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심장을 내놓고 사는 생물
"토끼는 굴을 하나만 파지 않는다."
강의실의 유일한 여학생 진이 말했다.
"의장의 말버릇이에요."
그녀의 입에서 남자 목소리가 나왔다. 조금 더 자세히 보니, 그녀가 아니라 옆에 있는 사무엘이 멋대로 설명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의장의 목소리를 흉내 내던 작은 체구의 청년이었는데, 가성을 사용할 때와 달리 본래 목소리는 남자치고는 얇았다.
"내 말 끊지마."
"누가 설명하건 상관 없잖아."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네가 내 말을 끊었다는 거야."
둘은 낮게 속삭이며 말다툼했다. 나는 그들이 완전히 날 잊기 전에 상기시키고자 대화를 끊었다.
"그건 무슨 암호인가?"
"아니요."
"그보다는 경고에 가깝죠. 우리 토끼풀십자회의 본질이기도 하고요."
이번에도 사무엘은 반성하는 기색 없이 진의 말을 도중에 가로챘다.
진의 또 다른 옆자리에 앉은 해리스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체구에 맞지 않게 어깨를 웅크리고, 이제는 장신구처럼 내 손에 들려 있을 뿐인 권총을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강의실 안에 있는 네 명의 그림자를 바닥에 길게 그렸다. 창밖에서는 지나가는 학생들의 수다 소리가 멀게 들렸다.
"더 자세히."
"의장은 언제라도 우릴 버릴 수 있지만, 그 반대는 할 수 없다는 뜻이죠."
묘하게 말을 돌려하는 청년이었다. 그런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이 적지는 않았지만, 그처럼 아무 은유도 없이 주제를 겉도는 표현을 고르는 사람은 확실히 드물었다.
왠지 모르게 내 주변에는 그런 드문 사람이 많았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로 나뉜다. 자신이 뭘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천치거나, 혹은 사회성이 아주 떨어지는 괴짜 말이다.
사무엘은 괴짜에 속했다. 내가 아는 그 많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과연, 그렇게 된거였군. 어쩐지 순순히 물러가더니만."
내가 혀를 차며 혼잣말하자, 진과 해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왜 그러지?"
"지금 저것만 듣고 알아들었다고요? 진짜로요?"
"의장과 자네들이 수평적인 관계가 아니란 것쯤이야 예측하고 있었어. 그리고 토끼풀십자회는 의장이 회원에게 구속될 필요가 없어야 하니, 단일 조직 형태도 아닐 테지. 그렇다면 점조직이라는 뜻 아닌가."
사무엘은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쟤가 저렇게 말하는데 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의장말고 처음 봤어요."
"쟤라고 하지마. 난 회장이라고."
진은 사무엘의 불평을 무시하며 척척 말했다.
"방금 말씀하신대로 토끼풀십자회는 칼리지 곳곳에 분산된 점조직이예요. 우리 같이 소수 학생이 모인 집회가 몇 개 더 있고, 그 회를 묶는 회의가 있죠."
"회의."
"네, 하지만 정기 소집이나 집회간 교류는 전혀 없죠. 우리 중 누구도 전체 회의의 규모가 어떤지, 누가 구성원인지 알지 못해요. 그 모든 정황을 파악하고 있는 건 오직 한 명뿐이예요. 사실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크게 중요하지도 않고요."
"의장이군."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학생들 놀이로 치부하기엔 너무 거창해졌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놀이가 아니니까요."
"그것이 가장 큰 문제라네."
고작 천 명 남짓한 칼리지 안에 규모조차 가늠할 수 없는 비밀 조직이 점 형태로 흩어져 있다. 그리고 행동력을 가진 이 집단을 이끄는 총수는 학장의 눈속임마저 간파한 천재이다.
심지어 회원 개개인의 역량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곳은 올드코트 대학, 지혜를 빙자하여 인간 역량을 한계까지 끌어내는데 목적을 둔 학술 기관이다.
진은 자조적인 표현을 쓰며, 내가 은연 중에 그들을 인질로서 가치 없게 여기도록 유도했다. 내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영리한 시도였다. 이렇듯 그녀는 어설픈 미인계로 품었던 선입견을 무마할 만큼 인재였다.
