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고해
빈센트 흐라발은 전형에서 벗어난 인물이었다.
파리의 명망 높은 예술가라면 이보다 화려한 삶을 살 줄 알았는데, 그의 거처는 내가 살던 런던의 아파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층을 여럿 쓰는가 싶으면 그조차 아니라, 2층 하나밖에 쓰지 않았다.
우리는 계단을 오르기 전에 집 앞에 모여 있는 수상쩍은 무리를 발견했다. 공통으로 베레모를 쓰고 성냥불 하나를 돌려쓰며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그들은 길 한복판을 태연히 차지하고 있었다.
르블랑은 그들에 대해 짐작 가는 점이 있는지 그들에게 얼굴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맞게 온 것 같군요."
"저 사람들은 누굽니까?"
"기자요."
과연,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한, 흐라발은 들키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올랐다. 멀찍이 동태를 살피던 기자들은 슬금슬금 우리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가 상대하고 있겠습니다."
"얼굴이 알려진 시장님보다는 제가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말없이 내 팔에 들린 캔버스를 응시했다.
"아니요,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제 얼굴이 더 팔렸겠군요."
"절대 뒤돌아 보지 마세요. 들키면 곤란해집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꼭 내가 뒤돌아보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기대처럼 우둔한 오르페우스가 되어 고난을 자처할 생각은 없었다.
르블랑은 그대로 멈춰서 기자들을 상대로 능청을 떨기 시작했다. 그를 알아본 기자들이 정신 팔린 동안 나는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한 손에는 천으로 감싼 캔버스가 들리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쥔 탓에 좀처럼 속도가 나질 않았다.
2층 현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림을 바닥에 놓고 다급히 문을 두드렸다.
──똑똑.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기자들이 저리 진을 치고 괴롭히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미련하게 다시 문을 두드리며, 이번에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흐라발씨."
돌아오는 반응은 무엇도 없었다.
나는 지금 상황이 르블랑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라면 흐라발의 거처에 기자들이 모여 있는 것도, 그가 나오지 않는 것도 예측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날 여기 데려와서 기자들에게 얼굴을 보이게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상황이 아주 귀찮게 된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생각 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두드렸다.
"흐라발씨."
──덜컥.
그러자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손잡이가 돌아가더니 그대로 문이 열린 것이다. 나는 혹여나 체인이 걸렸나 싶어서 더 당겨봤는데, 문은 그대로 활짝 열렸다.
나는 열린 문을 눈앞에 두고 어찌해야 하나 망설였지만, 여기서 돌아가서 르블랑의 꾀에 당해주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기에 결국 캔버스를 다시 쥐고 안으로 들어갔다.
"흐라발씨?"
실내는 대낮임에도 어두웠다.
모든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중에 어느 방에서도 빛이 새질 않았다. 보이는 창문엔 모두 숨 막힐 정도로 두꺼운 커튼이 몇 겹씩 쳐져 있었다.
잠시 후, 거실로 들어온 나는 그것이 커튼조차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바닥에는 아라비안 양식의 카페트가 깔려 있었는데, 그 형체가 볼품없이 가위나 칼로 난자되어 있었다. 그 쪼가리가 어디 갔는지 살피니 창문 틈틈이 기워져 있었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벌써 화가에 대해 한 가지 알게 되지 않았나. 어쩌면 그와 아주 쉽게 친해질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는 빛을 병적으로 혐오했다.
그런 한편, 복도의 벽면 역시 이질적이었다.
상실이란 알아보기 힘든 탓에, 나는 뭐가 이상한지 바로 말하지 못했다. 대신에 벽으로 다가가서 장갑 낀 손으로 한 번 쓸어본 뒤에야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챘다.
벽에는 벽지가 없었다. 대신 우둘투둘한 시멘트 흔적과 함께 도색이 벗겨져 나간 듯한 흔적만이 가득했다.
도색은 단단한 무언가로 긁어낸 모양이었는데, 주로 오래 방치된 폐건물 따위에서나 보이는 것이었다. 이런 신식 아파트에서 아무리 벽지를 벗겼다고 한들, 이런 흔적이 바로 생길 리가 없었다.
그것이 또 다른 불안 요소였다.
