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84화 (84/232)

§84. 비바 라 파리

배는 자정을 한참 지나고 칼레 부두에 정박했다.

시간은 이렇게 늦었건만, 선창장에는 여기저기 등불이 켜져 있었다. 항만은 사내들이 모인 장소 특유의 땀내나는 활기가 배어 있었다. 피곤한 인부들을 지나쳐, 우리는 조용한 칼레 시내로 나왔다.

새벽 거리를 지나는 내내, 나는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그저 르블랑을 쫓아 빛나는 곳으로 향하니, 그곳에는 가로등이 번쩍거리는 역이 있었다.

선로가 몇 개씩 깔린 규모가 제법 큰 역이었는데, 그곳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웅성거림에 의문을 품고 르블랑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은 저기서 뭘 하는 겁니까?"

"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것 말고 달리 할 일이 있습니까?"

"혹시 열차가 많이 밀립니까?"

내 질문을 르블랑은 잘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나는 설명을 더했다.

"제 말은, 다음 열차에 타지 못할까 봐 새벽부터 줄을 서는지 묻는 겁니다."

"아, 허버트 선생. 여기는 프랑스요."

그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난 우리가 역 주변의 주점 같은 데서 숙박하게 될 줄 알았는데, 르블랑은 태연하게 역무원에게서 표를 사고 내게 건넸다.

잠시 후, 나는 그 모든 것이 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저 멀리서 불빛이 은은하게 비추더니, 곧 굉장한 소음과 광공해를 몰고 철마가 나타났다.

열차는 역시나 역에 이르러 정차했고, 승객들이 무질서하게 서로 비집고 나오고 들어오고 했다. 우리는 뒤늦게 승무원에게 표를 보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새벽에...."

자리에 앉고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르블랑은 늙은 입가를 히죽거리며 물었다.

"영국에선 흔한 일이 아니죠, 안 그렇습니까?"

"제가 멀리 다니는 편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팡이로 의족을 툭툭 건드리며 화제를 돌릴 것을 요구했다. 그런 보람도 없이, 르블랑은 그 뒤부터 날 굉장한 촌뜨기, 아니, 도시뜨기처럼 취급했다.

세계 최고의 도시 시민을 대하는 태도치곤 아주 무례했다고 할 수 있었다.

열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잠깐 사이에 우리는 칼레에서 벗어났다. 무성하게 펼쳐진 밭길 너머 보이던 해안선은 점점 짧아지다가, 두 번째 언덕을 지날 무렵 완전히 시계에서 사라졌다.

한동안 파리가 얼마나 대단하고, 또 내가 얼마나 놀랄 것인지 성토하던 르블랑은 점점 말수가 줄어들더니 결국 잠들고 말았다.

나는 유독 잠들지 못했다.

좌석 등받이가 불편한 탓인지, 아니면 너무 오래 걸어서 다리가 아파 도리어 잘 수 없게 된 탓인지, 결국 대부분 승객이 잠든 뒤까지 깨어있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남겨졌다.

혼자는 아니었다. 내 세계에는 여전히 흔들리는 열차, 옆좌석의 코 고는 소리, 어디서 들리는지 모르는 낮은 소곤거림, 창 너머로 펼쳐진 숲과 언덕, 그리고 수풀, 졸졸 흐르는 개울가의 냇물과 천공의 은하수, 또, 굴뚝에서 흘러나와 하늘에 그려진 흰 궤적이 남아 있었다.

열차는 드문드문 멈추기도 하면서, 새벽 내내 달려서 파리에 도착했다.

완전히 멈출 무렵, 동쪽에서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 파리의 아침이 밝았다!

새벽이 스러지자 거인이 깨어났다.

