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81화 (81/232)

§81. 파리행行

사연은 이러했다.

예술계의 소식이 더딘 영국에는 그 전말까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3년 전 파리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있었다. 파리 시장이 사임하고, 파리 시청에서는 시장직을 폐지한 초유의 사태였다.

정치적인 이슈로만 알려졌던 그 사건의 내막에는 그보다 깊고 유치한 사정이 하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폴란드계 신인 화가의 그림 <노병의 초상>이 파리 살롱에 걸리며 시작되었다.

파리 미술가 협회의 전폭적인 지원 끝에 살롱에 걸린 그림은 곧장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노병의 초상>은 무명 화가의 그림치고는 섬세한 표현력이 돋보였으나, 파리에서 주목받을 만한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예술의 도시에선 그보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화가들도 노상에서 빌어먹는 일이 쌔고 쌨다.

하지만 그림은 이목을 끄는 정도를 넘어서, 파리 시민을 두 패로 갈라놓았다. 도시 전역에서 거센 소요 현상이 일었고, 사람이 셋 이상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격정적인 토론회가 벌어졌다. 그림이 전시된 동안, 파리 주점에서 신고된 폭력 사건의 수는 세 배로 뛰었다.

독감을 치르는 것은 전시회장 측도 마찬가지였다. 회랑에는 그림에 해코지하려는 의도를 가진 관람객이 너무 많고 빈번하여, 그림 주변으로는 지팡이가 닿지 않을 만큼 긴 줄이 처졌다. 개중에는 줄을 넘어서 그림을 내리려는 사람도 있어서 경찰은 전시 기간 내내 경비를 서야 했다.

예술계의 반응도 대중 못지않았다.

몇몇 유명 화가는 전시장에 무작정 쳐들어와, 자신의 그림을 막무가내로 떼어갔다. <노병의 초상>과 자신의 그림을 함께 전시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한때 전시 공간이 부족할 만큼 빼곡하던 회랑의 벽면에는 부자연스러운 공백이 듬성듬성 들어섰다.

이토록 도시 전체에 흉흉한 기색이 감돌았다. 이 모든 논란의 원인이자, 무명작가의 그림이 파리 살롱에 입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림은 잔인했다. 그것도 아주.

거기엔 전통 예술계가 추구하는 교훈도, 종교적인 상징도 담기지 않았다. 그저 이유 없는 악의의 나열이었다. 무고한 세 인물의 형상은 악마 숭배의 증거인 마냥 추하게 더럽혀졌다.

대중은 이걸 관대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파리 살롱의 상징성을 주장하며 이런 그림을 내려야 한다는 측과, 예술의 자유성을 강조하며 표현의 다채로움을 옹호하는 측으로 나뉘었다. 불을 지핀 것이 평단이었다면, 그 불을 타고 간 것은 언론이라는 들판이었다.

각 언론사는 파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사태에 대해, 자신들의 신문 기사 2면에 대서특필하여 전국으로 배송했다. 뒤늦게 전국에 알려진 사태는 두 번째 파동을 일으켰다.

전국의 지식인들은 제 의견을 담은 정성스러운 편지를 회랑에 보내며 논란에 공조했다. 전시장 옆에 급하게 세워진 소각로에선 수만 장의 편지가 봉랍도 떼지 않은 채 태워졌다. 평소의 수 배는 많아진 일거리에 우체국 기능은 마비되었고, 중요한 편지가 며칠씩이나 묻혀 있는 경우도 흔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시청에는 시민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시청은 대답을 내놓아야만 했다. 파리 시장은 그림이 전시된 지 2주 만에 결정을 내렸다.

<노병의 초상>은 파리 살롱 역사상 처음으로 시장령에 의해 내려진 그림이 되었다.

이렇게 사건은 진정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끝날 거로 생각했다면, 당신은 프랑스에 대해 절반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 파리, 모든 강압과 명령을 거부하는 희대의 꼴통들이 사는 도시.

곧바로 시위대가 조성되었다.

예술계의 소동에 아무 관심도 없던 사람부터, 전날까지 그림을 내려야 한다고 애타게 주장하던 과격파까지 모여서 성급한 시장령에 대해 반발했다. 시위대는 시청 앞을 가득 메웠다.

파리 시장은 여기서 최악의 선택을 내렸다.

