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영란은행
자본은 우주의 법칙을 따른다.
서기 1687년, 한 과학자가 세 권의 책을 펴내어 천공의 법칙을 밝혀냈다. 그로써 인류는 마침내 신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저 밤하늘 위의 무수한 별과 천체가 그저 혼돈의 산물이 아니란 것을, 우주를 가로지르는 은하수의 노래가 신의 계산 속에 만들어진 감미로운 선율이란 것이 드러난 것이다.
간단한 원칙이었다.
머지 않아 사람들은 그 짧은 공식이 삼라만상을 관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형태와 질량의 유무를 떠나,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우주의 법칙 아래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인류사의 프로메테우스적 전환이었다.
과학자의 이름은 아이작 뉴턴이었고, 법칙의 이름은 만유인력이라 하였다. 저 별들조차 이 우주에 복종하건대, 하물며 인간의 욕망 따위가 벗어날 재간은 있을까.
영란은행은 금과 은으로 빚은 태양이었다.
지난 200년간, 은행은 영국에서 가장 많은 돈이 모이고 오갔다. 쌓아올린 금자탑은 더 많은 금을 끌어모았고, 그곳에 돈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셀 수 없는 자본이 흘러들어왔다.
그야말로 만류인력의 온상이었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작 100 제곱미터 남짓한 이 좁은 부지에 1만 톤의 금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건물 부지는 100년 동안 더 늘어나지도 않았고, 건물의 높이가 더 높아지지도 않았다.
은행은 오직 내려가기만 했다.
금의 무게에 지면이 침식하는 것처럼 오로지 땅을 파기만 한 것이다. 저 유명한 건축가이자 영란은행의 3대 건축 책임을 맡았던 존 손의 발상이었다.
인부들이 파고 지나간 자리에는 식물의 뿌리가 자라는 것처럼 강철의 금고가 층층이 들어찼다. 겉보기에는 3층 남짓한 구식 건물 아래로 누구도 밑바닥을 본 적 없는 미궁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호사로운 미궁이다.
런던 부지의 1/10을 차지하는 땅문서, 수백 년 동안 장인들의 손을 떠나온 귀금속과 장신구, 떳떳하지 못한 지폐 뭉치, 해결되지 않은 빚 문서 등 값을 책정할 수 없는 보물들이 작은 금고 안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그런 만큼 무성한 소문이 이곳에서 자랐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각 금고에 무엇이 들었는지, 당사자와 담당 은행원을 제외하면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금고가 열리지 않은 채, 주인이 죽고 나면, 그 금고는 영영 잊히고 말았다. 그 때문에 더 많은 금고가 필요했고, 은행은 더 아래로 내려가고....
───또각 또각.
나는 폐소 공포증을 일으키는 협소한 복도를 걸었다.
그때마다 지팡이 끝이 바닥을 때리는 인조적인 소음이 긴 복도 끝과 끝으로 파도치듯 퍼져 나갔다. 나로서는 이렇게 소란스러운 복도에서 어떻게 그 많은 비밀이 자랐는지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사방에는 금고가 가득했다. 실은 복도라고 하는 것은 작은 붙박이 금고가 가득 찬 방 사이의 짧은 길을 말하는 것이었다. 금고에는 각자 번호가 붙어 있었는데 층마다 숫자가 네 자리를 넘어가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 때문인지 방한성은 전혀 없었다. 벽과 천장, 바닥에서는 지하 특유의 습기 찬 한기가 흘러나와 몸을 으슬거리게 했다. 여름임에도 두터운 코트를 준비한 둘째 형님의 의도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나는 공연한 핀잔을 듣기가 싫어서 애써 춥지 않다는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그런 허세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복도와 계단에는 꺾이고 말았다. 결국, 탈력하고 만 나는 한소리 들을 것까지 각오하고 물었다.
"아직도 멀었습니까?"
"참을성이 모자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비록 각오는 했다지만, 실제로 듣는 것은 또 다르지 않던가.
나는 입을 다물고 꿍한 표정으로 걸었다. 앞서 걷는 그에게 표정이 전해질 리가 없었건만, 에드먼드는 오랜 침묵을 깨고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평소부터 관찰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한 건 기억하고 있겠지."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금고마다 번호가 붙어 있는 것도 눈치챘겠구나."
그의 질문은 마치 너에게 눈이 달렸느냐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만을 묻는 말이 아니란 것은 바로 눈치챘다. 나는 영리하게 질문의 속뜻까지 간파하고 답했다.
"맨 앞자리는 지하 층수, 다음은 호실, 마지막은 순번이 나열된 것이죠."
"그래, 잘 봤구나. 이제 네가 가진 열쇠를 보렴."
나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에드먼드는 힐끗 뒤돌아 내 모습을 살피더니 말로 재촉했다.
"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압니다. 그냥 말해도 상관없어요."
"레몬."
결국, 애칭까지 불린 뒤에야 나는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싫은 티를 내는 것은 물론이었다.
