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지구가 가라앉는 날
그날 저녁.
나는 교외의 프랑크 저택을 방문하고자 마차에 올라탔다가, 규칙적인 흔들림과 불편한 나무 의자에 부득이하게 잠들고 말았다. 내가 잠든 사이에도 마차는 계속 달렸고, 그렇게 나는 몽중에 프랑크 저택에 도착했다.
그러니, 이것은 그날 밤 꾸었던 꿈에 관한 이야기다.
늦은 시각 도착한 나를 아서는 식사에 초대했다. 잠깐 식욕이 돌았지만, 그가 먹는 설탕 범벅의 토스트를 보고 있자니 포크를 들 마음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넓은 저택에는 나와 아서, 그리고 노집사뿐이었고, 아서 같은 자가 가사를 볼 일은 없으니 누구의 작품인지는 족히 알 법했다.
"에드워드?"
아서는 입가에 굳은 설탕 덩어리는 덕지덕지 묻힌 채 되물었다.
"그래, 혹시 집히는 바는 없나?"
"글쎄, 내가 필레몬이라는 사람은 한 명 정도 알긴 하는데, 하지만 에드워드같이 드문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모르겠네."
그는 포크를 내려놓더니 특유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꼬지 말고."
"영국에서 가장 흔한 이름을 꼽으라면 나는 기꺼이 존과 에드워드라고 말하겠어. 런던에도 한 백만 명은 있을 테고, 영국 왕실에도 에드워드 6세가 되고 싶어서 줄 선 에드워드만 다섯 명은 있을걸? 모두가 너처럼 이름만으로 통용되지 않는단 말이야."
드물게도 아서가 한 지적은 아주 상식적인 영역이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청년의 10년 전 목탄화뿐이고, 아는 이름마저 영국에서 가장 흔하여 사람을 구분하는 데 쓸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외모는 또 어떤가. 에드워드는 세상에서 가장 흔하게 생긴 부위만을 기워 붙인 인형처럼 특색이 없었다. 마치 꿈속에서 스친 타인처럼 순식간에 흩어지고 마는 희미한 존재, 그것이 바로 그의 본질인 것이다.
"탐정을 쓴 것도 어리석은 방법이었어. 그자들은 믿을 존재가 아니야. 헛되게 정보만 흘리고 만 거라고, 필로."
"아직 뭐가 결정된 것도 아니잖나."
"아니, 나는 알아. 그네들은 돈을 좇지, 그리고 부귀영화는 신념에서 가장 동떨어진 개념이기도 하고. 나는 내 학술회를 신념 가진 자로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영혼의 소유자들 말이야. 퀴리, 그녀처럼."
아서는 내 이야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특히나 부외자를 끌어들였다는 대목이 그에겐 유독 큰 불만인 것처럼 보였다.
그의 불만은 조직의 존망을 위협받은 지도자의 것보다는, 비밀 기지를 부모에게 고발당한 아이 같은 것이었고, 나는 그에게 한 마디 상의 없이 일을 진행 시킨 것을 사과했다.
그러고도 앞으로 학술회의 정보를 말없이 외부로 흘리지 않도록 약속을 한 뒤에야 그를 달랠 수 있었다. 아서의 외모 탓인지 동갑보다도 한참 아이를 상대한 피로감이 남았다. 최근에 적절한 예를 들자면, 앨리스를 상대할 때 이런 느낌을 받곤 했다.
우리는 다시 식사로 돌아갔다. 정확히 말하면, 아서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에 음식을 쑤셔 넣다가 헛기침을 하며 와인을 마시는 과정으로 돌아갔다고 할까.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나만 먹는 건 불공평해."
"식사를 무슨 벌 받는 것처럼 말하지 말게."
나는 그의 아이 같은 투정을 일축했다. 그라면 어떤 방법을 쓰건 더 좋은 식사를 마련할 수도 있었겠지만, 스스로 관심이 없을 뿐인 줄 알았기에 동정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식사가 싫은 것처럼 자꾸 식기를 내려놓고 또 다른 화제를 꺼냈다.
"네가 없는 동안 해오던 조사가 마침내 성과를 보여서 말이야."
무언가 이상한 문장이었다. 상대가 아서이니만큼 그것이 단순한 말실수는 아닐 거란 생각에 나는 곧바로 물었다.
"파리에 다녀온 일을 말하는 건가?"
"한동안 안 보인다 싶더니, 파리에 있었나? 그 얘기도 나중에 들으면 좋겠네."
뭔가 대화가 좀처럼 맞물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느끼는 위화감을 아서가 조금도 알지 못하는 듯하여 더욱 당황하였다.
"며칠뿐이었지만."
"이제 중요하지 않은 볼 일은 더 없겠지? 또 말을 끊을 거라면 지금 해둬."