집회의 회장을 자처한 사무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회성은 떨어질 지언정, 구조와 원리를 학습해서 주어진 설계도 없이 근거리 전화기를 설계했다고 한다. 그 허풍스러운 말이 전부 참이라면, 그는 공학적으로 재능 있는 발명가임이 분명했다.
과묵한 해리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의 시원스러운 외모와 건장한 신체는 영국 사회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환영받는 것이었다.
또 데이비는 어떤가. 비록 그가 초현실적인 재앙에 휩쓸렸다고 한들, 그는 나조차 풀지 못하는 앨리스의 수수께끼를 척척 풀어낸 인재였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묻지 않으면 안 되네."
나는 이들을 더는 학생 집회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토끼풀십자회의 목적은 뭐지?"
"모토는 해결과 수호입니다."
진은 만면에 긍지를 담아 대답했다.
"의장은 근 몇 년간 런던 전역에 발생하고 있는 이상 현상을 파악하고, 현상들을 해결하여 무고한 시민들을 지키려고 하고 있어요. 역사적으로 올드코트 대학이 맡아왔던 역할이기도 하고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하루이틀로는 쌓을 수 없는 높은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러니 적당히 둘러대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쩐지 그 내용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달랐다.
올드코트 대학은 학장 개인의 인간 양식장에 불과하지 않던가.
"숭고한 기지를 세우는 건 중요하죠. 합리를 쫓으면서도 대의만큼은 잊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인류를 주도하는 대학생으로서 불가사의를 남겨서는 안된다고 봐요. 의장 역시 동의했죠."
사무엘은 다시 난해한 표현을 골라가며 말했다. 두 번째쯤 들으니 이제는 그가 일부러 이런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녀의 말은 명분에 불과하다는 뜻이군."
"그런 셈이죠."
우리는 자연스럽게 해리스를 돌아보게 되었다. 누가 세운 규칙도 아니지만, 대화의 흐름상 그가 자신이 이해한 조직의 방침을 말할 차례가 되었다.
"생존이요."
해리스는 자리에 앉은 이후 처음으로 짧게 한 단어만을 말했다. 모두 이어지는 설명을 기대했지만,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정리하자면, 회원들의 뜻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거군."
"맞아요."
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우리는 뜻을 같이 하려고 모이지 않았으니까요. 처음에는 의장이 주도한 친목회의 느낌이 강했죠. 토끼풀십자회의 본질과, 그 위에 있는 회의는 나중에 알았어요."
그녀의 말은 많은 것을 설명했다.
토끼풀십자회가 가진 기형적인 구조에 대해 이보다 더 모순 없는 설명은 없는 듯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적지 않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것은 한 가지 기이한 전제 때문이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댐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굳이 그 사실을 되집을 필요는 없다. 그녀는 그런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을 저변에 깔고 있었다.
나는 그 괴리를 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내가 지금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자네들은 전에 의장을 만난 적이 있어야 해. 그것도 토끼풀십자회에 속하기 전후부터 말이야. 내 말이 틀렸나?"
"그야 당연하죠?"
진은 오히려 날 이상하게 여기며 대답했다.
"아니, 그건 당연하지 않아. 절대로 그렇지 않지."
나는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비밀을 간직한 뭇 단체가 런던의 뒷골목에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엽록소가 존재하지 않는 저 가혹한 무산소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조직이 유사한 형태로 수렴 진화한 것도 보았다. 내가 익히 보아온 철저한 비밀주의나 페쇄성 같은 것이 바로 그랬다.
거기에 하나 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규칙이 있었다.
소수의 초인을 제외한 조직의 모든 요소는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조직이 생존하기 위해서 조직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의장은 분명 초인이다.
토끼풀십자회라는 조직은 그를 제외하곤 모두 암 종양처럼 비대하고 쓸모 없는 것이다. 반대로 그가 살아있다면 지하실의 이끼처럼 어떤 형태로건 다시 재생할 수 있었다.
"점 형태는 합리적이지. 조직의 은밀성을 유지하는데 특히나 더 도움이 되니까 말이야. 덕분에 나는 자네들을 추궁해도 다른 집회가 어딨는지, 또 누구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네."
진은 서둘러 동의를 표했다.
"맞아요. 우리도 다른 집회가 얼마나 더 있는지 몰라요. 얼마 전까지 호레이쇼 데이비라는 학생이 토끼풀십자회의 회원인줄도 몰랐고요. 의장도 아마 우릴 버림패쯤으로 생각하고 있겠죠."
