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데자뷔 / 푸른 장기
시간이 다 되었다.
내 영혼은 지중해의 사르데냐 섬을 떠나 상승했다. 그 기세는 구름을 지나고도 잦아들 기색이 없어, 이윽고 한 번도 올라본 적 없는 대기권 위까지 상승을 계속했다. 푸른 지중해의 수면과 구두 모양 이탈리아 본토가 정교한 미니어처처럼 느껴질 무렵, 구형 지구가 서서히 순환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저 유명한 철가면이 갇혀 있던 해안의 이프 성을 지나, 불빛이 반짝이는 12월의 리옹 대성당을 지나, 에펠탑에서 추락하는 인부의 절망스러운 얼굴들을 지나, 적수를 모르던 무적함대가 잠들어 있는 도버 해협을 지나, 시속 삼십만 마일의 속도로 런던의 작은 대학의 중세 석조 탑에 도착했다.
아일랜드 성인의 탑의 학장실에 도착한 나는 아주 노쇠하고 볼품없는 노인의 육신에 이르러 안주했다. 마른 입술이 몇 번 들썩이며 목을 축이고자 했다. 현실과 정신을 오간 모든 대장정이 끝난 순간이었다.
보다 쉽게 말해서, 잠에서 깨었다.
"앗, 이제 정신이 드세요?"
눈을 뜬 내 눈앞에 황급히 달려오는 금발 소녀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앨리스 리들, 그녀였다.
"시간, 시간이...."
나는 몇 번 말하려 했으나 목이 타서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앨리스는 날 내버려두고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잠시 후, 작은 물주전자를 가져와 내 앞에 내려놨다.
"마셔요!"
그보다는 더 똑똑한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의를 받는 처지에 뭐라 군소리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주둥이에 입을 대서 목을 축였다.
"좀 살겠네."
"뭘요."
"그래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나는 여전히 내가 꿈속을 헤매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시계의 시침은 고작 숫자 3과 4 사이에 머물러 있건만, 창밖은 시꺼먼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어... 일단 제가 깨어나고 열 시간은 더 주무셨죠."
"뭐?"
"제가 잠들어 있던 시간까지 생각하면 열 세 네 시간은 족히 더 주무셨을 거예요."
그제야 어찌 된 것인지 알았다. 시계의 숫자는 오후가 아닌 오전이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와악, 괜찮으세요?"
놀란 앨리스가 허겁지거 내 옆에 다가와 부축했다. 그제야 나는 꿈이 끝났다는 실감이 돌았다. 상실은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하게 했다.
"어떻게 된 거지? 가슴 쪽이 아파."
"아... 그게 말이죠...."
내 질문에 앨리스는 내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내리고 살짝 찢어진 셔츠 사이로 긴 손톱자국을 발견했다. 어찌나 깊게 파였는지 핏물이 옷에 묻어 있었다.
"별수 없었어요. 또 뛰어내리시려 했는걸요."
"몸을 잡는 것만으로 상처가 났다고?"
"겸사겸사 상처를 내면 혹시 깨지 않을까 해서요."
"그래, 나쁘지 않은 시도였어. 인정하지."
그러고 보면, 꿈속에서 섬에 상륙하려 할 때, 나는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려 했다. 그때 느껴진 가슴 통증의 정체가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전부 꿈이었나?"
황망한 질문이었다.
"그래, 긴 꿈이었어."
"정말로 꿈일까요?"
앨리스의 의미심장한 질문에, 나는 이번에야말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비는?"
내 질문에 앨리스는 방 한쪽을 돌아봤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눈으로 쫓았다.
바닥에는 데이비가 쓰러져 있었는데, 그는 눈을 부릅뜬 채로 입에 거품 같은 것을 물고 있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입술을 달싹거렸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나지막하게 혼잣말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오뉴월의 꿈은 늦어도 칠월에는 끝나고 말아. 부모 없는 아이는 친가와 외가 사이 사 킬로미터 보도블록 사이의 방황, 떨어지는 별은 검은 돌덩이. 서른이 될 때는 죽을 줄 알아서 열의 아이는 울고 말고, 전신주 아래에서 옥상에서 투신하길 바라지만, 그럼에도 교살을 원해."
나는 그의 눈을 빛에 비춰보았다. 초점은 잡히지 않았다.
"당했군. 완전히 정신이 나갔어."
"어쩌다가요? 꿈속에서 말인가요?"
나는 앨리스를 돌아봤다.
"저도 교수님과 같은 꿈속에 있었어요. 기억하세요?"
"아니."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다시 한 번 기억하려 애썼다. 하지만 꿈은 깨고 나면 휘발하고 마는 것이라, 결국 무엇하나 떠올릴 수 없었다.