그렇다고 아주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사는 작년부터 해오고 있었어. 착상 자체는 전부터 있었지만, 막막하여 어디서 손대어야 할지 몰라서 손대지 않고 있었지. 네가 가능성을 보여주기 전까진 말이야."
아서는 그렇게 거창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알다시피 오라클은 오래전부터 하나의 계산을 해오고 있었어. 나는 그것이 인류의 파국을 읽어내는 수치라고 믿었고, 실제로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산출값이 차곡차곡 증가했지. 고작 1년 사이에 오래토록 숫자 1에 머물러 있던 값이 4까지 늘어난 거야. 단시간에 사료가 쌓인 덕분에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지."
나는 이 장황한 그의 말투에서 묘한 향수를 느꼈다.
"근래 런던에서 일어난 일 중 가장 참혹했던 것이 뭐라고 생각하지? 물론 런던 대화재였지. 하룻밤 사이에 수십만 명의 아이가 죽어나가고, 화재 피해는 영국 경제를 반세기는 퇴보시켰다고 말할 정도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 끔찍한 밤 이후에도 오라클의 수치는 변하지 않았어. 나는 거기서 결론을 역산해냈지."
아서는 중요한 대목이라는 듯이 악센트를 넣어서 비장하게 말했다.
"수치에 영향을 주는 건, 현상이 아니라 징조인 거야."
"그게 무슨 말이지?"
"런던 대화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끔찍한 파국이 일어날 거야. 그 시작에는 오라클이 계산한 요인들이 있겠지. 필레몬, 너처럼 말이야."
그는 신탁을 내리는 신처럼 말했다. 반은 신이니 아주 틀리진 않은 말이었다.
"거기서 내가 얻은 착상은 이래. 실은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내가 처음 오라클을 발견한 때부터, 그곳에는 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어. 로마자에는 0이 없으니 그게 초깃값이었다고 하면 이상한 일은 없지만, 그래도 이런 정교한 기계의 설계자치고는 허술한 마감이었지. 세상에 1과 0, 그러니까 존재와 비존재만큼 큰 격차는 없단 말이야. 그 점조차 간과했다는 건 이상한 일이지."
다소 편집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 의문은 꽤 합리적이었다. 나 역시 은연중에 넷이라는 생각을 쭉 품어왔으니, 설계자의 의도로 치면 아서의 해석이 옳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 거야. 오라클이란 기계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곳에 런던이란 도시가 세워지기 전부터, 우리 존재를 파멸로 이끌기로 예정된 존재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야. 아, 그리고 우리는 작년 마침내 알게 되었지."
아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직접 말하는 것이 세련되지 못하다고 여긴 것인지, 차마 입에 담기에도 불경하다 여기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우린 이미 알았다. 런던의 지하, 런던 이전 시대에 이 자리에 있었던 고대 로마의 도시와, 그들을 유혹하여 파멸로 이끈 끔찍한 아가리의 존재 말이다.
나는 그것의 이름을 몰랐기에 가장 어울리는 형태로 불렀다.
"론디니움의 악마."
"이런, 작명의 기회를 준 내가 잘못이지, 그치?"
내 대답에 아서는 기어코 딴죽을 걸었다. 나는 그를 노려봤다.
"기계가 완성하고 반세기가 지나고도 숫자는 언제나 1이었어. 하지만 그것이 단시간에 빠르게 늘어난다는 건, 심판의 날이 곧 도래한다는 뜻이겠지. 그때는 나팔수와 불비 대신에 추락을 겪겠지만."
"자네는 늘 어렵게 말하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조사했다는 게 대체 뭔가?"
"나는 작년 이후 늘 지하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지. 비쩍 마르고 죽어가는 로마인들이 뭘 할 수 있겠느냐만, 그들이 숭배하는 대상은 얘기가 다르니까. 지금 추세라면 숫자는 20세기가 도달하기 전에 끝까지 찰 거야. 우리는 새로운 세기 이전에 몰락을 겪을 테고, 그 시작은 분명 도시의 추락이겠지."
아서의 말은 허황하여 광인의 주절거림처럼 들릴 정도였다. 그는 몇 가지 심증만 가지고 논리를 전개하여, 터무니없는 몽상에 도달해 있었다.
나는 그의 불길한 망상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아서가 말하는 것과 아주 비슷한 광경을 두 눈으로 본 적이 있었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케이시 오' 제럴드 학장이 꿈을 통해서 보여줬던 세상의 종말, 그 예언 속에서 도시는 볼품 없이 추락하여 발 디딜 지상조차 거의 없었다. 날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라고만 여겼지만, 모든 정황이 그것이 머지 않은 미래라고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지혜란 미래를 보는 힘을 말한다.
그러니 인간 중 가장 지혜로운 자의 예언만큼 정확한 예측은 없는 법이다. 나는 충격적인 계몽 속에서 몸을 떨었다.
