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화성 전야
5월의 런던.
비가 내리는 계절이 되었다. 봄을 묻혀서 내려온 물방울은 지면에 스며들어, 품에 안은 생명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차가운 빗물에 놀란 어린 씨앗은 허겁지겁 싹을 내놓았고, 땅 위로 갓 태어난 싹이 머리를 바짝 내놓았다.
생명에게 고된 겨울이었다. 겨우내 소리 없지 잠들어 있던 들짐승이 하나둘 굴 밖으로 고개를 내밀곤, 바뀐 도시의 모습에 놀라며 새 터전을 찾아 분주히 떠돌았다.
하늘에는 보기 드문 철새 떼가 런던에 안착하여 내려왔다. 불탄 도시에 둥지를 짓고, 알을 낳는 새들은 도시의 또 다른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색이 없는 도시에 검푸른 심해의 색상이 덧칠해졌다.
서늘한 겨울이 가시니 도시는 뭍인지, 수중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습기로 축축해졌다. 수분을 빨아들일 목조 건물이 모두 타버린 탓이었다. 시내에는 미지근한 습기가 거미줄처럼 달라붙었다.
생명이 트는 바다였다.
그런 런던에 또 하나의 소란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호외요, 호외!"
대화재 이후 일손이 부족한 런던에 멜빵을 입은 인쇄소 직원이 신문팔이 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는 큰 신문 가방 하나를 가득 채운 채 소리 질렀다.
사실 굳이 외칠 필요는 없었다.
고작 5분 만에 그는 꽉 찬 가방 대신 주머니 가득 동전을 채우고 인쇄소로 돌아가야 했다. 새벽부터 분주히 신문을 증쇄하던 인쇄기가 과열되어, 찍혀나온 신문은 반쯤 잉크가 번져서 읽기도 쉽지 않았지만 인기는 어느 때보다 많았다.
그렇게 찍어내고도 물량은 부족했고, 거리에는 신문 하나를 두고 서너 명이 붙어서 보고 있는 광경도 흔했다. 비록 런던 시민이 신문을 애호한다고 하더라도 흔한 광경은 아니었다.
광장으로 나오면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잘 차려입은 신사들이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 광장을 재현이라도 하듯이, 기사를 놓고 격정적인 토론을 이어나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중은 진실과 낭설 사이에서 불안해하며, 그 똑똑해 보이는 웅변가들의 설전을 잘 들으려고 가까이 가려고 안달이었다.
그래서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이런 것이었다.
"우주인의 정체는 화성인이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그 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소."
"아니, 그들은 금성인이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지금 상황을 예견했지."
"금성이 생명체가 살기엔 너무 작은 별이란 건 17세기에 이미 증명된 바요. 하지만 화성이라면 우리 지구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종과 문명이 싹틀 수 있지. 그것이 과학이요."
"망원경이 거듭 진보하여, 이제는 화성 표면도 관측할 수 있게 된 지 오래요. 그런데 한 번이라도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단 소식을 들은 적 있소? 화성에서 지구를 관측했다면, 진작에 빅 벤을 발견했을 텐데 말이요. 그것이 화성이 무주공산이라는 증거이지."
"그것은 금성도 마찬가지 아니요?"
"뭣 모르는 소리. 금성은 노란 막으로 덮여 있어서 안을 볼 수가 없으니, 반대로 이것이야말로 그 안에 고도로 발달한 우주인이 산다는 증거 아니겠소? 행성을 덮을 정도로 커다란 막을 씌우는 기술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지 않소."
그런 비현실적인 대화를 들으며, 아무 근거 없는 우주 전문가들에게 동조한 시민은 또다시 패를 가르고 누구 말이 옳은지 열정적으로 토론했다.
광장뿐만 아니라 런던 전체가 들썩였다. 시내 어디서나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우주와 행성, 또 우주인에 관한 토론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의견은 전혀 교육받지 못한 사람의 헛소리부터, 종교적으로 사태를 해석하려는 신학자, 당장 자경단을 조직해서 대응해야 한다는 열정적인 자원병까지 아주 다양했다.
하지만 누구도 우주인 그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진 않았다.
모든 소란은 일간지 <더 런던>에 실린 한 기사에서 기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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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시민들이여, 도시는 역사상 유례없던 대위기를 앞에 두고 있다. 그것은 러시아 제국이나 프로이센 왕국 같은 구세계의 위협도 아니며, 아메리카 같은 제삼 세계에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적은 우리의 머리 위를 날아서, 한 번도 적군이 발을 들이지 못한 런던 한복판에 손쉽게 입성했다.
적은 화성, 금성, 혹은 그보다 먼 태양계 바깥에서 찾아왔다. 그들은 우주를 항공하는 기술을 필두로 인류보다 뛰어난 과학력을 가진 존재로, 100년 전 넬슨 제독이 목숨을 바쳐 나폴레옹의 침공을 막아낸 이래, 우리는 보다 월등한 적과 처음 마주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런던의 하늘에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무고한 시민들을 끌고 가 식량으로 쓰고, 해부하여 연구하고 있다. 작금과 같이 긴급한 사태에도 군대는 묵묵부답으로 보호의 의무를 방치하고 있다.
