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흑야黑夜 (모바일, 캔버스뷰어 전용)
2020.07.09 01:41
<69. 칸트의 무덤>
방의 형태는 기형적으로 뭉개졌다.
내가 기억하는 것에 비해, 방은 가로로 길쭉해져서 내 맞은 편 벽부터 책상까지 거리가 아주 멀게 느껴졌다. 단순히 눈의 착각은 아니었는지, 데이비의 모습 역시 그에 맞춰 작아졌다.
"나가야 해요!"
데이비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팔을 허우적거리며 창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를 붙잡은 건 앨리스였다. 그녀는 럭비 선수처럼 터프하게 데이비를 쓰러트렸다.
그건 내 시점에서는 꽤 이상하게 보였는데, 앨리스가 데이비보다 커보였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랐다...."
앨리스는 누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도 않는 혼잣말을 헐떡거리며 내뱉었다.
"하지만 나갈 길이 더 없잖나?"
"교수님까지 그런 이상한 소리할 거예요? 혹시 아까도 이러다가 뛰어 내렸어요?"
"아니, 나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두 팔로 책상을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교수님 팔이."
"내 팔이 뭐?"
그렇게 말하고 팔을 돌아본 나는 그제야 팔이 탈골되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맞아, 탈골 되었지."
"다들 이상해요."
앨리스는 데이비의 몸을 누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창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바깥은 왜 벌써 어둡죠? 방금까지 오후 1시였는데, 그리고 또 매미 울음소리는 뭐죠? 이 추운 날씨에 매미가 벌써 나왔다고요?"
나는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확실히 이상하군."
"하늘을 봐요!"
앨리스는 손가락을 뻗어 하늘을 가리켰다. 검은 하늘에는 해도, 달도 떠 있지 않고 오직 불길한 쌍성만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지면은 어둠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여러모로 배 위에서 본 밤바다와 닮았다. 달과 별이 뜨지 못하는 구름 낀 밤바다는 모든 생명을 삼키는 늪처럼 크고 어두운 아가리였다.
그런 밤이면 사람이 빠져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세계로 끌려간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돗대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고 제발 저 심연으로 끌려가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나는 여기가 어딘지 알아.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전에 와본 것 같아."
"마침 저도 그래요.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에요."
그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또 냄새는 어떻고요."
"으으...."
조금 전에 앨리스가 넘어트렸을 때,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던 데이비가 뒤통수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아파요."
"자네 좀 괜찮나? 진정했나?"
"네. 제가 왜 창밖으로 뛰어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손을 들었다. 우리는 일제히 그를 돌아봤다.
"잠깐만요. 메모가 있어요. 의장이 신변에 이상한 일이 생기면 읽어보라고 챙겨준 거예요. 분명 지금 같은 상황을 말하는 거겠죠. 그렇죠?"
데이비는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며 우리에게 동의를 구했다. 우리 중 누구도 의장이라는 사람을 아는 자가 없었기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눈치를 보듯이 쭈뼛거리며 종이를 주섬주섬 펼쳤다. 꾸겨진 모양새가 메모라기보다는 쓰레기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종이를 펼쳐 내용을 보더니,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뭐라 써있나?"
내가 답답한 나머지 말을 건 뒤에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 돼. 의장이 뭔가 잘못 안 모양입니다. 이건 도움이 안 돼요."
"그건 내가 판단하겠네. 뭐라 적혀 있지?"
그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마주 봤다.
"혹시 언제 학장 대리가 되셨는지 기억하세요?"
"그게 무슨 뜻인가?"
"당신은 네 번째 학장 대리예요."
"젠장, 혼자 중얼거리지 좀 말고 알아 듣게 좀 말하게!"
나는 그의 손에서 쪽지를 낚아챘다.
쪽지에는 투박한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올드코트 대학은 지금 공격받고 있음. 지난 2년 동안 학장 대리는 3번 바뀌었고, 그때마다 모든 관계자의 기억이 조작당했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스스로 공격받는다는 자각이 생겼다면 살 가능성은 없으니 자살하길 바람.