이것이 시간의 소행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쩌면 흐라발은 정신이 온전하지는 못한 자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달려들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지팡이를 꽉 붙잡고 사방을 경계했다.
내가 중앙 복도를 절반 정도 가로질렀을 때, 또 다른 이상이 발생했다.
벽면에 매끄러운 표면을 가진 뭔가가 다닥다닥 무리지어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갑각류의 일종일 것이라고 착각했는데, 가까이서 살피니 겉면이 코팅된 사진들이었다.
사진은 하나같이 악의로 가공되어 있었다.
피사체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았다. 구도 역시 그랬는데, 워낙 다각도로 되어서 같은 사람이 찍은 것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사진 자체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을 찍은 사진은 의도적으로 얼굴만 잘라내어, 다른 사람의 얼굴에 붙여 넣는 식으로 가공되어 불쾌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아이는 노인의 얼굴을 가졌고, 남성은 여성의 눈을 가졌다. 어떤 사진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거친 선의 낙서로 얼굴과 손을 난자당하기도 했다.
"이게 뭔...."
───아아아아악!
사진을 살피던 나는 갑작스러운 비명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고통스러운 절규는 복도 끝의 방 안에서 들려왔다. 나는 지팡이 끝을 앞으로 살짝 세운 채로 조심스럽게 안으로 향했다.
방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문틈 사이로 은은한 촛붗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누군가 안에서 낮은 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방은 창고처럼 보였다.
완성되지 않은 수많은 캔버스가 쌓여, 아교 냄새를 풍기며 천천히 부식해가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 이곳은 무덤과 같았다. 그 무덤에 남자는 앉아서 흐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 모든 사단을 일으킨 그 그림은 홀로 벽에 걸려 있었다.
르블랑의 말에는 어떤 거짓도 없었다. 나는 그림을 보는 순간 극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것은 고흐가 그린 초상화의 아류처럼 보였지만, 결정적으로 인물 조형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그림 속의 세 인물, 그러니 나와 아서, 그리고 마리는 고흐의 그림과 달리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 눈이 있을 자리엔 살과 피가 섞인 것처럼 덩어리진 물감이 발라져 있었고, 아서는 어떤 거대한 절지동물의 다리에 안겨 있었다. 그리고 마리, 아, 불쌍한 그녀의 목은 잘려 있었다.
도대체 누가 어떤 악의를 가지고 이런 그림을 그려내는가.
내가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나오기 전에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이젤 앞에 앉은 초췌한 남자는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문이 열려 있었네."
"그래요? 아무튼, 지금은 아무도 만날 생각이 없으니 나가주세요."
그는 몰랐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내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곧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당신, 당신이군요."
"자네가 빈센트 흐라발인가?"
남자는 내가 상상한 모습보다 젊고 앙상했다. 팔과 얼굴은 뼈가 보일 정도로 들어가 있으면서, 배는 불룩 튀어나온 것이 거식증 환자처럼 보였고, 또 며칠씩 자지 않는 것처럼 눈 근육은 축 처지고 안색은 창백했다.
"맞습니다, 제가 빈센트 흐라발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래요, 당신은 분명 필레몬 허버트겠죠."
나는 그를 알지 못했지만, 그는 익히 아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넉살 좋았다.
"아직도 나가야 하나?"
"아니요, 아니요. 당신이라면 얘기가 다르죠. 자자, 편하게 앉으세요. 다리가 안 좋으실 테니...."
굳이 말할 것도 없지만, 내 의족은 평소 바짓단에 감춰져 있었으니 보고 바로 알만한 것은 아니었다. 지팡이야 누가 들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은 물건이기도 하고 말이다.
평생 만난 적 없는 그는 내 초상화를 그린 인물이기도 했으니, 내 다리의 문제를 안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는 호의를 받들어 먼지 쌓인 받침대를 털고 앉았다.
"오늘은 그림에 대해 이야기 하러 왔네."
"제 그림 말입니까?"
"그래, 그것."
그러자 그는 도리어 편안한 얼굴로 안도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10년 전, 몽마르트 언덕의 술집에서 꿈꾼 뒤로, 저는 오늘 일어날 파국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흐라발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말하면서 그 표정이나 어조는 침착하고 이성적이었다. 나는 의미를 알기 어려운 독백을 흘려 들으며 가지고 온 그림의 천을 벗겼다.
