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위에서 아래로
때는 날과 역사의 과도기였다.
어제라 부르기에도, 역사라 부르기에도 일렀고, 그렇다고 오늘이라 하기에도, 당대라 부르기에도 일렀다. 역사적인 순간을 살아가는 자가 겪는 딜레마였다.
평소에는 가로등 한 대 놓이지 않아 빛 한 줌 닿지 않았을 저택에는 때아닌 적색 광선이 드리우고 있었다. 캔버스 모양의 창문에는 흑적 그라데이션이 종 방향으로 그어져 있었다.
똑.
딱.
똑.
딱.
먼지 쌓인 괘종시계에서 왕복하는 시계추도 그랬다. 얼핏 횡으로 다니는 것 같지만 실제론 종으로 다녔다. 위에서 아래로, 위에서 아래로... 시계는 태엽을 감지 않아 진작에 멈췄지만, 태엽에서 엇나간 시계추는 그런 줄도 모르고 미련하게 진자 운동했다.
시침을 따르지 않는 시계추라니, 제 존재 가치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서는 저 엇나간 시계추가 마음에 들었다. 설령 내일 당장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저 미련한 시계추는 목매단 채 인류의 자취를 노래할 테니까.
───삐걱... 삐걱....
방 안에는 또 하나 종으로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절제된 방 인테리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크고 부산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방 중앙에 매달려 저만의 박자에 맞춰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흉물의 이름은 아서 프랑크라고 했다.
밧줄에 목매단 아서는 위에서 아래로, 위에서 아래로....
.........
.....
...
..
.
런던은 놀라운 도시다.
무엇이 그러냐면, 그 숱한 재난을 겪은 아침에 마부 한 명에까지 조간신문을 쥐여줬다는 점이 그러했다. 심지어 호외 기사도 아닌 정기 발간물이었다는 점이 특히 놀라웠다.
실은 전날 인쇄한 조간에 화재 기사만 덧씌운 수준이었지만, 새벽 동안 일어난 일을 벌써 기사화한 것도 그랬고, 이런 와중에 인쇄소를 가동할 여력이 남아 있는 점만 해도 충분히 대단했다.
시내는 여느 때보다 혼잡했다.
타고 무너진 건물 잔해를 뒤적이며 하나라도 더 재산을 챙기는 재해민과, 파편과 탄피 등 각종 재난 부산물을 치우는 인부가 공존했다. 그 옆에는 기자와 인쇄소 직원이 어울리지도 않는 작은 신문 가방을 들고 나와 신문을 들이밀고 거기 또 줄이 생기니 발 디딜 틈 없다는 말이 딱 맞았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동물도 극성이었다. 하수도와 런던 시내 사이를 구분해주던 맨홀 뚜껑이 대량으로 사라진 탓에 도시는 해충과 시궁쥐로 들썩였다.
한 번씩 밀물이 몰아닥치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쥐떼 무리가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그들이 지나치고 난 자리에는 손가락뼈나 귓바퀴 등 먹다 남은 인체 부위가 떨어져 있는 것도 역겨웠다.
쉬이 짐작하겠지만, 그것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명백했다.
런던의 광장이란 광장에는 모두 아이 시체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날이 밝자마자 열을 받은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했는데, 그 악취는 런던 같은 해충의 도시에서는 만찬을 알리는 신호 같은 것이었다.
운구마차가 쉴 새 없이 시체를 날랐지만, 그 높이는 낮아지기는커녕 높아지기만 했다. 마차가 실어가는 것보다 골목에서 아이 시체를 짐수레 가득 담아오는 인부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은 이것도 봐줄 만한 편에 속했다.
적어도 여기 쌓인 시체들은 제대로 화장되고 뼛가루로 뿌려지건 신축 카타콤에 던져지건 할 테니까 말이다. 사정이 안 좋은 것은 템스 강 쪽이었다. 강 위에는 무수한 아이가 배를 까뒤집고 죽은 생선처럼 둥둥 떠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저 많은 시체가 전부 바다로 흘러갈 리도 만무했고, 어딘가 돌부리 같은 곳에 걸려 수 주는 강을 더럽힐 것이었다. 환호하는 것은 넘치는 박테리아와 장구벌레뿐이었다.
행진은 밑바닥이나 소금물에 닿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었다.
