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75화 (75/232)

§75. 그 후

"늦으셨습니다."

"변명은 되지 않겠지만, 나 역시 바쁘게 지냈네."

나는 그리 변명했다.

바람이 분다. 소란스러운 풍성이 귀를 간질인다. 이런 날은 꼭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 나는 춥지도 않았지만 공연히 코트깃을 여몄다.

"듣는 귀가 많습니다."

윌슨은 내 뻔한 변명을 한 번도 탓하지 않았다. 대신 주변을 한 번 눈으로만 훑고는 혼잣말처럼 중얼였다. 어쩌면 목소리조차 아니고, 바람에 옷 끝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잘못 들었을지도 몰랐다.

"자리를 옮기죠."

"그러지."

내 걱정이 괜한 것이었다는 듯이, 윌슨은 굳이 같은 말을 다시 했다. 우리는 밤길의 어둠을 틈타, 수상쩍은 걸음걸이로 건물 뒷편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갔다.

전에도 왔던 경찰청의 뒷골목이었다.

나는 여기 도착하자마자 무심코 으슥한 바닥을 눈으로 쫓았다. 내 시선 끝에 놓인 벽과 바닥에는 그림자로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꽃 낙서는 없습니다."

윌슨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이 말했다.

"그래도 자국은 남아 있죠."

"저 탄 자국 말인가?"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품에서 성냥갑과 담뱃갑을 번갈아 꺼내서 한 손을 들었다.

"담배 태우겠습니까?"

"저번에도 사양한 적이 있지."

"아."

입에 궐련을 문 윌슨은 성냥불을 붙이고 담배 끝을 태웠다. 그리고 타들어가는 꽁초를 손에 든 채로 그것이 아까워서 어쩔 수도 없다는 듯이 망설였다. 결국엔 버릴 시기를 놓치고 제 손가락을 데이고 나서야 바닥에 떨어트렸다.

바닥에 떨어진 성냥개비는 검고 주름진 애벌레처럼 꾸불거리며 알싸한 백린 냄새를 풍겼다. 윌슨은 데인 손으로 그을음 묻은 벽면을 살짝 쓸었다.

"담배는 좋습니다. 선생님도 배우시죠."

"오래 살고 싶으면 관두게."

그러자 윌슨이 콜록거리며 기침했다. 그때마다 입에서 검뿌연 웃음이 뿜어져 나왔다.

눈앞의 젊은 형사는 이제 제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수척했다. 마른 눈두덩과 광대 아래로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서 살가죽이 달라붙은 해골 같았다. 하지만 검은 구멍 같은 탁한 안구 속에 깃든 총기는 줄기는커녕 더 예리해졌다.

고작 스무 살 남짓한 청년의 주변에는 늘 죽음이 겉돌았다.

나는 그에게서 십오 년 전의 내 모습을 봤다. 사르데냐 섬에서 돌아오는 군함 위에서 면도하며 봤던 거울 속에는 이런 눈을 한 청년이 있곤 했던 것이다. 그는 내가 차마 찍지 못한 기념 사진이었다.

"배려 감사합니다."

"농담이 아니야. 오래 살아야지, 자네나 나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나...."

내 말은 힘없이 잦아들어, 끝내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윌슨은 대답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제니는 만났습니까?"

"그래, 당찬 여인이었지. 그런 상황에서도 기죽긴커녕 날 가르치려 들더군."

"그렇다면 제 메세지도 들으셨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벽에 그려진 것은 플랜태저넷 장미. 사건의 배후를 알아냈다."

"저는 곧장 조사했습니다만, 너무 늦어서 물증을 확보하진 못했습니다."

"그게 다인가?"

"하지만 심증은 충분합니다."

"그래, 그게 우리 일이지."

윌슨은 내 대답을 듣고는 잠시 망설였다.

"저는 그 뒤로 수사하지 못했습니다. 이건 제 감입니다만, 우리의 적을 수사국에 알려선 안될 것 같습니다."

"수사국 내부에 적이 있다고?"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페터 국장이 관여했다고 보나?"

"제 소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끄덕일 차례였다.

"아무 근거는 없습니다만, 국장님은 이 건에서 열외된 것 같습니다."

"그 눈치 빠른 녀석이?"

"그래서 더 문제입니다."

