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67화 (67/232)

§67. 백일몽

2020.07.06 22:07

<67. 인간 현상>

우리는 서재를 떠났다.

내 모습은 서재 안에 들어가기 전과 후에 바뀐 것이 전혀 없었지만, 누군가 내 두개골을 실톱으로 잘라내고 뇌수 위에 떠있는 회색질을 살핀다면, 그 오밀조밀한 신경 사이에서 얼마나 화려한 폭죽이 터지는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뉴런과 뉴런 사이 이음매에선 매 순간 격렬한 전기 신호가 누선되어 불꽃처럼 튀었고, 열을 받은 뇌수는 뜨거운 기름처럼 부글거렸다.

프랑크 올드 패밀리.

그들의 얘기를 들은 이후로 돋아난 미혹은 곧 거대한 불안으로 자라났다.

아서와 나는 프랑크 학술회를 통해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그러나 징조가 드러날수록, 우리가 심연이라 여겼던 그것이 고작 매미 유충이 파놓은 작은 굴 수준에 그쳤던 것이다.

이미 수많은 검은 거인들이 우리의 영역을 지나, 저 어둠의 맨틀 사이에 웅크려 앉아 제각기 음모를 품고 있었다. 나는 그 무수한 악이 무엇을 꾀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내 안주머니에 든 열쇠는 무게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작고 가벼웠지만, 과분하게도 내 모든 신경을 홀로 독차지하고 있었다. 이 낡은 열쇠가 모든 상황을 극적으로 타개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것 말고 의지할 단서가 없었다.

"다 왔습니다."

노집사는 방문을 지나치려는 날 멈추며 말했다. 나는 그제야 긴 사색에서 깨어났다.

우리는 마리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만약 어떤 예술가가 이 광경을 봤더라면, 그는 세계 최초의 모더니스트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내는 그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초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이제 와서 굳이 마리에 대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제자리에 앉아 벽면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돌리는 모습만으로도 한밤중의 악몽에 떨어진 듯한 섬칫한 느낌을 줬다.

반면, 넓은 방에서도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 역시 기이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온갖 불운을 모두 진듯이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뿐이라면 런던에서 흔했지만, 문제는 아이들과 마리가 같은 방 안에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완전한 부외자였다면, 지금 한순간에 제법 흥미로운 괴기 소설 한 편을 써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둘 모두 어떤 사연으로 여기 있는 줄 알았다.

마리가 벽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워낙 무서워하니까 불쌍한 그녀가 스스로 모습을 숨기려고 한 거겠지.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전혀 소용 없는 짓이었다.

그녀는 수채화 위에 덧그려진 유화처럼 어떤 형태로건 이질적이고 불쾌한 존재였다. 각도나 형태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마리는 곧장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주인님, 이건 정말 안 좋은 생각 같아요."

"정 안 되겠나?"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별수가 없네. 내가 머물 장소를 구한 뒤라면 또 모를까, 한동안 그조차 쉽지 않을 거야. 그때까진 여기가 안전할 테지."

단호한 대답에 마리는 실망한 듯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녀는 살아 있을 때만큼 몸을 활발하게 움직였는데, 그러면서도 표정이 바뀌지 않아서 때로는 마임이나 인형극처럼 과장되게 느껴지곤 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저 친구가 요리를 잘할 것 같진 않아."

"그건 맞아요."

"그렇지? 자네가 여기 남아 애들 입에 귀리죽보다는 좋은 걸 넣어줄 수도 있잖나."

마리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내가 맡긴 가방은 어딨지?"

그녀는 방의 또 다른 구석에 눕혀져 있는 가방을 들어서 내게 건넸다. 나는 다시 그것을 등에 메면서 노집사를 돌아봤다.

"삽과 전정가위는 어딨지?"

"정원 창고에 있습니다."

"조금 도와주겠나? 자네도 알다시피, 내 다리가 썩 삽질하는 데 도움되진 않아서 말이네."

"물론입니다. 안내하겠습니다."

그는 시원스레 답하고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쫓으려 했는데, 마리가 말을 꺼낼 듯하여 살짝 고개만 돌려 뒤돌아봤다.

"무덤을 만드실 생각인가요?"

여전히 눈치가 빠른 그녀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가 주인님의 교우 관계에 대해 뭐라 말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친구분의 정원이잖아요?"

"나중에 깨어나면 직접 말하겠네. 그리고 아서의 고약한 취미를 생각하면, 정원에 무덤 한두 개 정도는 있는 걸 좋아할 거야. 틀림없지."

"그러면 저는 뭘 할까요?"

나는 잠깐 망설였다.

"여기 남아 있으란 말만 빼고요."

"내가 뭐라 할지 그리 잘 알면서 왜 물어봤나? 이따 부르겠네.

그녀는 얼굴 표정 하나 움직이지 않고 질색했다.

작업은 해가 중천에 뜰 무렵 끝났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그래, 수고했네."

노집사는 바닥에 삽을 꽂았다.