"전혀."
"저는 방금 기억났어요. 아마도 이쯤에...."
앨리스는 다짜고짜 데이비의 주머니를 뒤지더니, 그 안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접어놓은 모양새 때문에 쓰레기처럼 보였지만, 어쩐지 나는 그것이 쪽지라고 바로 알아봤다.
현실 위에 어렴풋한 기억이 막처럼 씌워져 있었다.
"그건 기억이 나. 토끼풀십자회의 의장이 위급한 순간에 펼쳐 보라고 준 쪽지라고 했지."
"내용도 기억하시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꿈속에서는 방해를 받아서 보지 못했네."
"그러면 반드시 보셔야 해요."
그녀는 그리 말하고는 다짜고짜 쪽지를 펼쳐 내게 들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에 들린 쪽지를 조심스럽게 받아서 내용을 살폈다. 우려한 바와 달리, 글자가 갑자기 지네로 바뀌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올드코트 대학은 지금 공격받고 있음. 지난 2년 동안 학장 대리는 3번 바뀌었고, 그때마다 모든 관계자의 기억이 조작당했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스스로 공격받는다는 자각이 생겼다면 살 가능성은 없으니 자살하길 바람.
이하, 올드코트 대학을 공격할 수 있는 조직 명단(내가 파악하지 못한 조직이 있을 수도 있음. 다만, 그 경우 나도 죽을 것임.)
-학장(교정에서 이름 부르거나 쓰지 말 것. 생각도 최소한으로 할 것.)
-제임스 타운 칼리지
-에린의 십이사도 칼리지
-왕립 학회
-왕립 지리 학회(위랑 아래랑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음.)
-토지 측량국
-런던 소방대
-범죄 수사국
-보편 사무국
-아서 프랑크 백작
이 쪽지를 실수로 열어 봤다면 곧장 가지고 와서 사과할 것(한 번은 봐주겠음!)
ps. 혹시 머리를 감자처럼 자른 뇌 없는 사람은 나만 보이는 거야? 미치겠네. 다들 모른 척하는 거지?
────────────
내가 쪽지를 읽고 있자니 앨리스가 대뜸 말했다.
"이 쪽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말이지?"
"제가 대학에 들어오고 2년이 되었지만, 한 번도 학장 대리가 바뀌었던 적이 없어요. 늘 교수님이었죠. 하지만 저희가 처음 만났던 건, 작년 여름에 늑대인간 사건으로 한참 떠들썩하던 때예요."
"잘도 기억하는군."
그녀는 배시시 웃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부임한 건 작년 11월이야. 학장 대리가 된 지 반년이 채 되질 않았지."
"저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그녀의 대답에 잠깐 당황했다가, 곧 갈피를 잡고 정리했다.
"기억이 바뀌었군."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겨울 기억하세요?"
"그래, 칼라스 교수가 보이지 않는 괴물로 학생들의 뇌를 빼내던 사건 말이네."
"그때 우린 멋진 콤비였죠."
그녀는 멋진 모험을 마친 달타냥처럼 의기양양하게 굴었다. 내 기억에 그 여정은 피로 물든 끔찍한 것이었는데,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활극처럼 개변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누구의 소행인지 실로 두려운 기억 조작 능력이었다.
"이제 알겠군. 칼라스 교수가 원래 학장 대리였을 거야. 일개 교수 신분으로 그 모든 사건의 내막에 있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
"맞아요. 분명 그래요. 그리고 칼라스 교수님을 죽인 교수님에게 그 대역을 맡긴 거겠죠."
앨리스는 모든 정황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런 이상 현상에서 그녀의 후각은 도저히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정황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어느 시점에, 어떤 식으로 기억이 바뀐 것인지도 알아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기억에서 어떤 부조리도 느낄 수 없었다. 이 정도로 증거가 갖춰지고, 두 명이 같은 결론을 내렸음에도 나는 여전히 내가 학장 대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었다.
"이 모순들을 발견하고도, 나는 여전히 내가 학장 대리처럼 느껴지네. 나뿐만 아니라 대학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 설마 이런 일이 가능한 자가 있을 줄은."
"교수님이 말하는 사람은...."
나는 말없이 쪽지 위의 한 단어를 손가락으로 집었다.
학장.
"그 말곤 없겠지."
진실이 드러나며, 적이 명확해졌다.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그러면 이번 사건도요?"
"아니, 그건 아니야."
도중에 꿈에서 쫓겨난 앨리스는 이번 사건의 내막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올드코트 외부 세력으로부터 공격받았네."
그녀는 쪽지에 나열된 이름을 바라봤다.
"이 중에 하나인가요?"