윌슨의 우려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1878년, 하워드 빈센트 대령은 유명무실하던 범죄수사국 국장으로 임명된 이후, 정치적 판단을 이유로 정부 각처의 협력을 얻어 형사 200명을 주축으로 기관을 개편했다. 그 이후 스스로 사임하는 1884년까지 형사국은 빈센트 국장의 사조직처럼 운용되었다.

빈센트 대령이 물러난 이후, 경찰청은 수사권의 독점을 위해 후임자로 오른 에드워드 헨리를 정치적으로 거세게 압박했다. 캐나다 자치 정부에서 경찰 총감직을 맡다가 2대 국장으로 임명되어 본토로 귀국한 헨리 국장은 경찰견 양성, 지문 감식 시스템 구축 등, 다양한 방면의 개선 시도를 했으나 번번이 경찰청의 반대로 무마되고 말았다.

헨리 국장은 3년 만에 스스로 사임하고 말았다. 경찰청의 수작대로 수사국이 다시 경찰청의 하위 기관으로 전락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때 나타난 것이 프랑스 혈통의 젊은 시장 보좌관, 윌리엄 페터였다.

시장의 추천으로 3대 국장에 오른 그는 런던 시청을 등에 엎고 저돌적인 개편안을 강행했다. 경찰청에서 대책을 강구하기 전에, 1년 만에 수사국은 빈센트 시절처럼 국장의 사조직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었다.

1년 전, 윌슨 같은 경력 없는 순경이 단숨에 형사로 뽑힌 것 역시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 형사의 추천과 임명 여부 같은 모든 인사권이 국장 개인의 판단에 달려 있으니, 형사들이 '페터의 개들(Petre's Bloodhounds)'이라 불리는 것도 과한 풍자가 아닌 것이다.

문제는 윌슨의 감이 맞다면, 적들은 페터 국장의 눈조차 속이고 수사국 내부로 침투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이런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수사국이 뚫렸다면, 경찰청은 이미 믿을 수 없겠군."

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와 만나지 못한 동안, 나도 놀고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닐세. 나도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려 애썼지. 내 한 가지 인정하네, 발로 뛰는 조사라면 젊은 자네가 나보다 낫겠지. 하지만 순순히 젊음에게 공을 양보할 생각은 없지. "

나는 지팡이로 바닥을 긁었다. 지팡이 끝에 벗겨진 검댕이 묻어났다.

"내 추측이 맞다면 적들은 수백 년간 런던을 지배해온 망령들이야. 정부 기관에 침투하는 일쯤이야 아주 손쉽겠지. 이번 사건도 그래. 대화재는 한두해 사이에 준비된 계획이 아니라고 우리가 그랬지? 실제론 이론의 정립만 백 년은 족히 걸렸을 거야."

"아십니까?"

"그래, 우리가 같은 결론에 이르렀으면 좋겠군."

나는 어디서 본 것 같은 윙크를 흉내 냈다.

"이번 사건은 교묘한 이중 속임수야. 대부분 런던 시민은 표면상의 사건만 보고, 이번 대화재가 핍박받던 고아들의 폭동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허무맹랑한 시나리오를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어리석진 않네. 자네와 나처럼 진상을 쫓는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지. 거기서 또 하나의 속임수가 나오지."

계속 서서 말하는 것이 편하지는 않았기에, 나는 벽에 몸을 기대었다.

"사건의 가장 큰 수혜자는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하다."

윌슨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수상쩍은 토끼풀십자회 의장에게서 들은 힌트이자, 사실상 정답이기도 했다. 그 한 문장은 이번 사건의 모든 위화감을 단숨에 불식할 만큼 핵심을 관통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나는 의장을 하찮게 여기려다가도 그 재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대화재에서 우리가 알아낸 핵심 단서는 둘이었지. 하나는 자네가 주목한 것처럼 역逆 플랜태저넷 장미였네. 이것은 정말 가감없이 그들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야. 어쩌면 그들 스스로 흘린 유일한 단서일지도 모르지."

나는 손가락을 차례로 치켜 세웠다. 검지, 그다음엔 중지.

"또 하나는 런던 소방대야. 이번 사건의 결과물 중 가장 비현실적인 것이지. 이 별반 관계 없어 보이는 두 단서는 마치 어디선가 절묘하게 얽혀 있을 것 같았지. 하지만 정답은 정반대였네. 둘은 정말로 아무 관계가 없었어. 그게 바로 핵심이었지."

손가락을 펼친 그대로, 나는 손가락 사이에 수염을 집어 넣고 비비 꼬았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큰 덕을 본 것은 누구지?"

"물론 런던 소방대입니다."