"제이콥 섬은 가라앉았지. 누구라도 폭풍우의 영향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 섬은 그보다 전부터 가라앉고 있었어. 필 에식스 백작은 그 점을 알아보고 오랜 복수의 계획을 세운 거야."
나는 겁에 질려 독백했다.
"런던이 정말로 침강하고 있다고?"
"도시는 비대해지고 있지."
아서는 은 수저로 접시를 두드렸다. 불안한 진동음이 실내를 울렸다.
"공장이 세워지고, 고층 건물이 들어서며, 인구는 나날이 늘어나지. 누구라도 아는 간단한 중력의 법칙이 적용되는 거야. 무거운 것은 아래로 떨어지지. 위에서 아래로, 위에서 아래로...."
마치 종을 울리는 것처럼 반복하던 아서는 아예 식기를 내려놓았다.
"어때, 제법 그럴싸한 추측이지?"
"신 나며 할 이야기는 아닌 줄 아네."
아서는 내 말을 무시하곤 미소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접시는 반도 비우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탁상공론이었지. 현상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정보가 필요했지만, 일손은 턱없이 부족했어. 작업에는 큰 용기와 지혜가 필요했지만, 아주 긴 끈기가 중요했지. 그러니 일이 바쁜 너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던 거야. 그렇다고 내가 할 일도 아니었지. 나에겐 저택을 지킬 의무가 있거든. 그래서 나는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적절한 인재의 도움을 받기로 했어. 그녀는 겉보기엔 그리 보이지 않지만, 세상의 비밀을 파헤치는데 아주 열정적이면서도 재능이 있었지. 무엇보다 시간도 충분했고 말이야."
"그녀?"
나는 바로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아는 한 학술회 관계자 중 여인은 둘뿐으로, 그가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마리에게 위험한 일을 시켰을 리가 없었고, 퀴리 부인은... 이미 사라지고 난 이후였으니 말이다.
그러자 아서는 태연하게 듣고 싶지 않던 대답을 돌려줬다.
"소녀 리들 말이야. 그녀는 이번 일에 꽤 적임이었지."
"뭐?"
나는 책상을 딛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게 상의도 없이 내 학생을 지하로 내려보냈단 말이야?"
"성인에겐 제 운명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 법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 어린 아이를!"
"백작님을 너무 탓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소리지르다가 식당 바깥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불 한점 없는 컴컴한 복도에선 그만큼 어두운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차분한 걸음으로 실내에 들어왔다. 나는 그녀를 성으로 불렀다.
"리들, 이런 시간에 왜 여기 있지? 기숙사에 있을 시간인 줄 안다만."
"제가 고집을 부렸습니다. 백작님은 제 부탁을 듣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셨을 뿐이고요."
앨리스의 변호에 아서는 여봐란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네가 부탁한 것과, 그걸 들어주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따분한 소리. 자네가 교수가 된다고 들었을 때, 이렇게 지루한 교수가 될 줄은 몰랐지. 케임브리지의 프랑스 어 교수같이 말이야. 리들 양, 여기 머리 굳은 노인에게 자네가 보고 온 것을 직접 좀 말해주겠나?"
"예, 그러려고요."
가지런히 모인 그녀의 두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팔에 가려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하드커버 표지에는 어떤 삽화가 그려져서 꼭 동화책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템스 강의 수위를 측정했습니다. 도시가 침강하고 있다 해도, 해수면의 높이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요. 1월부터 지금까지 5개월, 사료로는 짧은 기간이지만 변화는 뚜렷했습니다."
"강 수위에는 변수가 너무 많아."
나는 그녀의 방식에 의문을 품으며 그녀가 보이는 표를 살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를 보니까 뚜렷해지더라고요."
"단위는 뭐지?"
"인치입니다."
표에 적힌 숫자는 기복이 있으면서도 꾸준히 상승했다. 나는 그 평균값을 빠르게 암산했다.
"20인치? 고작 4개월 만에 수위가 20인치나 상승했단 말인가?" (*약 0.5m)
"이제 조금 현실이 보이나, 필레몬?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이 추세라면 4년 뒤에는 버킹엄 궁전이 침수된단 말이야. 그러면 런던은 멸망하는 거지. 그 이전에 추락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아서의 말을 신호처럼 앨리스는 책을 가져가서 다음 장을 넘겼다.
"얼마 전, 런던 지하에 있는 도시, 교수님이 다녀오신 론디니움에 다녀왔어요."
"그 위험한 곳에 홀로 내려갔단 말인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발견했어요."
"뭘?"
"지하, 끝도 없는 지구의 밑바닥이요."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론디니움을 말하는 건가?"
"론디니움은 끝이 아니었어요. 그 아래로도 끝없는 공동이 이어지고, 또 결국 도착하고 알았습니다."
앨리스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내게 보였다. 어딘지 모를 절벽과 고원이 묘사된 높고 웅장한 자연물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지구는 비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