"자, 어떠니?"
"열쇠에는 금고에 대응하는 숫자가 없다. 그 말씀을 하려 한 것 아닙니까."
손 위에 올려진 열쇠에는 마땅한 아라비아 숫자가 없었다.
대신에 로마자로 「Ⅰ」이라고만 세공되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마저도 프랑크 백작이 새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실제로 열쇠는 수수한 민무늬였을 것이다.
에드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우리는 열쇠에 번호를 매기지 않는다."
"어째섭니까?"
"열쇠가 자격 없는 사람 손에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이 금고를 열어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지. 결국, 개설한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열쇠를 가졌다고 한들 금고는 열어볼 수 없는 거야."
"제겐 바보 같이 들립니다."
나는 퉁명스럽게 단언했다.
"왜지?"
"간단합니다. 어차피 열쇠를 잃어버린 사람은 금고를 열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금고 번호를 기억한다고 한들, 열쇠가 없어서야 은행원이 열게 둘 리가 없으니까요. 그때 해결책은 하나뿐입니다."
"그건 뭐지?"
"운이 좋은 것이죠. 담당 은행원이 어쩌다 금고 주인을 알아보고 신원을 증명해주는 겁니다. 그 은행원은 담당한 금고 번호와 주인을 일일이 맞춰 기억할 만큼 영리해야 하죠. 사실상 불가능한 겁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에드먼드는 내 대답을 숙고하듯이 침묵했고, 나는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멍청한 짓거리입니다. 그따위 이유로 열리지 않은 금고가 절반은 될 겁니다. 이 지하에 묻혀 있는 자산이 얼마일지 상상해 보세요."
"첫째로, 말을 곱게 하렴, 레몬. 그따위, 라니. 누가 그런 말을 가르쳤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둘째로, 네 생각은 합리적이지만 옳지는 않아. 세상 일이란 그런 법이지."
"무슨 뜻입니까?"
"금고는 열리는 것보다 열리지 않는 편이 좋거든."
내게 그 말은 마치 성경 속의 잠언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현실과 동떨어진 아리송한 철학 문구 말이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구나, 레몬. 아마 내가 허튼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겠지. 틀렸니?"
에드먼드는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 온화한 목소리에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좋아, 증명해주마. 네가 생각하는 습관에 도움이 좀 되겠지."
"제 생각에 제가 그런 걸 배울 나이는 지난 줄로...."
그는 내 소심한 항의를 완전히 묵살하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은행 입장에서 금고주와 관해 피할 상황은 하나뿐이지. 뭐라고 생각하니?"
"간단하군요. 금고 내용물이 도난당하는 겁니다."
"정말 생각이 얕구나. 발상은 어찌어찌 닿지만, 그 수준이 일차원적이야. 그게 다 생각을 깊게 하려 하지 않아서 그래. 네가 나태한 거지."
나는 한 마디 대답에 열 마디 훈계를 듣고 말았다.
에드먼드는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금고 안에 있는 건 뭐든 은행 소유물이 아니야. 그러니 도난당할 지언정 아쉬울 게 없지. 반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주인이 도난을 눈치채는 경우야. 알겠니?"
"같은 말 아닙니까?"
"레몬."
나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손을 들어서 손가락 둘을 펼쳤다.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둘뿐이다. 주인이 금고를 연다. 주인 아닌 사람이 금고를 연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건, 주인 아닌 사람이 금고를 연 후에, 주인이 금고를 여는 경우지."
그는 내 이해를 독려하듯이 잠깐 뜸을 들였다.
"단순한 경우의 수로 따져봤을 때, 주인이 금고를 열 때마다 절반의 확률로 문제가 된다. 횟수가 누적될수록 그 가능성이 올라가지. 그러니 알겠니, 은행 입장에서는 금고가 열릴 때마다 손해를 보는 거야."
억지스러운 주장이었다. 아니, 그렇게만 들렸다. 나는 바로 항의했다.
"말도 안 됩니다."
"뭐가 그렇지?"
"주인과, 주인 아닌 사람이 금고를 열어볼 확률이 같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잖습니까?"
내 항의에 에드먼드는 실망을 숨기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구나. 금고를 열 때마다 문제가 될 확률이 50%건, 1%건, 그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야. 너는 예전부터 늘 궤변으로 본질을 흐렸지. 몹시 나쁜 버릇이야."
나는 더 따지지 못했다. 사실 그러고는 싶었지만, 괜히 혼나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입 다물고 생각하자니, 납득하기 이전에 그의 말이 굉장히 합리적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전제대로라면, 금고가 열릴 때마다 은행은 일종의 리스크를 짊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끝내는 아주 세련된 사고법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가 틀렸다는 걸 눈치채고 말았다.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입니다."
"또 말을 돌리는구나."
정곡을 찔려서 잠깐 입이 멈췄다. 하지만 나는 다시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이 긴 이야기의 결론이 뭡니까? 결국, 열쇠에 맞는 금고는 알 수 없으니 일일이 전부 맞춰봐야 한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아, 쓸데없는 걱정이구나. 물론 아니지. 사실 나는 이미 금고 번호를 어느 정도 유추했단다."
