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73화 (73/232)

§73. 토끼풀십자회

에드워드의 공격으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고작 서른 시간 남짓 지났을 뿐인데, 정신을 해체하고 기억조차 욕보여진 그날의 공포는 모두 시간에 희석하여 있었던 일인지조차 가물거렸다. 허나,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도 그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만은 어쩐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밤이 끝나고, 우린 곧 다시 만날 겁니다.'

에드워드는 그 자신의 호언과 달리 첫 공격의 실패 이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또다시 공격당할 것을 우려하여 몸을 묶고 잠든 노력도 불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평화가 얼마나 얕은 것인지 알았다.

지구의 음지에서 흘러나온 암운이 서서히 런던 상공에 드리우고 있었다. 폭풍이 온다. 나는 저 깊숙한 폭풍우 구름 심연 속에서 벌어지는 참상에서 더는 눈 돌리고자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런던, 세계 전역에 전례 없이 거센 비바람이 몰아닥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아서가 쓰러지고 난 후에야 나는 진정 그가 어떤 식으로 세상 속에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 다짐한 지금.

나는 여전히 올드코트 대학에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화요일에는 다음 장부터 진행할 테니, 미리 한 번씩 읽어오고. 몇 번이고 강조하지만, 좋은 공부란 스스로 질문을 떠올리는 거야. 읽고도 의문이 없다면 그건 읽은 게 아닌 거지. 다들 의무적으로 질문 하나씩 적어오도록."

나는 지루한 표정의 학생들을 향해 짧은 연설을 토해내곤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케이시 오' 제럴드 학장이 걸어 놓은 세뇌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그러고도 나는 대학에서 수업을 진행하며 학장 대리로서 업무를 충실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처럼 내 처지를 낙관하진 않았다. 이제는 내게도 이곳의 흐름이 보였다.

올드코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다투는 체스판이었다.

가장 큰 아군이라 여겼던 학장은 끝을 알 수 없는 비밀과 힘을 간직한 최대의 위협이었고, 칼리지 안에는 토끼풀십자회라는 정체불명의 집단이, 밖으로는 에드워드를 위시한 여러 적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판 위에 놓인 말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기물이 판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둘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학장의 교묘한 인질극이었다.

그는 내가 통제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올 것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곳곳에 날 묶어두기 위한 장치를 설치했다. 내가 학장 대리가 된 순간부터 멈춘 육혜시계나 졸업식 같은 것이 그랬다.

학장은 칼리지 천 명의 학생의 목숨을 쥐고, 내가 자신의 세력권에서 떠나지 않도록 엄중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더는 무고한 피해자가 희생되는 꼴을 보는 것이 지긋지긋했고, 순순히 그 인질극에 응하기로 했다.

이렇게 첫 번째 이유가 숭고한 만큼, 두 번째 이유는 어느 정도 가감하고 들어주길 바란다.

두 번째 이유는 이랬다.

올드코트는 월급이 꽤 좋다.

일단, 나는 인생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풍족한 시기를 누리고 있었다. 책이 잔뜩 팔렸던 때보다도 그랬다. 사실 계약서를 잘못 쓴 탓에 인세는 거의 정산받지 못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반면, 학생들에게 교재를 파는 부수입은 내 주머니로 바로 들어오는 만큼, 당시보다 더 쏠쏠한 부수입이었다.

부디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두 이유 중 무게 중심은 첫 번째 이유 쪽에 더 몰려 있었다. 내 사명감에 어쩌다 경제적인 이득이 따라온 것이지, 결코 사리사욕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아니, 그리고 생각해 보라!

런던의 절반이 불탄 이 와중에 나 같이 장애가 있는 중년 귀족이 대학을 떠나서 어디서 일하겠는가. 나 하나 잘 살자는 것도 아니고, J.D와 호레이쇼 넬슨의 입원비가 끊기면 또 어찌 되겠는가. 정말, 오늘 아침 도착한 청구서를 봤어야 한다.

이제 내 복잡한 사정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라 믿는다.

여하튼, 나는 여전히 그런 이유로 대학에 남아 내 본분에 충실하고 있었다. 학생들 앞에서 내 서적을 바탕으로 쓰인 이해 안 가는 논문을 읽거나, 무너진 양계장을 다시 세우는 그런 일들 말이다.

