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89화 (89/232)

§89. 구름밤 흑운은 어디로 가는가

그날 나는 그대로 귀가하여 숙면했다.

나는 여전히 꿈에서 깨지 않았는데, 어떻게 꿈속에서 잠들 수 있는지 의문스럽기만 했다. 어쩌면 전날 꿈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현실이고,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것은 어젯밤 꾸었던 꿈에 관한 이야기다.

4월 23일 숙소.

나는 아침부터 세차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서 문을 열었다. 방문 앞에는 브라운 여사가 어쩐 일인지 기둥만큼 두꺼운 팔을 모아 팔짱을 낀 채, 미간을 모아서 찡그린 얼굴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허버트 씨, 손님이요."

"누구지?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그녀의 등뒤로 나타난 것은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양복을 입은 한 신사였다. 귀족이라기보단 전형적인 벼락부자처럼 옷이 안 어울려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허버트 선생님. 이른 아침 실례합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저명하신 선생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 찾아온 건 우주인에 관해 여쭈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잠이 덜 깬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가, 다시 브라운 여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를 쫓아내기로 했다.

"미안하지만, 이번 건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전혀 없네. 먼길 찾아오느라 수고했지만 미안하네."

"잠깐만요, 선생님. 한 가지만, 한 가지만 말씀해주세요. 우주인이 우릴 공격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장사를 좀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문을 아예 닫아버렸다. 바깥에서 선생님, 선생님, 우주인도 구두를 신습니까?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브라운 여사의 축객령에 곧 사라지고 말았다.

잠시 후, 모든 소란이 진정되고 방에서 다시 나온 나는 브라운 여사를 향해 최대한 미안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미안하네. 어쩌다 내 주소가 탄로 났는지 모르겠는데, 내게 손님이 찾아오면 여기 없다고 좀 해줄 수 있겠나?"

그녀의 비위를 거슬러서 내게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기에, 나는 조마조마한 채로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브라운 여사는 그저 한숨을 푹 쉬고 말았다.

"아침부터 할 일 없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그 뒤로 놀랍게도 날 찾는 손님은 정말 아무도 없었다.

간간히 1층 입구 쪽에서 작은 실랑이가 들리긴 했는데, 브라운 여사가 어찌 잘 처신했는지, 아니면 하는 일 없이 죽쳐 있는 브라운 씨가 집주인다운 면모를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내 방까지 도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아침 내내 게으름을 부리다가 식사 때를 놓치고 만 나는 늘 그리하듯이 여급에게 몰래 밀크티를 부탁했다. 소녀는 나름 요령이 생긴 것인지 브라운 여사의 호통 한 번 듣지 않고 몰래 잔을 내 방까지 가지고 들어왔다.

"고맙네."

그런데 평소라면 이쯤에서 수줍게 반응 없이 방을 나갔을 여급이 갑자기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벽 쪽에 몸을 붙이고 안절부절못하는 것 아닌가.

"뭔가 볼일이 남았니?"

"어르신, 어르신은 정말 뭐든지 아시나요?"

내가 묻기가 무섭게 그녀는 쏜살같이 질문을 던졌다.

"누가 그러든?"

"다른 사람들이요."

"다른 사람 누구?"

"아까 찾아온 신사분들께 몰래 여쭈니, 어르신은 뭔가 일이 생길 때마다 뭐든 아신다고... 그래서 꼭 얘기를 들어봐야 한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소녀의 동심을 배신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것이 용기를 짜낸 질문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나는 책임질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니.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아는 것은 사실이지만, 큰 차이라 할 정도는 아니야. 차이는 사고법에서 나온다네. 남들이 보려 하지 않는 관점에 대해 말하니, 그게 그들에겐 퍽 신기하게 보였나 보지. 하지만 뭐든지 안다는 건 분명 헛소문이네."

그러자 소녀는 눈에 띄게 실망하여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러면 어르신도 우주인에 대해서는 모르는 거네요."