그는 담담하게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그 때문에 나는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형님께서 프랑크 가문 금고 담당을 맡으셨습니까?"
사실 나는 전에 담당 은행원이 은퇴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서 본인이 알아낸 것을, 그의 노집사를 통해 들은 것이니 내 질문은 정말 무식한 것이었다.
나는 내 질문이 얼마나 하잘 것 없었는지 들킬까 노심초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행히 그 사실을 모르는 에드먼드는 질책하지 않았다.
"그건 아니지만, 나처럼 오래 은행에서 일하면 필요 없는 비밀을 많이 알게 된단다. 입 간수를 잘하는 것이 장기근속의 비결이지. 실은 간단한 추측이란다. 금고는 개설 순서에 따라 외각부터 안쪽으로 들어가지. 네 말대로라면 금고가 개설된 건 1869년이지?"
"맞습니다."
"그때면 내 근무 기간 안에 포함되었으니 운이 좋았지. 당시에 개설된 금고가 지하 몇 층을 썼고, 또 몇 호실쯤을 썼는지 기억한다면 찾을 곳이 크게 줄지 않겠니? 또 한 가지 좋은 단서가 있더구나. 네 명이 열쇠를 나눠 가진 가문 금고라고 했으니, 이런 소형 붙박이 금고를 쓰진 않았겠지. 그렇다면 개별 방을 사용하는 큰 금고를 위주로 돌아보면 되겠구나. 하나씩 맞춰본다면 십 분도 걸리지 않을 거야."
에드먼드의 설명은 간결했다.
나는 그 대범한 말투 때문에 무심코 그가 정말 쉽게 알아낸 것처럼 착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그가 말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초인의 영역에 이른 것인지 상상해 보란 말이다.
그는 27년 전에 개설된 금고가 지하 몇 층을 썼는지 기억하고 있었고, 자신의 기억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나와 같은 범인으로서는 흉내는커녕 이해조차 되질 않았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이렇게 오래 입 간수를 꽤 잘해왔단다. 하지만 그걸 마침내 한 번 깨게 되는구나."
내게 그 말은 책망처럼 들려서 입이 바짝 말랐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예상밖의 것이었다.
"드디어 네게 형다운 일을 한 번 해줄 수 있어서 기쁘구나."
나는... 솔직히, 감동했다.
하지만 내가 그 감정을 곱씹을 겨를도 없이, 에드먼드는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췄다. 그는 직전과 아주 다른 인상을 풍겼고,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심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필레몬."
애칭을 생략한 이름.
그가 날 이런 식으로 부를 때는 오직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아까 네가 나에게 한 설명을 그대로 읊어보겠다. 내 기억에 틀린 부분이 있다면 고쳐다오."
"그러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혼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런던 대화재가 있고 며칠 뒤, 너는 오랜 친우인 아서 프랑크 백작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화재 이후 자신이 물려받은 재산이 모두 온전한지 확인하길 바랐고, 그중에 1869년 개설한 프랑크 가문의 영란은행 금고가 있었다. 허나, 전대 프랑크 백작의 비극적인 실종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고, 그는 금고 열쇠만을 가지고 있을 뿐 상세한 것은 무엇도 알지 못했다. 알고 있는 것은 세 벌의 복제 열쇠가 더 있다는 것뿐. 그 때문에 여러모로 일 처리가 능숙하다고 알려진 너에게 이 일을 맡겼다."
에드먼드는 뒤돌아 날 응시했다.
"전부 맞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넌 왜 거짓말을 한 거지?"
내가 그 태연한 질문을 이해하는 데 걸린 시간은 꽤 길었다.
"무슨 말인지...."
"시치미 떼지 마라, 필레몬. 굳이 사람이 없는 지하까지 내려와서 이야기 하는 것이 네게 해줄 수 있는 배려의 전부인 줄 알란 말이다. 네 대답에 따라 나는 더 안내하지 않겠다. 일일이 열쇠를 맞춰보는 건 자유지만, 몇 년이 걸릴지 장담은 못하겠구나."
그는 확신에 가득 찬 태도로 경고했다. 나는 그가 농담이나 하는 성격이 아니란 걸 잘 알았다. 시답잖은 말장난이 통할 상대는 더더욱 아니었기에, 나는 순순히 실토했다.
"어떻게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아셨죠?"
"네가 세상을 등한시하고 산다는 건 잘 알겠다. 얼마 전에 기사가 났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기사였고, 어쩌면 보고도 기억하지 못할 그런 기사 말이다."
에드먼드는 말했다.
"아서 프랑크 백작의 부고였다."
귀가 따가웠다. 이명이 울렸다.
"질문을 다시 하자. 필레몬, 그 열쇠는 어디서 났지? 어째서 죽은 프랑크 백작의 소유물을 네가 가지고 있는 거지?"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