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노병의 초상
이젤 뒷면에는 붉은 물감으로 적힌 불어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었다.
"노병의 초상. 1890년 1월."
"이상하죠?"
나는 이젤을 내리며 어거스틴을 쳐다봤다.
"우선 그림에 인물이 셋 있으니까요. 노병 한 명만 언급하는 건 어색하죠."
"그런가? 나는 그림을 잘 몰라서."
"보통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고흐는 그림에 제목을 잘 붙이지 않는 편이기도 했고, 어쩌다 짓더라도 보이는 그대로 쓰는 편이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예술에 소양이 없는 나로선 알 길이 없었다.
"어쩌면 원래 이젤에 다른 그림을 그릴 생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이 그림의 제목으로는 어색하죠. 군인의 그림조차 아니니...."
"아니, 아마 노병은 날 말하는 걸 거야."
어거스틴은 눈을 껌뻑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는 잘 아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민망하기 전에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군인 출신이거든. 다른 둘은 군대 문턱도 밟아본 적 없네."
"전부 아시는 분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어거스틴은 둘을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셋이서 모인 적은 한 번도 없어."
비록 지금은 같은 프랑크 학술회 소속이라고 하지만, 우리 셋은 한 번도 이런 모습으로 만난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마리와 아서가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프랑켄슈타인 박사에 의해 새 몸을 얻은 후가 아니던가.
"그리고 이 그림이 1890년에 그려졌다는 것도 그러네. 말이 안 돼. 아무리 일러도 이건 작년, 그러니까 1895년에 그려졌어야 해."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변한다.
그 당연한 원리를 생각하면 이 그림이 6년 전에 그려졌다는 건 여러모로 말이 되질 않았다. 나와 아서야 6년 세월에 그리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내 멋진 수염이 다 자라지 않았던 것을 참작하더라도, 특히나 마리에게 6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내가 그녀와 처음 만난 것은 5년 전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녀는 그림 속의 모습보다 훨씬 어렸고, 작년의 그녀와 비교하더라도 아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였다.
그에 반해, 이 그림 속에 그려진 마리의 모습은 딱 작년 즈음 그녀의 모습 같지 않던가.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마리, 그리고 아서가 한 그림에 들어갈 만한 관계가 아니란 점이 그랬다.
내가 아서와 16년 만에 비밀리에 재회한 것이 바로 작년 일이었다. 사실 대학 시절, 그와의 옛 인연을 아는 자도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같은 새앙쥐 종격막 탐구회 소속이었던 부회장 정도일까.
그러니 아무리 우연이라고 해도 1890년에 나, 마리, 아서를 차례대로 나열해 놓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하나도 말이 되는 게 없어. 이 그림의 존재 자체가 모순이란 말이네."
그림의 화가는 일면식조차 없는 프랑스의 무명 화가, 빈센트 반 고흐.
5년 후의 미래를 그린 것처럼 작년 모습을 빼닮은 인물들.
1890년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도 알려지지 않은 프랑크 학술회 삼인의 그림.
이 그림의 모든 요소가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역시 이건 작년에 그린 그림이야. 누군가 우리 사진을 구해서...."
"아니요, 그럴 순 없습니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까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뜻인가?"
그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이 그림을 그린 고흐는 1890년 7월에 자살했습니다. 이건 그가 죽은 해에 그린 그림입니다."
적막이 흘렀다.
죽은 화가는 무엇을 보고 이 그림을 그렸을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그림에는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여기서 더 말인가."
"기법이나, 모델이나, 그런 것을 제외하더라도 이야깃거리가 있죠. 사실 이건 팔리지 않은 그림입니다. 원래 그의 그림은 모두 동생이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만큼은 미완성한 그림들과 같이 그의 침소에서 나왔죠."
어거스틴은 여봐라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몇 번을 곱씹고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아까도 말했지만, 고흐는 물감을 짜 먹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그의 그림은 평생 팔린 적이 없죠. 그런 그의 그림을 유일하게 사주는 고객은 동생인 테오 반 고흐였습니다. 고흐는 그림을 그리는 대로 테오에게 보내서 물감값과 생활비를 보충했죠."
나는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는 가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그림을 반 년간 품에 끼고 다녔다는 거군."
"맞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는 거고?"
