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80화 (80/232)

§80. 까마귀가 나는 밀밭

금고 안은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넓어서 성인 남성 둘이 들어가고도 공간이 약간 남았다.

하지만 나는 한사코 이 안에 머무르길 거절했다. 만에 하나둘 모두 금고 안에 들어간 상태로 금고문이 닫히기라도 한다면, 우리가 발견되는 것은 100년쯤 걸릴 테니 말이다.

"아이러니하군."

에드먼드는 유적지를 탐사하는 학자처럼 신중하게 금고 벽면을 살폈다.

"지금 상황이 꽤 우습지 않니?"

"뭐가 말입니까?"

"나는 지금 고대 문자로 쓰인 미래 기술 사이에 갇혀 있지. 불조차 비치지 않는데 한 자라도 알아보려고 실눈 뜨는 꼴하고는. 네게 모범이 될 만한 모습은 아니구나."

그가 뭘 걱정하는지 내겐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먼저 말한 관점은 놀랍도록 흥미로웠다.

내게 라틴어란 진부한 교양 강의이자, 늙고 영악한 귀족들이 공적인 행사에서 평민 출신 사업가를 욕보일 때나 쓰는 것이란 고정 관념이 박혀 있었던 탓이다.

"본뜰 수 있겠습니까?"

"글쎄, 나는 아무래도 이곳의 지엄한 규칙을 어기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채고 선수 챘다.

"OOO 말이군요."

"심성 고약하기는. 내가 그 말을 하는 걸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잖니."

에드먼드의 심술 찬 얼굴을 보고 나는 오랜만에 쾌거를 거뒀음을 알았다. 즐거운 형제간 농담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바로 진지한 표정으로 되돌아왔고, 나도 그에 맞춰 딱딱한 얼굴을 했다.

"여기 쓰인 것이 모두 후손을 위해 준비한 선친의 장난일 가능성을 얼마나 있다고 보지?"

"없겠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 면에서 여기 있는 모든 것, 전부 다 놀랍게 그지없어. 내가 공학자가 아니라 그 가치를 다 알아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지."

그는 벽면을 쓸며 단어를 나열했다.

"비행기, 비행위성, 해석기관, 차원열차, 영구동력선, 가압반응형 수평작동 장치... 어째서 이런 기술들이 수십 년 전부터 묻혀 있었을까."

한참 동안 벽면을 살피던 에드먼드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비행기는 영 쓸모가 없어 보이는구나."

"그렇습니까?"

"여기 쓰인 대로라면 이건 하늘을 나는 기계 같은데, 고작 사람 한두 명을 태우고 말보다 조금 더 빨리 나는 것이 고작인 모양이야. 바다를 건넌다면 배를 타는 게 효율적이고, 육로를 간다 해도 기차를 타는 게 낫지."

나는 그의 단호한 표현을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머지 않은 미래에 비행의 시대가 온다. 하늘에는 수만 대의 비행기가 매일 수백만 명의 사람을 태운 채, 전 세계의 하늘을 누릴 것이다. 비행이야말로 모든 운행 수단 중 정점이다.

형님의 이 원시적이고 치기 어린 발상을, 나는 선지자로서 겸허히 감수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 한편에 정말 그런 희망찬 세계가 찾아올까 하는 의문이 싹텄다.

시속 88마일. 인류 한계 속도.

내 전생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불길한 개념, 그것이 존재하는 한, 내가 아는 미래는 결코 오지 않으리. 수십, 수백 년이 지나도 인류는 하늘에 닿을 수 없다.

마치 하늘이 인류의 것이 아니란 것처럼.

"레몬, 왜 그러니? 얼굴이 아주 안 좋구나."

"아니요, 공기가 통하지 않아서 잠깐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이런, 내가 몸도 안 좋은 너를 너무 오래 방치했구나. 지하실의 단점이지. 지표 아래에서 와인과 치즈는 무르익지만, 인간은 곰팡이 슬 뿐이야."

잠시 끔찍한 몽상에 사로잡혔던 나는 형님의 부름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에드먼드는 내 얼굴을 보고 눈에 띌 정도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했죠?"

"누구라도 여기 있는 설계도 중 하나만 가지고 나가도, 영국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지. 내 정신을 봐, 이 금고야말로 영국 최고 부자의 금고였군."