런던은 이렇게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변질하였다.
상류층과 하류층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뒷골목에서만 보던 고아 시체는 광장에 무더기로 쌓였다. 하수도에 사는 생물들은 지상에 올라왔고, 전쟁을 모르던 도시에는 불발탄과 탄피로 덮여 있었다.
표면과 심층, 빛과 그림자, 삶과 죽음, 나열할 수 없는 양면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모순 속에 공존했다. 공간 속에서도 단면으로 존재하는 뫼비우스 띠와 같은 영원한 순환 굴레였다.
무한.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서던&미들랜드 철도가 창조한 지옥의 기계였다. 고속 열차 「웰스호」의 멈추지 않는 쇠바퀴의 형상과 수면 위의 임펠러가 서서히 겹쳐졌다.
인간이 설계한 악의는 런던에마저 침식하는가.
"런던 소방대가 대단한 일을 했죠."
내가 부유하는 철갑선을 응시하고 있자, 갑자기 마부가 말을 걸었다.
"오늘 조간에서 봤는데, 런던 소방대가 없었다면 피해 비용이 이천만 파운드는 더 나왔을 거라더군요. 이천만 파운드요. 이 정도 재정 손실이면, 미국이 영국 경제를 따라잡는단 말도 농담이 아니라더라고요."
"그런 걸 믿나?"
나는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냥 아무렇게나 써놓은 숫자에 불과해. 불이 꺼진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그런 계산을 다 했겠나."
실은 이리 말하는 나도 이게 아무 영양가 없는 트집이란 걸 알았다.
런던 소방대는 런던을 구했다. 비용이 어쨌건 그건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네 척의 철갑선의 출현은 그만큼 런던 시민들에게 인상 깊게 다가온 사건이었다.
철갑선이 직접 소화한 화재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그 등장만으로 터전을 잃고 폭력 속에 방치되어 당장 폭도로 돌변하려던 시민과 군대는 소요 해결에 집중하게 되었다.
영국은 여전히 건재하다.
깔끔한 신형 철갑선은 그렇게 외치는 것처럼 다가왔다. 도시의 존망이 걸린 상황에서 그것은 이미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다했다.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하필이면 노란 외벽 회사의 사유 기관, 런던 소방대의 철갑 소방선이 희망의 상징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도 대단한 일 아닙니까?"
내가 계속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말하자 마부는 눈치 보며 말을 이었다.
"뭐가 말인가?"
"배들 말입니다. 저렇게 커다란 철갑선을 네 척이나 숨기고 있었으니까요. 템스 강은 뱃길이 막혔다고 들었는데 저렇게 크고 무거운 배는 멀쩡하군요."
"대신 강 밖으로는 나갈 수 없겠지."
철갑선의 구조는 얼추 봐도 비효율적이었다.
웅장한 규모는 템스 강의 거센 물살에도 배가 흔들리지 않게 만들어 줬지만, 그 때문에 배가 런던 안팎으로 드나들 수 없게 만들었다. 거기다 구조도 효율적이라 보기 어려운 게, 전면으로 기운 선수는 차라리 쇄빙선의 그것을 닮았고, 방향을 돌리거나 빠르게 움직이는데도 부적절하게만 보였다.
모로 보아도 소방선으로는 부적합했건만, 그 외의 용도로 쓸 방도도 없었다. 물론 이 정도 규모 조선을 은폐했다면 적지 않은 자원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함선 네 척이 가장 적절한 시기에 비밀리에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심장 한구석을 회충이 파먹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사람이 만든 재앙, 사람이 만든 기술, 이보다 인위적일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니, 그냥 혼잣말이네. 길이나 잘 보게."
상류층 비밀 단체가 주도한 런던 대화재. 때마침 나타나 희망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소방선.
공교롭게도 사건의 뒷무대였던 런던 하수도를 관할하는 '템즈 워터'와, 런던 굴지의 조선 회사 '북해 조선 공학(NSSE)' 역시 노란 외벽 회사의 가맹사 일원이었다.
만약 이것이 추리 소설 플롯이라면 차마 잡지에 실을 수도 없을 것이다. 첫 화를 공개하는 순간, 출판사에 사건의 진상을 추리한 편지가 수백 통은 도착할 테니까.