어거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완성하지 못한 그림이었을 수도 있죠. 그것도 아니면...."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불길한 상상을 하고 몸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두려운 것은 나였다. 여기에는 알려졌을 리가 없고, 알려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오라클이었다.
쉴 새 없이 증기를 뿜으며, 태엽을 맞물리며, 미래를 조립해 나가는 오라클의 육중한 모습 말이다. 세상에 미래를 엿보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단 말인가?
나는 한참 동안 그림을 응시했다.
언제나 거울 속에서 봐온 그런 얼굴이었지만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러고 있자니 어거스틴은 속삭이듯이 말했다.
"실은 내일부터 샤프츠베리 가街에서 전시전을 열 생각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전 말인가?"
그렇게 말하면 정말 호사로운 일이다. 그리 생각하고 있었더니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명 프랑스 화가 한 명으로는 손님이 모이지 않으니, 베너 형제 중심으로 준비할 겁니다. 파리 살롱에도 전시한 적 있는 형제 화가니까 화제가 되겠죠. 고흐의 그림은 그 사이에 몇 점 끼워 넣을까 합니다."
그는 자신의 영리한 계획에 대해 자랑스럽게 떠들었지만, 나는 베너 형제가 누군지 전혀 몰랐다. 고흐에 비하면 별로 유명한 화가 같지도 않았다.
"그거 잘 됐군."
결국, 나는 어정쩡하게 축하사만 건네고 말았다.
"이게 본론입니다만, 사실 이 그림을 박사님에게만 미리 팔아 드릴 수도 있습니다. 5 파운드만 내시면 됩니다."
어거스틴은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난생처음 물건을 팔아보는 것처럼 어색한 태도였다.
나는 그 제안에 기가 차고 말았다. 수많은 일화와 불가사의가 얽혀 있는 그림을 내게 가져와서 그토록 정성스럽게 설명한 끝에 한다는 게 소박한 장사질이란 것이 우스웠다.
5 파운드. 고흐의 그림이라고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염가였지만, 그가 그림을 사들였을 가격을 생각하면 꽤 폭리를 취하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새 출발을 축하하는 의미로 내지 못할 돈도 아니었다.
거기다가 나는 어떻게든 이 그림을 확보해야 할 처지가 아니던가. 그렇게 돈을 쾌척하려던 나는 문득 지금 가진 돈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
"지금 수중에 돈이 없어."
"그래도 사실 생각이신 거죠? 그렇다면 그림은 따로 챙겨둘 테니, 언제든 전시전에 들러주세요. 앞으로 두 주간 열 예정입니다. 혹시 또 모르잖습니까, 괜찮은 그림을 몇 점 건지셔서 큰돈을 벌게 되실지."
조금 사정을 봐줄 법도 한데, 어거스틴은 매몰차게 케이스 안에 이젤을 집어넣었다.
"나는 자네랑 달리 심미안이 없어서."
어거스틴은 내 대답에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나?"
"네, 사실 제가 전시전 준비로 아주 바빠서요."
나는 그가 이번 사건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지, 혹은 야심 차게 준비한 전시전을 망치고 싶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작년과 비교하면 열정적인 모습이라 보기는 좋았지만,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이 언제고 꺾일 것 같아 불안하기 짝에 없었다.
그는 이젤을 집어넣고는 바로 돌아갔다.
방에 남은 것은 나뿐이었다. 정확히는 아침 식사를 걸러서 굶주리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피곤하고 퀭한 얼굴의 나뿐이었다.
그가 떠나고 나니 아침의 소란마저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홀로 독백했다.
"빌어먹을 에드워드."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잠에서는 깨었지만 개운하지 못한 몽롱함은 맴돌았다. 나는 구부정한 자세로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
아래 1층에서는 달그락거리며 접시를 닦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는 옛적에 끝난 것이 분명했다. 브라운 집안은 금욕적인 기독교 집안인지라 식사 시간이 지나고 나면 먹을 것을 죄다 치워놓건 했다.
어쩌면 미국 이주 시기를 놓친 청교도 집안일지도 몰랐다. 뭐가 됐건, 생활이 불규칙한 내게는 안 좋은 일이었다. 몇 시에 일어나건 식사를 준비해주던 마리는 얼마나 융통성이 좋았는지.
나는 비틀거리며 난간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민가를 급하게 뜯어내어 여인숙으로 만든 이 집은 손님 방에서 계단으로 내려오면 바로 부엌이 나오는 희한한 구조였다.