이하, 올드코트 대학을 공격할 수 있는 조직 명단(내가 파악하지 못한 조직이 있을 수도 있음. 다만, 그 경우 나도 죽을 것임.)
-학장(교정에서 이름 부르거나 쓰지 말 것. 생각도 최소한으로 할 것.)
-제임스 타운 칼리지
-에린의 십이사도 칼리지
-왕립 학회
-왕립 지리 학회(위랑 아래랑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음.)
-토지 측량국
-런던 소방대
-범죄 수사국
-보편 사무국
-아서 프랑크 백작
이 쪽지를 실수로 열어 봤다면 곧장 가지고 와서 사과할 것(한 번은 봐주겠음!)
ps. 혹시 머리를 감자처럼 자른 뇌 없는 사람은 나만 보이는 거야? 미치겠네. 다들 모른 척하는 거지?」
나는 쪽지를 아래로 내렸다.
"내가 부임한 건 작년 겨울이야."
"제 말이 그겁니다! 저는 토끼풀십자회에 들어가고 지난 2년 동안 학장 대리를 감시해왔고,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단 말입니다!"
그는 멈칫하고 앨리스를 돌아봤다.
"아니, 잠깐, 내가 학장 대리를 쫓는 역할을 맡은 건, 학장 대리님 근처 수수께끼 때문인데...."
"어... 제가 2학년이란 거 아세요? 그리고 제가 교수님을 처음 만난 건 작년 여름인걸요. 늑대인간 사건 때였어요, 정확히 기억해요."
세 명의 이야기가 모두 달랐다.
그리고 셋 모두 학장 대리 직책을 둘러싼 관계자였기에, 이야기가 이토록 어긋날 이유는 무엇도 없었다. 나와 앨리스는 바로 수긍해야만 했다.
"기억이 조작되었네. 설마 이런 걸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니."
"지금 좀 꿈을 꾸는 기분이에요."
홀로 납득하지 못한 데이비만 머리를 제 손으로 쥐어 뜯으며 당황했다.
"둘이서 절 짜고 속이려는 거 아닙니까? 도무지 말이 안되잖아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야 널리고 널렸지. 자네는 런던 하수도 아래에 심해 괴물이 살아서 밤마다 가정의 아이들을 납치한다는 말을 믿겠나?"
"농담이죠?"
"슬프게도, 아니야."
"그건 저도 처음 듣는데요?"
앨리스는 뒤늦게 내 쪽을 돌아봤다. 데이비와 달리 그녀는 즐겁게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걸세."
나는 쪽지를 다시 집어 모두의 앞에 내보였다.
"이 쪽지에 적힌 내용은 사실이야. 우리의 기억은 조작되었고, 또 지금은 모종의 집단에게 공격받고 있네."
"전 자살 못해요!"
데이비가 질겁하며 소리 질렀다.
"죽으란 소리는 안할 거야. 난 내 병사에게도 그렇게 말해본 적이 없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는 알아야...."
철썩 철썩.
파도가 선체를 때리는 소리에 우리는 몸을 휘청거렸다. 세상이 45도 정도 왼쪽으로 기울었고, 선반에 꽂힌 책들이 우수수 쏟아져 바닥을 굴렀다.
"밖이예요!"
데이비가 소리쳤다. 창밖을 보니 세찬 파도가 창턱 바로 아래까지 닿아 때리고 있었다. 우리는 말 그대로 배, 혹은 부표 등대 위에 있는 거나 다름 없었다.
우리는 아무 것이나 붙잡고 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웃기는 표현이지만, 지금은 벽이 바닥보다 아래에 있었으니까.
그렇게 잠깐 버티고 있었더니, 벽보다 위에 있는 창문 쪽에서 무슨 목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ǝɔᴉๅⱯ ʻɹɐǝp ʎW,,
우리는 창밖을 돌아봤다.
