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지하를 나는 열기구
잠에서 깨어난 나는 내가 본 것이 그저 평범한 꿈이 아니란 것을 바로 알았다.
커튼을 모두 열고, 해가 다 뜨지 않은 새벽하늘을 올려다봐도 여기가 현실인지, 어쩌면 꿈의 일부인지 알기 어려웠다. 몸은 겨울 바다에 적신 것처럼 차갑고 축축했고, 옷을 갈아입고 이불을 뒤집어써도 온기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상황은 점차 노골적으로 바뀌었다. 분명 4월 말일이 그 경계였던 듯싶다.
프랑크 저택.
가시나무로 가득 한 정원에는 누구 것인지 모를 황량한 무덤이 공터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저택의 주인인 아서조차 그게 누구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친우의 무심함에 감탄하는 한편, 정원사의 악몽 같은 이 정원에 그나마 짐을 놓을 자리는 거기밖에 없었기에 불경을 무릅쓰고 이곳에서 일을 준비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그조차도 하지 않았다.
내게는 왼 다리라는 형편 좋은 핑계가 있었고, 아서는... 그냥 아서였기 때문에 일하지 않았다. 결국 대부분의 준비를 도맡은 것은 아서의 형제인 노집사와 소녀 앨리스뿐이었다.
"열기구 준비 외에는 전부 자네에게 일임하라고 해서 관여하지 않았네만."
"그래, 모아 놓고 보니 장관이지?"
"대체 얼마나 오래 지하를 돌아다닐 생각인가. 또 저걸 전부 지하로 어찌 나를 생각이고?"
내 옆에 앉은 아서는 태평하게 쌓여가는 물자를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저건 혹시... 차인가? 이 와중에 찻주전자를 챙기겠다고?"
"차는 몸에 좋아. 탐사대도 다들 차를 마신다고 하잖아."
나는 그에게 카페인의 효능에 대해 떠드는 대신, 짐 더미로 걸어가서 스스로 그것을 옆에 치웠다.
"물을 끓이는 건 수통으로도 충분해. 찻잎만 고맙게 받겠네."
아서의 성격대로라면 이걸 조금만 중요하게 생각했어도 바로 노발대발했을 텐데, 그도 별로 진지한 것은 아니었는지 내 참견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준비한 열기구 쪽으로 다가갔다. 그라면 분명 거대한 것을 준비할 줄 알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아담한 크기의 기구였다. 그 옆에는 크기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대량의 연료통이 놓여 있었다.
"열기구 쪽은 어때? 말한 대로 연료통은 많이 준비했지만, 이래서야 무게 때문에 날기도 전에 떨어지겠어."
"그 부분은 괜찮네. 어차피 우리는 떨어지러 가는 거니까."
"나는 자살에 돈을 대는 게 아닌데."
아서는 내 말을 곡해했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실로 그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우리 목적지가 어딘지 잘 생각해보게. 연료를 많이 실은 건, 오히려 무게를 늘려서 더 빨리 내려가기 위함이야. 열기구 특성상 지면에도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을 테고, 여차하면 잉여 연료를 버려서 무게를 낮출 수도 있지. 반대로 연료를 거의 다 쓰고 돌아올 때는, 무게가 줄어서 더 빨리 올라갈 수 있겠지."
내 설명에 아서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곤 눈에 띄게 당황했다. 평소에는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눈치 빠르던 그가 이런 실수를 보이니 퍽 유쾌했다.
"아, 그래."
"왜 그러지? 우수한 탐험가를 찾는 것 아니었나?"
나는 기회다 싶어서 그를 골렸다. 그러나 아서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나는 그게 내 실수였단 걸 깨달았다. 자존심이 높은 사람의 실수를 지적해서야 좋을 일이 없었는데, 아서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기구는 잘 다룰 수 있겠어?"
"사용법이라면, 전에 암흑 대륙을 탐사하던 시절에 곁눈질로 배운 적이 있네. 하지만 그때보다 크기가 작아서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서의 퉁명스러운 질문에, 나는 허겁지겁 대답했다.
"기류라든가?"
"그래, 알다시피 기구가 작으면 바람에 크게 영향받으니까."
내 말에 아서는 갑자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미쳤나 싶었다. 시종일관 기분 나쁜 티를 내더니, 갑자기 세상 웃긴 말을 들었다는 듯이 폭소하고 있으니 말이다.
"왜 그래?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필로, 이 바보야, 지하에 무슨 기류가 흐르겠어."
잘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이쪽은 목숨이 달린 일이니, 혹시 모르잖나!"