그 옆에는 축축한 흙이 뒤집어진 흔적이 역력했다. 묘비 하나 세워지지 않은 젖은 흙 무덤만이 삶과 죽음을 나누는 스틱스 강이었다.

"누구였습니까?"

"신사였네. 나보다도 훌륭한 신사였지."

노집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골프 가방 안에 들어갈 정도면 키가 아주 작은 분이셨나 보군요."

나는 몇 번이고 장례식을 다녔다. 런던 시민 중 나보다 많은 장례식을 다닌 사람은 장의사와 신부뿐일 것이다.

그런 나도 이렇게 초라한 장례식은 전에 본 적 없었다.

허술한 묘지는 가시나무가 다시 자라고 나면 어딘지 찾을 수도 없어 보였다. 관도 짜지 못해, 대신에 가죽 골프 가방 채로 땅에 묻을 뿐이었다.

맑게 갠 런던 하늘은 화창하기만 했다. 하늘조차 울지 않는 죽음이란 게 있었다.

"아이들과 마리를 불러와 주게. 장례 준비를 하겠네."

그러자 그는 드물게 말을 듣지 않고 가까이 다가왔다.

"또 다른 방법도 있었습니다."

그는 악마처럼 속삭였다.

"당신께서 어떤 이유엔가 이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있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속을 썩힐 바에는 차라리 없었던 일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허튼 소리 말게."

나는 가볍게 일축해다.

"엎지른 물을 담을 수 있나? 바닥에 퍼진 물을 되돌릴 수 있느냐 묻는 것이네. 죽음이란 그런 것이야."

"정말 염치도 없으십니다. 능청을 떠시는군요."

도리어 노집사는 내 대답을 하찮다는 듯이 응수했다.

"다른 이도 아닌 허버트님께서 그리 우둔한 말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깨진 접시는 다시 붙일 수 있습니다. 풀린 올을 다시 꿰맬 수도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있는 한, 물론 가능하고 말고요."

"무슨 수작인가?"

나는 노집사를 쏘아봤다.

"아서는 마리가 부활한 직후, 그녀가 인류에 해가 될 것이라고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네. 그런데 이제 와서 자네가 아서의 뜻을 거스르고, 또다시 금기를 깨트릴 것을 권하나?"

그러자 그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주인 어르신은 아버지의 피가 짙습니다. 반면, 저는 어머니의 피를 짙게 물려받았죠. 그 때문에 저에게도 깊은 열망이 있나 봅니다."

나는 그것이 어떤 열망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 그의 나지막한 경고를 불쾌하게 여길 뿐이었다.

"저와 주인 어르신의 뜻이 항상 같지는 않습니다."

"참고하지."

잠시 후, 노집사는 저택 안의 군식구를 모두 불러 모아 정원으로 데리고 나왔다. 나는 내가 아는 성경을 들고 간결한 장례 절차를 거쳤다. 신부도, 장의사도 없으니 모두 내가 해야만 했다.

십여분 남짓 짧은 장례식이 끝났다.

다시 봐도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런던을 불탔고, 아서는 목매달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나의 자랑스러운 올드코트 대학 말이다. 철옹성같이 무장한 대학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전교생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와, 누구도 다가올 수 없게 밤 내내 대학을 지켰다고 한다.

언덕을 끼고 있는 특유의 요새 같은 폐쇄적인 구조 덕분에 고아는 물론, 폭도와 군대도 쉬이 접근할 수 없었고, 올드코트는 기적적으로 어떤 피해도 없이 재난을 넘길 수 있었다.

실은 아무 피해도 없는 건 아니었다. 닭을 키우던 작은 양계장이 완전히 불타서 작은 소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니 레그혼 암탉 여남은 마리가 타 죽어서, 기숙사 식단에서 달걀 요리가 사라진 것 말고는 별문제는 없었다.

그러니 아무 피해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군사 훈련받은 적도 없는 학생들이 그토록 주도적으로 물샐 틈 없는 경비 체제를 조성했는지 알 방법이 없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덕분에 내 수입은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집과 사용인을 동시에 잃은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이었다.

겨울 학기가 끝나고 정규 학기가 시작한 대학은 이전보다 활기 넘쳤다. 내가 올드코트에 이런 표현을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정말 그랬다!

고향에서 돌아온 학생들은 좁은 캠퍼스 안에 바글바글 몰려다니며 을씨년스러운 중세 석조 건물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겨우내 시들대던 잔디도 푸르게 피어나며 풍경에 생동감을 더했다.

학생들이 보이는 지식에 대한 집착적인 갈증은 여전했지만, 그것도 봄 날씨에는 꽤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렇게 황폐한 런던 도시 안에서 올드코트는 홀로 동떨어진 정원처럼 아름다웠다.

다시 현실로 돌아가자.

나는 여전히 학장실에 있었다. 평소에는 들를 일이 많지 않던 집무실이지만, 요즘은 그럴 수도 없어졌다.