마른 수건으로 접시에 묻은 토마토 즙을 닦던 여급은 날 눈치채고는 내 쪽을 힐끗거렸다. 그녀는 다리가 한쪽 없는 내가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차를 좀 주겠나."
"우유는 따라 드릴까요?"
"그래, 진하게."
나는 아예 주방 한편에 놓인 의자에 앉기로 했다. 주린 배가 꾸륵거리며 아픈 소리를 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운이 없었는지 주방에 들어오는 브라운 여사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식사 정리 후에 그녀는 항상 볕 들어오는 자리에서 식탁보를 널었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지금 만날 리 없었는데.
"세상에, 허버트 씨. 지금 일어나신 건가요? 식사는 없어요. 남들하고 같이 식탁에 앉는 게 아니면 따로 챙겨 드릴 수 없어요. 아시죠?"
"그래."
"식사는 전부 치웠어요. 하지만 늦으신 건 늦으신 거고, 저희도 준비한 만큼 돈은 받아야겠으니 못 돌려 드려요."
나는 그녀가 처음부터 식사를 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그녀처럼 기센 여인에게 따지고 들 자신이 없었기에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잠깐, 너 지금 뭐하는 거니? 접시는 다 닦은 거고?"
내가 승복하자, 그녀는 바로 시선을 여급에게 돌렸다. 구석에서 우유통을 꺼내던 소녀는 깜짝 놀라며 그 무거운 통을 든 채로 벌서는 것처럼 얼어붙었다.
"내가 묻는 말에는 바로 대답하라고 했지? 애가 대체 왜 이렇게 답답하고 멍청하게 구니?"
"아니요, 여사님."
"그건 또 뭐니, 몰래 우유를 마실 생각은 아니었겠지?"
나는 보다 못해 참견하고 나섰다.
"내가 밀크티를 부탁했네."
브라운 여사는 내 대답을 듣고도 성이 차지 않는 것처럼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버트 씨도 너무 응석 부리게 해주면 안 돼요. 저런 애들은 자주 혼내주지 않으면 나쁜 마음을 가진단 말이에요."
"봐주고 자시고 사실을 말한 것이니...."
"찻값은 받을 거예요."
"나중에 숙박비랑 같이 내겠네. 돈이 전부 은행에 있어."
"좋아요. 꼭 기억하세요."
그녀는 신신당부하고 나서야 계단을 올라갔다. 브라운 여사와 달리 심약한 브라운 씨는 차마 찻잔마다 가격을 매길 순 없었는지 몰래 계산에서 빼주곤 했다.
한바탕 폭풍이 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얼어 있는 여급을 눈으로 재촉했다. 한참 동안 무거운 우유통을 들고 있었던 탓에 얇은 팔이 벌벌 떨렸다.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창 너머 햇빛에 비친 먼지가 프랙탈 모양으로 아른거렸다. 바깥에는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렸고, 안에서는 아이 우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아침인가 보다.
같은 날 점심.
나는 영란은행의 돌계단을 오르다 중턱 부근에서 멈췄다. 완전히 오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시 내려갈 자신감도 없는 회색 지대였다. 그곳에서 나는 걸린 것처럼 우뚝 멈춰 서서 불안하게 주변을 살폈다.
런던 중심가의 오후는 인파로 들썩거렸고 그중에 내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잠깐동안 바닥에 고인 웅덩이를 내려다보며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전날 부탁해서 다림질한 코트는 깃이 아주 뻣뻣하게 각져있었고, 사고 한 번도 쓰지 않은 실크 모자는 색이 잘 물들어 있어서 말끔한 인상을 더했다. 칙칙한 색깔은 우중충한 런던에 잘 어울리는 교양이다.
면도칼로 섬세하게 다듬은 수염과 눈썹 역시 단정했다. 어느 털도 유독 빠져나오지 않고 고르게 정렬해 있었다. 나는 언젠가 들었던 눈썹이 짝짝이라는 얘기가 신경 쓰여 괜히 미간을 좁혔다 키웠다 했다.
그러다가 나는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싶어서 전부 그만두고 말았다.
여인을 만나러 가는 숫총각같이 유치한 짓거리였다. 이것도 저것도 귀찮기 짝에 없었다. 나는 가만히 선 채로 꾸밈없는 모습으로 상대를 맞기로 마음을 정했다.