하루 만에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한 것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대비되지 않았던 시청은 수습하지 못했고, 혼란은 박차를 가해서 결국 시장직 재폐지라는 희한한 결론에 안착했다.

1889년 에펠탑 낙하 사건 이후로 공백이 되었던 시장직이 다시 채워진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결국, 3년이 지난 지금까지 파리는 다시금 시장 없는 도시로 남아 있었다.

런던에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였다.

무엇이 그러느냐면, 이 모든 사건의 시작점이 고작 무명 화가의 그림 한 점이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무명이던 신인 화가는 고작 2주 살롱에 전시되었을 뿐인데, 가장 장래를 주목받는 파리 대표 유망주가 되었다.

미술가 협회는 일약 스타덤에 오른 그를 지원하며 각종 행사에 앞세웠다. 그리고 3년째, 어떤 신작도 발표하지 않은 채, 그저 사교계의 명사가 되고 말았다는 비난만 남겼다.

"이야기가 옆길로 새는군요."

그 일련의 일화를 말없이 듣던 나는 나지막하게 지적했다.

"그렇군요. 지금은 그 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아니었죠."

"사실 저는 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 그림이 파리 살롱에 걸렸던 <노병의 초상>의 모작이란 말입니까?"

나는 노인에게 인내심을 시험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 신경질적인 질문에, 노인은 타이르는 어조로 답했다.

"이해합니다. 모작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늘어놨으니까요. 하지만 여기까지가 배경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께서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셔야 할 테니까요."

그의 말에 설득되진 않았지만 요지 자체는 이해가 가는 터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로 관계있는 얘기입니다. 그 뒤로 3년이 흘러서,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벌어진 일이죠. 그곳에 대해서 좀 아십니까?"

"아니요, 솔직히 말해서 잘...."

그렇게 답하면서 나는 기시감에 수염을 만졌다.

아주 유명한 장소인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해도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자 노인은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화들짝 놀랐다. 그리곤 홀로 납득했다.

"이해합니다."

"무슨 말이죠?"

"영국은 특이한 곳이죠. 별로 예술에 관심 없는 사람들뿐이니까요."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 프랑스인이란!

그들은 이렇게 기회만 있으면 특유의 선민의식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나는 그와 공연한 말다툼을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대신에 소심하게 항변을 얹었다.

아, 내가 아서였다면 이자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교우 20년 만에 마침내 그에게 재산 외의 장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몽마르트르 언덕은 뭐라고 할까요, 화가들이 모이는 소란스러운 거리입니다. 화가라는 족속들이 으레 그렇듯이, 빵이나 국 대신에 와인과 곡주로 배를 채우죠. 문제가 참 많은 거리입니다만, 그조차 파리의 자랑 중 하나라는 건 분명합니다."

노인은 항변을 묵살한 채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화가가 모이는 만큼, 화구와 중고 그림을 파는 크고 작은 노점도 흔합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인이 적힌 그림이 아주 많이 오가죠. 그중에서 한 그림이 발견됐습니다. 파는 사람도 어떤 경유를 거쳐 자신에게 왔는지 모르는 그림이었지만, 그 형체는 어지간히 세상 일에 관심 없는 사람 아니고는 알 수밖에 없었죠."

나는 손뼉을 쳤다.

"<노병의 초상>과 같았군요!"

마침내 사건의 개략적인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인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림은 3년 전, 파리 살롱에 걸렸던 <노병의 초상>과 똑같았습니다. 세세하게 다른 부분은 그림의 우연성 때문이지, 접목된 모든 기술과 묘사가 일치했습니다. 이러니까 미술가 협회가 뒤집어질 수밖에요. 전폭적으로 지원한 유망주가 사실 표절 작가라고 드러난다면 얼마나 망신입니까?"

노인은 심각한 사건을 다루는 것치곤 신 난 어조로 말했다.

"이번 사건에 뛰어든 것은 협회뿐만이 아닙니다. 각 대학과 연구소는 그림의 연식을 비교할 수 있는 첨단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중에 한 곳이 협회와 접선하고 조사했지요."

나는 노인의 설명을 무심코 같잖게 여기고 말았다. 현존하지도 않는 전생의 기술과 현대를 비교하는 건 나의 악벽 중 하나였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압니까? 그려진 시기가 워낙 가까워서 전후를 밝힐 수 없다고 합니다."

나는 그 설명에 납득했는데, 노인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그는 내 공감을 요구했다.