그는 벽면을 바라보며 홀로 청자 없는 외로운 대화를 이어나가다가, 마지막에 내 쪽을 향해 고개 돌렸다.

"프랑크 백작가 말이다."

"실은 저는 아서의 선친께서 어떤 식으로 축재했는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아, 그래, 그럴 법해. 그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비밀 많은 마법사였으니까 말이야."

"마법사!"

"이상한 부분에서 놀라는구나. 설마 그가 염소의 심장을 뽑으며 주문을 외기라도 한다고 생각한 거니? 아니,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만큼 그자의 행보는 신비했으니 말이야."

에드먼드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사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네게 해줄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네게 필요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구나. 몸은 좀 괜찮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언제든 몸이 나빠지면 말을 끊고 올라가자꾸나. 그러면 내가 알고 있는 프랑크 백작의 이야기를 네게 해주마. 프랑크 백작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고작 수십 년 전까지 그 가문은 런던 교외의 영락한 귀족 무리 중 하나에 불과했단다."

그는 나지막이 설명을 시작했다.

"런던에는 본 적 없는 철판 공장이 마구 늘어섰고, 잉글랜드를 상징하던 템스 강은 오염되고, 가뜩이나 흐린 하늘은 다시는 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연으로 뒤덮였지.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어. 바야흐로 광기의 시대였던 것이지. 비바람처럼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 낙오된 군소 귀족들은 가진 땅과 재산을 모두 잃고, 운이 좋아야 고작 저택 하나 건사한 거야. 본래는 프랑크 백작도 다른 늙은 귀족처럼 지금쯤 저택마저 팔아치우고 무덤으로 쓸 땅이나 찾아다녔겠지."

그의 입가에서 자조적인 음성이 떠났다. 나는 그가 지금 이야기에 누굴 투영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귀족 신분으로 바닥에 떨어져, 일평생 명예를 회복하는 일도 없이 쓸쓸히 세상을 떠났던 한 남작 말이다. 장례식을 찾아온 조문객은 고작 아홉에 불과했다.

"우리끼리 마법의 날이라 부르던 날이 있었단다. 그날이 오면 모든 것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지. 평생 은행에 돈을 넣을 줄만 알았던 구두쇠부터, 한두 푼 쌈짓돈뿐인 거렁뱅이 신사도 증서를 들고 와 돈이란 돈을 죄다 가지고 나갔지. 그렇게 오전이 지나면 전날까지 가득 차 있던 은행 금고가 텅 비었단다. 그리고 소란스러워 나가보면 왕립 증권거래소 앞에서는 잘 차려입은 신사들이 패싸움하고 있었지. 난리도 여간 난리가 아니었어. 아무 전조도 없이 갑자기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야. 그러니까 마법이라 부를 수밖에 없지."

감상에 젖을 틈은 없었다. 늘 그렇듯이 에드먼드의 이야기는 극적으로 반전했다.

"그리고 마법을 부리는 건 늘 마법사 아니겠니. 모든 소동이 끝날 무렵, 해가 중천을 찍고 내려오면, 그제야 그자가 느릿하게 나타났지."

나는 갑자기 시작한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끝날지 눈치챘다.

"프랑크 백작, 늘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과시하는 것처럼 느리게 걷는 자였어. 그래도 사고 날 걱정은 없었지. 그 주변에는 언제나 광신적인 추종자들이 개처럼 따라다녔거든. 그들은 그의 가르침과 비밀을 조금이라도 엿듣기 위해 딱 붙어서 한사코 떨어질 줄을 몰랐어. 그 늙은이는 자본 세계의 재림 예수였던 거야."

그 과격한 표현에 놀란 나는 무심코 에드먼드의 얼굴을 직시했다.

"노파심에 말해두면 이건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단다. 누구라도 그 열광적인 행렬을 보고 나면 같은 생각을 했겠지. 사실 그가 이룩한 업적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지. 그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땅 한 마지기도 사지 않고, 어떤 사업도 벌이지 않았다. 대신에 외국에서 들여온 희귀한 관목을 정원에 심고, 무굴과 청나라의 향신료로 만든 고기 요리와 아메리카에서도 가장 질 좋은 차만을 들여와 손님을 대접했지. 각종 명사가 연일연시 프랑크 저택을 방문했고, 한때는 여왕이 버킹엄에 없으면 프랑크 저택에 가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았단다. 그는 자본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였던 거야."