고루한 언변으로 학생들의 넋을 빼놓고 복도로 도망치는 일도 엄연히 직무에 속했다. 올드코트의 열정적인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고도 질문이 너무 많았다.

"교수님."

질문을 받지 않겠다고 이보다 더 명확한 의사 표현을 할 수도 없건만, 복도로 나온 날 붙잡은 학생이 있었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나는 무심코 물었다. 그녀는 암갈색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여학생이었는데,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화장품이 발라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내 수업을 듣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작은 보폭으로 내 곁에 다가왔다. 그녀의 머리가 내 가슴 근처에 이르자 머리카락 끝에 걸린 감미로운 향수내가 코에 닿았다.

"기다릴게요."

그리 말하며 그녀는 내 손 위에 곱게 접은 쪽지 한 장을 쥐였다.

나는 지금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얼떨떨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도망치는 여학생 뒷모습을 바라보고 말았다. 그러다가 대기 중에 잔류한 희미한 분 냄새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마법에서 풀린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교수님."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나는 무심코 미간을 좁혔다.

"오늘 수업 중에 말씀하신 것 중에 말입니다."

시간을 너무 끌었다. 이곳이 전쟁터였다면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런 비장한 감상으로 나는 강의실 안에서 쫓아온 학생을 돌아보며 보충 수업을 시작했다.

추후 확인한 쪽지 안에는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쓴 흔적이 역력한 세 단어만이 적혀 있었다.

「4층, 마지막 강의실, 해질 무렵」

시간은 오후 6시 4분 무렵이었다.

건물 밖에서는 고요한 노을빛이 네모진 모양으로 흘러들어와 복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교정에 남은 학생들은 두셋씩 모여 나 같은 외부인은 알지 못할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 쪽지 한 장을 넣은 채로 숫자들을 지나쳤다.

23... 또각 또각 또각. 24... 한적한 복도에 지팡이 끝이 부딪히는 소리가 리듬감 있게 울렸다. 25... 그래, 이제 거의 다 왔다. 그리고, ...26!

층의 마지막 강의실에 도착한 나는 손을 품에 집어넣고, 다른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안에서 어린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를 찾은 줄 아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안쪽에서 옷깃이 스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나는 문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열린 문 너머로는 낮에 봤던 여학생이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품 안에 넣었던 손을 꺼냈다.

여학생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해리스, 멈춰!"

그녀의 신호에 맞춰 강의실 안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급격히 멀어졌다. 나는 옷깃 소리가 들렸던 방향으로 손에 든 권총을 겨눴다.

"눈치가 빨라서 고맙네. 나라고 학생을 쏘는 건 마음 편하지 않아."

문 뒤에 숨어 있다가 졸지에 총구와 눈싸움하게 된 남학생이 얼은 채 뒷걸음질쳤다.

"둘, 셋뿐인가? 생각보다 대접이 박하군. 그래, 조금 더 물러나게. 기왕이면 벽에 등을 붙이는 게 좋겠어."

나는 강의실 안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강의실 중앙에 서서 날 끌어들이려 한 여학생.

서서히 뒷걸음질치다가 이제는 아예 벽에 등을 붙이고 선 체격 좋은 남학생.

그리고 창문 커튼 뒤에 다 보이게 숨은 사람.

그뿐이었다. 실내에는 사람이 더 숨을 곳도 없었다. 나는 복도 쪽을 힐끔 살폈지만, 딱히 외부에도 연계할 만한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상대하면 되는 것은 여기 있는 셋이 전부였다.

내게는 형편 좋은 이야기였다. 실은 여기 셋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초, 총?"

얼핏 들은 바로는 아마 해리스라는 이름의 남학생이 더듬거리며 혼잣말했다.

"권총 좋아하나? 엔필드라네, 군에서 십 년 전에 퇴역한 물건이라 그런지 쉽게 내주더군. 잘 살고 볼 일이지."

실은 저번에 옥스퍼드를 다녀왔을 때부터 호신 화기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구하기가 번거로울 듯하여 늦장을 부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틀 전 사건 이후로 막상 구하려고 해보니 일사천리였다. 후배 장교를 찾아가서 넌지시 운을 띄웠을 뿐인데, 그 자리에서 권총 한 정을 챙겨준 것이었다.

바로 그 다음 날부터 꺼내서 휘두르고 다니는 건 예정에 없었지만 말이다.