"압니다. 선생께서도 수상하다 여겼겠죠. 모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평단에서 노골적으로 편들어주려 한다는 점쯤은 알 수 있었습니다. 어째서 기관 하나만 접선했는지, 또 기술력이 부족하다는 뻔한 거짓말까지."

부끄럽게도 나는 그제야 상대의 말을 이해했다.

이것은 나와 시대 간의 깊은 인식 차였다. 내게 이 시대의 기술은 원시적이라, 딱히 경외를 느낄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렇게 기술력 부족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쉬이 납득하는 것이다.

반면, 세간의 인식은 전혀 달랐다. 과학은 수십 년간 모든 생활을 바꿔놓았다. 러시아의 소식이 오늘이면 런던에 도착해 있고, 아동 사망률은 현저히 줄었으며, 예전에는 죽을 병도 약 한 정을 먹으니 나았으며, 유럽 바깥에서는 신비한 물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들에게 과학은 다음 세기의 종교였다.

그들은 '첨단 과학'이라는 단어에 불가능은 없다고 진심으로 신봉하고 있었다. 내가 거기서 느끼는 괴리감은 세월로는 고쳐지지 않는 것이라, 아직도 가끔씩 머리를 드러내고 날 골탕 먹이곤 했다.

이번에도 티는 내지 않았지만, 딱 그 수준의 이야기였다.

"차이가 근소하다는 표현도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누구 하나는 확실히 보고 베꼈다는 뜻이 되니까요. 거짓말이라면 그런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협회가 화가를 지키려 한다는 뜻이니, <노병의 초상>이 모작이란 것이 드러나는 셈이고요. 완벽한 자충수였습니다.

나는 어째서 그가 이 사건에 이리도 열정적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가 그 사실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이었다.

"정작 상황이 이러니, 협회와 화가 본인은 침묵에 들어갔습니다. 모든 논란이 사그라 들때까지 잠적하겠다는 뻔한 의도였죠. 그런 수작에 당해줄 프랑스인이 아니잖습니까. 우리는 바로 방법을 찾아냈죠."

노인은 언성을 높였다.

"그게 뭡니까?"

"초상화란 결국 인물화입니다. 그러니까 그림의 모델을 찾아내면, 누가 원작자인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프랑스 전역에...."

설명하던 노인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곤, 아주 점잖은 눈짓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뭡니까? 설마...."

"혹여 프랑스에 가시거든, 처음 보는 사람이 알아봐도 너무 놀라지 않길 바랍니다. 전국에 공고가 났습니다. 프랑스 모든 신문에 초상화와 함께 광고가 실렸죠. 그림 속 인물을 찾아오면 상금을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어지간한 시골 사람이 아닌 이상, 신문을 들고 이웃 얼굴과 맞춰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오죽하면 프랑스 대통령보다 친숙한 얼굴이라 할까요."

노인은 웃으며 말했지만, 그도 정작 본인을 마주하니 웃을 일이 아니란 건 아는 눈치였다.

"그림, 그림을, 당신이 초상화를 사려고 한 이유도 알겠습니다."

나는 너무 당황하여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더듬거렸다.

"세상에."

"유감입니다."

노인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실은 이렇게 런던에 방문한 것도, 전시회장에 들른 것도 모두 해당 건과 무관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 그림을 발견한 이후론 꼭 파리로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아침부터 만사를 제쳐놓고 여기 앉아 있었던 겁니다."

잠깐 눈치를 살피던 노인은 이내 경쾌한 어조로 설명했다.

"이게 정말로 1890년이라면 그림의 연식 비교로 분명해질 테니까요. 설마 2년 차이를 사소하다고 말하진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군요."

그는 벌떡 일어나며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워낙 극적이었던 탓에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노인을 올려다봤다.

"온 프랑스를 뒤져도 없을 수밖에요! 당사자가 바로 런던에 있는데!"

노인은 내가 이 모든 사건의 열쇠를 잡고 있다는 걸 확신하는 듯했다. 하지만 유감천만하게도,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을 밀어내며 정중히 사과했다.

"미안하지만, 저에게선 어떤 원하는 대답도 들을 수 없을 겁니다."

내 말에 노인은 인상을 확 썼다.

"혹시 화가와 뭔가 관계가...."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저는 평생 초상화를 의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놀란 듯이, 이내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 번도요? 그럴 리가. 사소한 일이라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저는 아닙니다."