입으로는 향수를 말하면서 에드먼드의 표정은 한사코 변함이 없었다.

"한 시대의 우상이었던 그가 어떻게 벌써 잊혔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위세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단다. 그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지 은행에 알려졌지. 돈이 오가는 이곳이야말로 그자의 사업장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대신 나타난 것은 불안이었다. 에드먼드의 월등한 두뇌는 그가 원치 않더라도 분주히 미래를 예측했다. 27년 전 만들어진 금고에 적힌 범접할 수 없는 기술들, 네 명의 열쇠 소유자, 프랑크 백작의 비밀....

"하지만 말이다, 그 무수한 소문 중에, 나는 한 번도 그가 천재적인 공학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

금고 속의 어둠에 묻힌 에드먼드가 숨 막히는 눈으로 날 직시하며 물었다.

"런던에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안 그러니?"

영국에는 한 가지 전통적인 믿음이 있다.

오랜 숙적 프랑스와 겨뤄서는 안 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는 믿음 말이다. 고작 삼백 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파리에서 예술이 융성하는 동안, 이곳 런던은 유럽 주류 예술계로부터 오랫동안 소외되어 있었다.

자신의 문화적 교양을 과시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프랑스어와 오스트리아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마련이었고, 그 결과, 영국에서 조금이라도 미술과 관련한 것이라면 뭐든지 외국어로 쓰여 있곤 했다.

샤프츠베리 가街는 그런 풍토에 써억 잘 적응했다. 나는 거리에 도착하자마자 영국 거리 한가운데 세워진 프랑스 건물을 몇 채 발견했다. 그중 하나의 문 앞에 선 어거스틴은 날 알아보며 반갑게 맞이했다.

"와주셨군요, 박사님!"

나는 그를 아는 척하기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는데, 그건 전부 그의 옷차림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마른 몸에 착 달라붙고, 또 어깨는 얼마나 부자연스럽게 부풀어 올랐는지.

턱시도를 입은 어거스틴의 모습은 풍자화 속에서 갓 튀어나온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제법 성황이 아닌가."

"런던 사람들에게도 이런 게 필요한 시기가 됐죠."

어거스틴은 노련한 사업가처럼 말했다.

"예술을 통한 마음의 위안 같은 것 말인가?"

"아니요, 허영이요. 저는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겁니다."

그는 정말로 노련한 사업가처럼 말했다!

"하지만 제가 사기를 친다거나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시잖습니까, 박사님."

"어쩌면 말이야."

"아니요,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죠. 제가 하는 사업은 모두에게 이득이 됩니다. 파리에는 정말 화가가 넘쳐납니다. 영국에서는 그럭저럭 먹고 살았을 화가도 생활고를 겪으며 노상에서 그림을 팔지요. 저는 그런 화가들의 생활비를 좀 보태주고, 런던의 자본가와 기술공에게는 문화를 제공하는 거죠. 그 중간에서 중계비를 받는 것이 제 수입이고요."

"왜 꼭 자본가와 기술공이지?"

"그 사람들은 돈이 많고, 허영도 많지만, 심미안이 없거든요."

그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전에 본 적 없는 것이었다. 매사 눈치만 살피던 작년의 풋내기가 맞았나 싶을 지경이었다.

"자네는 있고."

"아, 물론이죠. 그림을 감별하는 것은 와인과 비슷합니다. 평생 싸구려 와인만 마신 사람은 좋은 와인을 마셔도 그 맛을 모르듯이, 늘 예술을 접해오지 않은 사람은 그림의 가치를 모릅니다."

어거스틴은 공감을 요구하듯 말했지만, 예술에 어떤 소양도 없는 나로선 전혀 공감할 수 없는 화제였다.

사실 그의 태도를 젊음 특유의 치기 어린 생각이라 치부할 수도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그는 무명의 고흐를 발굴한 사람이 아닌가. 어쩌면 그는 중매인으로서 굉장한 안목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오늘은 그림을 보러 오셨습니까?"

"그러면 좋겠지만, 사실은 조금 바빠서 말이야. 그림만 받으러 왔네."

"그림이요?"

"자네도 알잖나. 빈센트 반 고흐가 그렸다는 내 초상화 말이야. 가격은 바뀌지 않았겠지?"

내 장난스러운 질문에 어거스틴이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다시 물었다.