"권총?"

목소리는 창문 커튼 쪽에서 들렸다.

커튼 틈새로 손가락과 눈만 내밀어 내 쪽을 엿보는 모습은 짐짓 섬뜩하게 보였다. 볼록 튀어나온 커튼과 그 아래 훤히 보이는 발을 봐선 숨으려는 의도보단 제 모습을 감추겠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가 여자를 만나러 오면서 권총을 들고 옵니까?"

"뭣 모르는 소리. 이것도 경무장이야."

"미인계, 안 통했습니까?"

나는 기가 차서 콧방귀 뀌고 말았다.

"유감이야. 나는 자네가 더 똑똑할 줄 알았는데."

"저도 그렇습니다. 교수님이 이보다 눈치 없길 바랐는데."

커튼 뒤에 숨은 남자는 낮게 깐 목소리로 진중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권총을 커튼 쪽으로 돌렸다.

"자넨 누구지?"

"우리 불쌍한 제독은 무사합니까?"

돌아온 대답은 엉뚱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야말로 교묘하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절묘한 대답인 줄 알았다.

"그래, 이제 알겠군. 자네가 의장이었어."

"축하합니다, 토끼풀십자회(Trifolicrucians)를 찾으셨군요. 부디 일신상에 행운과 평화가 있기를."

커튼이 들썩거리며 안쪽에서 메마른 박수 소리가 들렸다.

"꽃말입니다."

"다시 묻겠네, 자네는 누구지?"

내 질문에 의장은 침묵했다. 그리고 살짝 엇박자라고 느낄 정도로 어색한 침묵 뒤에 말하기 시작했다.

"의장이라 불러주세요."

그는 처음부터 그랬다. 뭐든지 반응이 조금씩 느렸다. 내가 쪽지 안에서 봤던 기민한 지성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서투른 오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것이 내가 경계했던 의장의 진상이란 말인가? 그는 그저 운 좋게 진실을 접한 사회 부적응자에 불과했단 말인가? 내 의문을 뒤로하고 의장은 계속 말했다.

"그럼에도 사람 같은 이름이 필요하겠다면, 굳이 뉴먼(Newman)이라 불러도 됩니다."

"흔한 이름이군. 본명은 아니겠지."

"간결하지만 제게 어울리는 이름 아닙니까. 저는 구 인류보다 성숙한 신 인류(New Man)입니다."

"끔찍할 정도로 오만한 대답이군. 그 전에 자네는 새 사람(New Man)부터 돼야겠어."

내 대답에 커튼 안쪽에서 낮게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였다. 지금까지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던 모습은 어쨌는지, 타인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소리 죽이는 모습은 여태껏 내가 받은 인상과 정반대였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치곤 서툴다고 생각하지 않나? 지금까지 조용히 내 뒤를 쫓다가 이제 와서 서툰 미인계로 제 함정에 빠질 줄이야."

"제 목적은 이미 성공했습니다. 제압에 성공했다면 조금 득을 봤겠지만, 이루지 못했으면 그뿐입니다."

"무슨 뜻이지?"

"거래합시다. 학장 대리님은 말이 통하는 사람 아닙니까?"

의장, 혹은 뉴먼이라 부를 그 남자는 불리한 형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제안했다.

"내가 응할 이유가 있나? 자네들 목숨을 내 손에 쥐여 있다는 걸 잊지 말게."

그는 답하지 않았다.

방금 전처럼 엇박자로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미친 사람처럼 낮은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말았다 할 뿐이었다.

대답이 돌아온 것은 조금 뒤였다.

"아니요, 학장 대리님은 절 잡을 수 없습니다. 절 심문하는 건 물론이고 제 목숨을 빼앗지도 못할 겁니다."

"무슨 뜻이지?"

"제가 아무 준비도 않고 학장 대리님을 여기 불렀다고 생각합니까?"

뉴먼은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어색한 목소리 톤이 유독 두드러졌는데, 나는 그가 일종의 가성을 내고 있다고 확신했다. 능숙하기보다는 차라리 어른 목소리를 흉내 내는 아이 같았다.

"저의 제안은 이렇습니다. 납치한 호레이쇼를 해방하면, 이 자리에서 학장 대리님이 지금 가장 궁금한 질문의 답을 드리겠습니다."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이라고? 그게 뭔지는 알고 거래를 제안하는 건가?"