학장 대리로서 처음 맞는 신학기는 취임 이후 가장 바쁜 시기가 되었다. 나는 교수들이 제출한 강의 내용을 검토해야 했고, 돌아온 기숙사 학생들의 건의 속에 파묻혔다. 그리고 가장 신경 거슬리는 것은 역시 무너진 양계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런던 대화재나 프랑크 올드 패밀리 같은 비일상적인 신비에 대한 조사는 거의 진전되지 않았다. 그 어떤 악몽 같은 사건도 결국 생계가 걸리면 뒷전으로 밀려나고 마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는 윌슨을 다시 찾아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아침부터 학장실에 틀어박혀 골머리를 썩히는 참이었다.

───똑, 똑.

나는 고개를 들었다. 책상 맞은 편으로 긴 방을 지나, 웅장한 학장실 나무문을 누군가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시계를 꺼냈다. 칼라스 교수 사후에 교정의 육혜시계가 모두 멈춘 탓에, 이곳에서는 시계가 필수였다.

오후 5시.

그럴 리가. 나는 시침을 다시 확인했다. 오후 6시. 잠깐 사이에 시침은 1시간이나 더 움직여 있었다. 나는 당황하며 시계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얼마나 정신없이 일했으면 이렇게 시간이 지난 지도 몰랐을까, 그리 내 처지에 한탄하고 있자니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쿵, 쿵쿵.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박자였다. 심지어 두드리는 방식조차 달랐다.

나는 문 너머 서 있을 방탕한 누군가를 떠올리고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는 편입생이다.

마다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입학금도, 학비도, 기숙사비도 모두 지불할 능력이 있었고, 입학 추천인도 올드코트 졸업생이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돌아보면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그는 돈 많은 고아였다. 친인척 관계가 좁은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아,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소문만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재산을 처분하고는 봄 학기에 올드코트에 입학원서를 보내온 것이었다. 그의 이전 거주지가 옥스퍼드 인근의 리밍턴이었단 사실을 알면 더욱 의아한 사실이었다.

그런 독특한 배경 탓인지, 나는 이 편입생이 영 불편했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고 한 청년이 학장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띄웠다.

청년은 새것처럼 뻣뻣한 프록 코트 안쪽으로 꽃무늬가 들어간 하얀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그뿐이라면 좋았을 텐데, 족히 반세기 전에는 유행했을 법한 긴 부츠와 거의 맞닿는 다갈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곳이 미국 남부 시골이 아닌 런던이란 점을 고려하면 아주 엇나간 패션이라 할 수 있었다. 도무지 시내에서 마주칠 것 같은 복장이 아니었다.

한 손에는 짧은 지팡이가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을 페도라를 잡은 채로 공손히 가슴 위에 올라가 있었다.

"앉게."

나는 짧게 말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내 책상 맞은 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이름은?"

"에드워드입니다."

"그뿐인가?"

"아버지가 죽은 탓에 성을 새로 지어야 하는데, 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지 못해 비워뒀습니다."

이름을 물었을 때, 이보다 창의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나는 그를 상대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 직감했다.

"그래, 에드워드. 추천인 소개장을 보니, 자네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는데, 굳이 런던으로 온 이유가 뭐지?"

내 질문에 착착 대답하던 그는 처음으로 망설였다.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그의 외모를 살필 여유가 생겼다. 단발머리에 짙은 흑발과 흑안은 묘한 중력을 가지고 있었다. 빛조차 빨아들이는 흑색다운 강한 흡착력이었다

나는 그의 외모를 언어화할 자신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중립적이라 하겠다.

머리가 짧은 지금은 남자라고 곧바로 알아봤지만, 조금만 머리를 길러도 여자라 불러도 손색없을 외모였다. 그렇다고 마냥 미형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던 때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는데, 살짝 미간을 찌푸린 지금은 악마처럼 흉하게 보였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윤기 있는 피부인 것 같다가도,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숨넘어가는 노인의 늙은 살가죽처럼 쭈글거리게 보였다.

이러니 내가 그런 애매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해될 것이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기 때문이겠죠."

에드워드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만약 제 인생이 관성대로 흘러갔다면, 저는 분명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갔을 겁니다. 제 가문은 옥스퍼드 지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세간에도 제게 적합한 존중을 받았을 겁니다. 대학 안에도 저를 지원해줄 어른이 몇 있으니 생활에 불편함은 없고, 런던에 오기 위해 가산을 처분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는 왼손을 크게 펼치고, 검지를 다른 손으로 감싸듯 잡았다.

"이것이 인력입니다. 운명에 관성을 부여하는 힘이죠."

"납득이 안되는군. 그저 인생이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이 싫어서 런던까지 왔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내 반문에 에드워드는 정색하고 나섰다.

"자유란 건, 예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인력에 구속되지 않고, 제 운명은 오롯이 제 것이고, 어떤 불순물도 없이 순수한 제 의지만을 반영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나와 철학을 논할 생각이라면 관두게."

나는 그의 눈을 마주 봤다.

"조예가 없거든."