실제로 그랬다.

나는 평생 초상화를 그린 적이 없었다. 착각으로 치부하기엔 아주 정당하고 불가피한 이유가 말이다. 나의 어린 시절의 가정 형편 말이다. 런던 기준으로 썩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객관적으로 불우하다 말할 수 있었다.

사실 초상화를 그릴 기회 자체는 몇 번이고 있었다.

문법학교와 대학을 졸업했을 때, 그리고 군에 장교로 입대했을 때, 전쟁에서 귀환하고 훈장 수여식에 참가했을 때, 암흑 대륙 탐험을 위해 영광호에 탑승했을 때, 심지어 올드코트에 취임했을 때도.

어릴 적부터 형편 좋은 삶을 따라온 귀족이라면, 벌써 여러 장의 초상화로 인생을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한사코 모두 거절했다. 사진이라면 필요에 따라 몇 장 찍었지만, 그조차도 최근엔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초상화에 그려진 것처럼, 내 노후한 현재 모습은 세상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본인 외에는 말이다.

"이것은 이상한 그림입니다. 저는 고흐라는 자를 만난 적도 없었고, 또 다른 프랑스 화가를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수염을 이 정도로 기른 것도 최근의 일이라 지금 모습을 알지 못하면 그릴 수 없습니다."

나는 고흐의 그림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독백했다.

"그렇다면 이 모두 공상의 산물이며 우연의 일치라는 겁니까?"

"보다시피, 그리 부르기엔 너무 절묘하죠."

노인은 내 중구난방한 표현에 답답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막막한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리하자면, 평생 그린 적 없는 제 초상화가 세상에 세 점이나 나돌아다닌다는 겁니다. 그리고 온 프랑스 사람이 그걸 봤고요."

"그럴 수가."

그리 말하면서도 노인은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그 반응에서 나는 상대의 향락적인 인생을 얼추 엿볼 수 있었다. 초상화 한두 점쯤은 언제든 그릴 수 있고, 또 그럴 의무를 지어 온 귀족 세태에 걸맞은 안락한 삶 말이다.

"일단, 그림은 양도하겠습니다. 원래 선생께서 선약하신 것이고, 또 선생께서 그려진 것이니 제가 양보하는 수밖에요."

노인은 그 의구심을 풀지 않은 채 얼렁뚱땅 넘어갔다. 나는 그가 타협에 능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신 한 가지 약속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림을 양도하는 조건입니까?"

"아니요, 그건 원래 선생의 것이니 그렇게 말할 순 없죠. 제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줄 만큼 친분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뭡니까?"

그러자 노인은 다짜고짜 말했다.

"저와 파리로 가주시죠."

나는 그가 프랑스식 농담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눈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표절 사건에 집착합니까?  저야 제 얼굴이 걸린 문제니 그렇다 치더라도, 당신은 화가와 아무 관계도 없지 않습니까?"

나야 이 그림에 얽힐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것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그림이다.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프랑크 학술회의 현재 모습을 고발하기라도 하는 듯한 예언화. 그런 것이 현실에 세 점이나 있다면, 이곳 런던의 적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수습할 의무가 내겐 있었다.

아서 프랑크가 혼수상태인 지금, 프랑크 학회는 외적에 너무나도 취약했다.

하지만 노인은 그런 미스테리한 사건의 완벽한 부외자였다. 그러니 그가 이 그림에 관해 아는 것은 오로지 표절 논란 뿐일 텐데, 그가 보여주는 집착은 여간 흔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당신은 이번 사건의 관계자입니다. 그렇죠?"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나는 노인의 고백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당신은 미술가 협회 관계자군요. 그것도 협회장이나 그쯤 되는 깊은 관계자 아닙니까?"

내 자신만만한 추리에 노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내 추측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논리적으로 따지면 당연한 귀결입니다. 우선 당신의 관심은 변덕스러운 참견으로 치부하기엔 과했습니다. 그러니 이권 관계자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또, 실례지만, 연세로 보아서나, 해외에 나와 계신 점을 보아서나, 생업이 바쁠 만큼 실무자는 아닐 겁니다. 그러니 어느 기관의 고위 직책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럽죠."