잠시 후, 나는 그 판단을 후회했다.
해가 조금 더 높이 뜨고 난 후에 은행 건물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나는 그를 알아봤고, 그 역시 바로 알아본 눈치였다. 그는 내게 다가오며 목소리를 높이며 유난을 떨었다.
"세상에, 레몬, 너구나! 정말 못 알아볼 뻔했어."
레몬이란 것은 내 애칭이 분명했고, 나는 쥐구멍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오래 되어 물이 빠진 쥐색 양복을 차려입고, 황동 색깔 안경을 쓴 이 말끔한 중년인은 내 기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제대로 잠은 자고, 밥은 먹고 지내는 거니? 너는 예전부터 꼭 누가 돌봐주지 않으면 끼니를 거르는 나쁜 습관이 있었지. 지금 네 얼굴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유감이구나. 아주 말랐어."
"그만 하세요, 남들이 듣습니다."
말없이 듣고 있던 나는 소극적인 반항을 시도해봤다.
"널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둔 가정부는 대체 뭘 하는 거니. 마리라는 아이가 보기에는 일을 꽤 잘할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까 겉보기로 판단할 일이 아니었어. 내가 새로 사람을 알아봐 줄까? 손님 중에 그런 일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오히려 내 항의가 그를 자극하기라도 했는지 말은 더 많고, 목소리는 더 커졌다. 우리가 있는 곳은 빈말로라도 구석졌다고 하기 어려웠기에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모였다.
결국, 나는 질색하며 낮게 앓았다.
"형님, 제발!"
수염 한 올 나지 않은 남자의 성명은 에드먼드 허버트라고 했다. 그 성姓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나의 둘째 형님으로 이곳 영란은행에서만 31년째 근무 중인 은행원이기도 했다.
"저도 제 앞가림을 못할 만큼 어리진 않습니다."
"네가 충분히 잘한다면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겠지. 하지만 이 모습을 보고 내가 어떻게 넘어가겠니. 네가 어머니와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께 부끄럽지 않도록 돌보는 건 내 의무란다. 하지만, 정말로 네 모습을 좀 보렴! 내가 어머니를 볼 면목이 없구나."
내 소심한 반역은 쉽게 진압되고 말았다.
나는 얼굴을 붉힌 채로 그의 잔소리를 모두 감수했다. 억울한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둘째 형님만큼은 거스를 수가 없었다.
어찌 그러겠는가. 빌어먹을 첫째 탕자가 가산을 탕진하는 동안, 둘째 형님은 철이 들 무렵부터 은행에서 일하며 그 돈으로 내가 문법학교와 대학교를 나오도록 지원했다.
비록 나이 차이는 네 살밖에 나지 않았지만, 인생의 깊이 차이는 아주 폭넓었다.
"형님, 일단 들어가시죠."
"그래, 그게 좋겠구나. 너는 햇볕을 많이 받으면 안 되는 체질이야. 알고 있겠지?"
"잊으신 게 아니라면 좋겠지만, 저는 참전병 출신입니다."
"그래서 더 안 좋아졌지."
나는 평생이 지나도 그를 말로 이기지 못할 거란 확신을 품었다.
우리는 은행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점심 시간이 되도록 식사도 하지 못하는 말단 은행원들과 붐비는 손님들로 소란스러웠다. 에드먼드는 로비를 그대로 통과하여 더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경비 모두 그의 얼굴을 아는지 아무도 우리를 제지하지 않았다.
에드먼드는 개별 미팅룸 안으로 날 안내했다. 그는 걷는 내내 나의 걸음걸이를 신경 쓰는 눈치라, 나는 괜히 더 의족의 보폭을 크게 한 탓에 다리가 아주 아팠기에, 의자를 보자마자 재빨리 앉았다.
그렇게 사람의 귀가 더는 닿지 않는 곳에 도착해서야, 에드먼드는 사람이 바뀐 것처럼 부쩍 작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금고에 들어가고 싶다고?"
나는 품 안에서 열쇠 하나를 꺼냈다. 소박한 철제 열쇠 위에는 로마 숫자로 「Ⅰ」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가문에는 금고가 없단다. 필요가 없거든. 네가 금고를 개설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지.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 같구나."
에드먼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면 깁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프랑크 올드 패밀리의 열쇠를 얻기까지의 이야기를 천천히 읊기 시작했다. 전부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