우리는 야밤을 틈타 기구를 묘지로 옮겼다.
표면상으론 안전 문제로 방치된 웨스트 노우드 공동묘지는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보다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잔디밭에는 무분별하게 잡초가 돋아나서 허리춤까지 자라났으며, 말끔하던 잔디는 영양을 뺏긴 탓에 누렇게 말라붙었다.
묘지는 무분별한 한량과 탕아들의 모임소가 되었는지, 묘비의 절반 정도가 훼손되거나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쓰레기가 넘쳐나고, 거미줄이 군데군데 자라나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광경이었지만, 오늘 우리가 할 일도 그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좁은 카타콤 계단 사이로 수레를 비집어 넣었다. 세워서는 들어가지 않았기에 뒤집어 넣었고, 열기구나 다른 짐도 마찬가지로 일일이 다시 넣어야 했다.
야밤의 달빛 아래로 수상쩍은 인영이 몇 묘지를 오갔다. 그렇게 한 시간쯤이 지나고 마침내 우리는 지하로 내려갈 준비를 다 했다.
"저는 여기서 더 가지 못합니다."
노집사는 말했다.
"주인 어르신을 홀로 둘 수는 없거든요. 제가 없는 새에 목이라도 맬지 모르니 말입니다."
"설마, 농담치곤 고약한데."
평생을 지하에 갇혀 산 자의 농담은 쉬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와줘서 고맙네."
"영광입니다."
아서에게 어떻게 배워 먹었는지, 어울리지 않게 격조 높은 인사를 남긴 그는 올 때와 달리 마차도 찾지 않고, 걸어서 저택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이야말로 그의 남은 인생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저주받은 반쪽 피를 물려받은 그는 평생 그렇게 세상 가장자리를 떠돌 숙명을 가졌다.
나와 앨리스는 수레를 이끌며 카타콤 지하로 향했다. 널브러진 유골 중 일부가 마차 바퀴에 눌러 짓이겨졌다. 모두 치우고 갈 시간은 없었으니 이조차 감당해야 할 불경이었다.
우리는 준비한 밧줄로 뚫린 지하로 수레를 내리고, 그다음에 앨리스와 내 순서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래, 도착했군."
나는 말했다. 앨리스는 말이 없었다.
우리는 수레의 짐을 단단히 고정하고 천천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바닥은 전과 다를 것 없이 부패한 배설물로 칠해져서, 조금만 방심해도 수레바퀴가 미끄러지며 앞으로 기울었다. 그러니 수레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움직여야 했는데, 앨리스는 군말 없이 잘 적응해 주었다.
가는 길에 나는 낯익은 흙무덤 몇 개를 발견했는데, 뼈만 앙상하게 남은 광부의 시체가 삐져나와 있었다. 1년 만에 이렇게 삭을 수는 없었으니, 누군가 살점을 발라낸 흔적이 분명했다.
"여기에 다시 올 줄은 몰랐네. 밤마다 보는 악몽이 여기서 시작되었으니."
나는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걸었다.
"하지만 자네가 여기 오겠다고 자처한 건, 솔직히 말해서 놀랍군."
"그래요?"
"대학에서 자네는 그리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열정을 숨기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나."
앨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이곳은 특출나지. 올드코트의 끔찍한 비밀조차 이곳의 사정과 비교하면 우스운 수준이야. 나는 이런 일에 길이 들었다고 하지만, 자네 같이 어린 소녀가 여기에 여러 번 들어오길 자처한다는 건...."
나는 잠깐 발을 멈추고 표현을 골랐다. 갑자기 멈춘 날 따라서 앨리스도 발을 멈췄다. 멈춘 수레가 미끄러질 것처럼 굴었기에 나는 허겁지겁 다시 걷기 시작했다.
"특이하지."
뜸들인 것치고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한 단어를 내뱉은 이후, 한동안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앨리스는 느리게 말했다.
"제 안에는 어떤 열망이 있어요. 출처 모를 향수, 어린 시절의 꿈 같은...."
"열망?"
"교수님은 혹시 그런 경험 없으신가요? 나이가 들고 잊고 있던 동심이 불현듯 찾아오곤, 기억을 두고 온 탓에 찝찝한 동기만 남기는 경우 말이에요."
"자네가 하는 말은 알아듣기가 어렵군."
"저도 잘 모르는 것을 설명하는 중이니 어쩔 수 없어요."
앨리스는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매일 꿈에서 보는 광경이 있어요."
"꿈?"
"그래요,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죠?"