농담이라고 한 말인데, 말한 내가 민망해질 정도로 에드워드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긴 미소를 띄웠다. 마땅히 비교할 대상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나마 내가 살던 아파트 앞의 작은 화단에 세워진 울타리와 닮은 미소였다.

그것은 아주 오래 남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에드워드는 표정을 되돌렸는데도, 미소만은 남아 있다니.

"저는 합격입니까?"

"자네와 말을 나누기 전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고민 중이네."

"하지만 결국은 입학하겠죠."

나는 잠깐 뜸들이다가 수긍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습니다."

에드워드는 짐짓 겸손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만하게 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와 악수를 권했다.

"만약 내가 악수를 받지 않는다면, 자네의 그 괴상한 논리도 틀린 것이 되겠군."

"그것이 정말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결국 그와 손을 맞대었다.

"내 의지로 잡았네."

우리는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는데, 그 순간 나는 물 안에 잠긴 것처럼 몸이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서명하게."

에드워드는 펜대를 잡고 유려한 필체로 입학동의서에 서명했다. 나는 압지를 들고 그 옆에 학장 서명을 쓰고자 했다. 한때는 어색했지만, 최근에는 내 서명보다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나는 학장 서명을 어찌 쓰는지 잊어버려서 펜을 든 자세 그대로 종이를 보며 멈췄다.

"교수님?"

그의 부름에 고개를 드니, 어느 틈에 에드워드가 문 앞까지 가 있었다. 그는 머리 위에 페도라 모자를 얹어놓고 있었다.

"서명하지 않으십니까?"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

내 손은 쇳덩이로 묶어놓은 것처럼 무거워서 움직이질 않았다. 그런 날 보더니 에드워드는 내 눈을 마주치며, 영혼마저 끌어당기는 무거운 눈으로 물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그러게."

"죄수가 한 명 있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죄를 잊고, 이전에 죄지었을 때와 동일한 조건에 놓인다고 하면, 그는 과연 같은 죄를 반복할까요?"

"아니."

나는 즉답했다.

에드워드는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대신에 어떤 만족도 느끼지 못한 딱딱한 표정으로 차갑게 묵례했다.

"제 대답은 얼마 전에 들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질문만큼이나 의미가 불분명한 대답을 남겼다. 나는 그 방탕한 목소리에 갑자기 잠에서 깨었다. 생각해보니 이상한 일이다.

이번 학기엔 편입생이 없었다.

2020.07.07 22:05

<67. 백일몽>

우리는 서재를 떠났다.

내 모습은 서재 안에 들어가기 전과 후에 바뀐 것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두개골을 실톱으로 잘라내고 뇌의 회색질을 살펴봤다면, 그 세밀한 신경 사이에 얼마나 화려한 폭죽이 만개하고 있는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뉴런 사이 이음매에서 격렬한 전기 신호가 누선되어 불꽃처럼 튀었고, 뇌수는 부글부글 끓어서 기름처럼 튀었다. 그러니 내게 온전한 두개골이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프랑크 올드 패밀리, 그 단어를 들은 이후로 그랬다.

아서와 나는 프랑크 학술회를 통해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그러나 징조가 드러날수록, 우리가 심연이라 여겼던 그것이 고작 음지의 지표에 불과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미 무수한 거인들이 우리의 영역을 지나, 저 어둠의 맨틀 사이에 웅크려 앉아 제각기 음모를 품고 있었다. 왕립 학회, 올드코트 대학, 노란 외벽 회사... 나는 심지어 그들이 뭘 꾀하고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 안주머니를 흘끔 내려다봤다.

품속의 열쇠는 무게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가벼웠는데, 과분하게도 내 모든 신경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이 낡은 열쇠가 우리와 선구자 사이의 간격을 극적으로 좁혀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나아갈 길 정도는 밝혀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다 왔습니다."

나는 노집사의 말에 정신 차렸다. 사색이 길어져 다 온 줄도 모르고 지나치려 한 것이었다.

덜컥.

응접실 문이 열리고, 우리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만약 어떤 예술가가 이 광경을 봤더라면, 그는 세계 최초의 모더니스트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내는 그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초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이제 와서 굳이 마리에 대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제자리에 앉아 벽면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돌리는 모습만으로도 한밤중의 악몽에 떨어진 듯한 섬칫한 느낌을 줬다.

반면, 넓은 방에서도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 역시 기이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온갖 불운을 모두 진듯이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뿐이라면 런던에서 흔했지만, 문제는 아이들과 마리가 같은 방 안에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완전한 부외자였다면, 지금 한순간에 제법 흥미로운 괴기 소설 한 편을 써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둘 모두 어떤 사연으로 여기 있는줄 알았다.

나는 곧장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합의된 리더를 앞으로 내밀었다. 아이들을 대신해 날 상대하는 역할은 늘 맏이 소녀의 것이었다.

"어떠니? 지낼만 하겠니?"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한 마디 표독스럽게 내뱉을 줄 알았던 소녀는 입만 삐쭉 내밀었다. 저택의 풍경이 어린 그들에게 얼마나 끔찍하게 보일지 쉬이 짐작이 가는 반응이었다.