"실은 그렇지 않네."
말 많던 진과 사무엘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자네들도 진즉에 눈치채지 않았나. 자네들이 아니라도 상관 없어. 그 많은 집회 어디를 통해서도 나는 다른 집회는 아니어도 단 한 명, 토끼풀십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이어질 수 있네만."
심장을 내놓고 사는 생물. 그 표현이 딱 맞았다.
"의장 본인 말이야."
강의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고개 숙인 학생들의 모습은 교사의 훈계를 듣는 학생처럼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크게 다르진 않았다. 오직 해리스만 그 와중에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어느덧 석양은 완전히 지평선을 넘어가 교정에는 가스 가로등의 은은한 백색광이 비추었다.
"그리고 자네는 스스로 인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할 생각인가 본데, 실은 그렇지 않네. 아주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지."
내 말에 학생들이 의아한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토끼풀십자회는 지금까지 잘해왔네. 반년간 나는 그 실체조차 확인하지 못했지. 그런데 의장은 오랜 은둔을 관두고 나와 접선했지.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제야 진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이를 물었다.
애초에 의장은 데이비를 구하기 위해서 조직 전체를 드러내고, 심지어 본인마저 내가 있는 바로 아래층까지 접근했다. 회원 개개인을 소홀히 여긴다면 이런 위험을 감당할 리 없었다.
"또 그는 자네들의 안위를 염려하며, 마지막 순간에 제가 가진 패를 내게 송두리 건네기도 했네. 원래는 데이비와 거래할 내용이었지."
나는 의장이 전화 건너로 툭 던진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어투는 경솔했지만, 그 내용과 의도는 아주 뚜렷했다. 나는 그들의 얕은 사고방식이 되돌릴 수 없는 참사로 이어지기 전에 현실을 알려주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의도는 잘 전해진 것 같지 않았다.
"영국인은 절대 아군을 적에게 팔지 않아요."
갑자기 진이 선언하듯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말이예요."
사무엘이 바로 뒤따랐다.
나는 그들의 여유작작한 태도가 어디서 나왔는지 마침내 이해했다. 진짜 고난을 만나본 적 없는 이들은 귀족적인 낙관으로 가득했다. 반면, 해리스만은 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금은 그러겠지. 나는 자네들이 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마음 속에는 용기가 가득하고, 굳건한 신념은 여지껏 흔들려 본 적이 없겠지. 그것이 가장 큰 문제란 말이야. 안 그런가, 해리스?"
호명된 해리스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는 겁먹은 눈으로 나와 동료들을 힐끗거렸다.
"왜 그래, 아까부터?"
진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옆에서 보기만 했던 그녀는 알 턱이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권총은 그저 하나의 협상 수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해리스가 인질로 잡힌 상황조차 인질 교환이 전제된 협상 과정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사람들은 잘 모른다. 장전된 총구, 그 악의 넘치는 공동을 들여다보는 순간, 개인이 수십 년간 다져온 인간성따위 한낱 먼지뭉치보다 가볍게 날아가고 마는 것임을.
여기 있는 학생들 중 해리스만이 유일하게 그 사실을 알았다.
"자네들은 지금 무지의 산맥을 오르고 있네."
나는 무심코 눈을 감으며 독백했다.
"눈앞의 봉우리가 전부라고 믿겠지만, 그 언덕에 오르면 그제야 하늘인줄 알았던 저것이 산맥에 쌓인 동토라는 걸 깨닫겠지. 자네들의 부족한 상상력이 말하는 '절대'따위는 희망사항이라 부르는 것이 옳네!"
실로 한탄스러운 낙관이었다.
문명 속에서 한 번도 위협받지 않고 자란 청년들은 생명으로서 마모되어 있었다. 공포란 삶을 향한 경종이다. 허나 그마저도 무디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겐 생명의 자격이 없었다.
"자네들은 의장한테 속고 있어."
"잠깐만요, 교수님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어요. 의장을 나쁘게 말하지 마세요."
"사기 행각이야! 런던 대화재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나? 무지한 아이들을 내세워 모든 죄를 뒤집어 씌게 하고 죽였지. 자네들 처지라고 많이 다른줄 아나?"
"저도, 우리도 위험한 줄은 알아요. 저희가 선택한 일이예요."