그러자 안쪽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고흐가 그린 초상화가 모습을 비췄다. 흐라발은 그것을 보더니 놀란 듯이, 실망한 듯이, 안도한 듯이 굴었다.
"이 그림에 대해 좀 알고 있나?"
"아니요, 오늘 처음 봅니다. 하지만 누가 그렸는지는 바로 알겠군요. 빈센트, 그자겠죠. 그는 지금도 잘 지냅니까?"
"6년 전에 자살했네."
"아."
그는 오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격정적인 표정을 보였다.
"유감입니다. 깊은 유감을 느낍니다."
"각별한 사이였나?"
"아니요. 하지만 술잔을 나눌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가 파리를 떠난 이후로는 보지 못했지만...."
"몇 가지 물을 것이 있네."
"당신에겐 물을 권리가 있습니다. 아마 궁금하시겠죠. 어떻게 저와 빈센트가 오늘날 당신의 모습을 알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는지. 그리고 제 그림과 똑같은 그림은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그는 내가 묻지도 않은 질문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간단합니다. 우리는 표절했습니다."
흐라발은 말했다.
"10년 전의 일입니다. 저와 빈센트는 예술을 꿈꾸는 학도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빈센트만이 학도였습니다. 저는 그저 냉정한 세간의 무관심과 끊임없이 고여오는 자괴감에 매일 술을 마실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열정이란 것도 보잘것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그는 자조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대부분은 의미 없는 사족이었다.
"빈센트는 그런 저와 종종 어울렸습니다. 우리는 몽마르트의 값싼 술집에서 꼭 한 파인트를 시켜서 나눠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잔으로 나눠 마시고, 양이 비면 그만큼 물과 공장에서 받아온 에탄올을 섞어 마셨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술 대신 에탄올 희석액을 마시는 식이었죠. 어쩔 수 없었습니다. 현실을 잊고 예술을 쫓자니 술이 필요했는데, 돈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나는 그의 말을 끈기 있게 들었다. 그는 성급히 자극해서는 안 되는 사람처럼 위태롭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흐라발의 눈빛이 독살스럽게 바뀌자, 나는 이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될 것을 직감했다.
"그는 10살 남짓한 아이였습니다. 이런 허름한 술집에서 만나기엔 고귀한 태생이란 것도 바로 알았습니다. 나이에 비해 몸가짐은 의젓했고, 대학을 나온 어른보다 유창하게 말하니, 술에 절어 판단력이 흐려진 우리는 그에게 곧 빠져들었습니다. 맨정신이었다 한들 다르지 않았겠죠. 저는 결국 예술이란 길을 잃은 탕아였으니, 그런 만큼 의존할 것이 필요했던 겁니다."
언젠가 이것과 아주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취한 채로 과시하듯 예술이란 무엇인지 떠들었습니다. 그렇게 언변과 취기에 의식이 몽롱한 순간, 아이는 자신이 그린 것이라며 그림 한 점을 우리에게 보였습니다. 저는...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긴 시간이 있다 한들, 저로선 결코 이를 수 없는 높이가 있음을. 어렴풋이 닿을 줄 알며 예술을 떠들어봐야, 저같이 말뿐인 열정을 지닌 자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는 고원이 있다는 걸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 이 그림을 내가 그린 것이었으면 하고...."
흐라발은 당장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그리고 끝내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도작을 꿈꾸게 된 것입니다."
강렬한 데자뷔가 엄습했다.
"저는 끈기 있게 기다렸습니다. 매일 전시장을 드나들며 신작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토록 훌륭한 그림입니다. 발표한다면 누구나 애타게 선망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그림이 세상에 알려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소년은 처음 말했던 것처럼 그것을 습작으로만 여겼던 겁니다. 그런 확신이 서자, 저는 마침내 오래 꿈꿔왔던 몽상을 행동으로 옮길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습니다. 아무리 모조품이라 한들, 그토록 훌륭한 것을 본뜨면 빛이 나기 마련입니다. 제가 늘 선망해왔던 살롱의 명작들이 하찮게 여겨질 정도로 독보적인 빛깔을 뽐냈습니다. 아, 세상이 내 그림을 보고 있어. 그것이 본래 내 것이었건 아니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화가가 된 것입니다."