일상의 산발적인 소음이 거리 곳곳에서 흘렀고, 점차 퍼져 나가는 웅성거림은 이내 도시 전체로 번졌다.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아침의 파리는 여지껏 내가 봐온 어떤 도시와도 달랐다

색깔이다. 이 도시에는 진한 색깔이 배어 있었다

창 너머 몸 내민 아낙들은 팔을 걷어 올린 채, 하루 동안 모은 오수를 창밖으로 흘려보냈다. 빈 대야에 우물물을 떠오는 역할은 아이들의 것이었다. 그 사이에 나갈 준비가 된 노동자들은 꾸민 것인지 알 수 없는 꾀죄죄한 모습으로 거리에 나와 일터로 향했다.

대로에는 한 손에 술병을 쥔 마부가 분주히 마차를 몰았고, 그 위에는 제 몸보다 폭이 큰 드레스를 입고, 팔뚝보다 가는 허리를 가진 여인들이 숨쉬기 힘든지 낮게 재잘거렸다. 베레모를 쓴 인부들은 누가 시킨 것처럼 몰려다니며 여기저기 담배로 아침 물안개를 만들고 다녔다. 봇짐을 진 여인과 뛰노는 악동은 골목 구석구석까지 거리의 활기를 분주히 수혈했다.

쉬이 상상할 수 있는 도시의 아침이지만, 여기에는 색깔이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런던은 회색빛으로 칠해진 우울한 도시이다. 사람들은 표정을 짓지 않고, 상공에 뭉친 피로와 우울만이 도시를 묵중하게 짓눌렀다.

런던 시민들은 언제나 절박했다. 그들은 절벽 끝에 한 손으로 매달린 것처럼 늘 몰려 있었고, 그 끝에는 비극과 파국을 장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선 모두가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살았다. 파리 시민은 피로에 절은 와중에도, 얼굴 한구석에 은밀한 자부심을 담아두는 걸 잊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여유의 원천이었다.

아, 그렇다, 파리인 것이다!

그들은 모두 파리에 살기에 무한한 자부심을 품고 사는 것이다. 내가 런던 같은 도시를 알지 못했다면, 무심코 이곳이 세계의 정중앙이라고 인정하고 말았을 테지.

우리는 한동안 도로변을 따라 걸었다.

그렇다고 넓은 파리 전체를 걸어서 지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인근에 세워진 마차에 다가가서 조는 마부를 깨웠다. 술을 적지 않게 마신 것 같은 마부는 흐린 눈을 깜빡이며 몽중을 헤맸다.

"이봐, 이봐! 마차를 좀 빌리고 싶은데."

마부는 그제야 날 직시하고는 입을 쩝쩝거렸다.

"지금은 안 돼요. 바빠요."

그는 그것이 변명이라도 된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뚜껑 열린 술병을 꺼내 입에 가져갔다. 녹색 액체, 압생트였다. 음주를 숨길 생각도 않는 그 뻔뻔한 작태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항의했다.

"내가 영국에서 와서 불어에 썩 능통하진 않네만, 언제부터 술을 마신다는 것이 바쁘다는 뜻과 같아졌나?"

"아이고, 선생님,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저도 마시고 싶어서 마시는 게 아닙니다."

마부의 입은 술을 즐기는 와중에 변명까지 해야 해서 아주 바빴다.

"그런 것치고, 자네는 음주 자체가 목적인 사람처럼 보이는데."

"이건 제가 일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입니다. 적어도 술을 마시는 동안에는 선생님처럼 말 거는 사람이 없으니... 괴롭다, 아주 괴롭다...."

코끝까지 벌겋게 물든 마부는 힘껏 딸꾹질했다. 압생트 특유의 독한 풀 냄새가 코를 쏘았다.

"설령 대통령이 온대도 저는 안 몰 겁니다. 아침 8시까지는 일하지 않기, 그게 제 규칙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다른 마부나 운전수를 찾아보시죠."

내가 한 마디 더 하려 하자, 르블랑은 내 말을 끊고 날 끌어내다시피 뒤로 물렸다. 나는 길 잃은 불만을 담아 르블랑에게 따졌다.

"왜 그럽니까?"

"뭐가 말입니까?"