잠시 후, 커튼 안쪽에서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대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런던 대화재의 진짜 배후."

나는 눈을 부릅떴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저는 탐정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입니다. 서사를 망치는 부조리의 화신입니다. 모든 사건은 제가 어느 시점에 개입하느냐에 따라 진상이 밝혀지는 시기가 달라집니다. 바로 제가 형평성이 어긋난 천재이기 때문입니다."

뉴먼은 딱딱한 어투로 그 모든 말을 읊었다. 평범한 말이라기보단, 희곡의 대화문처럼 어색한 문구였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무슨 말이지?"

"당신이 처음 나타났을 때, 그저 그런 피해자가 하나 더 늘어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진상을 역으로 쫓아보니, 제가 착각한 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칼라스 교수의 대체품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칼라스 교수의 살해자였습니다. 올드코트의 외적이 어쩌다 내부인이 되는 경우는 처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런던의 크고 작은 사건에 하나씩 발을 걸치고 있는 경력은 또 어떤지요."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는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줄곧 내가 우위에 있는 줄 알았지만, 그는 아주 오랫동안 내 뒤를 캐고 있었다. 그리고 나조차 얼마 전에 겨우 알게 된 사실마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얼마나 더 알고 있을지 두려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무심코 앞으로 걷고 있었다. 방 안의 다른 여학생과 남학생이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에 나는 커튼 지척까지 다가갔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어떻게 알아냈지?"

"당신은 앨리스가 맹목적으로 따르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적 없습니까? 그녀는 오랫동안 당신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은 압니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위험하고 무모한 줄을 알면서도 커튼을 들췄다.

"뭐, 뭐야!"

커튼 너머에서는 깡마른 청년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햇빛을 받은 흡혈귀처럼 몸을 벌벌 떨었다.

"그럴 리가."

분명 말하고 있는 것은 그였다. 목소리 역시 의장의 그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말과 사람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바닥에 떨어트릴 지경이었다.

내가 떠올린 것은 영적인 빙의였다. 이제는 그런 것이 없으리란 법도 없으니, 의장이 흑마술을 이용해 이 깡마른 남자의 몸에 씌어 있었다고 가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설명이 되질 않았다.

비밀은 곧 밝혀졌다.

나는 남자가 바닥에 떨어트린 물건을 주워들었다. 그 검은 철제 장치에는 얇은 전선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살짝 열린 창틈 사이로 빠져나가 있었다. 나는 이것이 뭔지 바로 알았다.

"전화기를 만들었군!"

뉴먼 의장은 원시적인 형태의 직결 전화기를 만들어 자신은 멀리 떨어진 채로 이 모든 말을 전하게 한 것이었다. 나조차 전화란 통신국을 통해 연락하는 고정된 것이란 인식이 박혀 있는데, 의장은 그것을 응용해 단거리 휴대전화를 구현한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의장에게서 느꼈던 모든 위화감이 단숨에 설명되었다. 어째서 모든 대화가 뚝뚝 끊어져서 이어졌는지, 대담한 의장이 날 도발하는데 한참 망설였는지, 그 모든 것이 말이다.

의장은 대리인을 내세운 채, 자신만 멀리 떨어져 모든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용의주도한 면모에 치를 떨었다.

[아하. 학장 대리님, 정말 이렇게 유치하게 구시나요. 소설책을 사면 마지막 페이지부터 확인하는 편이시죠? 그래서 즐겁습니까?]

수화기 너머 들리는 음성은 너무 흐릿해서 내용만 간신히 알아들을 수준이었다. 목소리를 통해서 상대의 성별이나 나이, 출신지, 무엇도 가늠할 수 없었다.

"자네는 이 모든 게 장난 같나?"

[설마요.]

차라리 커튼 뒤에 숨어 있던 남자가 더 나았다. 직접 들은 의장의 말투는 한층 더 경박했다.

[우리 회원들을 너무 핍박하지 말아줘요.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힌트를 드릴게요. 사건의 가장 큰 수혜자는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그러면 다음에 또 봐요.]

그것이 끝이었다. 수화기 너머로는 더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수화기선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확인했다. 전선은 바로 아래층 강의실 창문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제 와서 쫓아봐야 이미 달아난 후일 터였다.

결국, 분을 삭이지 못한 나는 수화기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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