시 민들이여, 무력하게 침략자들이 안방에 쳐들어와 가족을 해치기를 기다릴 텐가? 아니면 맞서 싸울 텐가! 런던 소방대는 결코 시민과 도시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야간 순찰대는 두 배로 늘리고, 대원 모두에게 개인용 호신구를 지급할 것이다.
우리는 건장하고 용맹무쌍한 청년과 잘 훈련받은 사냥견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함께하고자 하는 투사는 당장 가까운 소방대 지부로 달려가 지원하라. 당신의 부모, 형제, 부부, 자식의 안전이 당신의 손끝에 달렸다. 여왕폐하 만세!
- 런던 소방대 인력 공고
(1896년 4월 22일, 일간지 <더 런던> 17호 등재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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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실제로 실린 기사였다.
정성스레 사진까지 곁들여진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광고였지만, 덕분에 1면을 차지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특집 기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은 전혀 호외도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기사에서 두 가지 주목할 점을 찾아냈다.
첫째로 광고주의 신원이었다. 런던 소방대와 <더 런던>, 얼핏 전혀 무관해 보이는 두 기관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인지 아는 내게 이 광고는 아주 수상쩍게 보였다.
둘째는 사진이었다. 조잡한 화질의 사진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멀리 보이는 빅 벤의 실루엣으로 간신히 런던을 배경으로 한 밤풍경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문제는 하늘에 찍힌 것이다.
사진 상단에 부자연스럽게 비친 광원은 마치 그곳에 비행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형체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고전적인 UFO의 스테레오 타입 그 자체였다.
나는 그것을 보며 옛날에 느꼈던 부조리를 다시 한 번 회고했다.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그날, 하녀 마리는 동상을 보고도 인체를 연상하지 못했다. 이미지란 시대로부터 학습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고전적이라고 느끼는 이 UFO의 형상은 대체 무엇을 본뜬 것이란 말인가.
실존하는 UFO가 런던 상공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 모든 의문을 뒤로하고, 나는 약속 장소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런던 최고의 레스토랑 '르 호튼' 인근에 자리 잡은 동양식 찻집으로, 최근 파리에 유행하는 것처럼 차와 커피 같은 음료와 간단한 식사를 제공하는 현대식 카페였다.
런던에는 이런 세련된 가게가 의외로 많지 않았는데, 이런 신축 가게를 바로 알아보고 약속 장소로 지정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아, 선생님, 오셨습니까!"
내가 카페 안으로 들어오자, 먼저 안쪽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시선을 끄는 동작이었기에 가게 밖에서 유리창 너머로 지나던 숙녀들이 실내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곤 하나같이 그 특출난 외모에 놀라며 감탄했다.
그는 자신의 특이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지만, 나는 그만큼 자신의 외모를 잘 써먹는 사람을 알지 못했다. 그 본질을 아는 나조차 종종 그가 모범적인 청년처럼 보이니 대단히 뻔뻔스러운 사내였다.
"요즘 세상에 무슨 난리가 그렇게 많은지."
"좋은 징조 아닙니까?"
내가 그의 맞은 자리에 앉으며 푸념하자, 남자는 웃으며 반문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우리는 돈을 벌지요. 특히나 선생님은 인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모르는 소리. 웃으며 할 얘기가 아니네. 날 찾는 사람은 뭣도 모르는 시정잡배뿐이야."
"그러면 더욱 좋죠. 뭔 얘기를 해도 곧이곧대로 믿으니, 돈을 뽑아낼 방법이 수도 없지 않습니까. 대중의 무지는 우리 같은 사람의 힘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선생님?"
나는 그 말에 질색하며 단호히 부정했다.
"자네와 날 그런 식으로 묶지 말게. 나는 자네와 같은 일을 할 생각은 추모에도 없으니까 말이야."
"런던에서 탐정으로 알려진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귀가 가렵군요."
남자는 그렇게 넉살을 떨었다. 그의 이름은 앨런 블랙, 흔히 말하는 사립 탐정이다.
그의 전문 분야를 생각하면, 그보단 협잡꾼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모로 보나 내가 평소 즐겨 어울릴 만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번 일을 맡기기에 그보다 적임이 없었다.
"장사 이야기는 차차 접어두고, 이런 시기에 절 부르신 건 제법 괜찮을 일감이 있다는 뜻이겠죠. 오늘 떠들썩한 '그것'에 관한 건가요?"
"자네마저 바보 대열에 합류할 생각인가?"
내가 질색하자 블랙은 의외라는 듯이 눈을 치켜뜨곤 곧 웃었다.
"이것 참, 굉장한 호재입니다. 제가 이런 분야에서 선생님보다 정보가 앞서는 일은 드물었는데 말이죠."
"그게 무슨 말인가?"