창 너머에는 흉흉한 쌍둥이 별을 등지고 길쭉한 암초 위에 가로등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불이 깜빡깜빡 거리는 그곳에는 바다 파리가 많이도 꼬였는데, 실은 그 아래에 더 많았다.
가로등에는 밧줄 하나가 묶여 있었는데 그곳에는 토끼 한 마리 주검이 데롱데롱 매달려 있었다.
、、¡noʎ ǝǝs oʇ pooꓨ ¡noʎ sˌʇI,,
그것의 목에서 나온 소리는 도무지 정상적인 발성 기관에서 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백마스킹 시킨 것 같은 소리였다.
"저것은 말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부식 가스가 새는 소리인가?"
"아, 제가 알아요! 저건 끼토(Tibbar)예요."
앨리스는 손을 번쩍 아래로 내리면서 외쳤다.
"끼토?"
"토끼를 뒤집으면 끼토가 되잖아요. 말 그대로 뒤집힌 토끼예요. 그런데 제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죠?"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ʇɟǝๅ ǝǝs I pᴉꓷ ¡ɥnɯɐN ǝʞᴉๅ sʞooๅ ʎๅๅɐǝɹ ǝH ·ʎɯ ɥO,,
끼토가 뭔가 말했다. 데이비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외쳤다.
"저것이 말을 걸잖아요!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진정해요, 제가 말을 걸어볼게요."
그러더니 앨리스는 갑자기 벽에 기대어 물구나무 서려고 했다.
"자네 치마!"
"치마가 아니라 마치(Triks)니까 괜찮아요."
영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더니 그녀는 머리를 땅에 붙인 채 빙글 뒤집어졌다. 걱정한 바와 달리, 치마는 그녀 말대로 꼿꼿히 천장 쪽으로 펄럭였다.
"뭐라고 하고 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pᴉdnʇs ʻpɐǝɥ ɹnoʎ uo puɐʇs uǝɥꓕ,,
앨리스는 바닥으로 내려왔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뭐라고 했나?"
"물구나무를 서래요."
、、·ǝuo ɹǝᴉsɐǝ ǝsooɥꓛ ·pɐǝɥ ɹnoʎ uᴉds ʇsnſ uɐɔ noʎ ɹO,,
나는 쭈뼛거리며 망설이다가, 팔을 땅에 붙이고 물구나무 섰다. 앨리스도 곧잘 해냈는데, 유일하게 데이비만 바닥에 철푸덕 엎어졌다.
、、¡ʇˌuɐɔ I,,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안 들리네!
내가 데이비에게 소리지르자, 끼토가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저 친구 영어를 못하나 봐. 머리로 서라니까 머리를 땅에 대고만 있잖아!"
끼토, 아니, 이제 토끼의 목소리는 곧잘 들렸다.
"여기는 어딘가?"
"여기는 칸트의 무덤이야. 나는 그렇게 부르고 있지만, 앞에는 네가 좋아하는 이름을 아무 거나 붙이면 돼. 대신 무덤이라는 사실은 존중해주길 바라. 여기서 누가 죽은 것만은 확실하거든."
내 질문에 토끼는 술술 대답했다.
"그럼 너는 누구지?"
"반대로 묻겠어. 너는 누구지? 내가 묻는 건 이름이 아니야. 이름을 말하거나 하는 촌스러운 행동은 하지 말아줘. 내가 말하는 건 더 실존적인 의미거든. 세상이 요지경이 되었어.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감각 체계가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지. 그런데 네 존재를 증명할 수 있어?"
나는 인상쓰며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것이 기이한 꿈처럼 느껴졌다.
"너는... 실존하지 않아."
"그러면 너는 어떻지? 나는 이렇게 너의 사고 체계 안에 실존하고 있어. 그런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들, 너는 실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좋아, 아주 잘하는 짓이다. 네 덕분에 이 세계 전체가 송두리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잖아.