복잡하게 얽힌 만사가 평면적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말을 종종 걸음을 멈췄다.
도로가 부서지거나 잔해가 길을 막아 좁은 길폭을 몇 대나 되는 마차가 지나려고 하고 있었다. 도로는 그 어느 때보다 혼잡했고, 다시 불편한 침묵이 흐르자 마부가 말을 꺼냈다.
"자제분들입니까?"
"그렇게 보이나?"
마부는 헐거운 이빨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아니요."
그가 뒤로 고개를 돌리자 의심 깃든 누런 눈이 보였다.
"실례지만, 어르신이랑은 안 어울려 보입니다. 제겐 차라리 부모 없는 아이들처럼 보이는군요."
나는 내 곁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돌아봤다. 좁은 좌석에 끼여 앉은 탓에 나와 맞댄 작은 어깨를 통해 떨림이 전해졌다.
"자네 말이 맞네. 내 자식들이 아니야. 집이 타버린 친척으로부터 부탁받았네. 내 친구가 런던 교외에 살고 있다는 걸 알고는 그곳에 머물도록 부탁해 달라고 하더군."
이런 알량한 거짓말을 믿으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모두에게 악몽 같은 밤이었다. 이제 와서 누구도 시비를 가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부가 도로 고개를 돌리자, 아이들의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낮은 한숨이라니.
고작 열 살도 되지 않은 이 아이들은 제 감정을 죽이는 법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았다.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고개 돌려 거리를 바라봤다.
누구도 시비를 가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말고는 모두 그랬다.
하지만 나는 이번 화재가 악의의 산물임을 알았다.
윌슨은 참지 못하고 달려가 버렸지만, 나는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진상을 알아낸 후에, 반드시 심판받게 할 것이다.
덜그럭 덜그럭.
마차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갈라진 도로의 틈새 사이로 바퀴가 빠지며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나는 마차 창틀에 걸터앉은 아이가 뒤로 넘어지지 않게 손을 잡았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달구지의 짐짝처럼 교외 프랑크 저택으로 향했다.
그런 와중에 내 안에는 불연소한 사고의 찌꺼기가 남아 꿈틀거렸다. 그것은 차마 명문화할 수 없는 인지 영역 밖의 암시 같은 것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래, 지혜가 내렸다고 하겠다.
이번 런던 대화재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내막이 있다. 절대 쉽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덧 마차는 저택이 보이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프랑크 저택은 여느 때처럼 황폐했다. 동시에 생명력으로 가득했다.
정원에서 자란 녹색 가시나무의 생식에 대한 탐욕은 욕심 많기로 유명한 인간마저 한 수 접고 들어갈 지경이었다. 기형적으로 성장한 그것은 담장과 정문까지 뻗어, 제 동료인 담쟁이덩굴마저 말려 죽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매번 저택에 도착할 때마다 다른 장소에 떨어진 것 같은 착시를 느꼈다. 단일 군체가 인간이 조성한 풍경을 바꾸는 광경은 이유 모를 불쾌함을 선사했다.
나는 언젠가 인류가 이 별에서 사라지고 말 것을 안다. 하지만 저 억척스러운 생물만은 태양이 폭발하는 그 순간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사멸한 행성 전역에 뿌리내려, 끝내는 인간이 일군 모든 흔적을 집어삼키고 말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다.
저 탐욕스러운 생물도 생태계 위에 군림하는 종을 알아봤다. 참 신기하게도 정원사가 관리하는 것도 아닐 텐데, 언제나 정문에서 저택까지 이어지는 좁은 오솔길만은 가시나무도, 붉은 장미도 자라지 않았다.
식물도 아첨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나에게 인류의 몰락과 영광 양면을 비춰주는 이중적인 존재였다.
"드라큘라."
정문이 열리자 뒤쪽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제야 내게 자연스러운 이 건물 구조가 아이들에게 어찌 보일지 떠올렸다. 사람 없이 열리는 문, 가시나무로 뒤덮인 정원, 증기에 썩어 문드러진 목조 건물, 닦지 않아 안개 낀 것처럼 뿌연 프랑스식 창문.
아이들의 악몽 속에 나온 괴물들을 노역시켜 만든 건물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겁먹지 마. 그냥 건물이야."