"아니, 지금 같은 시기에는 뭐든지 민감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네. 그것이 설령 꿈이라고 해도. 말해보게, 무슨 꿈인가?"
내가 재촉하자, 그녀는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꿈속에서 저는 푸른 하늘 아래 있어요. 아래로는 풀밭이 있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높은 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고요. 그리고 저는 꽤 높이 있어요. 나무보다 높지만, 저는 그걸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어느 언덕 위에 있기 때문이란 걸 곧 알게 되죠. 그걸 깨닫고 나니, 제가 혼자 있지 않다는 걸 눈치채요. 낯선 누군가, 저는 늘 그가 누군지 궁금해서, 꿈에서 깨면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람에 대입해 봤어요."
"나도 그랬나?"
"교수님도, 백작님도, 심지어 얼굴이 무서운 집사분도 그 자리에 두고 나면 아주 어색해지고 말아요. 그러니 제가 찾는 그 사람이 아니란 걸 깨달을 수밖에요."
앨리스는 한낱 꿈에 대해 말하는 것치곤 더없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꿈에 관해 진지한 사색을 하는 것은 성실한 성격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장난스러운 성격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좀처럼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둘은 아주 달랐지만, 공교롭게도 모두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저는 언덕의 경사에서 발을 헛디뎌요. 하얀 뭔가를 쫓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나비인지 토끼인지, 혹은 민들레 씨앗인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저는 끝없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낯선 세계에 떨어져요."
"낯선 세계라고?"
"어린 시절, 저는 그곳을 이상한 나라라고 불렀어요. 하늘에는 지구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검은 하늘이 펼쳐졌고, 곳곳에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벼랑과, 또 끝을 알 수 없이 솟은 절벽이 있었어요."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의 묘사에 대해 얼마 전 들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어쩐지 닮지 않았나요? 지구의 공동, 지하 세계 말이에요. 하늘은 막혀 있으니 어두울 수밖에 없고, 절벽은 지상, 벼랑은 지구 중심으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죠. 저는 백작님께 교수님이 다녀왔다는 지하 도시의 이야기를 듣고, 그 오랜 꿈을 기억해 내곤 가겠노라 자처한 거예요."
앨리스의 설명은 거기서 끝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한 가지 의문이 남아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가장 중요한 설명을 빠트린 것이다.
"하지만, 왜?"
"왜라뇨?"
"자네가 꿈에서 지하 세계를 보았다고 한들, 그곳을 찾아갈 이유는 되지 않아. 더욱이 위험한 장소라면 오히려 피하고 꺼리는 것이 정상일 테지. 자네는 그토록 열성적으로 지하로 향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네."
그러자 앨리스는 지금까지와 달리 좀처럼 말하기 불편한 기색을 비췄다.
"나는 학술회의 탐사자이나, 대학의 교육자이기도 하네. 솔직히 지금도 자네를 저 위험한 지하로 이끄는 게 영 탐탁스럽지 않아. 자네가 어떤 각오도 없이 흥미본위로 따라 나선 거라면, 나는 나 홀로 지하로 내려갈지언정 자네를 대동하진 않겠네."
"하지만, 하지만 백작님이 허락하셨잖아요. 교수님께는 그럴 권한이 없어요."
"책상에만 앉아 있으면 세상 돌아가는 법칙을 모르게 되는 법이지. 현장에는 현장의 규칙이 있네, 소녀."
앨리스는 처음으로 뚜렷한 감정을 드러내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속삭였다.
"두고 왔어요."
그녀는 부끄러운 듯, 두려워하는 듯 수줍게 말했다.
"무엇을, 어디에?"
"아주 중요한 것을, 꿈속에 두고 왔어요. 그러니 다시 가지러 가야 해요."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앨리스는 내 회유에도 더 말하려 하지 않았고, 나는 그런 그녀를 배려해서 더 묻지 않았다. 침묵은 수 시간 더 이어졌고, 우리는 마침내 앨리스가 말했던 지하 공동으로 이어진 구멍 앞에 도착했다.
바깥에는 지금쯤 아침 해가 떠올랐을 것이다. 나는 만년필을 꺼내 메모를 적었다.
「5월 1일. 예의 낭떠러지에 도착했다. 아래에는 어떤 광원도 없어서 항로를 만들고 따라가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열기구를 설치하고, 돌아올 경로를 표기하기 위해 가스등을 놓았다. 희미한 불빛이지만 이런 어둠 속에서는 등대처럼 환하게 보였다. 준비한 가스로는 족히 24시간은 빛날 것이다. 우리는 그 안에 돌아올 것이다.」