"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 저는 철저한 기계론자입니다. 예컨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보다 추수절에 작 익은 칠면조 다리 한 점에 가치가 있다고 믿죠. 종교인들의 수상쩍은 마법이나 주문보단, 비싼 값이 붙을 만한 서양식 도자기에 흥미가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시겠죠. 원래 우주인 같은 웃기는 소문은 제 관심사 밖입니다."
나는 그가 합리적이라고 하는 말에 웃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다. 내가 일찍이 마법이란 것에 숙달하고 사용하였으니, 이 세상이란 얼마나 상식이 의미 없는 것인지 우습기 짝에 없었다.
"작년에 그런 저도 솔깃할 만한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꽤 되었군."
"그런 편이죠. 혹시 운석 소송을 기억하십니까? 결국 흐지부지되어서 곧 잊혔습니다만, 그 무렵 들은 정보입니다. 실은 제가 그리니치 대학에 아는 정보원 한 명이 있는데, 그가 말하기론 그리니치 천문대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겁니다."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겉보기와 달리 그는 본업에 있어선 아주 진지한 사내였기에, 나는 그가 진지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봤다.
"그리니치 천문대는 1년째 가동을 멈추고 있습니다. 신규 직원을 더 뽑지도 않고, 정기적으로 주도하던 천문학회도 열지 않고, 직원들은 짧게는 수일, 길게는 수 주까지도 시설에 체류하며 보안에 철저하다는 것이죠. 저는 늘 1년 넘게 세계 최고의 천문학 기관이 비밀로 해야 할 정보가 무엇인지 생각해 봤죠. 육안으로도 보이는 금성이나 화성 따위는 비밀이라 할 수도 없을 겁니다. 거기서 저는 추측했습니다. 혹시 그 소문을 아십니까? 태양계 끄트머리의 어둠 속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9번째 행성이 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성 X. 실존한다면 모든 천체가 그랬듯이 라틴의 신 이름을 따서, 명왕이라 불릴 그 행성 말이군."
"저는 그들이 그걸 찾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짜잔. 우주인들을 발견한 거죠."
"조금 전에 스스로 기계론자라고 하지 않았나? 모두 근거랄게 없는 추측 아닌가?"
"아하, 기계적인 상상이었죠."
그는 언제 진지했느냐는 듯이 능청을 떨었다.
"하지만 제법 잘 맞아떨어지는 극본 아닙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 문 닫은 그리니치 천문대, 이번에는 우주인까지."
"그래, 확실히 절묘하긴 하군."
블랙은 알지 못했지만, 나는 운석이 우주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그가 주장하는 것만큼 절묘한 우연은 아니었지만, 분명 그 사태는 의아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자네가 어떤 바람이 불어서 일러줬는지 모르겠지만, 내 기꺼이 참고해서 조사해보겠네. 하지만 지금은 당장 할 일을 해야지."
나는 가방에서 준비한 노트를 꺼냈다.
"이건?"
"화가의 스케치북이네."
그는 팔랑팔랑 페이지를 넘겼다. 어설픈 솜씨로 사람을 따라 그린 흔한 습작들이 스쳐 지나갔다.
"팔아도 돈은 안 될 것 같군요."
"그런 것도 보나?"
"한때 예술품 거래에도 낀 적이 있어서."
블랙은 말끝을 흐렸다. 아마 합법적인 장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그는 갑자기 어느 그림 한 장에서 멈추고는 살짝 눈썹을 들썩였다.
"이건 괜찮군요. 이런 식으로 배우다 보면 십 년 뒤쯤에 괜찮은 화가가 되겠군요. 괜찮은 주선도 가능할 것 같고 말입니다. 혹시 작가를 소개해주실 수 있습니까?"
"죽었네."
"선생님이 가져오는 일이 늘 그렇죠."
나는 문득 지금 대화를 10년 전의 흐라발이 들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무엇을 상상하건 현실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는 예술가로서 최악의 배반을 했고, 그 죄로 불구덩이에 몸을 던져서 타버리고 말았으니까. 어떤 무거운 후회도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지금 보는 그 그림이네."
펼쳐진 스케치북에는 10살 남짓 소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목탄으로 그려진 소년의 얼굴에는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 같은 오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본래 개성 없는 외모 탓인지 눈을 떼면 곧장 어찌 생겼는지 잊을 정도로 인상이 옅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소년의 본질이라는 걸 바로 알았다. 그는 처음부터 현실에 걸쳐 있는 존재였으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모습이네."
"선생님, 설마."
"성장한 소년을 찾았으면 하네. 분명 런던 어딘가에 있겠지."
블랙은 노트를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무리 뭐든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번 건은 농담으로도 듣기 힘듭니다. 옛 사진으로 사람을 찾는 건 통속 소설에나 나오는 일 아닙니까."
"대신 이름을 알고 있네."
나는 노트를 들어서 소년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악마를 쫓아내듯이, 지난 10년간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흉행을 꾸미고, 사람들을 비극에 몰아넣은 그 소년의 이름을 세 번 불렀다.
"에드워드, 에드워드.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