상황이 지나고 찬찬히 생각할 여유가 생기자, 나는 곧 그것이 파리에서 드문 광경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르블랑의 태도가 그런 생각을 뒷받침했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나는 혼자 중얼거리고 말았다. 런던에서 저런 게으른 사람을 입에 풀칠도 못할 거란 말이 목구멍 앞까지 나왔지만, 괜히 영국을 욕보이는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 내 푸념이 어떻게 들렸는지, 르블랑은 잘 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파리는 특이하죠. 세계 어느 도시보다 특이하죠. 저번에 제가 왜 시장직을 바로 관뒀는지 그 이유를 물으셨지 않습니까?"

"분명 그랬습니다만."

나는 분명 그가 또 다른 프랑스 자랑을 늘어놓을 줄만 알았는데, 그의 대답은 내가 예상한 무슨 말과도 달랐다.

"제가 사퇴한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시위가 그렇게 격했습니까?"

"선생께선 아무것도 모릅니다. 시위가 격하고, 그렇지 않고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파리에서 남의 위에 선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위험한 일이란 말입니다."

그의 말은 영 와 닿지 않았다. 물론 나는 프랑스의 반골 기질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백 년 간 이 나라의 정권이 몇 번이나 뒤집혔는지 생각하면, 파리가 온전히 도시의 형체를 유지한 것만 해도 굉장한 기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는 화를 입기 전에 서둘러 관둔 덕에 무사히 살아남았죠. 하지만 그 뒤에 누구도 같은 책임을 지기 싫어서, 시청은 그냥 시장직을 없애고 만 겁니다. 투박하지만 그래도 제법 현명하죠."

하지만 르블랑의 설명은 그런 통상적인 개념과 사뭇 달리 들렸다. 그는 갑자기 목까지 덮은 칼라에 손을 올리더니, 손톱을 세우고는 옷감 너머 목을 벅벅 긁기 시작했다.

"파리에서는 누구도 진정 남 위에 설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고 말고요."

흰 칼라 위로 붉은 핏물이 은은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목을 긁던 르블랑은 갑자기 손을 우뚝 멈췄다.

"괜히 말이 길어졌군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내가 잘 아는 르블랑 본인이었다. 그는 넉살 좋게 말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은 여유가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마차를 잡기 더 힘들어 질 겁니다. 서두르시죠."

그 뒷모습에서는 직전 보였던 광기의 편린은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워낙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나는 내가 미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르블랑의 목 칼라에 어렴풋이 비치는 분홍 빛깔을 보고 말았다.

저토록 평범한 사람조차 한 꺼풀 벗기면 이렇게 미쳐 있었다.

나는 지구를 덮은 그림자의 깊이에 새삼 놀라고, 또 두려워했다... ....

빈센트 흐라발의 거처는 파리 중심가에 있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며, 파리 시내 어디서나 보일 법한 높은 탑을 보게 되었다. 이름만 들은 흉흉한 에펠 탑의 실체였다. 공사 중에 설치한 철골은 십 년 넘게 방치되어 자연물처럼 녹슬고, 곰팡이가 번져 변색해 있었다.

"이봐, 저게 안 보이는 길로 좀 다니게."

내 시선을 쫓은 르블랑은 갑자기 마부를 향해 언짢은 목소리로 탓했다. 마부는 그런 요구를 듣는 것이 꽤 익숙한지, 군말 없이 말 머리를 돌려 건물 사이 골목길로 파고들었다.

나는 여기서 마부가 노련한 기술자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선택한 길에서는 정말로 건물에 가려져 탑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골목은 별로 사람이 지날 것 같은 모양이 아니었는데, 탁 트인 대로보다는 이곳이 더 붐볐다.

나는 어쩌면 이것이 파리에 산다면 누구나 익히고 있는 요령일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해봤다. 에펠 탑이 보이지 않는 길로 다니기.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에펠 탑이 어디 있는지 알았다. 또 그것이 가까워지는 것도 느꼈다. 물론 내게 인간을 초월한 인지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시력이 힘을 못 쓰는 곳에선 당연히 청력과 후각이 힘을 써줬다.