윌슨은 장담했다.

"대화재는 원인이 무엇이건 런던 소방대의 오점이 될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숨겨둔 네 척의 철갑선으로 오히려 런던의 영웅이 되었죠."

"그 이상이지. 템스 강 위의 저 흉물들은 고작 반 세기 만에 빅 벤을 몰아내고 런던의 상징이 되었네. 그날 밤, 또 다른 영웅이 될 수도 있었던 육군과는 정반대의 결과였지."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 것은 순리였다.

밤새 타오른 도시에 집을 잃은 시민들은 다음 날 내내 거리에 쌓인 수십만 구의 아이 시체를 봐야만 했다. 전쟁터에서나 볼 수 있는 시체 구덩이가 공터마다 들어섰고, 강에는 반쯤 부패한 시체가 둥둥 떠다녔다.

해외 언론들은 영국군을 영유아 살해자로 매도하기 바빴고, 정의로운 영국을 믿으며 낙관하던 시민들은 단숨에 우울증 환자가 되었다. 누구라도 책임을 져야했다. 후세기를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희망과 공포. 그중에 사람들은 희망을 쫓았다.

"희망은 무엇보다 맹목적이네. 사람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아.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절대로 묻지 않지. 대체 런던 소방대는 어떤 목적으로 저런 철갑선들을 숨겨서 조선했는지,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리고 왜 화재에 초동 대응하지 않았는지, 누구도 대답을 듣고 싶어하지 않네. 대신 흐릿한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몸으로 지키고 앉아 있지. 지성인으로서 한심할 따름이지!"

시민들이 한심한 작태를 보여주는 것이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다. 나는 분을 삭히며 말을 이었다.

"의회에서는 일사천리로 대도시 소방대법을 통과시켰네. 이제 런던 소방대는 영국 전역에 퍼져 나갈 거야. 템스 강 정박권 문제도 바로 해결됐지. 오히려 신사 양반들이 앞다퉈 재단을 만들어 철갑선 유지비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모든 것이 불탄 밤에 런던 소방대는 유일하게 승리한 셈이야. 그 뒤에 노란 외벽 회사가 있음은 물론이네."

모든 정황은 교묘하게 노란 외벽 회사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사십만 명의 고아를 동원할 재력을 가진 배후.

창녀를 고용하여 천사 연기를 시킨 상류층 신사들.

고아들이 숨어 있던 템즈 워터의 런던 하수도.

단시간에 준비할 수 없는 철갑선의 절묘한 순간의 등장.

결과적으로 영국 전역으로 진출한 런던 소방대.

허나, 그것이야말로 배후의 사고 통제였다.

"달리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그들에게 불필요한 일이었네. 노란 외벽 회사는 기업이야. 그리고 런던 전체를 보증하고 있는 보험 회사 집단이기도 하지. 자네라면 무슨 말인지 알겠지."

가장 큰 수혜자는 가장 큰 피해자.

그 말대로였다. 노란 외벽 회사는 커다란 정신적 이득을 챙긴데 반해, 런던 전역에서 발생한 막대한 화재 보험금을 떠맡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피해 건물 중 다수는 회사 소유이기도 했다.

꽃 그림을 통해 방화 지점을 지정할 수 있었다는 걸 고려하면 불필요한 피해였다.

"그리고, 네 척의 철갑선. 이 또한 미심쩍은 면이 많네. 런던 소방대는 아주 교묘하게 조선 과정을 숨겨왔어. 그 정도 공정을 비밀리에 진행하려면 비용이나 시간도 더욱 많이 들었겠지. 그런데 말인데, 대화재 당시에 나타났던 철갑선들에 대해 나만 이런 생각이 드나?"

나는 템스 강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철갑선은 절묘하게 출현한 것이 아니라, 더는 은폐할 수 없게 되자 마지 못해 끌려 나온 거라고."

템스 강에 소방선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화재 당시까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런 조심스러운 은폐 공작이 고작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노란 외벽 회사의 본질은 기업이다.

그들은 이윤을 쫓는다. 반면, 이번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들이 입은 피해는 가히 천문학적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국이 영국의 경제 규모를 쫓아올 정도의 손해를 입은 게 분명했다.

"즉, 노란 외벽 회사는 배후가 아닌 거군요."

"그래, 맞아."

윌슨은 이미 짐작하는 바가 있는지 바로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역 플랜태저넷 장미라네. 이번 사건의 실질 유일한 단서이지. 그리고, 이건 아주 노골적이라서 당황할 정도였어. 자네도 보자마자 눈치챘을 정도이니."