그 빌어먹을 토끼는 잘도 떠벌떠벌 떠들었다. 나는 머리에 피가 쏠려 죽을 지경인데, 저것은 도리어 생기 넘쳐 보였다.
원래 뒤집어져 사는 생물... 아니, 그것은 살아 있지도 않았다. 나는 겨우 한 가지를 이해했다.
"그래, 죽은 걸 뒤집어서 살아 있는 거였군."
"그래, 바로 그거야! 이제 너도 농담을 아는구나!"
그것을 아래로 데롱데롱 흔들렸다. 내가 보기엔, 아마 펄쩍 뛰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크, 녀석이 온다."
"아비 잃은 드로우드(Drawde)말고 누구겠어!"
그렇게 외친 토끼는 발을 묶을 줄이 뚝하고 끊겨, 그대로 검은 바다 아래로 잠기고 말았다. 토끼를 삼킨 검은 바다는 쉴 새 없이 철썩거리며 늘 한 자리에 물길을 튀겼는데, 그 모습이 사람 같이 생겼다.
나는 그의 이름을 알았다. 전에도 꿈에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로우드!"
"혹은 에드워드입니다."
방이 빙글 돌더니 천장이 바닥이 되고, 바닥이 천장이 되어, 나는 물구나무 선 줄 알았는데 천장에 팔로 매달려 있는 모습이 되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도망쳐!"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내 목청에서 솟은 것은 길고 얇은 여섯 개의 외골격 다리였다. 그것은 내 얼굴을 발톱으로 마구 긁으며 빠져 나오려고 애썼다.
"맴맴!"
내 입가에서 매미가 우화했다. 실은 그것은 내 성대였기 때문에, 나는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저는 올드코트에 들어가도 됩니까?"
찌르르... 찌르르... 맴맴....
수천 마리나 되는 매미가 창밖에서 밀어 닥쳤다. 우리의 팔다리에 다닥다닥 달라 붙은 그것은 수액을 빨아먹듯이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달라 붙었다.
"저 기억났어요."
그 순간, 태연하던 앨리스가 말했다.
"저 여기가 어딘지 알아요. 여긴 꿈나라(Dreamland)예요. 꿈이니까 그냥 잠에서 깨면 그만이예요!"
그녀는 유레카, 하고 외치는 모양이었다. 에드워드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역시 저 여자는 없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에서 깨었다.
2020.07.09 22:05
<69. 흑야黑夜>
창문을 응시하던 나는 곧 다른 변화를 하나 더 알아냈다.
"앨리스가 사라졌어."
그러자 데이비는 그제야 그것을 깨달았는지 당황하며 두리번거렸다.
"언제부터 없었지?"
"문과 여자! 둘 다 사라지다니!"
데이비가 경악하며 외쳤다.
나는 그의 여자라는 표현이 영 거슬렸는데, 분명 낯선 여인의 이름을 부르기 서투른 숫총각의 타협선과도 같은 것일 터다. 나는 그 심정을 곧바로 눈치챘다.
데이비의 폭주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혼란에 빠진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고, 평생 달려본 적 없는 사람처럼 어설픈 주행법으로 창문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나가야 해요!"
"잠깐, 멈춰!"
나는 책상을 발로 밀어낸 뒤,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곧장 그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창틀에 손을 올린 그를 전신을 이용해 넘어트렸다.
"윽!"
바닥에 쓰러진 데이비가 멍청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 순간, 나는 묘한 위화감에 사로잡혔으나 그 정체가 뭔지 알 순 없었다. 떠오른 것은 죽은 아버지였다. 이유는 없었다.
실내는 어두웠다.
나는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8시.
찌르르... 찌르르... 맴맴....
더운 밤바람과 함께 창 너머로 매미 울음소리가 한적하게 들려왔다.
"여기는 런던이 아니야."
나는 머릿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런던에는 이렇게 매미가 우는 밤이라곤 거의 없었으니까. 나는 쓰러진 데이비를 내버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에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하늘에는 달도, 별도 떠 있지 않았다. 모든 천체를 상실한 우리 위로는 양극의 쌍둥이별만이 흉흉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전에도 이런 천공을 본 적이 있었다.