"그걸 묻고 싶었니? 유감이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단다."

우습게도 여급의 모습은 어디서 본 것처럼 아주 낯익었는데, 나는 그것이 마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처음 마리를 데리고 왔을 때, 그녀도 이렇게 어리고 미숙했더랬다.

한 번 그리 생각하고 나니, 나는 이 가여운 소녀가 도무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힘없이 방문을 나서는 작은 등을 향해 참견 한 마디를 얹고 말았다.

"그래도, 우주인이 널 납치하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렴."

소녀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제가 그걸 물어볼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검지를 들어 이마를 툭툭 쳤다. 그녀는 여전히 맹한 얼굴로 헤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주인에 대해서 모르신다 했잖아요."

"간단한 추론이란다. 네 몸을 보렴."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너는 또래보다 훨씬 말랐잖니. 네가 우주인이라면 작은 사람과 큰 사람 중 뭘 먹으려 하겠니?"

"아."

"오늘 만은 브라운 여사에게 감사해야겠구나."

여급은 화색이 되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나 근심이 컸었는지, 신이 난 나머지 문을 닫는 일조차 까먹고 방을 나섰다. 결국, 나는 스스로 문을 닫아야만 했다.

다음 손님은 내가 한참 늦장을 부리다가, 거리가 한산해져 슬슬 외출하고자 옷을 다 갈아 입었을 때 찾아왔다.

"이봐, 저기, 내가 방해한 게 아니면 좋겠는데."

"아니, 괜찮네. 브라운, 무슨 일인가?"

단정하게 콧수염을 다듬은 뚱뚱한 중년인은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문을 조용히 닫고는 누가 들으면 큰일 나는 비밀을 속삭이는 것처럼 말했다.

"실은, 자네가 이런 일로 아주 유명하다고 들어서... 나쁘지 않게 들었으면 좋겠는데...."

"우주인 말이군."

"그래, 그거! 어떻게 알았지?"

"이런 때 날 찾는 손님이야 늘 같은 화제를 꺼내기 마련이니까."

"어... 그렇군."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갑자기 그의 이런 성격이 언제 생긴 것인지 궁금해졌다.

브라운 여사와 같이 기센 여인과 함께 살면서부터? 아니면 원래 이런 성격이었기에 그런 여인과 만나서 결혼한 걸까? 실은 브라운이 잡혀산다고 하긴 하지만, 여사와 함께 있을 때 그는 꽤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로 우주인이란 게 있을까? 그러면 군대가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은데... 여왕폐하께 청원하기엔 나 같이 미천한 놈과 만나주실까 해서. 실은 요즘 청년들은 군인보다 소방수가 꿈이라고 하니. "

나는 그 말을 듣고 낮게 읊조렸다.

"말세야."

"어... 나는 좋다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것도 맞는 것 같아."

"그래서 이것의 뭘 물으려 한 건가?"

"내 생각엔, 그러니까, 사실은, 잘 모르겠어.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우니까, 자네 생각이 듣고 싶었을 뿐이야. 우주인이나 이런 것들 있잖아."

"글쎄 어디서 들었나?"

"어딜 가도 다 이 얘기 중이야. 그리고 어제나 오늘 신문에서 다 그 얘기를 하고."

그는 내게 신문을 건넸다. 어제 보았던 것과 같은 <더 런던>이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곱게 접으며 말했다.

"우선 나라면 신문에 쓰인 것을 맹신하지 않을 거네. 더 알아봐야겠지만 결국 우주인을 봤다는 사람은 한 명뿐이고, 사건의 본질은 실종 사건 아닌가. 얼마 전에도 아이 도둑 같은 헛소문이 돌았지."

"음... 그렇군."

더 깔끔한 대답을 원했는지 브라운 씨는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개운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결국 그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돌려줬다.