"묻는 것이 너무 늦었구나. 이름이 뭐지?"

"줄리엣이요. 얘는 프레디, 앞니가 없는 건 토미, 그리고 여자 애기는 도로시, 그리고 고작 다섯 살밖에 안된 얘는 월터예요."

"나이는?"

"저는 11살이요, 아마도."

소녀는 끝에 가서 자신없게 말했다. 나는 그녀가 버려진 아이라는 것을 쉬이 짐작해냈다. 몇 살 때 버려졌는지 몰라도, 정확한 생년월일을 모르는 것쯤은 런던에서 드문 일은 아니었다.

"정말 여기서 살아야 해요?"

"런던 어디에도 이보다 나은 환경은 없을 거란다. 적어도 고아원이나 구빈원보다는 낫지 않겠니?"

줄리엣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히 여기 있으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야."

"그러면요?"

"런던의 상황이 진전되고, 너희가 살만큼 큰 집을 구하게 되면 다시 불러올 거란다. 그때까지만 있으면 돼."

"오래 걸릴까요?"

"글쎄다...."

나는 정말로 알지 못했다. 런던이 얼마나 강인한 도시인지는 알았지만, 이런 재난의 여파가 금방 지나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약속은 반드시 지키마. 나는 신사 대 신사의 약속을 짊어진 이상, 그 의무를 결코 외면하지 않을 거야."

"톰이예요."

줄리엣이 말했다.

"그래, 톰."

"뭐라고 기도하면 될까요?"

나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저는 아는 기도문이 없어요. 하느님한테 뭐라고 부탁해야 톰을 천국에 보내줄까요?"

"그저 네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하렴. 주께서는 전부 들으신단다."

그러자 줄리엣은 내내 굳어 있던 얼굴 근육을 살짝 이완하며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톰은 묻어줄 건가요?"

"그래. 언제나 만날 수 있게 이 정원에 묻을 거란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서로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밤 중에 너무 많은 상처를 입어서 서로 다가가기조차 꺼렸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서 마리에게 시체가 든 가방을 받았다.

작업은 해가 중천에 뜰 무렵 끝났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그래, 수고했네."

노집사는 바닥에 삽을 꽂았다.

그 옆에는 축축한 흙이 뒤집어진 흔적이 역력했다. 묘비 하나 세워지지 않은 젖은 흙무덤만이 삶과 죽음을 나누는 스틱스 강이었다.

"누구였습니까?"

"신사였네. 나보다도 훌륭한 신사였지."

노집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골프 가방 안에 들어갈 정도면 키가 아주 작은 분이셨나 보군요."

나는 몇 번이고 장례식을 다녔다. 런던 시민 중 나보다 많은 장례식을 다닌 사람은 장의사와 신부뿐일 것이다.

그런 나도 이렇게 초라한 장례식은 전에 본 적 없었다.

허술한 묘지는 가시나무가 다시 자라고 나면 어딘지 찾을 수도 없어 보였다. 관도 짜지 못해, 대신에 가죽 골프 가방 채로 땅에 묻을 뿐이었다.

맑게 갠 런던 하늘은 화창하기만 했다. 하늘조차 울지 않는 죽음이란 게 있었다.

"아이들과 마리를 불러와 주게. 장례 준비를 하겠네."

그러자 그는 드물게 말을 듣지 않고 가까이 다가왔다.

"또 다른 방법도 있었습니다."

그는 악마처럼 속삭였다.

"당신께서 어떤 이유엔가 이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있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속을 썩힐 바에는 차라리 없었던 일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허튼 소리 말게."

나는 가볍게 일축해다.

"엎지른 물을 담을 수 있나? 바닥에 퍼진 물을 되돌릴 수 있느냐 묻는 것이네. 죽음이란 그런 것이야."

"정말 염치도 없으십니다. 능청을 떠시는군요."

도리어 노집사는 내 대답을 하찮다는 듯이 응수했다.

"다른 이도 아닌 허버트님께서 그리 우둔한 말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깨진 접시는 다시 붙일 수 있습니다. 풀린 올을 다시 꿰맬 수도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있는 한, 물론 가능하고 말고요."

"무슨 수작인가?"

나는 노집사를 쏘아봤다.

"아서는 마리가 부활한 직후, 그녀가 인류에 해가 될 것이라고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네. 그런데 이제 와서 자네가 아서의 뜻을 거스르고, 또 다시 금기를 깨트릴 것을 권하나?"

그러자 그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주인 어르신은 아버지의 피가 짙습니다. 반면, 저는 어머니의 피를 짙게 물려받았죠. 그 때문에 저에게도 깊은 열망이 있나 봅니다."

나는 그것이 어떤 열망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 그의 나지막한 경고를 불쾌하게 여길 뿐이었다.

"저와 주인 어르신의 뜻이 항상 같지는 않습니다."

"참고하지."