머릿속에 황사가 흐른다. 광야를 달리는 열차, 별과 별 사이에 놓인 선로....
"여기 온 적이 있어."
생명 한 줌 없는 하늘에 수천 마리의 괴조가 들새처럼 날아올랐다. 원근감을 흐리게 만드는 기형적인 군무였다.
그리고... 우리는 바다 위에 있었다.
나는 15년 전에 언젠가 봤던 밤바다를 떠올렸다. 수평선에서 세상을 집어삼킬 기세로 먹구름이 몰려왔고, 달과 별, 오랜 천공의 지배자는 제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침반조차 세울 수 없는 흔들리는 선체에서, 나는 어떻게 길을 잃지 않고 여기까지 도착했을까. 무엇을 의지했단 말인가.
"으으... 살려줘요...."
고개를 돌리니 몸을 웅크린 데이비가 벌벌 떨고 있었다.
"괜찮아. 곧 지날 거야."
나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손잡아 주었다.
철썩, 철썩.
직육면체의 배가 파도를 맞으며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끼익, 끼익. 배 이음쇠 사이로 바닷물이 스며들며, 녹슨 쇠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메모가 있어요."
데이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메모?"
"의장이 준 거에요.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그때만 펼쳐보라고 했어요."
"꼭 지금 같은 상황이군."
그는 고개를 처박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꾸겨진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쪽지라기보다는 쓰레기처럼 보였다.
"읽어주세요."
"내가?"
"저는... 읽을 자신이 없어요."
그는 내 기억보다도 의기소침하게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를 이해했다. 누구라도 한순간에 이런 지옥에 떨어진다면 위축하고 겁먹겠지. 나는 지옥에 퍽 익숙해진 자이기도 했다.
나는 종이를 주섬주섬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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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즉시 자살하길 바람
지금 즉시 자살하길 바람
지금 즉시 자살하길 바람
지금 즉시 자살하길 바람
지금 즉시 자살하길 바람
지금 즉시 자살하길 바람
지금 즉시 자살하길 바람
지금 즉시 자살하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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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나는 기겁하며 쪽지를 집어 던졌다.
"뭐라 적혀 있어요?"
"뭐라고 한들...."
바닥에 떨어진 쪽지의 글자가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작은 개미떼였다. 그것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뒤에 종이에는 한 단어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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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em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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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이상해지는 광경이다. 그야말로 악몽이로다.
"허억... 허억...."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뭐라 적혀 있었어요, 뭐라고?"
데이비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당했어. 그 쪽지는 이제 쓸모가 없네. 저번에 펼쳐봐서 여기 주인에게 들킨 거야."
"들키다니, 누구한테요?"
그 질문에 나는 의아하여 대답하려다가, 곧 나도 대답을 알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들키다니, 누구한테? 내가 이 쪽지를 전에 본 적이 있다고?
철썩 철썩!
검은 파도가 선체를 때렸다. 창턱을 넘어 검은 물길이 넘쳐 바닥에 쏟아졌다. 데이비는 그것에 몸이 젖는가 싶더니, 기겁하며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거, 바닷물이 아니에요!"
바닥에 흥건한 검은 액체는 액체답지 않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은 개미떼였다. 나는 소스라치며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그것들을 마구 밟았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거센 파도가 몰아쳤다.
"아무거나 꽉 붙잡아!"
선체는 마구 흔들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나는 책상에, 데이비는 책장을 꽉 붙잡았다. 세계는 45도 정도 기울었는데, 책상과 책장은 제자리에 박힌 듯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야! 아야! 아야!"
하지만 책은 아니었는지 데이비는 책장에서 쏟아지는 책에 머리를 계속 부딪쳤다. 꽤 웃기는 광경이었지만 당사자는 필사적이었으니 웃을 수도 없었다.