"얼마를 원하나?"

"네?"

"내가 자네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개업 축하금이라 생각하면 내지 못할 것도 아니야. 그래서 얼마를 더 내면 되나?"

그러자 그는 더욱 어쩔 줄 몰랐다.

"아니요."

"뭐가 아니란 건가? 똑바로 좀 말하게."

"실은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또 다른 구매자가 그림을 사고 싶다고 우기고 있어서요."

"뭐?"

나는 무심코 되물었다.

"왜?"

"네?"

"내게 팔기로 언약한 그림을 왜 전시해 놓은 건가?"

어거스틴은 창백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실은 베너 형제 전이라고 해도, 고흐도 명색이 전시 작가 중 한 명인데 그림 한두 점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개중에 쓸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고평가한 그의 심미안은 엉터리일지 몰랐다. 고흐의 그림을 도매로 사들이고, 유일하게 내가 아는 고흐와 화풍이 다른 하나만을 골라 전시하다니.

"그래도 하루이틀 전시하고 내릴 생각이었습니다. 박사님께서 일찍 오시면 바로 드릴 생각이었고요."

"그런데, 전시 하루 만에 구매자가 나타났다는 거군."

"지금도 회장 안에서 예약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버티고 있습니다. 권리를 양도받겠다고요."

금방 그림만 건네받으면 될 줄 알았는데, 일이 아주 복잡하게 되었다.

"안내하게."

"이쪽으로 오시죠."

어거스틴은 황급히 앞장서며 실내로 안내했다.

전시회장은 원래 주거용이었는지, 복층 건물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걸 감안해도 2개 층에 걸쳐 많은 그림이 걸려 있는 모습은 제법 그럴싸했다.

나는 혹여 내가 아는 그림이 있나 여기저기 둘러봤지만, 무엇도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잠시 후, 우리는 회장 안쪽의 작은 방에 도착했다.

"원래는 창고 겸 쓰던 방인데, 그림을 빼고 나니 공간이 나서 응접실로 쓰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묻지도 않은 설명을 하며 문을 열었다.

"당신은...?"

문 너머 앉아 있던 콧수염이 인상적인 노인은 눈을 키우며 물었다.

그의 경악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 자신이 사겠다고 주장한 그림 속 인물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난 셈이니 말이다. 신경 쓰이는 부분은 그가 사용한 언어였다.

"프랑스에서 오셨습니까?"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그는 서툰 영어 발음으로 말했다. 발음은 엉성했지만, 그 미숙한 영어 속에도 몸에 밴 기품이 묻어나니 얕보고자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그가 프랑스 귀족이거나, 아니면 아주 형편 좋은 집안에서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일 거로 추측했다.

"아마 이제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왜 저 그림을 사려 하는지 말입니다."

"그래요, 놀랍습니다. 찾아다니던 초상화의 인물 본인과 런던에서 만나게 될 줄은."

날이 그리 덥지도 않았는데 노인은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찾아다녔다뇨? 초상화를 오늘 처음 보신 게 아닙니까?"

"물론 저 초상화는 오늘 처음 봤죠. 하지만 영국에서 저걸 또 보게 될 줄은 몰랐어서 아주 놀랐습니다."

노인의 말에서 모순을 지적하니, 또 다른 모순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다.

나는 말할수록 혼란스러웠다. 그는 내가 느끼고 있는 혼란이 무엇인지 눈치챈 것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압니다. 제가 아주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시겠죠."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실은 저는 이것과 아주 똑같은 그림을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세세하게는 달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같은 그림이란 걸 알 수 있지요."

"그게 무슨 말인지 도통...."

그러자 노인은 미소를 거두며 선언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건 모작입니다."

1889년.

한 예술가는 생애 마지막 한 해를 모작으로 불태웠다. 홀로 기술을 독학한 8년간 그림 한 점밖에 팔아본 적 없는 무명 화가가 당대 최고 유명인들의 그림을 베끼기 시작한 것이다.

예술가의 붓끝에 그들의 기술이 고스란히 맺혔다. 그 순간, 그는 이젤을 바라보며 무엇을 꿈꿨을까. 그 희망 없는 눈동자는 무엇을 보고 빛났는가.

1890년, 빈센트 반 고흐 자살하다.

1905년, 고흐 회고전에서 그의 그림은 세간의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죽고 나서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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