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71화 (71/232)

§71. 한여름 밤의 꿈

<제1막>

시칠리아 섬. 하늘은 어둡다.

임간의 놓인 관, 그 위에 필레몬이 누워 있다.

에드워드, 그 옆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다.

필레몬 : 나는 여기 관 위에 누워 있다.

여기에는 어떤 흥미로운 사연도, 부조리한 실책도 없다.

나는 온전히 내 의지로 관에 누워 땅에 묻히고자 한다.

생자의 몸으로 사자의 흉내를 내니,

나는 살았는가, 아니면 죽었는가?

아! 돌이켜보면 참 힘겨운 삶이었다.

나는 학문에도 통달하여 영국 최고 명문을 나왔으며,

군인으로 여왕의 훈장을 받기도 했고,

탐험가로도 명성을 쌓을 만큼 쌓았다.

대학에는 내 지식을 엿들으려 하는 학생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나 자신도 모르는 것을 적은 책은 또 불티나게 팔리네.

허나,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생자의 몸으로 누릴 것이란 모두 누린 줄 알았건만,

저승에 가져갈 것을 생각해보니 단 하나도 없구나.

내 인생은 그저 이력서 같구나.

그것을 관 위에서야 깨달았다.

별이 보인다. 시간이 다했다. 나는 가야 한다.

나는 인생의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하고 지금 여기서,

죽어간다, 죽는다, 죽었다....

(필레몬, 눈을 감다.)

에드워드 : (관 뚜껑을 닫으며) 죽었나? 정말로 죽었겠지?

이것은 꿈인가? 아니, 분명 현실이다.

나의 오랜 숙적이 이토록 허무하게 사하니,

아! 시간! 두렵구나! 하지만 그것도 지금은 내 편이지....

자, 이제 때가 되었다!

천사들이여, 노래하라, 내가 개선하겠다!

어린 천사들 : (딴청 하며 웃는다.)

에드워드 : 뭣들 하는 것이냐. 막을 내려라.

내가 승리했단 말이다.

(태양이 떠오른다. 붉은 광선이 하늘의 지평을 덮는다.)

에드워드 : (놀라며) 그럴 리 없습니다!

여기는 꿈 너머에 존재하는 세상,

지구의 천체인 태양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하, 이제 알겠다. 실로 너다운 위장이다.

태양을 끄는 것은 예로부터 신뿐이라 정해졌건만,

신의 흉내를 내는 너는 파에톤이 고작이다.

남의 꿈에까지 행패를 부리는 네 녀석은,

지금 당장 꿈의 주인인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천둥소리가 울려 퍼진다.)

태양 : 누가 나에게 명하는가.

이곳은 나의 안뜰인데,

내가 다니지 못할 길이 어딨는가.

에드워드 : (혼잣말로) 저놈은 꿈이 황도에 놓인 줄 아나 봅니다.

이 선생께서 우둔한 네게 한 가지 가르침을 주마.

여기 드림랜드는 무無와 유有, 정신과 현실, 벡터와 공간 사이에

놓인 공간이며, 위대한 쌍둥이가 주인으로 거하신 곳이다.

네가 얼마나 신성을 수양하였다 한들, 네깟 것이

여기서 주인 대접을 받기나 하겠느냐.

그러니 썩 꺼지거나 모습을 드러내라, 제럴드의 자식놈아!

어린 천사들 : 찬란한 태양이 떠오른다.

이 하늘의 광채를 보고 어찌 의심하리오.

별조차 겁먹어 어둠 속에 숨었네.

제럴드의 자식을 경배하라.

그 이름은 케이시.

이곳은 그의 낡은 뜰*

(*Old Court)

시계추가 멈췄다.

그의 승리가 확실해졌다.

지혜로운 자는 따를 것이고,

우둔한 자는 멀리할 것이다.

두려워하라. 두려워하라.

인간의 시간이 끝나는 것을 두려워하라.

(케이시 등장한다. 태양이 움직여 그의 머리 뒤의 헤일로가 된다.

관 뚜껑이 저절로 옆으로 비킨다. 안에서 필레몬이 상반신만 일으킨다.)

필레몬 : 무엇이 나의 잠을 이렇게 방해하는가.

눈이 부셔서 도저히 잠들 수가 없구나.

이곳에 천체라곤 쌍둥이 흉성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반가운 태양도 있었구나. 그가 내게 일어나라 하니,

그 손을 잡지 않을 재간이 없구나.

보라, 내 몸을 억죄고 갉아 먹던 개미 떼는,

모두 한 줌의 타르 덩어리로 녹아 버렸구나.

실로 은혜로운 태양이다.

아니, 잠깐. 저게 정말 태양일까?

에드워드 : 보라, 우스꽝스럽다.

여기 YLTH의 종놈 셋이 모였구나.

주인 없는 자리에 노예만 세 놈이니,

누가 제일 난 놈인지 다투는 꼴이구나.

(케이시를 가리키며) 그중에 제일 우스운 놈은 이놈입니다.