、、¡uoɯǝๅᴉɥꓒ ʻɹɐǝp ʎW,,
그 목소리는 창밖에서 들려왔다.
폭풍우치는 바다 위에는 길쭉한 암초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는데, 그 위에 깜빡거리는 전기 가로등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는 바다 파리가 많이도 꼬였는데, 다들 빛만을 쫓아온 것 같진 않았다.
가로등에는 밧줄 하나가 걸려 있었는데, 거기 매달린 토끼 주검 하나를 두고 수십 마리가 빙빙 돌며 다투고 있었다. 목소리는 토끼의 입에서 들려왔다.
、、¡noʎ ǝǝs oʇ pooɓ sˌʇI,,
실은 그것을 목소리라 부르는 것도 과감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 소리는 도무지 성대를 통해 나온 것 같지 않았고, 굳이 표현하자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백마스킹 시킨 것 같은 인공적인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괴물이다!"
데이비는 빽하고 소리 질렀다.
"아니, 저건 끼토(Tibbar)야. 내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지?"
"농담이죠?"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끼토가 매달린 가로등의 형태는 저번과 사뭇 달랐다. 이전에는 전형적인 영국식의 그것이었다면, 지금은 차라리 21세기형 현대 가로등처럼 보였다.
"저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난 홀로 내 마음의 소리에 이기죽거렸다.
、、¿ʇɟǝๅ ǝǝs I pᴉꓷ ¡ɥnɯɐN ǝʞᴉๅ sʞooๅ ʎๅๅɐǝɹ ǝH ·ʎɯ ɥO,,
"끼토건 뭐건 저게 우리한테 말을 걸고 있다고요!"
"내가 대화해 보겠네."
"어떻게요? 영어를 하는 생물 같지가 않은데."
"그렇다면 어영(Hsilgne)을 써야지. 어렵지 않네, 물구나무를 서거나, 그냥 머리를 뒤집으면 돼. 쉬운 쪽을 고르게."
데이비는 뭐라 하려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팔을 바닥에 붙이고 물구나무섰다. 세상이 한 바퀴 돌아가면서 끼토인 줄 알았던 그것이 토끼로 변했다.
"이제 내 말이 좀 들리겠군. 멋지게 세상을 뒤집었어. 콜롬버스도 달걀을 잘 뒤집었지. 사실 그치는 내 주방장이야, 나는 반숙이 좋은데 그는 늘 노른자까지 익히더라고."
토끼는 쫑알쫑알 혼자 잘도 말했다. 나는 팔로 세상을 힘겹게 받치며 말했다.
"여기는, 칸트의 무덤이야. 나는 전에 여기 와본 적이 있어."
그러자 토끼는 기분 나쁜 것처럼 쏘았다.
"제발 머저리 같은 말 좀 하지 마. 여기가 어디고, 네가 누군들 뭔 상관이겠어. 네가 있건 없건 이곳은 이곳이야. 사실 이름을 정해줄 필요조차 없지!"
"그러는 자네는 누군가?"
"나는 베니토 무솔리니야."
그 당돌한 선언에 나는 곧장 답하지 못했다. 한참 뜸들인 것치고 내 대답은 간결했다.
"뭐?"
"이런, 아직 그가 태어나지 않았나 보지? 나는 늘 시간을 헷갈려서 농담을 망쳐. 시계를 거꾸로 봐서 그런가 봐. 역사는 늘 반복된다고들 말하잖아. 근데 그게 정말 말 그대로라는 게 웃긴데, 누구도 이 농담을 이해하질 못하더라고."
토끼는 아래로 대롱대롱 흔들렸다. 그 모습은 꼭 매달려서 들썩거리며 웃는 것 같았다.