잠시 후, 노집사는 저택 안의 군식구를 모두 불러 모아 정원으로 데리고 나왔다. 나는 내가 아는 성경을 들고 간결한 장례 절차를 거쳤다. 신부도, 장의사도 없으니 모두 내가 해야만 했다.

십여분 남짓 짧은 장례식이 끝났다.

다시 봐도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런던을 불탔고, 아서는 목매달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나의 자랑스러운 올드코트 대학 말이다. 철옹성 같이 무장한 대학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전교생이 자발적으로 뛰쳐 나와, 누구도 다가올 수 없게 밤 내내 대학을 지켰다고 한다.

언덕을 끼고 있는 특유의 요새 같은 폐쇄적인 구조 덕분에 고아는 물론, 폭도와 군대도 쉬이 접근할 수 없었고, 올드코트는 기적적으로 어떤 피해도 없이 재난을 넘길 수 있었다.

실은 아무 피해도 없는 건 아니었다. 닭을 키우던 작은 양계장이 완전히 불타서 작은 소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니 레그혼 암탉 여남은 마리가 타 죽어서, 기숙사 식단에서 달걀 요리가 사라진 것말고는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러니 아무 피해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군사 훈련 받은 적도 없는 학생들이 그토록 주도적으로 물샐 틈 없는 경비 체제를 조성했는지 알 방법이 없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덕분에 내 수입은 끊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집과 사용인을 동시에 잃은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이었다.

겨울 학기가 끝나고 정규 학기가 시작한 대학은 이전보다 활기 넘쳤다. 내가 올드코트에 이런 표현을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정말 그랬다!

고향에서 돌아온 학생들은 좁은 캠퍼스 안에 바글바글 몰려다니며 을씨년스러운 중세 석조 건물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겨울 내내 시들거리던 잔디도 파랗게 피어나며 풍경에 생동감을 더했다.

학생들이 보이는 지식에 대한 집착적인 갈증은 여전했지만, 그것도 봄 날씨에는 꽤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렇게 황폐한 런던 도시 안에서 올드코트는 홀로 동떨어진 정원처럼 아름다웠다.

다시 현실로 돌아가자.

날 일깨운 것은 매미 울음소리였다. 찌르르, 쓰름쓰름 하고 열린 창 너머로 더운 바람과 함께 소리가 함께 들어왔다. 그와 함께 잠깐 저 멀리 떠나있던 내 의식이 돌아왔다.

나는 여전히 학장실 안에 있었다.

높은 아일랜드 성인의 탑 창문 너머로는 잔디밭이 푸른 성 헨리 8세 칼리지 교정이 훤하게 드러났고, 그 너머로는 불탄 잿빛 런던의 전망이 비추었다.

단, 창문은 단방향으로만 나 있었다. 탑에서 다른 칼리지 쪽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올드코트에 팽배한 엄숙주의로부터는 학장 대리인 나도 자유롭지 못했다.

맴맴, 쓰름쓰름. 다종다양한 매미가 세차게도 울었다.

학장 대리로 맞는 첫 신학기는 여지껏 중 가장 바쁜 시기였다. 명목은 대리라지만 두문불출하여 소식 없는 오'제럴드 학장을 대신하여, 나는 대학 내 벌어지는 모든 사건에 대처해야 했다.

고향에서 돌아온 학생들은 기숙사에 도착해 짐을 풀어놓자마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나는 조만간 그들이 하늘의 색깔을 바꿔 달라거나, 영국 총리를 바꿔 달라 건의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교수들이 제출한 학기 강의 내용을 일일이 검토해야 했고, 시청에서 날아온 공문서에 관한 건도 승인해야 했고, 심지어 왕립 학회의 조사원 맞이까지 도맡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초상적인 현상에 관한 조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아서 피습 사건의 범인, 런던 대화재 도중 사라진 윌슨, 프랑크 올드 패밀리와 비밀 금고 열쇠, 템스 강에 정박한 네 척의 철갑 소방선... 아, 그것들도 무너진 양계장보다 중요할 순 없지!

이날도 나는 아침부터 학장실에 틀어박혀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하얀 종이 위에는 문자 대신 검은 지렁이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찌르르... 똑, 찌르르... 똑.

내 귀가 완전히 맛이 간 것이 아니라면, 매미 울음 사이에 노크 소리가 섞인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실외의 쨍쨍한 햇빛에 비하면 방 안은 꽤 어두웠는데, 해가 직선으로 내리쬐는 탓이었다. 업무용 마호가니 책상 맞은 편에 놓인 문은 여전히 투박하고 조용했다.

"어쩌면."

나는 홀로 중얼거렸다.

"마침내 내 귀가 맛이 간지도 몰라."

눈을 가늘게 뜬다고 문 너머가 비춰 보이지도 않을 텐데, 나는 문쪽을 한참 노려보다가 품에서 시계를 꺼냈다. 올드코트 관계자는 모두 시계를 들고 다녔다. 칼라스 교수가 죽은 뒤, 갑자기 교정의 육혜시계가 모두 멈춘 탓이었다.