"문단속을 잘하고 조심하면 괜찮을 거야. 군인은 사람들 생각만큼 어리석지 않네. 내 말이 무슨 일인지 알겠지? 그들은 영국이 공격받으면 어떤 상황에도 소집에 응할 걸세. 나도 그럴 테고."

"아, 그래,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제야 그는 속 시원하게 안심했다.

"아."

"왜 그러나?"

"혹시 신문 필요한가?"

"아니. 사실 평소엔 신문을 잘 읽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들 사길래 나도 사봤을 뿐이라서...."

"그러면 내가 사겠네."

"그래 주겠어?"

그는 내게 동전을 받고 화색이 되어 신문을 다시 건넸다.

"자네는 신문을 좋아하나 보지?"

"그렇기도 하지만, 이런 기사를 수집하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네. 선물로 좋을 것 같지 않나?"

"음... 그래. 나는 잘 모르겠네. 외출하나? 조심히 다녀오게.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하니...."

브라운 씨는 짧은 대화 중에 벌써 서너 번째 무서운 세상에 대해 언급하고는 방을 나섰다. 나는 가방에 신문을 잘 정리해 넣은 후에, 코트와 모자를 챙겨서 방을 나왔다.

그날 마지막으로 날 불잡은 사람은 뜻밖에도 1층에 있던 브라운 여사였다.

"이봐요, 허버트 씨."

눈을 반쯤 치켜뜬 그녀는 군더더기 없이 물었다.

"정말로 런던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해요?"

"설마. 그렇게 무너질 만큼 약한 도시였다면 진작에 사라졌을 거야. 런던은 사람도, 도시도 아주 강해."

그러자 그녀는 모든 의문이 풀렸다는 듯이 깔끔하게 말했다.

"그럼 별문제 아니네요."

런던처럼 어두운 도시에 그녀만큼 강한 담력을 가진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솔직하게 감탄하며 숙소를 나섰다.

그날 오후.

나른한 햇볕이 드는 학장실의 육혜시계에서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 특유의 잔잔한 마찰음이 들렸다. 오늘은 수업이 없는 목요일이었지만, 나는 성 헨리 8세 칼리지의 학장실에 출근해 있었다.

대학은 늘 인력난에 시달렸고, 하루라도 자리를 비워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업무로 한참 분주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나는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들어보세요, 교수님! 장담하건대 제 말을 들으시면 교수님도 더는 절 무시 못할 거예요."

눈앞의 금발 말괄량이는 평소보다 더 차분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아서의 유산 문제나 업무 등으로 충분히 정신이 번잡했는데, 그녀는 내가 상대해줄 때까지 평생 여기 있을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이지?"

나는 성의 없이 물었다. 지난 12월 이후 그녀는 매주 한 번은 내게 대단치 않은 일화를 소개하곤 했는데, 그녀는 내 인정을 받고 프랑크 학술회에 들어오고 싶은 모양이었다.

"정말 듣고 싶어서 묻는 게 맞나요?"

"그럼."

내 미적지근한 반응에 그녀는 영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그러시지만 듣고 나면 다르실걸요. 교수님이 없으신 동안 있었던 일이에요."

"오호."

그녀는 자신의 발견물이 퍽 자랑스러운지 좀처럼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그녀치곤 드문 일이었다.

나는 입으로만 흥미 있다는 듯이 추임새를 넣고, 눈으로는 계속 사무를 쫓았다. 그러자 그녀는 최소한의 편법도 허락할 생각이 없는지, 토라진 얼굴로 내 책상 앞에 쭈그려 앉았다.

"자네가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걸 리들 경께서 좋아하시진 않을 텐데."

"제 이야기에 집중을 안 하시잖아요. 그것도 되게 무례한 거예요."

"나는 좀 무례해도 혼낼 사람이 없으니까 괜찮아."

그녀는 아예 턱을 책상 위에 올리더니, 턱뼈 윗부분만 움직이며 어정쩡한 발음으로 말했다.

"그래서─교수님이 없는 동안 조사를 좀 해봤는데요."

"아까도 들었네."