이자는 지금도 속으로 셋 중에 자기가 제일 난 놈이라 생각할 겁니다.

내가 그 배배꼬인 성격을 잘 알지요.

성정이 얼마나 오만한지,

사람 위에 사람 없다고 했건만,

이자는 솔로몬 왕 머리 꼭대기 앉아 있습니다.

케이시 : 나는 눈이 없어도 해가 밝은 줄 안다.

나는 귀가 없어도 암탉이 언제 우는지 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도 이처럼 참은 참이로다.

진리를 네 감각 아래 두려 하지 마라.

나처럼 지혜로운 자는 세상에 또 없다.

아담, 하와, 오라. 내가 너희를 구할지니.

필레몬 : (두려워하며) 혼란스럽다.

한밤중에 깨어나니, 내 관 위에서 신들이 설전하고 있다.

목소리만 들어도 오싹하고, 모습만 봐도 경건해지네.

차라리 도망쳐 버릴까? 하지만 꿈을 버리고

도망친 주인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모른 척하고 다가가서 합석할까? 디오니소스가

올림푸스에서 헤스티아의 자리를 몰래 꿰찼다 들었다.

나도 그렇게 해버릴까. 하지만 디오니스소스도 신이다.

나같이 신 아닌 자가 저 자리에 끼거든 바로 티가 날 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나는 정말 어찌해야 할까.

합창 : 아침이 온다, 동이 튼다.

이 밤이 가면, 전부 봄꽃처럼 사라질 꿈.

음풍이 분다. 사시나무가 벌벌 떨린다.

푸른 섬이 갈색으로 물든다.

황망하다. 벌써 가을이 온 건가?

<제2막>

사르데냐 섬.

낙엽이 떨어져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다.

에드워드 : 더는 됐다. 우리 둘이 얘기해서야 끝이 나지 않는다.

(필레몬을 가리키며) 차라리 여기 있는 인간에게 묻도록 하자.

그는 드림랜드의 손님이고, 네 뜰의 손님이니,

누구보다 공정한 선택을 내릴 테지.

케이시 : 좋다. 징을 울려라. 에우로스여, 세차게 날갯짓하라.

감각의 폭풍은 몰아치고, 밤의 여인은 치마폭을 흔들어라.

필레몬 :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귀가 들리지 않는다.

말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으니, 나는 내 안에 갇힌 죄수다.

아, 괴롭구나!

하지만 뭐지? 내게도 불빛이 남아 있구나.

저 등불을 따라가면 어디에 도착할 수 있을까.

두렵지만 나아가지 않는 수가 없구나.

(성채에 도착한 필레몬. 케이시와 어린 천사들이 뒤따른다.)

필레몬 : 어둠 속 한줄기 불빛을 따라왔더니 낯선 곳에 도착했다.

여기도 사르데냐 섬이란 말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이 성채가 어딘지 알고 있다.

다름 아닌 런던 한복판의 내가 수업하는 올드코트 대학이 아닌가.

세상이 어둠에 빠졌건만, 이곳은 유난히 밝구나.

신의 뜻인가, 아니면 과학의 소치인가.

시민1 : (필레몬을 보고 놀라며) 아, 당신, 당신도 무사했군요.

다행입니다. 이런 세상에선 사람 보기가 힘들지요.

필레몬 : 이런 세상이라니, 어떤 세상을 말하는가?

시민 1 : 종말이요! 심판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천지가 개벽하고, 바다가 요동치며, 우레가 넘실거리고,

하늘에선 불비가, 땅에서는 황충이, 물에는 파도가 떨어집니다.

이웃이 이웃을 덮치고, 애욕과 광기에 굴복한 시민들이 미쳐 돌아다닙니다.

본 적 없는 괴이한 이매망량은 또 어떻고요.

필레몬 : 군인들이 있지 않은가?

시민 2 : 그들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지요.

군인들은 상황이 여의치 않자 시민들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남은 병사들도 런던 탑이나 버킹엄 궁전으로 가서,

여왕폐하와 로열 패밀리를 지키기에나 급급했고요.

그런데 어찌 된 줄 아십니까?

성과 요새가 통째로 지하에 떨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없습니다.

런던에 서 있을 땅이라곤 여기 한 곳밖에 없습니다.

필레몬 : 어떻게 여기는 무사하지?

시민 3 : 실은 여기도 처음부터 안전하진 않았습니다.

세 칼리지 중 한 곳이 배신하여 모두 죽을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조차 학장님의 안배인 줄 나중에 알았습니다.

인류 최후의 배신자를 솎아내고 나니, 남은 두 칼리지가 이토록 평화로워졌습니다.

생존자를 학장님께서 돌보시니, 여기야말로 노아의 방주입니다.

필레몬 : 아니다, 이것이 현실일 리가 없다.

내가 지금껏 해온 노력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케이시 : 지혜로운 자여, 사물을 보라.

이것이 진정 찾아올 미래이다.

종말 속에 인류를 구할 구원자는 나 이외에 없다.