"그것까지는 모르겠네. 올드코트가 이렇게 많은 적을 가졌을 줄도 몰랐지. 하지만 주모자의 이름과 목표는 알아. 이름은 에드워드, 성별은 남자, 검은 눈과 머리카락을 가졌고, 자네와 비슷한 나이에, 또 자네처럼 옥스퍼드 억양이 아주 강하네."
앨리스는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저 사투리 쓰나요?"
"몰랐나?"
그녀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 중 가장 격한 반응이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지. 여하튼,"
"중요하지 않다뇨. 중요하지 않다뇨!"
"좋은 거야! 나는 심지어 돈 주고 배웠다고! 그러니까 일단 들어!"
나는 애써 그녀를 달래고 말을 이었다.
"에드워드는 날 통해 올드코트 안에 들어오려 했네. 들어온다는 것이 어떤 걸 의미하고, 그걸 허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 하지만 확실한 건, 에드워드는 나와 그를 적으로 여기고 있네. 올드코트에 들어오려 한 것도 그 연장선이겠지."
학장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해, 나는 쪽지 위에 손을 올린 채로 말했다.
"어째서 교수님을 적으로 여길까요?"
"그것까진 모르겠네."
여러 가능성은 바로 떠올랐다. 내가 올드코트 학장 대리이기 때문에, 혹은 학장의 하수인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어쩌면 프랑크 학술회가 탄로 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석연치 않았다.
"확실한 건, 우리가 공격받고 있고, 그 사실을 예측한 자가 이 칼리지 안에 있다는 거지."
"토끼풀십자회 의장 말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적막이 흘렀다.
"자네를 너무 늦은 시간까지 묶어놨군. 돌아가서 쉬게. 내게서 떨어져 있으면 에드워드에게 공격받진 않을 거야."
"교수님은 어쩌시고요?"
"나는 책임을 져야지."
우리는 동시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데이비를 쳐다봤다.
───덜그럭 덜그럭.
나는 새벽이 밝자마자 마차를 타고 데이비를 왕립 베스렘 병원으로 호송했다.
웨스트 노우드 공동묘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런던 남부의 한적한 정신병원은 주로 군인의 치료를 도맡는 공기관이었다. 그 특이한 배경 때문인지 이곳에선 괴담이 끊이는 일이 없었고, 그중에 절반 정도는 불운하게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런 각종 소문 덕분에 이 병원은 아주 조용하곤 했다. 십수 년 전, 내가 이곳에서 치료받았을 때나, 얼마 전에 J.D라는 가명으로 학생을 입원시킬 때도 불편함을 겪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병원은 내 마지막 기억과 아주 달랐다.
마차에서 데이비를 부축하고 내리기가 무섭게 또 다른 인파가 밀려와 우리를 치고 지나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신경질적이었고,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작은 자극에도 폭발할 것 같은 화약고 특유의 아슬아슬한 모습에 나는 어떤 항의도 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실내는 더욱 번잡하였다. 군복을 입은 군인부터 양복을 입은 공무원까지, 로비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그들 중 절반은 넋이 나가 입에서 침을 흘리거나, 아니면 당장 죽을 것처럼 우울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몰려다니고 있었다.
이 좀비들을 끌고 다니는 건, 피로에 절은 의사와 경비원들이었다. 그 좀비 행렬이 지나간 복도에는 곧 간호사들이 뛰어다녔다. 그녀들은 제 옷을 더럽히는 게 익숙한지, 피와 분비물이 묻은 옷가지와 이불포를 한아름 안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한 환자들은 세상에서 소외되어 구석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간헐적으로 비명을 질러 고통을 호소하거나, 소리 내어 울기도 했지만 누구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지난 전쟁 이래로 이렇게 많은 환자가 왕립 베스렘 병원에 들어찬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시내에서 떨어진 이곳은 런던 대화재의 불길을 피해 갔지만, 그 여파를 오롯이 감당하고 있었다.
"잠시, 잠깐, 수속을 하고 싶은데."
로비에 의사와 간호사가 지나갈 때마다, 나는 그들을 멈춰 세우려고 애썼다. 하지만 바쁜 그들은 누구도 멈추거나 돌아보지 않았다.
홀로 온전한 정신을 가진 나는 여기선 유령이었다.
결국, 나는 기다리다 못해 수속을 도와줄 의사를 찾아 로비를 지나서, 그대로 병실 복도 쪽으로 들어갔다.
전에도 몇 번 지난 적이 있었지만, 이 병원의 복도는 살풍경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우선은 구조부터 그랬다. 모든 복도는 특징이 없었고, 짧은 구간마다 나누어져 반복했다. 좌우로 늘어진 병실 중 어느 곳도 구분할 수 있는 숫자나 기호가 적혀 있지 않았다.