그 와중에 가장 맏이로 보이는 소녀가 동생들을 달래고 있으니 수고를 덜었다. 사실 나는 아이를 잘 돌보는 편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는 내친김에 미리 해야 하는 중대한 경고를 지금 하기로 했다.
"실은 이 저택에 괴물이 둘 정도 살긴 하네."
내 갑작스러운 선언에 기껏 진정한 아이들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소녀는 당찬 눈으로 날 노려보며 항의했다.
"그렇게 우릴 겁주면 재밌어요?"
"있는 걸 없다고 할 수야 없는 노릇이니.
나는 내가 너무 눈치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덧붙였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말게. 내가 아는 둘은 아주 착한 괴물이니까. 아니,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 사람보다 좀 낫지. 자, 들어가지. 이곳이 한동안 자네들 집이 될 거야. 성질 고약한 집주인이 허락만 해준다면 말이야."
아이들은 주춤주춤 내 뒤를 따라 오솔길을 걸었다.
───쿵! 쿵! 쿵!
나는 문앞에 도착하자마자 손잡이를 잡고 세게 두드렸다. 그리고 잠시 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예상보다 이르게 문이 열렸다.
"필레몬 허버트님, 초청장 없는 손님을 다섯이나 대동하시다뇨."
"그 건에 관해 아서와 할 말이 있네. 불러와 주게."
좁은 문틈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왜 그러나?"
"주인 어르신은 오실 수 없습니다."
말이 되는 듯 되지 않는 듯 난해한 표현이다.
"사람이 없으면 없는 거지, 올 수 없다는 건 또 뭔가?"
"외부로 새어서는 안 되는 정보입니다."
나는 잠깐 그것이 무슨 뜻인가 살피다가, 내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떨어져서 귀 좀 막고 있게."
아이들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치 빠르게 물러났다. 이 정도로 순순하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노동에 길들여진 아이들인 만큼 지시받는 것이 능숙했다.
"그래서, 어떤 일인가?"
노집사는 슬쩍 문틈 사이로 쭈글거리는 눈알을 보이며 아이들이 물러난 걸 확인하고 말했다.
"주인 어르신께선 전날 괴한에게 피습당해 현재 의식 불명 상태입니다."
"뭐라고?"
나는 무심코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활짝 열리고 노집사의 흉측한 얼굴이 드러나자, 실눈을 뜨고 있던 아이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미리 언질을 준 덕인지, 아니면 그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지 그들은 충격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무작정 실내로 발을 들인 나는 갑자기 멈춰 서고 다시 몸을 돌렸다. 마음이 급해 앞섰지만 홀로 가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가까스로 떠올린 덕이었다.
"아서는 지금 어딨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손님분들은...."
노집사의 시선이 아이들을 훑고 지나가자 그들은 마귀 솥에 들어갈 아이가 정해진다고 생각이라도 하듯이 어깨를 움츠리고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썼다.
"저흰 괜찮아요. 밖에서 기다릴게요."
소녀가 눈을 피하며 말했다.
"좋아. 다 해결됐군. 어서 가지."
"짐을 맡아 드릴까요?"
"아니, 이건 내가 갖고 있겠네."
노집사는 문을 닫고 걸쇠를 걸었다. 그리고서야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장서 걷기 시작해다.
아서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환자가 누운 자리치고는 더러웠는데, 오랫동안 말리지 않은 이불 특유의 눅눅한 곰팡내가 남아 있었다. 높은 각도의 창문을 통해 햇살은 고스란히 침대 위로 쏟아졌는데, 해가 중천에 뜨면 누워 있는 아서의 얼굴까지 닿을 것 같았다.
나는 혼수상태 환자가 햇빛을 받는 게 좋은지, 아니면 받지 않는 게 좋은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덥겠거니 하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마리는 처음부터 아서의 머리맡을 지키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왔을 때는 잘 만든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있던 그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인간적인 투정을 부렸다.
"설마 여기서도 간병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마치 내가 병수발이 필요한 노인처럼 말하는군."
"아니요, 그렇지만 침대에 누운 모습은 꽤 비슷해요. 새도 날개 짝이 맞는 것끼리 모인다는데 딱 그 격이네요."
"같은 자리에 번개가 두 번 치는 일은 없다지. 이 정도면 자네가 불운을 몰고 다니는 게 아닌가?"