이제야 나는 모든 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아직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의 출처를 따지려면 그를 쫓아야 하는 게 아니란 것만은 분명해졌다. 두 화가 모두 어떤 소년의 그림을 베꼈을 뿐이고, 그 소년이야말로 오늘날을 예언한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 뒤는, 아주, 아주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다음 작품을 요구했지만, 저는 만드는 법을 모릅니다. 저는 화가가 아닙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예술이 완성되는지 알지 못한단 말입니다. 매일 연구했습니다. 폭력과 악의를 익히기 위해 사진을 닥치는 대로 찢어 붙이기도 했고, 며칠이고 술과 약에 절어 있기도 하며 무작정 영감이란 게 찾아오길 기도했습니다. 저라고 노력하지 않은 줄 압니까? 저도 노력했습니다! 수년간 걸식하며, 잠조차 자지 못하고 늘상 예술만을 상상했단 말입니다!"
그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작위적으로 발작했다. 허나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 믿는 것 같았다. 그의 손톱은 모두 벗겨져 있었는데, 나는 갑자기 도색이 벗겨진 복도 벽이 떠올랐다.
"한 달 전쯤인지 세간에 제 그림과 같은 것이 유통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파국을 예상했습니다. 볼 것도 없이 진품입니다. 어쩌다 그런 노상에 흘러들었는지 몰라도, 진품이 시중에 도는 이상 곧 탄로 날 겁니다. 예술이란 영혼을 태워 그 탄 재로 그려내는 것이라 하니, 제가 만든 모조품엔 사람을 홀리는 힘이 없습니다. 옆에 놓고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진품인지 바로 알겠죠. 그렇기에 저는 이 순간을 두려워하며, 누구에게도 그림을 팔지 않은 겁니다."
좌절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한 흐라발은 힘없이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온 고흐의 그림에 매달리며 한심하게 웃고 기뻐했다.
"하지만 다행입니다. 저만 절망을 맛본 줄 알았는데, 빈센트같이 우직한 예술가도 욕망을 버리지 못했으니까요. 그는 저보다 열정적이었고, 그림을 알아보는 재능도 있었으니 그가 더 했을 겁니다. 굉장한 유혹이었겠죠. 우리는 예술의 길목에 들어서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미숙한 고흐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버리지 못했군요. 이래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눈을 끌 자극적인 요소가 모두 지우고서야 타협하지 않느니만 못하군요. 그렇게 약하니까 자살 따윌 하는 거지. 어리석은 빈센트."
흐라발은 미친 사람처럼 낮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고흐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의 착각을 정정해야 했다.
"아니, 그렇지 않네."
"제게 팔리는 그림을 논하십니까?"
"나는 문외한이라 잘 알지 못하지만, 고흐는 일생 여러 그림을 모작하며 공부했지만 한 번도 속인 일이 없네. 고흐도 분명 이 그림이 발표되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테지. 그렇기에 그는 이 그림을 공표하지도 않고, 판 적도 없네. 심지어 가장 가까운 형제에게도 보이지 않았지. 자살한 그해에 어떤 절박한 마음으로 그렸건 말이야."
흐라발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림은 그가 자살하여 유산을 정리하던 도중에 방에 숨겨놓은 것을 발견한 것이야."
"아."
탄식성.
"아아... 그는 진정 예술가였군요."
흐라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휘청거리며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족히 수십 년간 제자리에 붙박여 있었던 것 같은 카펫과 커튼을 모두 맨손으로 잡아 뜯었다. 너덜너덜한 쪼가리가 벗겨지자, 거센 햇볕이 실내로 내리쬐었다.
그리고 흐라발은 맨눈으로 하늘 위의 태양을 직시했다.
"저것은 황금입니다."
그는 애달프게 말했다.
"또 쟁반입니다. 그리고 광륜이며, 불타는 화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내 쪽을 응시했다. 태양에 노출된 눈은 마르고 타들어 가, 붉은 핏줄이 잔뜩 올라 있었다. 그의 눈은 날 찾으려는 듯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결코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떠오르는 건 그게 답니다. 쟁반, 광륜, 금괴, 화구... 모두 앞선 선인들의 답습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괴롭습니다. 저것을 볼 때마다 제가 얼마나 착상 없는 존재인지 되새김하게 되기에, 저는 그것이 괴롭습니다!"