"교내에 벌어진 비밀 집회에 잠입했어요."

나는 펜을 내려놓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뭐?"

"토요일 밤에 열렸던 야간 집회였어요. 주동자가 누군진 아무도 몰랐지만, 기숙사 학생이라면 누구나 알았죠."

"잠깐, 설마 약속을 어기고 다른 칼리지에 접근한 건 아니겠지?"

그러자 앨리스는 깜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아니요! 우리 칼리지 얘기예요! 장소는 남자 기숙사 옥상이었는걸요."

"남자 기숙사에 들어갔다고? 너하고는 좀 더 얘기를 해봐야겠구나."

"저 말고도 많이 들어갔어요! 사감도 없었는걸요!"

앨리스는 펄쩍펄쩍 뛰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사감이 없었다고?"

"네, 정말 이상한 일이죠? 밤이라도 언제나 한 명 이상은 꼭 있었는데, 그날따라 지키는 눈이 없었으니까요."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올드코트의 근무자들은 대학에 대한 충성심이 굉장한 편이었다. 그것이 학장의 술수인지 어떤지는 제쳐두더라도, 학생들이 그 충성스러운 사감들을 어떤 식으로 포섭하고 꼬드겼을지 의문스러웠다.

"우리는 모두 얼굴을 가리고 기숙사 옥상으로 올라갔어요. 참석 조건은 그것뿐이었죠. 옥상에 올라가니 얼굴을 가린 학생들이 아주 많았어요. 세지는 않았지만 마흔 명은 넘어 보였죠. 대화를 나누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아마 같이 온 사람들 같았어요. 저는 혼자였어서 몰래 구석에 숨어서 보고 있었죠."

앨리스의 설명에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세요?"

"아직도 동년배와 어울리는 게 힘드나?"

"네? 네?"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크게 소리 질렀다.

"제가 처음부터 잠입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잠입하는데 친구랑 같이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얼굴이 붉어진 앨리스는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말을 쏟아냈다.

"아무튼, 제가 혼자 있었던 건 얘기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거든요?"

"그래, 미안해, 계속 말하게."

"그건 처음부터 천으로 덮여 있었어요. 누가 가지고 온 것 같지는 않았고, 한참 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 같았죠. 언제 그 커다란 것을 옥상까지 올렸는지 아무도 몰랐죠. 저희야 물론 여자 기숙사에서 생활하니까 모를 수도 있다지만, 남학생들까지 모른 것은 정말 말도 안 돼요, 그렇지 않나요?"

나는 앨리스가 말하는 '그것'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모두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그런지 대학 축제 무도회 같았어요. 물론 우리 대학은 축제가 없지만, 책에서 본 미국 대학 축제 분위기랑 비슷했거든요. 서로 누가 누군지 몰라서, 그 기계를 조작한 게 누군지도 모르겠어요. 남녀 여럿이었던 것 같은데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았거든요."

그녀는 금방 주제에서 벗어나 재잘거리다가도, 완전히 탈선하는 일 없이 본론으로 돌아왔다. 분명 그녀는 내게 보고를 하는 것 같은데, 듣고 있으면 잘 짜인 이야기 하나를 듣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슬슬 말해주게. 아까부터 말하는 그것이 대체 뭔가?"

"기구에 다가간 네 명이 천막을 들추자, 안에서는 난생처음 보는 기구가 나타났죠. 저는 전에 책에서 본 적이 있어서 알았지만, 몇몇은 그게 뭔지 모르는 것 같았어요. 그도 그럴 것이, 그건 탐조등이었으니까요."

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앨리스를 보고 다시 물었다.

"탐조등, 주로 배나 등대에 설치하는 그것 말인가?"

"네, 맞아요. 전기는 대학을 가로지르는 가로등에서 뽑아서 쓰고 있었어요. 그렇게 하면 전기를 무료로 쓸 수 있는 것 같은데, 왜 지금까지 생각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전선은 지상에서 옥상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어요. 이것도 언제 설치했는지 모를 일이었죠."