그날 밤, 윌슨은 장미의 정체를 알아보자마자 배후를 직감했다.

실제로, 이것은 공작이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범인의 족적이었다.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지 몰라도, 철두철미한 속임수를 준비한 것치고는 여과 없이 흘린 단서였다.

"먼저 다른 이야기를 해보지. 신문은 조금 봤나?"

"아니요."

윌슨은 내 질문에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예상대로 그는 여기까지 생각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얼마 전까지 신문에는 대화재 피해 현황이나, 경제 침체따위의 내용만 다뤘네. 부고란은 꽉 차서 더 실지도 않을 지경이었지. 여기까지는 자네도 쉬이 예상하는 바일 거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더 뭐가 있단 말인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각종 신문에서 호조에 대해 다루기 시작하더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제히 비슷한 경제 호조나 위생 개선, 노동자 인권 향상 등 런던답지 않은 훌륭한 변화들을 보도했지. 각 분야는 그리 유기적으로 이어질 빌미도 없는데 말이지."

나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란 걸 눈치챘다.

그건 일시적인 현상도 아니었고, 머지 않아 나는 그게 어떤 수학적 법칙을 따르고 있다는 통계를 얻었다. 결정적인 부분에서 정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던 날 도운 것은 케이시 오' 제럴드 학장이었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조사하던 나는 책을 찾다가 자리에 돌아오고 보니, 내 자리에 놓인 100페이지 남짓한 학술서를 확인했다. 방식은 알 수 없었지만 누구의 소행인지는 뻔했다.

학장의 도움은 불쾌했지만, 몇 번의 교류를 통해 그가 내 적의 적이란 확신을 얻었기에, 나는 그 책을 집어 들고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인구론."

이 논서는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가 주장한 과격한 인구 억제 이론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거의 백년은 전에 쓰인 이 글은 논리적인 헛점으로 가득했지만, 이런 오염의 시대에 적용할 부분이 소름 끼칠 정도로 많았다.

그가 인구론을 발표한 후, 런던 인구는 1821년부터 30년 동안 2배가 되었고, 또 1896년인 지금은 다시 2배가 되었다. 기록적인 인구 폭증은 맬서스가 예언했던 최악의 붕괴 사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재앙을 일시적으로 멈춘 것은 한 사건이었다.

"불은 화려하지. 불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무심코 그것이 본질이라 여기고 말아. 하지만 런던 대화재, 그 자체가 빌미에 불과했다고 하면 어떤가? 대화재를 명분으로 삼아, 런던에 도착한 군대는 아무 거리낌 없이 42만 명이나 되는 대량의 인구를 성공적으로 억제시켰네. 바로 그게 노림수였던 거야! 경쟁 집단의 시설을 방화로 공격하는 건 부산물에 불과했어!"

나는 흥분하여 외쳤다.

"다시 플랜태저넷 장미로 돌아오지. 본래 플랜태저넷 장미는 적색이 위로, 백색이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지. 적색은 장미전쟁의 승자인 플랜태저넷 가문을 상징하고, 백색은 패자인 튜더 가문을 상징하네."

나는 손가락으로 회오리를 그렸다.

"하지만 역 플랜태저넷 장미는 반대지! 역사 속 패자인 튜더 가문의 백장미를 적장미 위에 뒀어! 그 의미는 분명하지! 장미전쟁의 결과에 불만을 품은 자, 튜더 가문의 생존자 말이네!"

윌슨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왕립 학회의 튜더 회장."

"그리고 그거 아나? 토머스 맬서스는 왕립 학회의 회원이었네."

우리는 마침내 진정한 적의 실체를 파악했다.

이백 년간 영국 상류층을 지배해온 영국 굴지의 귀족 집회.

튜더 회장이 이끄는 왕립 학회.

런던에는 필요 없는 생물이 많다. 창틀에 올려놓은 촛불에 뛰어 들어 스스로 사하는 저 나방파리처럼. 하지만 저것들이 우리 스스로 창조한 비극임을 아는 자가 이 런던에 몇 명이나 있을까.

한편, 나는 문득 이런 의문을 품었다.

왕립 학회가 남긴 것이 만약 역 플랜태저넷 장미가 아니라, '튜더 장미'라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본래의 역사를 인식하는 또 다른 존재가 집단의 규모로 존재한다면?

런던의 밤은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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