거기다 풍경은 또 어떤가. 그 흔한 창문 하나 나 있지 않은 이곳에는 오직 흐릿한 전구 불빛과 좁은 환풍구를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햇빛만이 전부였다. 그 와중에 모든 것이 희게 도배되어 나는 걸으면서도 원근감을 잃었다.
이 건물은 정교하게 설계된 감옥이었다. 폐쇄적인 구조는 오로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환자들이 길을 잃게 하려고 만들어져 있었다. 지금도 건물 어딘가엔 탈출을 시도했다가 길을 잃은 환자들이 의사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광경을 상상하고 있자니, 정신이 온전한 나마저 길을 잃을 것 같아 나는 몇 번이고 되돌아갈까 망설였다. 그런 와중이었다.
"누구십니까?"
뒤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병실 안으로부터 흰 가운 차림의 의사가 스멀스멀 빠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의사의 얼굴을 마주 보고 대답하려다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도무지 같은 종의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실핏줄 터진 각막 위에는 붉은 자위가 반점처럼 퍼져 있었고, 감은지 오래된 눈 아래로는 살가죽이 축 처져 고무처럼 늘어져 있었다. 손은 고원의 나무 잔가지처럼 벌벌 떨렸고, 목소리는 깊은 동굴 안에서 들린 메아리처럼 낮고 멀게 느껴졌다.
의사는 울고 있었다. 적어도 직전까지, 혹은 지금도 그랬다. 고장 난 눈물샘에서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멈췄기를 반복했다.
그는 슬픔이 낳은 기형아였다. 계속 울기만 하는 사람이라면 그 모든 장애가 생기고도 족했다.
"여기는 환자와 의사가 다니는 길입니다. 나가주세요."
나는 의사의 재촉에 겨우 제정신을 차리고 변명처럼 말했다.
"그게 아니라, 환자 입원 수속을 하려고 합니다. 로비는 워낙 바빠서...."
"환자는요?"
"이자입니다. 이름은 호레이쇼 데이비입니다. 그건 그렇고 병실은 남아 있습니까? 아까 보기엔 사람이 아주 많아서 병실이 남아 있을 것 같지가...."
"자리는 만들면 됩니다."
그가 정색하자 목청에서 고장 난 축음기처럼 일그러진 음성이 나왔다.
"환자는 제게 맡기고 돌아가세요."
그리고 기형적인 의사는 내가 들춰 맨 데이비를 강압하듯이 옮겨 받았다. 이 시점에 나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억지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혹시 입원 환자를 면회할 수 있습니까? 제가 치료비를 대고 있는 환자인데."
"이름이 뭐죠?"
"J.D. 올드코트의 J.D. 신원 보장은 필레몬 허버트로 되어 있을 겁니다."
의사는 단언했다.
"지금은 만날 수 없습니다."
"어째서죠?"
"J.D 환자는 지금 뇌수술동에 있습니다. 뇌수술동은 의료 관계자 외에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습니다."
"모든 환자 이름을 외우고 다닙니까?"
내 추궁에 의사는 충혈된 눈으로 날 노려봤다.
"오직 뇌수술동에 들어간 환자만 외우고 다닙니다."
"어째서죠?"
"나오면 바로 알아보기 위해서요. 모든 병원 관계자가 외우고 다닙니다."
그 음울한 목소리에서 깊은 어둠을 보고는 더 캐묻지 못했다.
런던의 음지에는 저마다의 규칙이 있었다. 그것을 지키지 않고 섣불리 다가가면 어떤 참사가 벌어지는지, 나는 많은 사건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러면 하나만 대답해 주시죠. 언제쯤 만날 수 있습니까?"
돌아온 것은 대답이라기보단 탄식이었다.
"뇌수술동에서 돌아온 환자는 개원 이래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제 돌아가 주세요."
마지막 퇴거령이었다.
결국, 나는 무기력하게 병원을 떠났다. 문득 돌아본 낡은 건물 곳곳에는 창백한 비명이 붉은 녹처럼 묻어 있었다. 질척한 공기가 병동 전체를 무겁게 덮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남은 의문은 하나였다.
뇌수술동은 대체 넓지도 않은 건물 부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눈에 보이는 건물이라곤 모두 내가 아는 왕립 베스렘 병원 본 건물뿐이었다.
정신은 본디 장기와 같은 것이다.
푸르고 얇은 피막 위로 미세한 핏줄이 수십 가닥 이어진 장기. 그런 섬세한 기관을 꿰매는 기술을 어디선가 연구하고 있다면... 말해서도, 기억해서도 안 되는 기억을 누군가 억지로 봉합하고 있다면....
그날 밤, 나는 눈꺼풀이 잘려나가는 악몽을 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