나는 시침을 읽었다.

오후 5시. 그럴 리가.

나는 시침을 다시 읽었다.

오후 6시. 이번에야말로, 그럴 리가.

나는 시침은 다시 읽었다.

오후 7시.

나는 눈을 비비며 시계를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방 안이 전과 달리 상당히 어두웠다는 걸 깨달았다. 해는 이미 저물어 있었고, 천장의 샹들리에를 통해 산란하는 전광만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쿵쿵.

난쟁이처럼 낮은 노크 소리는 이제 거인의 발길질처럼 거셌다. 매미 울음도 더 들리지 않았다.

누군지 몰라도 성미가 급한 손님이었다. 아니,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거의 두 시간은 그를 문 앞에 세워둔 꼴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급하게 들어오라고 말하려다가 직전에 멈췄다.

"접니다. 들어가게 해주세요."

문밖에서 애타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고 귀를 기울였다.

"약속대로 찾아왔습니다. 안에 계십니까?"

처음에는 그것이 사람의 목소리인 줄만 알았는데, 곧 그것이 언어치고는 많이 뭉개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뜻을 모르는 짐승이 목소리만 흉내 내는 것처럼, 차라리 숨소리라 부르는 게 어울리는 헐떡임이었다.

"접니다, 에드워드."

에드워드,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실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뭉게뭉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가 우리 칼리지의 편입생이라는 사실 말이다. 나는 그와 대화마저 나눈 적이 있었다.

"정말 자넨가?"

"그렇습니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였지만, 그대로 돌아가라고 말할 자신도 없었다.

"들어오게."

그렇게 말한 순간, 방문이 열리고 어두운 복도에서 하얀 청년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에드워드.

그리 소개한 그는 딱 내가 생각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새것처럼 뻣뻣한 프록코트 안쪽에 꽃무늬가 들어간 하얀 재킷을 걸쳤고, 하반신에는 족히 반세기 전에 유행한 긴 부츠, 그리고 부츠 끝에 아슬아슬하게 닿은 다갈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미국 남부라면 모를까, 런던 한복판을 활보하려면 적잖은 용기가 필요한 옷차림이었지만, 나는 그 모습이 썩 낯익었다.

그의 한 손에는 신사다운 짧은 지팡이가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은 페도라 챙을 붙잡고 제 가슴 위에 정중하게 올라가 있었다.

"앉게."

그는 내 맞은 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이름은?"

"에드워드입니다."

"그뿐인가?"

"아버지가 죽은 탓에 성을 새로 지어야 하는데, 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지 못해 비워뒀습니다."

누군가 이름을 물었을 때, 이보다 창의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그래, 에드워드."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우리 대학에 편입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혹시 결격 사항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전혀. 오히려 탈이랄 게 없네."

나는 입학원서와 추천인 소개장을 들춰 보며 말했다. 추천인은 다름 아닌 올드코트 졸업생으로 십이사도 칼리지 출신이었다. 대학의 폐쇄성으로 미뤄본다면 그보다 더 나은 신원 보증도 없었다.

그의 이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밍턴의 유력 가문 출신인 그는 신분으로 보나, 재산으로 보나, 우리 대학에 해가 될 여지가 없었다. 학비나 기숙사비를 지불하지 못할 일도 없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가족 관계 내력이었다.

"실례지만, 자네는 상당한 자산가라고 알고 있네. 이것이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결과라고."

"얼마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정당한 상속권을 가진 친인척이 없어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게 문제라도 됩니까?"

"아니, 문제는 없지."

갓 스물을 넘은 청년이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는 일은 드물기는 하나 없을 법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보통은 큰 유산일수록 잘게 해체되어 성인도 되지 않은 자식보다는 나눠 가질 사람이 많았다.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이, 친척 하나 없는 청년이 그 유산을 온전히 물려받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나는 근거 없는 불길한 상상을 멈췄다. 지금 이 자리는 입학 면접 자리지 청문회가 아니었고, 꺼림칙하다는 개인적인 감상이 그를 재단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면접이라고는 하지만, 결과 역시 내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에드워드. 소개장을 보니, 자네는 리밍턴 출신이라 들었는데. 그렇다면 거기 있는 자산은 처분하고 내려온 건가?"

"맞습니다."

"그러지 않고 옥스퍼드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케임브리지도 아주 멀지는 않고 말이야. 굳이 런던으로 온 이유가 뭐지?"

모든 질문에 착착 대답하던 에드워드는 처음으로 말을 멈췄다.

나는 그가 대답을 궁리하는 동안, 처음으로 그의 옷차림이 아닌 얼굴을 볼 여유가 생겼다. 잘 인상에 남지 않는 외모인 탓에, 나는 그 얼굴을 기억하려고 부단히 애써야 했다.

딱히 몰개성하다고 할 수는 없는 얼굴인데도 이상한 일 아닌가.

일단, 그는 분명 검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짙은 검은 눈동자를 가졌다. 흑색은 빛조차 붙잡는다 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강한 중력을 가진 빛깔이었다.