일화는 이제는 학생들의 돌발 행동으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들은 올드코트의 충성스러운 사감들을 회유했고, 군용으로나 쓰이는 장비를 입수하여 설치했으며, 또 위험천만한 전기 공사를 남몰래 마쳤다.

나는 어떤 배후세력의 개입을 노골적으로 감지했는데, 올드코트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학생들을 포섭한 세력에 대해서는 하나밖에 알지 못했다.

"토끼풀십자회가 개입했군."

"아하, 우수한 수사관끼리 생각이 통했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녀는 내 한 마디에 방방 뛰며 좋아라 했다.

"하지만 그 뛰어난 의장도 결국 학생에 불과할 텐데, 대체 어디서 그 모든 자금과 연줄을 얻었는지 모르겠군. 탐조등까지 직접 설계했을 리는 없을 테고."

"장미십자회(Rosicrucianism)의 조력이 아니었을까요? 토끼풀십자회(Trifolicrucians)를 지원하는 게 틀림없으니까요."

"장미, 뭐?"

"장미십자회요. 모르세요?"

앨리스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아주 유명한 비밀결사예요! 세상에, 어떻게 그걸 모르실 수 있죠?"

"유명과 비밀. 벌써 같이 있으면 안 되는 단어가 둘이 모였는데."

"어휴, 그런 사사로운 건 신경 쓰지 마시고요."

그녀는 내 정당한 지적에 날 뭣 모르는 노인 취급하며 가볍게 넘어갔다. 나는 불쾌했지만 모르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설명을 들었다. 앨리스는 전보다 밝은 어조로, 또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기원은 프로이센 왕국 쪽일 거예요. 그렇다고들 하는데 사실 실체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딱 집어 어디라고 말할 수 없어요. 적어도 유럽 안에서 일어난 일인 건 확실해요. 그들은 흑마술과 예언, 마법, 악마 숭배를 연구하면서 카톨릭 체제를 붕괴시키고자 오랜 세월에 걸쳐 전 세계로 지부를 확장해 나갔죠. 우리 영국에서도 황금여명회와 관련되어 비슷한 소동이 있었고요. 사실 제가 살던 옥스퍼드가 이 일과 무관하지 않답니다. 하여튼!"

그녀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점점 목소리를 높이다가, 마지막에는 서서히 올리던 손을 번쩍 들고는 휘청거리며 벽면에 달라붙었다. 꼬리를 쫓는 강아지처럼 바보 같이 보였다.

그녀는 꼭 마라톤을 주파한 주자처럼 지쳐서 숨을 헐떡였지만, 그녀는 42.5km를 주파하긴커녕 선 자리로부터 5m 안팎을 몇 바퀴 빙빙 돌았을 뿐이었다.

"토끼풀십자회는 이름처럼 장미십자회에 많은 영향, 혹은 지원을 받고 있는 건 분명해요. 사실 조직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학생들을 끌어들이는데 그 이름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뭐니뭐니해도, 그들은 아주 많거든요."

"으흠."

내 무성의한 반응에 실망했는지,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책상 앞에 달려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책상 위로 뛰어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리들 경의 끈기 있는 교육이 일군 성과였다. 남의 책상 위에 올라가지 않기, 가르치는 게 분명 쉽지 않았겠지.

"으흠, 이라뇨! 대단한 발견 아닌가요? 작은 동아리 수준이 아니라 대규모 비밀 조직이라니까요!"

"그래, 한 달 전에 알았을 땐 꽤 놀랐지. 참고로 그런 구조가 된 건 그들이 점조직이라 그렇고, 그들의 의장은 뉴먼이라는 이름을 자칭하는 남성이었네. 기술력도, 행동력도 남다른 조직이야."

내 대답에 앨리스는 깜짝 놀라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왜? 내가 그 뒤로 아무것도 안 알아봤을 줄 알았나?"