"아, 그래서 제가 저주받은 인형이라고요?"
나는 깜짝 놀라 손을 저었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나!"
마리의 수은 눈동자가 빙글 돌았다. 나는 애써 눈을 피하며 침대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읊조렸다.
"아서 프랑크도 눈을 감는군."
상황에 맞지는 않았지만, 나는 문득 그가 잠든 모습을 처음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새벽 4시에 발견한 이래로 쭉 이 상태였습니다."
노집사는 어느샌가 내 옆까지 다가와 속삭였다.
"자세히 설명해보게."
"알겠습니다."
그는 다급함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느긋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오늘 새벽은 유난히 밝았습니다. 멀리서도 런던에 큰 불이 난 건 알 수 있었죠. 불은 밤새도록 꺼지지 않고 타올라, 주인 어르신께서는 마음이 들뜬 상태라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나이를 먹고 불장난을 좋아하는 건 그밖에 없지."
"아시다시피, 주인 어르신은 방 하나에 머무르는 걸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매일 즉흥적으로 아무 방에나 들어가 주무시곤 하지요. 그런 분이 어쩐지 오늘은 직접 3층 방에서 잘 거라 말씀하시고, 또 제게 해가 뜨기 전에 한 번은 방문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아서의 기이한 습관에 대해서는 별로 놀랍지 않았지만, 노집사가 하는 말 자체는 뭔가 부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런 일이 잦았나?"
"아니요. 주인 어르신은 자는 모습을 보이는 걸 싫어합니다. 꼬박 잠들 수도 있다는 이유로 늦은 새벽에는 부르지 않는 편이죠."
나는 알리바이를 추적하는 탐정이라도 된듯한 기분이 되었다.
비밀장치가 가득한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미수 사건,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장치였다. 하지만 불쾌하게도 이 런던이란 동네는 요즘 추리란 게 성립하는 동네가 아니었고, 피해자도 용의자도 인간의 잣대에 두고 보기엔 규격 외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제가 주인님을 찾아간 것은 새벽 4시 경이었습니다."
"너무 늦은 시간 아닌가?"
"해가 뜨기 전이니 지시에 반하는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굳이 그 시간을 선택한 이유는 소리였습니다."
"무슨 소리 말인가?"
"난생처음 들어보는 큰 소리였습니다. 높은 하늘에서 쇳덩이라도 떨어트린 것 같은 굉음이었죠. 바로 지척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생생했습니다."
나는 그가 들었다는 소리에 대해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야포였다. 분명 그때쯤 군대가 도착하고 전투가 벌어졌었다. 사람을 죽이는 소리가 야속하게도 사람을 구하는 신호가 된 것이다.
"주인 어르신은 이 방 정중앙에서 목을 매달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 밧줄로 말입니다. 저는 그분을 천장에서 내려 드리고 살아있는 걸 확인하고 침대에 눕혔습니다. 하지만 발견이 약간 늦었는지, 주인 어르신은 그 뒤로 지금껏 주무시고 계십니다."
노집사는 당당하게 품에서 감긴 밧줄을 꺼냈다.
"설마 이건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입만 뻥긋거리다가 말았다. 형사들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현장 보존을 해주리라 기대하는 것이 잘못이었다. 거기다 고작 밧줄로 알아낼 수 있는 것도 많지 않기도 했으니 말이다.
"마리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저도 거의 비슷한 시간이에요. 호출을 받고 바로 여기 와서 쭉 있었으니까요."
나는 잠깐 아서의 눈꺼풀을 들추거나 입을 열어보거나 하며 그의 뇌가 멀쩡한지 확인했다.
"사실 지금 이야기에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이 있네."
"어떤 것 말입니까?"
"자네는 아서가 피습당했다고 말했지. 하지만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 보통 방 한가운데에 밧줄을 걸고 목을 매달았다고 한다면 자살 기도라고 할 텐데 말이지."
내 질문에 노집사는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거칠게 숨을 쉬었다. 그 순간, 나는 이번 사건 해결의 단초가 될 단서를 잡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노집사는 그저 입을 크게 벌리고 가가대소할 뿐이었다.
"뭐가 그리 웃긴가?"
"순진하신 분. 자살하는 거미를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