기억나는 것은 그게 다였다.

작은 표정 변화에도, 보는 각도에도, 그의 얼굴은 매번 새롭게 보였다. 만약 그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렸다면 여자처럼 보였을 터였다. 미소 지은 모습이 저 티치아노의 성스러운 유디트라면, 살짝 미간을 좁힌 지금은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만큼 억세게 보였다.

피부의 주름은 갓 태어난 아기의 것처럼 생기 넘치다가도, 빛을 받는 각도를 살짝 돌리면 오랜 세월 동안 중력이 빚어낸 도자기처럼 힘없이 늘어져 보이기도 했다.

한 사람의 얼굴에 성별, 나이, 미추조차 담겨 있지 않으니, 몰개성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인상에 남을 수도 없는 기이한 외모가 된 것이다.

잠시 후, 에드워드는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기 때문이겠죠."

나는 그마저 어디서 들어본 적 있었다.

"만약 제 인생이 관성대로 흘러갔다면, 저는 분명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갔을 겁니다. 제 가문은 옥스퍼드 지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세간에도 제게 적합한 존중을 받았을 겁니다. 대학 안에도 저를 지원해줄 어른이 몇 있으니 생활에 불편함은 없고, 런던에 오기 위해 가산을 처분하는 일도 없었겠죠."

에드워드는 손을 크게 펼치고, 자신의 다른 손으로 펼친 검지를 꽉 붙잡았다.

"이것이 인력입니다. 운명에 관성을 부여하는 힘이죠."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군."

나는 중얼거렸다.

"그건 참 꿈처럼 모호한 말이네. 꿈에서 일어나는 사건, 대화에는 논리가 없지. 딱 그 격이라네. 그저 인생이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이 싫어서 런던에 왔단 말인가?"

내 질문에 에드워드는 정색했다.

"자유란 무엇에도 예속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제 운명이 인력에 이끌리지 않고, 순수하게 제 의지만을 반영할 때, 그야말로 저는 자유롭게 되는 겁니다."

"자네의 말대로라면 진정 자유로울 때는 최고 속도로 자유 낙하할 때뿐이겠군. 나와 철학을 논할 생각은 관두게."

에드워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조예가 없거든."

농담이라고 한 말이었지만 에드워드는 내가 민망해질 정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시간이 잠깐 멈춰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갑자기 길게 미소 지었다.

그 입 모양에 대해 서술하고자 해도 마땅히 비교할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예시를 들자면 내가 살던 아파트의 작은 화단에 있던 울타리에 견주어야 했다.

그만큼 무기질적인 모습이었다. 미소는 에드워드가 표정을 바꾸고도 잔상처럼 오래 남아 있었다.

"저는 올드코트에 들어가도 됩니까?"

"자네와 말을 나누기 전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고민 중이네."

"하지만 결국 입학하겠죠."

나는 그를 거부할 갖은 이유를 떠올렸다.

하지만 무엇도 마땅하지 못했다.

"그래, 서명하게."

에드워드는 펜대를 잡고 유려한 필체로 입학동의서에 서명했다. 나는 그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 옆에 학장 서명을 쓰려 했다.

"뭘 기다리십니까?"

각종 대학 사무를 도맡다 보니, 나는 학장의 이름으로 하는 서명이 내 서명보다도 자연스럽곤 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펜을 잡고 서명하려 하니, 그리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름."

에드워드의 독촉에 홀린 듯이, 나는 내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무심코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미안하지만, 입학동의서는 다시 적어야겠네. 학장 서명이 아닌 내 이름을 적어버렸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서 에드워드는 악마처럼 웃고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아, 나는 그가 간질 발작을 일으킨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 입안에서는 곧 찌르르, 찌르르. 맴맴.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지금 당장 문을 닫고 나가게."

에드워드는 대답하지 않고 박장대소했다. 맴맴. 맴맴. 맴맴. 그 목청에서 수천 마리나 되는 매미가 우글우글 기어나오며 일제히 울어댔고, 어찌나 많이 웃었는지 눈에서 한 마리 두 마리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번 학기엔 편입생이 없었다.

나는 꿈속에 있다.

전에도 같은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내가 느낀 모든 위화감은 일종의 역 데자뷔였다.

"이제 아셨습니까?"

맴맴맴맴맴맴맴맴맴.

나는 햇볕이 따가워서 잠에서 깨었다.

매미 울음이 들리지 않는 것에 의아해하다가, 문득 3월에는 매미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떠올렸다. 애초에 여름은커녕 봄이 왔다고 하기에도 쌀쌀한 시기다.

시간은 오후 7시는커녕, 해는 푸른 하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아마 이제 막 정오를 넘겼을 것이다. 나는 그 옆에 창틀 너머 몸을 내민 남자를 보았다.

병약한 인상의 마른 남학생이었다. 그는 창문에 걸치 듯이 내밀어 내 쪽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구도의 광경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지면이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잠결에 투신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