"그렇다고 해도, 미술가 협회라고 딱 집어 말하긴 어려울 텐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아까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표절 사건에는 이권이 걸려 있다고. 또, 초상화란 결국 인물화라고. 저를 파리로 데려가려는 의도에 대해서는 알았습니다. 제게 거짓 증언을 시킬 셈이죠. 그 폴란드계 화가라는 작자에게 제가 초상화를 맡겼다고 한마디만 하면 모든 논란이 불식되는 겁니다. 그로 인해 이득을 볼 사람은 제가 아는 한, 그리고 당신의 말을 따르면 화가와 협회뿐이군요."

"확실히 그렇군요. 저 같은 노인이 신인 화가는 아닐 테니, 소거하면 협회 사람이라 보는 게 맞겠습니다."

노인은 내 추리를 듣고는 남일 얘기하는 것처럼 웃었다.

"유감이지만 틀렸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내 야심 찬 추측을 일축했다.

"설마 저를 평단 쪽으로 볼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설명을 듣고 나니 확실히 그렇게 보일 법도 하군요. 아주 영리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좀 덜 영리했나 봅니다."

나는 멋쩍게 중얼거렸다.

별로 대답하지 않게 여긴 인물에게 정면으로 부정당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었다. 이런 경우는 드물었기에 나는 더욱 어색해졌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어요. 사실 당신이 세운 전제 중에 틀린 부분이 있거든요."

노인은 날 위로하는 것처럼 말했다.

"선생께선 제가 여행을 다닐 만큼 생업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사실 저는 지금 맡은 직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것이죠. 그 부분을 고친다면 제 정체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의 장난스러운 어투에서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한 번 부끄러운 꼴을 보였는데 그것을 재차 요구하는 것이, 내 치부를 들추며 장난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악의는 없을지언정, 예의 바르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다시 해보죠."

나는 불쾌를 숨기지 않고 받아들였다.

사실 그의 말대로 전제를 바꾸니 또 다른 가능성이 여럿 떠올랐다. 서서히 추측을 좁혀 나가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자, 나는 깜짝 놀라서 몇 번이고 노인과 추리를 몇 번씩 대조해서 맞춰봤다.

"어떻습니까?"

여유작작한 노인의 모습은 귀족 사회 특유의 태평한 그것이었다. 거기선 어떤 특별한 요소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단한 부가 느껴지는 인상착의도 아니었고, 어딘가 노련한 면모를 숨기고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하면 대단한 모순이 생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람이 그런 직책에 오를 수 있을까.

"이제 알았습니다. 제가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내 말에 노인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무슨 뜻이죠?"

"저는 당신이 제게 거짓 증언을 시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혜자가 없는 목적이란 없는 법 아닙니까. 만약 제가 거짓말을 한다면 협회와 화가라는 수혜자가 생기지만, 그 반대는 없단 말입니다. 화가와 협회가 큰 손해를 보고 끝날 뿐, 누구도 득을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반대를 생각한 겁니까?"

"세상만사가 이치대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미련한 자는 모두가 손해 보는 길을 기어코 선택하고 맙니다. 그리 생각하면 당신의 집착이나, 당신 같은 사람이 직책 없이 떠돌고 있는 이유도 설명됩니다."

나는 길지도 않은 인생에서 그런 미련한 인물을 몇 만난 적이 있었다. 내 머릿속에 평생 아비의 그림자에 누워 있던 늙은 늑대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기 하나만으로 런던 한가운데의 섬마저 가라앉힌 희대의 초인, 필 에식스 백작 말이다.

그만큼 지독하진 않았어도 이자의 동기도 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림의 모델인 허버트 남작, 그러니 나 자신. <노인의 초상> 발표 2년 전에 그려진 고흐의 그림. 이 두 가지 중 무엇을 파리로 가지고 가도, 화가의 모작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화가의 인생은 몰락하며, 협회는 굉장한 망신을 당하게 되겠지. 누구도 득을 보지 않는 최악의 결말,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바랄 만한 사람을 단 한 명을 알았다.

내 추측대로라면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인물 말이다.

"그러면 제 정체가 뭔지도 압니까? 정말로?"

노인은 날 약 올리면서도 정말 맞출 거란 생각은 못했는지, 놀란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에게는 그저 고약한 장난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나는 내 의문을 뒤로 한 채, 최대한 거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체 어쩌다가 하루 만에 사임을 결정한 겁니까, 시장님?"

파리 시의 마지막 시장.

그 노인은 지금 런던에서 유치한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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