흐라발은 실명했다.
"왜 저에게만 뭐라 하십니까! 이 시대는 본래 창작이 결핍한 시대인데! 순수한 창작이란 불가하고, 세습과 답습, 모방만이 의미 있으니, 차라리 나는 창작하지 않겠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붓을 잡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의 모습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것을 직감하고, 그를 멈춰 세우려고 붙잡았다.
"나의 그림을 보라! 이 무수한 파편을 보란 말이다! 이곳에 진정 내 손에 의해 탄생한 창작은 없다! 붓끝이 갈라져 생긴 미세한 흔적 하나하나가 모두 모방품이다! 이 그림을 묶어둔 구조의 결합은 위태롭기 짝에 없어, 아주 낮은 열에도 처참하게 붕괴하여 녹아내릴 물감 덩어리에 불과하단 말이다! 여기에 내 그림은 없다! 나의 자취는 오직 혼돈 속에서만 발생하여, 나조차도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다! 내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무슨 생각인가! 진정하게!"
그는 자신이 그리던 이젤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 부자연스럽고 극적인 발광에, 옆에 세워둔 촛불이 바닥에 떨어졌다. 먼지와 그림으로 가득한 창고 안에 삽시간에 불이 번져나갔다.
"고작 모작일 뿐이야! 되돌릴 방법은 많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는 악을 썼다. 이 마른 몸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내가 붙들고 잡아당기려고 해도 그는 도통 움직이지를 않았다. 근육은 시체처럼 딱딱했다.
"그렇다면 난 차라리 신을 저주하겠다! 내게 애타게 끓는 열망만을 주고, 일말의 재능조차 주지 않은 신을 원망한다! 나는 공동이다! 무엇이든 음으로 바꾸는 마이너스다!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그대들을 저주한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모든 작가를 저주한다!"
그는 악을 쓰며 날 밀쳤다. 그 직후, 바닥을 타고 번진 불길이 그의 옷에 묻은 시너를 따라 맹렬히 질주했다. 산채로 불타며 흐라발은 비명처럼 절규했다.
"괜찮습니다! 이건 나무를 태우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가짜 인간입니다! 사는 흉내를 내었을 뿐인 삶의 모방품입니다! 당신은 사람이죠, 저는 그것이 너무 부러워서...."
그의 외침은 끝맺음 짓지 못했다. 화마에 완전히 삼켜진 그는 광기에 젖어 그렇게 불 속으로 사그라졌다. 고전적인 최후였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를 구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고 성급히 자리를 떠났다. 마지막 순간에 단백질 타들어 가는 소리 속에 나지막한 음성이 들렸다.
"아, 불이야. 나도 이렇게 절박하니, 분명 예술을 완성할 수 있겠지. 내 혼을 태워서...."
실제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모든 것이 불길이 만든 환청인지 도무지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란 건 분명했다.
긴 여정이 비해 모든 것이 지나치게 허무한 결말이었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번 사태에 인공적인 개입을 강하게 느꼈다.
모든 것이 끝에 이르러 어색하고 작위적이었다.
기자들에게 몸살을 앓은 흐라발이 어째서 현관문을 열어뒀을까.
흐라발이 그림을 베꼈을 뿐이라면 어떻게 날 그리 잘 알고 있었을까.
마지막의 갑작스러운 발작은 또 무엇이며, 그 마른 몸에서 어떻게 날 뿌리칠 만큼 강한 힘이 나왔는가.
나는 불타는 아파트를 바로 빠져나가지 않았다.
대신에 굳게 닫힌 문을 모두 열고 다니며, 무언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아 헤맸다. 이 아파트가 모두 타고나면, 겨우 찾아온 모든 단서가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이 모든 광기 어린 사연이 악몽의 전초에 불과한 것이다.
가득 찬 연기를 마시며, 의식이 몽롱해지는 와중에 나는 그의 침실에서 한 노트를 발견했다. 흐라발의 연습용 스케치 노트로 이런 것은 직전에도 몇 권씩 봤기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대신 빠르게 훑던 도중, 나는 강한 위화감을 느끼고 몇몇 그림을 다시 봤다.
잠시 후, 나는 그 노트만을 들고 아파트에서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