탑이 인간의 손을 떠난 후, 그곳은 새의 둥지가 되었다.

자연물은 제각기 에펠 탑의 소유권을 두고 거센 항전을 벌였을 것이다. 어쩌면 수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후에 승전고를 울린 것은 까마귀였다. 그들은 난폭하고 무리 지을 줄 아는 점에서 사람과 닮았으니 승리는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그 뒤부터 파리에선 까마귀 우짖는 소리가 꺼진 날이 없을 것이다.

또 냄새는 어떤가. 수십 마리의 검은 새떼가 군무할 때마다 새똥과 토사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센 강의 악취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것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에펠 탑은 육지의 템스인 셈이다.

나는 어째서 파리 시민이 에펠 탑을 그토록 혐오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 추악하고 수치스러운 탑은 스스로 욕보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찬란한 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폐허로 만들었다.

더욱이 파리 한가운데 점령지를 차지한 까마귀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잠깐 마차가 멈춘 사이에 까마귀가 창틀에 날아와 앉자, 르블랑은 질색하며 손을 털어서 쫓아냈다.

"까마귀들! 저것들이 늘 문제입니다!"

그는 탑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공연히 까마귀한테 화풀이했다. 나는 어느새 마차 안에 떨어진 검은 깃털을 손을 잡고, 마차 밖으로 털어 던졌다. 깃털은 팔랑거리며 바람을 타고 오히려 하늘로 올라갔다.

"좀 드시겠습니까?"

르블랑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는 언제 챙겼는지 품에서 깔끔한 유리병을 꺼냈다. 잽싸게 병뚜껑까지 연 그는 입안에 녹색 액체를 털어놓고 병을 건넸다.

나는 말없이 병 주둥이를 잡아 받고, 한 모금으로 입만 축였다. 그리고 매운맛에 콜록거리며 재채기했다.

"세상에, 뭡니까, 무슨 압생트가 이렇게 독합니까?"

"입에 안 맞으십니까?"

"제 취향은 아니군요. 솔직히 말해서, 이게 누구한테 맞겠습니까?"

"프랑스요."

르블랑은 짓궂게 웃었다.

"이게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 많은 공장이 파산했을 겁니다. 일하러 나오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병에 붙은 커버는 아까 마부가 마시던 것과 똑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마차 마부의 주머니에도 같은 병이 꽂혀 있었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술입니까? 프랑스처럼 좋은 와인이 많은 나라에, 저는 도통...."

"실은 이건 평범한 술이 아닙니다."

그는 대단한 비밀, 혹은 자부심처럼 속삭였다.

"술의 화학 성분을 추출, 분석해서 만든 인공주거든요. 효모균이 만드는 투박한 알코올과 비교하면, 공장에서 만든 에틸알코올의 끝 맛이 얼마나 깔끔한지요."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내게는 아주 당황스럽게 들렸다.

"에틸알코올이요?"

"맛이라는 것이 결국 화학 성분이란 게 밝혀졌지 않습니까.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술이란 결국 알코올에 무엇을 첨가하느냐에 따라 맛이 바뀌는 겁니다. 프랑스 최고의 샤토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에, 축복받은 한 해 동안 만든 최고의 와인 한 병을 공장에서 찍어낼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많은 것이 바뀔 겁니다. 포도 농장들은 모두 망하고, 대신 그 자리엔 공장이 세워질 겁니다. 또, 이제 와인 병에는 밭 이름 대신 공장 번호 라벨이 붙을 테고요."

르블랑은 신이 나서 열변을 토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몽상이 향후 백 년 간 실현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특별히 별난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구시대의 법칙은 뭐든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그런 믿음 말이다.

바야흐로 비바 20세기였다.

나는 르블랑의 말에 뚜렷한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마차는 그러는 중에도 계속 달려서, 어느덧 빈센트 흐라발의 거처 앞에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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