그대 이것을 본 이상, 내게 충성하는 수밖에 없겠지....

합창 : 두려워라, 섬뜩해라.

진노의 날이 온다, 심판의 날이 온다.

오색찬란한 하늘, 밤하늘의 무지개.

구원일까, 희망일까?

세상에 빛은 초롱아귀 불빛뿐.

빛 앞에는 오직 아가리.

입밖에 맴도는 건 유언,

귓가에 맴도는 건 장송.

할렐루야, 할렐루야.

천사의 음성이 들리네.

하나되고 유일한 빛이여.

아담과 하와를 구할 방주여.

할렐루야, 할렐루야.

경배하고 따르라.

그의 이름은 삼천 가지요,

그중에 으뜸은 뉴턴과 케이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필레몬 :  그만! 그만!

(노래가 멈추고 정적이 흐른다. 무대가 어두워지고, 조명 아래 필레몬만 남는다.)

<제3막>

어둠 속에 홀로 남아 웅크린 필레몬.

그 옆에 에드워드가 다가온다.

에드워드 : 괴로우십니까? 힘드십니까?

순진하신 분, 어찌 보이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습니까.

여긴 꿈속입니다. 무엇이든 생기고 사라지는 곳이지요.

애초에 지혜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진정 믿습니까?

케이시는 천상 사기꾼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해 인간을 이용할 뿐입니다.

신이라고 하면 듣기에 꽤 달콤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이 세계에 신이란 변변치 않은 것들뿐이지요.

그렇게 그는 벌써 이백 년간 살고 있습니다.

인간보단 악마에 가까운 자이지요.

그러니 저의 말을 들으십시오. 제가 올드코트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케이시의 흉계를 저지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당신도 속고 있던 처지 아닙니까. 어떤 의리로건 희생하며,

저를 막을 이유가 일절 없단 말입니다.

부디 현명하게 생각하시죠.

필레몬 : 그렇다, 내게는 그를 도울 이유가 없다.

나는 내가 학장 대리라 생각했지마는,

그건 전부 케이시에 의해 속은 결과일 뿐이야.

에드워드 : (손뼉 치며) 바로 그겁니다!

저자는 자신이 거하기만 하면 당신이 넘어올 거라 굳게

믿고 있는 눈치인데, 그 수작에 당해주지 마시죠.

저를 믿고 맡기시면 됩니다.

제가 어디 당신에게 해 끼칠 사람입니까?

저만큼 당신을 잘 아는 사람도 어디 없습니다.

친부모, 친형제보다도 절 가깝게 여기면 됩니다.

(필레몬, 괴로워한다. 그때, 어둠 속에서 케이시가 나타난다.)

케이시 : 이것은 약속과 다르다.

너야말로 거짓만을 말하는구나.

승부는 무효다. 원점으로 되돌려라.

에드워드 : 악마도 부르면 나온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구나.

지금은 내 차례건만, 노심초사 엿보다가 승부가 기우니

나타나서 무마를 주장하는 꼴이 비루하기도 하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가 실제로는

세상에서 가장 겁많은 자라니 딱하기도 하여라.

케이시 : 공정하지 않다.

에드워드 : 세상만사에 공정한 경쟁이 어디 있을까.

체스를 둔다 해도 두는 사람의 지능과 경력이 다르고,

골프를 쳐도 바람이 부는 방향이 시시각각 다르다.

개체는 모두 격차를 가지고 태어나며,

지나간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백년을 살고도 그 간단한 이치를 알지 못하니,

천하에 우둔한 자가 바로 너다.

필레몬 :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만, 그만 다투어라!

내 비좁은 뇌가 터져나갈 듯이 괴롭다.

더는 사악한 신언神言으로 나를 망령들게 하지 마라!

사라져라, 잡귀야! 나는 너희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다!

에드워드 : 정신이 나갔습니까?

앞서 말했지만 케이시의 흉계를 막지 않고는 도시가, 세상이 위험합니다.

필레몬 : 그것은 내가 막겠다.

너는 관여하지 마라.

케이시 : 나는 인류의 방주다.

그 모든 것을 보고도 의심하느냐?

필레몬 : 그것이야말로 너희 신의 오만이다.

인간은 스스로 완전하며 누구에게 도움받을 필요도 없다.

너희야말로 내 이름을 두려워하라.

나의 이름은 필레몬 허버트.

별의 어둠을 몰아낸 만물의 영장이며,

인간 이성의 시대에 낡은 신이 나설 자리는 없다.

나는 나로서 완전하다!

(조명이 켜지고, 무대 위에 빛이 생긴다.)

케이시 : 네 하늘이 별로 가득 찬 뒤에 너는 오늘을 후회하리라.

(케이시, 사라진다.)

에드워드 : 밤이 끝나고, 우린 곧 다시 만날 겁니다.

(에드워드, 사라진다.)

필레몬 : 고요하다. 영원한 허무가 찾아왔다.

아니, 마냥 그렇지는 않구나. 누군가 날 깨운다. 가봐야겠다.

(필레몬, 잠에서 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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