"선택? 진짜 선택이 뭔지는 아나? 표지판 없는 갈림길에서 왼쪽을 선택하건, 오른쪽을 선택하건, 그게 선택인줄 아나?"
"어떤 일인지는 잘 알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솔선해야 하는 거예요!"
───탕!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자신의 눈앞에 꽂히는 탄환을 보고는 앉지도 서지도 못한 엉거주춤한 자세로 얼어붙고 말았다.
"의장이 이런 얘기도 해줬나? 자네들이 교수라고 믿고 있는 누군가 총으로 쏴버릴 수도 있다고? 그리고 그게 자네들이 맞을 결말 중 가장 평온한 것이라고?"
나는 홧김에 탄창을 비우게 될까 두려워, 김이 피어오르는 총신을 식히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귀족의 의무. 허울 좋은 말이지. 하지만 기억하게. 누구도 죽을 의무를 가지고 태어나진 않아."
그제야 나는 의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룩한 모든 시스템이 어째서 그토록 비효율적인지, 넘치는 재능을 가지고도 어째서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지. 그는 아주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에게선 음지 주민이 으레 가지고 있는 탁한 악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무산소의 세계에서 여전히 폐와 아가미로 호흡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영리하면서도 무지했다. 사람은 산소로 숨쉬지 않음을, 미칠 광狂이 턱없이 부족함을!
토끼풀십자회의 규모와 행동력은 분명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 학장이 이들을 제 안뜰에서 활보하게 두는지 이해했다.
미치지 않은 천재가 위험할 리가 없었다.
나도 곧 그들에게 흥미를 잃고 말았다. 어느덧 품고 있던 신비감은 사그라들고, 목멘 시체를 볼때 느끼는 생리적인 혐오감만이 남았다.
"그가 돌아오면 이리 전하게. 데이비는 왕립 베스렘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니, 치료비를 보탤 의향이 있거든 언제라도 찾아오라고."
의장이라면 모를까, 그들과는 더 얘기해서 얻을 것이 없어 보였고, 그렇다고 조치를 취할 만큼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혹은 돌아오지 않거든, 전부 잊고 그저 살아가게."
나는 강의실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나가려던 찰나, 번개처럼 내리꽂는 영감에 우뚝 멈춰서곤 고개 돌렸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확인하지. 혹시 아까 토끼굴 얘기 말인데, 토끼풀(Clover)이니까 토끼인건가?"
"그럴걸요."
한껏 의기소침해진 사무엘이 대답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중얼거렸다.
"내 사십 평생 가장 가독성 떨어지는 농담이었어. 정말로."
의장에게 결핍된 것은 광기뿐만이 아니었다. 유머가 아주 치명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그곳을 떠났다.
그날 밤. 그날 밤. 그날 밤.
나는 런던 중심가를 가로질렀다. 간만에 본 런던의 풍경은 낯익은 듯 하다가도, 완전히 이국의 도시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래된 목조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현대식 4층 고층 건물 골조가 세워져 있었고, 지금처럼 늦은 시간에도 인부들로 붐볐다.
그간 화재 피해가 적었던 대학과 인근의 여인숙만을 오간 탓에, 런던 수복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몰랐던 나는 그 모습에 크게 놀랐다.
런던이란 도시가 가진 생명력이 범상치 않은 줄은 알았지만, 폐허 위에 층층이 다시 쌓아올려지는 건물들을 보고 있자니, 미생물로 가득한 고인물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포를 보는 듯했다.
어둠 속에 하는 작업이 그리 안전하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여기서 그들의 안전에 대해 묻는다면 내가 바보가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만연한지라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런던 중심가는 그래도 사정이 나았다.
화재가 크게 번질 만큼 목조 건물이 빽빽하지도 않았고, 경찰과 군인의 빠른 초동 대응으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덕이다. 하지만 이곳에도 유독 한 건물에는 불에 탄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그 건물 근처로 다가갔다. 전날 남긴 전언을 들었다면, 아마 지금쯤 이 근처에 나와 있어야 했다.
얼마 걸리지 않아, 나는 약속한 사람을 찾아 다가가며 인사했다.
"윌슨 형사."
"...선생님."
우리는 반소한 건물 아래서 만났다. 흑백이 뒤섞인 듯한 건물의 이름은 스코틀랜드 야드, 런던 광역경찰청이 위치한 건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