의 혼란을 틈타 저택에 침입한 괴한에게 피습당한 것이다. 이 사건은 훗날 세계의 운명을 크게 흔들어 놓는 전초가 되지만, 그 일화에 대해서는 훗날 공들여 서술하도록 하겠다.
우선은 이번 사건에 관해 마무리 짓도록 하자.
───똑똑.
어느 날, 작은 여관방에 머무르던 나는 독특한 손님을 맞았다.
"한참이나 찾았습니다. 혹시 절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말고."
잊을래야 그 독특한 남부 발음을 들으면 기억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일전에 아이들에게 공격당하고 있던 것을 구해줬던 미국인이었다.
"자네 이름이 아마...."
"마이크 데이비스입니다."
"그래, 맞아, 데이비스. 그래서 어쩐 일인가? 내가 거처를 옮겨 다닌 탓에 찾기 힘들었을 텐데."
그러자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쓸었다. 미국인다운 가벼운 동작이었다.
"사실, 오늘 런던을 떠나려고 해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우선 리버풀로 가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배편이 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해서 말입니다."
"고작 그것 때문에 찾아온 건가?"
"고작이라뇨. 생명을 구해주셨는데 인사밖에 드릴 게 없는 게 죄송합니다."
나는 이 짧은 대화만으로 데이비스라는 청년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는 아주 예의를 잘 아는 청년이었다. 미국인이라기보다는 영국인 같았다.
"원래는 제대로 사례해야 하는데, 여비를 꽤 빠듯하게 들고 와서요. 혹시 미국에 들르실 일이 있다면 꼭 우리 데이비스 집안을 찾아주시죠. 저희는 꽤 넓은 땅을 가지고 대대로 농사를 짓는 지역 유수이니, 서운하지 않게 대접하겠습니다."
"농사?"
데이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손이 부족해서, 런던에 노예를 사러 왔는데 하필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네요. 정말 인생에 쉽게 되는 일은 없군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뭐?"
"모르셨습니까? 미국에서는 영국 출신 노예가 꽤 유명합니다. 물론 고아를 사들여 어릴 때부터 데려가 키우지만요."
나는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줬다. 그리고 상대를 후려쳤다.
이걸로 이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