"시간은 선형적이라는 말 알아? 시간은 꼭 앞으로만 달리는 마라토너 같아서,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달린다는 거야. 실은 그 말을 사실이 아니야. 시간을 움직이는 건, 아주 작고 무수히 많은 시간 요정들이거든. 걔네가 분자나 원자를 밀어서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거야. 굉장히 노고가 드는 일이지. 시간 요정들은 언제나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해서 세상은 늘 조금씩 뜨거워지는 거야. 그런데 사람들은 요정들에게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뻔뻔하게 시간이 혼자서 달리는 것처럼 말하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너무 서두르지 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시간 요정들은 아주 성실해서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어. 하지만 요정 일이란 게 늘 완벽할 수는 없으니, 아주 작은 실수 정도는 할 수도 있지만 결코 티가 나지 않지. 하지만 이 우주는 알다시피 아주 넓잖아. 그래서 어떤 나쁜 마법사가 우리가 사는 지구를 어항 속에 집어넣고, 지구의 시간 요정들을 속여서 모두 일을 거꾸로 하게 만들면 어떻게 될까? 모든 분자와 원자가 거꾸로 움직이고, 사라진 생명이 돌아오고, 태어난 아이마저 부모의 뱃속으로 돌아간다면 말이야. 그건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토끼가 말하고 있는 개념이 무엇인지 곧장 눈치챘다. 하지만 그 내용은 내가 아는 바와 너무 달라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한참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고 입을 열려고 하니, 토끼는 급하게 내 말을 틀어막았다.
"네가 하는 말은 설마...."
"이크, 네가 너무 뜸들이니까 녀석이 와버렸잖아."
"녀석, 누구?"
가로등에 매달린 주검의 목이 우두둑 뜯어지며 돌아갔다. 나는 그 시선이 끝나는 방향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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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em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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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거꾸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찌르르, 찌르르, 맴맴.
나는 창밖을 쳐다봤다. 구름인 줄만 알았던 하늘의 검은 덩어리들이 포개어져, 마치 사람의 모습처럼 보였다. 수평선 위에 광활한 모습의 그것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이름을 난 알았다.
"왜 잊고 있었지? 우리는 공격받고 있어!"
구름인줄 알았던 그것이 다가오자 고막이 찢어질 것처럼 거센 날갯짓 소리를 내었는데, 나는 그것이 셀 수 없이 거대한 매미 떼라는 걸 눈치챘다. 거꾸로 매달린 끼토는 매미 떼에 삼켜져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도망쳐!"
"어디로요!"
데이비는 울먹이며 외쳤다. 나는 주변을 급하게 둘러봤다. 그리고 선수 방향, 검은 개미 바다를 넘어 가까운 곳에 섬 하나를 발견하고 그를 돌아봤다.
"헤엄칠 줄은 아나?"
"설마...."
"지금이 그 설마야!"
나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옷과 머리카락 사이로 수천 마리의 개미가 파고들어 살을 깨물었다. 나는 급하게 헤엄쳐 앞으로 나아갔다.
살갗에 사람 손톱자국 같은 상처가 그려지더니 핏물이 흥건히 묻어 나왔다.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옷을 벗어 던지고 개미 떼를 모두 털어냈다.
뒤돌아보니 데이비가 어설프게 헤엄치며 섬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 바다로 들어가 그의 손의 잡고 끌고 나왔다.
"진짜... 싫다...."
데이비는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호레이쇼라고 하니 바다와 친숙하지 않나?"
"그러면 모든 피터는 어부입니까?"
그가 노려보며 따지는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모래사장을 둘러보며 여기가 어딘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이곳도 전에 와본 적이 있는 해변이었다. 하얀 모래 위를 걷던 나는 바다에 쓸려와 개미 떼에 뒤덮인 토끼의 머리를 발견했다.
"있잖아, 나는 늘 여기서 누가 죽었는지 궁금했어."
토끼가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무덤, 플라톤의 무덤, 칸트의 무덤, 여러 이름을 붙여도 어울리지 않더라고.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그것은 완전히 파먹혀 이제는 개미 뭉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건 개미 기어가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네 무덤이야. 사르데냐 섬."
그리고 적막만이 흘렀다.
꿈은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