"하지만... 그치만... 교수님은 파리에 갔다 왔잖아요!"

"그래, 운이 좋았지. 실은 알게 된 것은 파리에 가기 전이거든."

나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앨리스는 여전히 불만이 많아 보였다.

"그래서, 계속 얘기해보게. 탐조등,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났지?"

"아, 그래요, 으흠."

그녀는 뒤로 물러나더니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밤새 그곳에서 의식을 치렀어요. 의식이라곤 해도, 우주인과 교신하기 위해 탐조등 불을 껐다 켰다 반복한 것에 불과했지만요. 그리고 두어 시간 지나고 모두 흥미를 잃었을 무렵에 보았어요."

"보다니, 뭘?"

"우주선이요!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봤어요!"

앨리스가 갑자기 소리 지르는 탓에, 나는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건 서쪽 하늘에서 나타났어요. 어두운 밤하늘을 등진 탓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거기 뭔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죠. 그건 새보다 빠르게 하늘을 날았고, 곧 시야에서 벗어나고 말았어요. 모습을 살피려고 탐조등을 움직여도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죠. 열기구나 비행선과는 분명 달랐어요."

그녀는 지금 당장 그것이 보이는 것처럼 흥분하여 말했다.

"우주선을 본 충격에 모두 하늘을 보고 있자니, 누군가 손을 들고 외쳤어요. 저 뒤, 저 뒤에 뭔가 있다! 우리 모두 그 손끝에 향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어요. 그리고 또 보았죠. 세상에, 어두운 하늘의 그림자 뒤에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어요.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얼추 보아도 빅 벤 정도로 거대했어요. 저는 그렇게 거대한 기구는 함선밖에 알지 못했어요. 그야말로 비행 함선이었던 거죠!"

나는 무심코 그녀의 손동작에 속아서 창문을 돌아보았다. 내가 고개를 다시 돌리니, 앨리스는 혼자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것들은 잠깐 우리를 지켜보는 듯하더니, 그대로 왔던 하늘로 돌아가고 말았어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보았듯이, 그건 환각이나 착란 같은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선은 실존했던 거예요."

앨리스는 지금까지 소란이 거짓말처럼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마쳤다. 나는 그 억양에 속아서 한 편의 교훈 있는 동화를 들은 것 같은 묘한 여운을 느꼈다.

"확실히 기묘한 이야기군."

"거짓말이 아니에요. 교수님은 믿어주실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아무튼, 제 얘기는 이게 다예요."

그녀는 평가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로 날 바라보며 기다렸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그래, 솔직히, 자네한테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잘했네. 도움이 되겠어. 하지만 위험한 행동 좀 그만하게."

뒷말을 듣기나 했는지, 앨리스는 들뜬 표정으로 말없이 학장실을 나가려고 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 흔들리는 금색 머리카락을 보다가 말을 걸었다.

"아참, 혹시, 리들."

그녀는 발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날 바라봤다.

"전에 염색하거나 가발을 쓴 적이 있나? 검은색으로 말이야."

"검은색이요?"

앨리스는 자신의 금발을 손가락으로 잡아서 눈앞까지 끌고 갔다.

"아니요, 저는 늘 이 머리색깔이었는걸요."

"그래, 그러면 됐네."

"그래도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중에 금발을 가진 건 저뿐이거든요. 대체 저는 누굴 닮은 걸까요?"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눈을 찌를 사람처럼 한참을 바라보았다.

옥스퍼드에서 만났던 리들 학장은 그녀가 어린 시절에 검은 머리카락이었다고 말했다. 앨리스의 기억이 언젠가부터 바뀐 것일까, 아니면 리들 경의 불안증이 망상으로 자란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내가 꿈에서 보았던 흑발의 앨리스는 대체 무엇이지.

"그런데 갑자기 왜요?"

"아니, 그냥, 그런 꿈을 꾸어서."

그 말에 앨리스는 헤 웃고 방을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